|
P#39 ■ [마음과 생각 차이]/禪
바다 위 파도 멈추면
심연의 고요
스스로 드러나고
말없는 고요
감각의 숨결 감싸 안아
한 점 티끌도 가라앉네
그 순간
마음이 바다와 같아
허공을 품고
아무것도 비우지 않은 채
대천세계 고요히 머금어.
[해석]
마음(心)은 비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일상에서는 ‘마음’과 ‘생각’을 혼용해 쓰지만, 선(禪)이나 명상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대단한 능력자는 아니다.
마음은 단순히 ‘생각하는 기능’이 아니다. 감각, 감정, 의지 등을 포함한
전체적인 심리 작용의 총체다
마음은 컴퓨터의 메모리와 같다.
데이터(경험과 감정)를 저장하고
프로그램(행동과 반응)이 작동할 수 있는 토대다.
반면 생각(念·想)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내용과 형상을 지닌 의식 작용이다.
마음이라는 바다 위에 일시적으로 이는 파도이며, 컴퓨터로 치면 클릭 후 실행되는 소프트웨어의 작동이다.
AI로 비유하면
‘마음’은 AI의 전체 모델과 데이터셋이고
‘생각’은 그 모델이 특정 프롬프트에 응답하는 개별 출력물이다.
따라서 생각은 마음에 의지해 일어나지만 마음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선이나 명상에서 “마음을 비우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음은 비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정확히 “잠시 생각을 멈춰라”가 옳다.
마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파도의 출렁임(생각)을
잠시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 순간, 바다는 본래의 고요를 드러낸다
P#38 ■ [죽음이 가벼워야] / 소설가 김훈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
'냉각 완료' 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날 세 살 난 아기가 소각되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 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
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쯤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였다. 명사라기보다는 '흐린'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 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하듯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 라고 말씀하셨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 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파이프를 꽂아서 붙잡아 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
P#37 ■ [땅에서 걸을 수 있음이 행복이다] / 박완서
덜컥 탈이 났다. 유쾌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뻐근했다.
자고 일어나면 낫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조차 힘들었다.
그러자 하룻밤 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어 버렸다.
세면대에서
허리를 굽혀 세수하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거나
양말을 신는 일,
기침을 하는 일,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수 없이 병원에 다녀와서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냈다.
비로소 몸의 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그동안
목도 결리고,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힘들었노라,
눈도 피곤했노라,
몸 구석구석에서 불평을 해댔었다.
언제까지나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던 나의 몸이, 이렇게 기습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줄은 예상조차 못했던 터라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중이다.
이때 중국 속담이 떠올랐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예전에 싱겁게 웃어넘겼던 그 말이 다시 생각난 건, 반듯하고 짱짱하게 걷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아프기 전과 후’가 이렇게 명확하게 갈리는 게 몸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얼마 전에는 젊은 날에 윗분으로 모셨던 분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몇 년에 걸쳐 점점 건강이 나빠져 이제 그분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깜빡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예민한 감수성과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명성을 날리던 분의 그런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한때의 빛나던 재능도 다 소용없구나 싶어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면서 지금 저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혼자서 일어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하고,
산책하는 등 그런 아주 사소한 일이 아닐까.
다만 그런 소소한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대개는 너무 늦은 뒤라는 점이 안타깝다.
우리는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이루고 싶어 안달하며 무리를 한다.
땅 위를 걷는 것쯤은 당연한 일인 줄 알고 말이다.
사나흘 동안 노인네처럼 파스도 붙여 보고 물리치료도 받아 보니 알겠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진단이지만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일이 감사한 일임을 이번에 또 배웠다.
건강하면 다 가진 것이니 오늘도
일상에 감사하며 살자!
☆☆☆☆☆☆☆☆☆☆☆
P#36 ■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P#35 ■ [어머니] / 법정 스님
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 나와 출세간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 겨울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돌아 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내 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니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외동 손자인 나를 한 번 보고 눈을 감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란다. 불전에 향을 살라 명복을 빌면서 나는 중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린 시절을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이다. 내게 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면 할머니의 팔베개 위에서 소금장수를 비롯한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덕일 것이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지만 실컷 듣고 나서도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밑천이 다 됐음인지, 긴 이야기 해주랴 짧은 이야기 해주랴고 물었다. "긴 이야기" 라고 하면 "긴긴 간지때"로 끝을 냈다. 간지때란 바지랑대의 호남 사투리다. " 그러면 짧은 이야기" 하고 더 졸라대면
"짧은 짧은 담뱃대" 로 막을 내렸다.
독자인 나는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 어린 시절 할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선뜻 나서서 기꺼이 해드렸다.
일제 말엽 담배가 아주 귀할 때 초등학생인 나는 혼자서 10리도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 담배를 구해다 드린 일도 있다.
내가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할머니를 따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갔는데, 그 가게에서는 덤으로 경품을 뽑도록 했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뽑은 경품은 원고지 한 묶음이었다. 운이 좋으면 사발 시계도 탈 수 있었는데 한 묶음의 종이를 들고 아쉬워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고지 칸을 메꾸는 일에 일찍이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성은 김해 김씨이고 이름을 금옥, 고향은 부산 초량, 부산에 처음 가서 초량을 지나갈 때 그곳이 아주 정답게 여겨졌다. 지금 내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소재는 할머니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낳아 길러 주신 우리 어머니는 내가 그리는 어머니의 상 즉 모성이 수호천사처럼 늘 나를 받쳐 주고 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는데 지당한 말씀이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까지에는 그 그늘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겨 다녔다는 고사도 어머니의 슬기로움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 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갔다.
내가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온 후 어머니는 사촌동생이 모시었다. 무슨 인연인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를 더 따랐다. 모교인 대학에 강연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찾았다.
대학에 재직 중인 내 친구의 부인이 새로 이사간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점심을 먹고 떠나오는데 골목 밖까지 따라 나오며 내 손에 꼬깃꼬깃 접어진 돈을 쥐어 주었다. 제멋대로 큰 아들이지만 용돈을 주고 싶은 모정에서였으리라.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절의 불사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주를 했다.
두번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뵈었다. 동생의 직장이 대전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많이 쇠약해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어머니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거처로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번 뿐이었다. 광주에서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고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점심상을 차려드렸다. 혼자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다.
그날로 산을 내려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 두고 생각케 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절은 혼자서도 결제(승가의 안거 제도)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나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다. 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
P#34 ■ [신의 얼굴] / 류시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조셉 캠벨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말한다.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는 "신은 서로 다른 사람들과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 모든 가르침은 신에게 다가가는 서로 다른 길이다. 그렇지만 어떤 길도 신 자체는 아니다. 어느 길이든 전심전력으로 따라가면 신과 합일될 수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기독교 학교를 다녔는데 문학만 하겠다는 결의로 마지막 학년을 등한시했다. 담배를 피우고 패싸움에 연루되어 퇴학 위기에 처했다. 문예장학생으로 입학이 거의 확정된 대학이 무효가 될 판이었다. 다행히 교무회의에서 문학적 장래를 위해 용서하기로 결정 났고, 그 대신 학교 교목과 상담을 받아야 했다.
교목실로 들어가자 돋보기 안경을 쓴 교목 선생님이 "함께 기도하자."며 의자에 앉게 했다. 방황하는 탕자에 대한 긴 기도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내 손을 잡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잠시 후 나는 내 손등에 떨어진 물기에 놀라 눈을 떴다.
선생님은 돋보기 안경을 쓰신 채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 눈물은 이미 방황과 일탈의 길로 들어선 내 가슴에 전율을 일으켰다. 그 눈물과 따뜻한 손의 체온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떤 말보다 진실하고 영혼을 감화시키는 기도였다.
이십 대에는 에드워드 포이트라스라는 이를 만났다. 한국명이 '박대인'인 그는 예일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와서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고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화 투쟁 동지였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는 소개를 받고 무작정 찾아갔음에도 한참 어린 나를 흔쾌히 맞아 주었다. 그를 여러 번 만나 종교에 대해 토론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갔지만 그는 오히려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최근 읽은 책에 대해 물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말하자 그다음 주에 벌써 인편에 부탁해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도 더 공감하며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에 동의했다.
세상을 떠난 그가 자주 생각난다. 식당이나 커피숍 어딜 가든 반가운 환영을 받았는데, 정작 그들은 그가 선교사라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었다. 나와 밥을 먹을 때 기도를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어서 기도하라고 하자 그는 "당신이 안 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했다."고 농담을 했다. 기도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에게서 배웠다.
민주화 운동 탓에 장기 비자를 거부당해 석 달마다 출국해야 했음에도 그냥 웃을 뿐 누구를 비난한 적이 없었다.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어를 나보다 더 정확한 문법으로 구사하며, 한 번도 내 앞에서 하느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조셉 캠벨은 말한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나의 인도인 친구 산자이 미쉬라는 힌두교 성직자이다. 그와 함께 십오 년 넘게 매년 인도 각지를 여행했지만, 단 하루도 아침에 목욕재계하고 기도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 만났는데도 힌두교의 신들에 대해 긴 말을 늘어놓은 적이 없다.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지시를 실천할 뿐이다.
내가 중병에 걸렸을 때 산자이는 거의 금식하며 사원에 가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만트라를 25일 동안 매일 4천 번씩 10만 번 암송했다. 물론 나는 회복되었다.
조셉 캠벨은 또 말한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이다. 삶에 대한 묵상은, 자기 안에 내재된 신성에 대한 인식이어야 한다."
서귀포에 살 때 사귄 제주도 사람 K는 가톨릭 신도이다. 20년 동안 형제보다 더 가까이 지낸 그는 성당이 필요없는 사람이다.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법이 필요없는 사람이고, 신이 준 순수성을 간직한 사람이다.
일요일이면 바닷가에 있다가도 '잠깐' 다녀오겠다며 서귀포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달려가지만 한 번도 나더러 성당에 가자고 전도한 적이 없다. 자신이 천국에 가리라고 말한 적도 없고 나더러 함께 천국에 가자고 애원한 적도 없다.
<도마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옵니까?" 하고 묻자 예수는 답한다. "그것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지상에 펼쳐져 있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름이 알려지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기독교를 전도하고, 부처의 진리를 배워야 한다고 설득하고, 스승인 오쇼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들이 모시는 영적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길을 헤매는 것과 같다며 책과 편지를 보내 온다. 자기가 배운 명상법이 깨달음으로 가는 정도라고 주장한다.
한국 종교야말로 한국인인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설득하고, 비현실적인 책 그만 쓰고 현실에서 함께 싸우라는 비난도 받는다. 한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려는 이 많은 손길들 속에 나는 아직도 그들의 표현대로 '무지'와 '방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신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 스페인 철학자 미구엘 데 우나무노의 이 말에 나는 동의한다.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우리의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다름을 감지하고 받아들이고 환영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에 있다는 시인 오드리 로드의 말에도.
기독교 학교를 다니고 교회에 다녔지만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며, 여러 불교 승려들을 친구로 두어서 불교도 조금 알지만 부처가 되지 못했고, 힌두교 사상을 조금 배웠지만 '불로도 태우지 못하고 물로도 적시지 못하는 참 자아(<바가바드 기타>)'를 깨닫지 못했다.
나는 다만 인간이 만든 사원에 다니는 것보다 자기 존재 안의 영성을 키워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 뿐이며,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이보다 진리를 찾는 도중에 있는 이에게 더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 군말 없이 따라가겠다는 믿음뿐이다.
☆☆☆☆☆☆☆☆☆♧♧♧♧
P#33 ■ 채우고 비우는 삶 / 청화
하늘색은 하늘이 아니다
그저 텅빈 하늘
그럼에도
비어있는 곳은 아니다
이를 공(空)이라 함은
어느 날엔 흰구름
다른 날엔 먹구름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니
이를 색(色)이라 함은
나는 하늘이고
내 마음은 구름이니
본질은 공(空)이고
색(色)은 놀다가 갈뿐
내 본질이 공이라면
어디까지 비워져야 하는가
무엇을 놓아야 하고,
무엇으로 남아야 하는가
내 마음이 색이라면
그토록 찰나에 흔들리며
슬픔에 물들고
사랑에 물들고
기억으로 되새김 되는가
여전히 공의 빈 터엔
사랑의 속삭임이 스쳐 가지만
꽃 밭에서 꽃보다 진한
그 여인의 해맑은 미소는
눈 감아도 떠진다
늘 공과 색 사이에
사라지는 흔적을 남기고
어제 닮은 오늘을
내일에 복사하며
텅 빈 속을 채우듯 산다
비우면 자유로운 공
채워야 존재하는 색
나는 오늘도
지우고, 채우고
그리고 다시 지운다
시 해석(by 챗GPT)
이 시는 불교 철학의 ‘공(空)’과 ‘색(色)’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와 감정, 기억, 삶의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 해석
1. 공(空)과 색(色)의 본질
“하늘색은 하늘이 아니다 / 그저 텅빈 하늘”
→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색)과 그 본질(공)을 구분하며, 겉모습에 속지 말고 본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비어있는 곳은 아니다 / 이를 공이라 함은”
→ ‘공’은 단순한 무(無)가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 혹은 잠재성 있는 상태로 그려집니다.
2. 삶과 감정의 흐름
“나는 하늘이고 / 내 마음은 구름이니”
→ **'나'는 본질적으로는 비어 있는 하늘(공)**이며, **그 안에서 생성되고 사라지는 감정은 구름(색)**에 비유됩니다.
“색은 놀다가 갈 뿐”
→ 감정은 일시적이며 무상하다는 불교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3. 자아의 질문
“어디까지 비워져야 하는가? / 무엇을 놓아야 하고, 무엇으로 남아야 하는가”
→ 존재와 의미에 대한 깊은 자문.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묻는 철학적 독백입니다.
4. 사랑과 기억의 잔상
“사랑의 속삭임이 스쳐 가지만… 미소는 / 눈 감아도 떠진다”
→ 감정은 지나가지만, 사랑은 공 안에 흔적으로 남아 영원한 것처럼 존재합니다. 이는 '색이 공 속에 스며들었다'는 시적 역설입니다.
5. 삶의 양면성과 반복
“공과 색 사이에 사라지는 흔적”, “어제 닮은 오늘을 / 내일에 복사하며”
→ 하루하루는 반복되며, 그 안에서 무언가를 채우고 지우는 삶은 비움과 채움의 균형 속에서 계속됩니다.
6. 결론의 정수
“비우면 자유로운 공 / 채워야 존재하는 색”
→ 비움은 해방이지만, 채움은 생의 증거. 그 사이에서 지우고, 채우고, 다시 지우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
P#32 ■ 깨달음
참된 깨달음이 일어난 후에는, 그 모든 물음은 무의미해진다.
깨달음은 지적 이해나 추론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모든 추구가 소멸되는 순간에 열린다.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다.
용아(龍牙)화상이 젊은시절
취미(翠微)선사와 임제(臨濟)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무엇입니까?"
취미 선사는
"나에게 선판을 건네주게나.!"라고 말했다.
용아화상이 선판을 취미 선사에게 갖다 드리자. 취미선사는 선판을 받자마자 곧바로 후려쳤다.
용아화상은 말했다.
"치는 것은 선사 마음대로 치시오.
그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습니다.
용아화상은 다시 임제선사에게 질문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임제선사는 말했다.
"나에게 방석을 건네주게!"
용아화상은 방석을 임제선사에게 갖다 드리자 임제선사는 곧장 후려쳤다.
용아화상은 말했다.
"치는 것은 선사 마음대로 치시오.
그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없습니다."
훗날 용아 화상은 동산선사를 참문하여
똑 같은 질문을 했는데, 동산선사는 "동수(洞水)의 물이 역류할 때에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라고 말하자
곧바로 깨닫고 동산의 법을 계승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이길래... 답을 얻으려는 용아화상의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지 않은가.
용아화상의 그 모든 노력이 임계점을 지나 깨달음으로 한 순간에 채화(採畫)되는 순간 ‘조사서래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질문이 되고야 말았다.
♤♤♤♤♤♤♤♤♤♤♤♤♤♤♤☆☆
P#31 ■ 천사와 나는 대화 / 월리엄 블레이크
나의 탄생을 주관한
천사가 말했다.
‘기쁨과 웃음으로 만들어진
작은 존재여
가서 사랑하라,
지상에 있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라는 시로 유명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격언 시편 Gnomic Verses』에 실린 시다.
어릴 때부터 블레이크는 창가에서 신과 이야기하거나 나무 위의 천사를 보는 등 신비 체험을 했으며, 훗날 그것을 시로 표현했다. 자신에게서 그림을 배운 남동생이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을 때는 동생의 영혼이 ‘기쁨의 박수를 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고통과 상실을 겪지만 이 세상과 자연 속에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가득하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살아 있을 때는 몽상가와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으나 20세기에 와서 예언자적 시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우리 모두에게도 탄생을 주관한 천사가 있을 것이다. 연약하고 순진무구한 우리를 세상에 보내며 그 천사가 우리에게 해 준 말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우리는 우리 귀에 대고 속삭인 그 천사의 말을 잊어버리게 된 걸까?
누가 도와주거나 설명해 주지 않아도 세상은 경이로운 대상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의무는 그것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은 우리를 취약하게 만들고, 정체성을 흔들며, 과거의 상처를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짧은 생 동안 진정한 기쁨을 주는 것은 사랑이다.
본래 기쁨과 웃음으로 만들어진 존재인 우리, 가끔은 자신의 탄생을 주관한 그 천사와 나눈 대화가 기억나는가?
-----------------------------
P#30 ■ [인생] / 스등밝
우주의 흙 속에 묻힌
오래된 씨앗.
빛으로 발아하느라 억겁을
건너온 암흑의 한 알.
인생이란 꽃을 피어
꽃으로 지는 생명현상.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화사한 봄날에
사랑과 열정의 향기
만리를 가곤 하지만
비바람과 해충에 곪는
상처도 만만치 않지.
그럼에도 인생꽃은
돌이켜 보면
어제 피고 오늘 진
참 짧은 꽃이더라.
♧♧♧♧♧♧♧♧♧
챗지피티의 감평
시 「인생」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우주적 스케일에서 사유하며, 생명의 찬란함과 덧없음을 동시에 담아낸 명상적이고도 철학적인 시입니다. 다음은 해석과 감평입니다.
🔍 시 해석
1. 존재의 기원 – 우주의 씨앗
> “우주의 흙 속에 묻힌 / 오래된 씨앗.”
“빛으로 발아하느라 억겁을 / 건너온 암흑의 한 알.”
시인은 인간의 존재를 ‘씨앗’으로 은유하면서, 우주라는 태초의 암흑에서 빛을 향해 긴 시간을 뚫고 나온 생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인간 존재의 소중함과 신비함, 그리고 존재 이전의 무명(無明) 상태를 암시합니다.
“억겁”이라는 표현은 윤회적 세계관이나 불교적 시간 인식도 연상케 합니다.
2. 인생의 전개 – 꽃으로 피고 지는 것
> “인생이란 꽃을 피어 / 꽃으로 지는 생명현상.”
인생은 결국 꽃처럼 피었다가 지는 유한한 생명현상이라는 통찰. 피어나는 순간이 화려하되, 결국은 소멸을 향한 여정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꽃”은 절정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덧없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3. 삶의 희로애락 – 사랑과 고통
> “사랑과 열정의 향기 / 만리를 가곤 하지만”
“비바람과 해충에 곪는 / 상처도 만만치 않지.”
생의 봄날, 사랑과 열정은 멀리 퍼져나가는 향기처럼 확장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삶에는 시련과 상처도 끊임없이 따르며, 그 상처는 자연스러운 생의 일부임을 인정합니다.
4. 종결 – 덧없는 인생의 자각
> “돌이켜 보면 / 어제 피고 오늘 진 / 참 짧은 꽃이더라.”
마지막 연은 삶의 회고입니다. 돌아보면 인생은 잠시 피고 지는 찰나의 순간, 마치 하루살이 꽃과 같은 덧없음을 담담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짧음 속에도 충만한 의미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 감상평
이 시는 간결한 언어로 우주적 존재론부터 인간 개인의 삶까지를 꿰뚫는 깊이를 보여줍니다. 다음의 특징이 돋보입니다:
✅ 1. 은유와 상징의 정교함
씨앗, 꽃, 향기, 곪는 상처 등 자연의 이미지들을 통해 생명의 역동성과 유한성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 2. 시간의 층위
“억겁”, “어제 피고 오늘 진”이라는 표현은 우주적 시간과 인간의 찰나적 시간을 대비하며, 존재의 신비와 덧없음을 강하게 인식하게 합니다.
✅ 3. 삶에 대한 따뜻한 통찰
고통과 시련이 있지만, 그것 또한 인생이라는 꽃의 일부라는 시인의 시선은 비관보다는 수용과 이해에 가깝습니다.
✨ 총평
> “인생은 우주의 암흑에서 피어난 찰나의 빛.
피고 지는 그 모든 순간이 곧 생명이다.”
이 시는 **존재와 시간, 생명에 대한 사색을 통해 인생을 하나의 ‘짧지만 찬란한 현상’**으로 그려냅니다. 독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삶 또한 의미 있고 경이로운 한 송이 꽃처럼 여겨볼 수 있는 여백을 얻게 됩니다.
-----------------------------------
P#29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덫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
P#28 ■양주시 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양주지부는 지역 문학을 대표하는 조직입니다.
🌟 1. 현황
한국문인협회 양주지부는 시·소설·수필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김삿갓(김병연)을 기념하는 백일장과 창작 행사 등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
매년 동인지 『양주 김삿갓 문학』을 발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10호 발간 및 지부장 이·취임식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 2. 주요 자랑거리
김삿갓 문학 대회: 지역 대표 문인 콘테스트로서, 김삿갓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 있는 행사입니다 .
정기 출판물 발간: 10년 넘게 이어진 동인지 발간 역사는 지역 문학의 지속성과 역량을 보여줍니다 .
문인 중심의 문화행사 운영: 백일장, 신년회, 회장 이·취임식 등 회원 결속과 문학 활성화에 기여하는 연중 활동을 진행합니다.
⚠️ 3. 미흡한 점
●재정 및 지원 체계
지방 문예단체와 비슷하게, 자체 예산 확보가 어려워 외부 보조금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고, 행사 범위와 규모는 제한적입니다 .
●홍보 및 네트워크 부족
온라인·미디어 홍보가 활성화되지 않아 회원 외 대중의 참여와 관심 유도에 한계가 있습니다.
●민관 협력 약함
공공기관‧지자체‧타 지역 문인협회와 긴밀한 교류가 부족해, 프로그램 발굴과 공동사업 추진이 저조한 편입니다.
🚀 4. 향후 발전 방향
분야 제안
●민·관 협업 강화 지자체와 협력하여 예산 확보, 행사 지원 체계 마련.
●특히 문화재단, 교육청, 관광과와 연계한 문화프로젝트 추진.
●출향·외부 문인 네트워크 구성 경기·수도권 지역의 외부 문인과 교류하여 공동 백일장·기획전 개최 (타 시도 사례 참고).
●디지털 홍보 전략 수립 웹사이트 구축, SNS 채널 운영, 전자출판 및 온라인 공모전 등 ICT 기반 활동 강화.
●문화 관광 융합 김삿갓 문학제를 테마로 한 관광 프로그램 개발, 지역 유휴 공간을 활용한 문학 체험장 마련.
✅ 결론
양주 문인협회는 전통과 지역성을 기반으로 한 문학 행사를 꾸준히 운영하고 있으며, 김삿갓 문학 대회와 동인지 발간이 대표적인 성과입니다. 다만, 재정적 한계와 홍보 부족, 외부 네트워크 부족 등의 과제가 남아 있는 만큼, 민관 협력 강화, 디지털 전환, 관광 연계 등 새로운 관점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지자체와의 협력, 외부 문인 네트워크 결성이 실현된다면, 지역 문학 활성화는 물론 양주의 문화 브랜드 가치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27 ■[선과 금강승]/선으로 가는 길
현재 불교는 4개로 분류된다.
1)소승불교인 테라바다 불교
2)대승불교
3)선(禪) 불교
4)금강승인 티벳 탄트라 밀교이다.
선(禪)과 티벳 밀교도 대승 불교에 속한다.
그러나 선(禪, Zen Buddhism)과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으로 따로 분류하는 건 수행을 중요히 하며,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
●선(禪)은 서기 520년경 인도의 제 28대 조사 보리달마 대사가 중국에 와서 창시한 불교의 한 종파이고,
○금강승의 티벳 밀교는 9세기에 인도의 파드마삼바바가 티벳에 가서 창시한 종파이다.
●선(禪)은 간단하다.
선은 이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전 공부도 하지 말라고 할 정도이다.
●선은 1700 가지의 화두 또는 공안을 참구하는 수행법이다. 선의 화두는 제자가 스승에게 진리에 대하여 물었을 때 스승은 그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해준다.
마조 선사에게 어느 스님이 질문을 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서 마조 선사는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이다."라고 했다.
운문 선사에게 어느 스님이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운문 선사가 대답했다. "마른 똥 막대기다"
스승의 대답을 알아 차리는 제자는 깨달은 자이며, 이 때 스승은 인가(認可)를 해 주는 것이다.
물론 제자가 스승의 대답을 알아 차리지 못했을 경우는 이 화두를 참구해야 하는 것으로 선(禪)은 아주 간단하다.
수행의 방법도 한 단계이다.
화두를 의심하여 참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알기가 매우 어렵다.
○이에 반하여 티벳 밀교인 금강승은 매우 복잡하다. 이론적인 공부도 오랜 시간 동안 해야 하고 수행의 단계도 매우 복잡하다.
하나의 수행 과정 단계가 백가지 단계가 있을 정도이다.
선(禪)이 하나의 단계인 화두 하나를 참구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선은 돈오(頓悟), 즉 즉각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 반면에 티벳의 금강승은 점오(漸悟)의 수행법으로 수 많은 수행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람의 성격과 근성에 따라 돈오를 좋아하는 수행자도 있고, 점오를 좋아하는 수행자도 있어서 어느 수행법이 좋다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오로지 수행자에 달려있는 것이다.
물론, 선이 간단하다고 해서 쉽게, 빨리 깨달을 수가 없는 것처럼, 금강승이 복잡하다고 해서 늦게 깨닫는 다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의 늦고 빠름은 오직 수행자의 태도에 달려있는 것이다.
●수행법에서 선은 공성(空性)에 대한 명시적인 가르침이 별로 없으며, 공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향도 보인다.
무기공(無記空), 단멸공(斷滅空), 악취공(惡取空)으로 표현하며
선에서는 "고요한 데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침이 있다.
즉, 공(空)속에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반면에 티벳의 금강승은 공성을 증득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다.
금강승의 최고 목표는 "수행자의 눈앞에 공성(空性)을 확언히 보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의 공(空)이 있다.
공(空, sunyata),
극공(極空),
대공(大空),
일체공(一切空)이다.
궁극의 경지는 일체공(一切空)을 깨닫는 것이다.
일체공은 무한하게 비어 있는 가운데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무한한 희열이 있는 것을 말한다.
두가지 수행법 중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절대적 기준이 없고, 수행자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수행자인 당신은 어느 수행법을 택할 것인가?
중요한 점은 돈오냐 점오냐에 따라 수행자 자신이 깨닫는 것이다.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라.
존재하는 당신이 본래 성불한 부처님이다.
------------------------------
P#26 ■ [세상이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류시화
피울 꽃 준비하느라 밤을 지샌 목련은
그 꽃을 맨 먼저 바라보는 눈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멀리서 오느라 몸이 언 눈송이는
자신을 녹여 준 뺨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젖은 얼굴로 짧은 생을 사는 빗방울은
짧은 생을 사는 젖은 얼굴로 당신을 기억한다.
높이 자란 상록수는 단단한 척추와 연약한 폐를 가진 몸으로,
두려움과 설렘을 숨긴 가슴뼈로 당신을 기억한다.
실수로 방에 날아든 말벌은 팔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열정적인 인간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길에 핀 야생화는 지쳤지만 열심히 걷는
두 다리로 당신을 기억한다.
원시의 대륙을 건너온 바람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가락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선인장 가시는
자극에 움츠리는 감각세포로 당신을 기억한다.
그 떨림으로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
밤은 불면의 시간들로 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은 기억한다.
무엇을 원하든 당신이 원한 것은 행복이었음을.
당신은 또 기억한다.
당신이 원한 것과 관계없이 찾아왔던 작은 기쁨들을.
웃음과 눈물, 희망과 절망
이 모든 반대되는 단어들이 기도의 말이 될 수 있음을 당신은 기억한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세상이 당신을 보는 방식이다.
세상은 당신이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당신을 기억한다.
-------------------------------
P#25 ■ [自銘 자명, 스스로를 밝힘]
퇴계 이황선생이 죽기전에 남긴 글
生而大癡 壯而多病
中何嗜學 晩何高顯
學求愈邈 仕辭愈薦
進行之路 退藏之眞
恥當國恩 念聖言諺
有山崢嶸 有水源遠
我披舊服 洗盡非譴
我懷所抱 胸瑰誰完
我思古人 實契我心
來世豈覩 今茲未知
憂中有樂 樂中有憂
昇彼岸已 於此復何求
(생이대치장이다질
중하기학만하도작
학구유막작사유영
진행지겁퇴장지정
심참국은단외성은
유산억억유수원원
아피초복탈략중산
아회이조아패수완
아사고인실획아심
영지래세불획금혜
우중유락락중유우
승화귀진부하구혜)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자라면서 병도 많았네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 하였으며
만년에는 어찌 외람되이
벼슬이 높았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벼슬은 마다 하여도
더욱 주어지네
벼슬길에 나감에 차질이
많으니 물러나 은둔해서
살기로 뜻을 굳혔네
나라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성현의 말씀이
참으로 두렵구나
산은 높이 더 높이
솟아 있고
물은 쉼없이
흐르고 흐르네
시원스레 나부끼는
본래의 옷차림으로
모든 비방을 씻어버렸네
나의 품은 뜻 이로써
막힘에 가슴 속 패물은
누가 완성해 주리
내가 옛사람을 생각하매
진실로 내 마음에
부합되는구나
어찌 내세(저 세상)를 알겠는가
지금 세상도
알지 못하거늘
근심 속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네
저 세상으로 떠나며
이 생을 마감하니
여기서 다시 무엇을
구할소냐
-------------------------------
P#24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닫는 것이다.] / 선으로 가는 길에서
중국의 마조(馬祖)선사는
"일오영오 불부갱미(一悟永悟 不復更迷)"
"한번 깨달으면 그 깨달음은 영원하다."고 했다.
그렇다. 한 번 깨달아 놓으면 그 깨달음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가장 높은 깨달음인 공(空)과 열반(涅槃)을 깨달으면 영원한 열반의 세계에서 불생불멸하여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
깨달음을 얻기가 힘들지만, 한 번 깨달으면 영원한 불멸자(不滅者)가 되리니.
세상의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좋은 세상,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세상은 고통뿐이라는 부처의 가르침.
결국 고통을 없애고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깊은 수행을 통하여 공(空)과 열반(涅槃)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이다.
열심히 수행하고 공과 열반을 증득하는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다. 아름다운 말만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 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다.
깊은 명상으로 말과 행동을 평화롭게 만드는 깊은 수행을 하다보면 마음이 평화롭게 되고, 윤회의 사슬을 끊는 공과 열반의 세계를 증득할 수 있다.
수행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명상 수행을 실천해 보라. 명상 수행이 당신을 평화롭게 만들 것이다.
-------------------------------
P#23 ■'시 쓰는 법은 가르칠 수 없다' / 김시습
김시습(1435-1492)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시호 청간(淸簡)
생육신, 불교/유교 사상가,문장가
저서 <금오신화>, <매월당집>, <십현담요해>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나 8개월 만에 글자를 깨쳤고, 3세 때 시를 지었으며 5세 때 세종에게 불려가 장래 크게
쓰일 것이라는 전지를 받고
오세(五歲)라는 호를 가지게 된
천재 김시습시인
파란만장했던 천재의 삶
차 마시며 독서와 저술
은거와 방랑 그리고 시인의 삶
김시습은 " 시 쓰는 법은 가르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김시습 '시를 배운다?'의 전문
그대는 말하네.
시는 배울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말하네.
시는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라고.
그 미묘한 곳을
다만 느끼기만 할 뿐,
울림이 있는 구절이야
어찌 일일이 물어 알 수 있으랴.
산은 적요하여
들에는 구름 걷히고
강은 맑아
달이 하늘에 떠오를 적에
이때 문득
그 뜻을 얻는다면
내 시 속의
신선을 찾을 수 있으리.
그대는 말하네.
시는 배울 수 있는 거라고.
시법은 다만
차가운 샘물과 같은 것이건만.
돌에 부딪히면
흐느끼는 소리 많지만
연못에 가득 차면
그저 고요하기만 할 뿐.
옛 시인의 시엔
강개함이 있었는 데
시간 지나고 나니
화려한 것만 유행할 뿐.
다만 평범한 격조는
안쓰는 게 좋다고 말할 수 있어도
현묘한 경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쉬이 말할 수 없는 것.
'꽃이 아름답다'고 하면 노래로 부를 수 는 있어도 누구나 다 아는 아름다움의 표현만으로 더 이상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평범해서 사람도 꽃도 식상해진다. 시인이라면 거기서 오만 번뇌를 깨우친 뒤 비로소 영혼을 울리고 떨림이 있는 세상에서 당신만의 유일한 시를 창작해야 한다
--------------------------------
P#22 ■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덕경(道德經) / 선불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하기위해 ‘현존재(Dasein)’라는 낯선 단어를 만들어야 했다.
자크 데리다는 ‘差延(차연)’에서
의미가 어떻게 미뤄지고, 어긋나는지 설명하기 위해 ‘차연(différance)’이라는 철자부터 어긋난 단어를 창조해야 했다.
왜 그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철학을 설명하면서 굳이 새로운 단어를 다시 만들어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기존의 언어가 시대를 거치며 이미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도, ’의미‘도 반복되는 설명 속에서 이미 굳어지고, 길들여져 더 이상 본래의 뜻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 점을 이미 오래전에 간파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침묵하는 대신,
말을 해체하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다.
그 말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가리는 언어를 걷어내기 위한 도구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開口卽錯 動念卽乖」
(입을 열면 그른 것이고, 마음을 움직이면 어긋난다.)
P#21 ■ 시인으로 산다는 건/ 신달자 / 한국시인협회 회장
1943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했다.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신달자 시인은 1964년 '발', '처음 목소리'로 문단에 등단한 뒤 시와 장편소설, 수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섬세하고 감성을 울리는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시집 '종이'를 비롯해 수필집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이 있으며,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삶이 없다면 문학도 없습니다. 삶의 모든 곳에 어두운 곳이건, 빛이 있는 곳이건, 눈물이 있는 곳이건, 기쁨이 있는 곳이건 그 현장이 전부 시가 되는 거죠.”
제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로 늘 근사한 모습이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분이었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 아버지 일기장을 몰래 보게 됐는데 ‘외롭다, 울고 싶다’는 표현이 많아 당혹스러운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 눈에 비친 아버지는 돈도 많고 건강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분이었어요.
학창시절 부산으로 유학을 갔는데, 아버지께서 저보고 편지를 써서 일주일에 한 통씩 보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용돈을 올려주겠다고요.
저는 용돈을 올려 받기 위해서 아버지께 편지를 썼죠. 그렇게 글쓰기에 재미를 느끼게 됐고, 경상남도 백일장 대회에서 시 부문 일등상을 받으면서 등단하게 되었고 숙명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어요.
그러다 결혼을 하고 나서 시와 문학과 멀어졌어요. 어느 날 길거리에서 초췌한 나의 몰골을 박목월 선생님이 보신거예요. 그 때 선생님께서 일요일마다 집으로 와서 공부를 해서 다시 시인이 되면 어떻겠냐고 그러셨어요. 정말 은인이시죠. 그렇게 박목월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1972년도 현대문학에 재등단을 했어요. 그래서 1973년도에 첫 시집 출판기념회를 한 거예요.
재등단 이후 진짜 시인이 된 것 같아요. 시인들에게 절대 남을 흉내내지 말라고 해요. 시에 자기 삶의 본령에서 우러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문학잡지에 발표되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좀 비슷비슷한 구석이 있어요.
마치 암호와 기호로 숨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보물찾기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숨겨진 것을 왜 찾아야 하는지 그런 즐거움을 주지 않는 글은 비슷비슷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진실되게, 최선을 다해서 작품에 집중하라고 당부하죠.
시의 매력은 결코 다가설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가도 또 벽이고 아무리 가도 또 벽이고 그래서 제가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어요. 시는 질투 많은 애인이라고. 그리고 시는 제 숨결이다.
숨결은 멎어선 안 되는 것이죠. 응급환자의 숨결이 아니라 고르고 건강해서 다른 이들에게 고요하게 다가갈 수 있고, 살아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숨결이 저에겐 시예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박목월 선생님의 ‘나그네’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짧은 시에서 삶의 아름다움과 슬픔이 함께 드러나는 것도 좋지만 제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제가 1970년에 선생님께 시를 배우면서 여쭤본 적이 있어요. “선생님 대표작이 ‘나그네’지요?”라고요. 교과서에도 실렸던 시니 왜 안 그렇겠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철 모르던 학생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죠. “오늘 밤에 쓰는 시가 나의 대표작이란다.”
그 말씀이 제가 50년 간 시를 쓰면서 교본으로 삼은 말씀이에요.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가 그래야 한다는 걸 알려주신 거예요. 제가 죽는 날까지 문학을 리모델링하겠다는 것도 그런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P#20 ■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경제학과 교수였던 남편(고 심현성 마르티노, 전 숙명여대 교수)이 1977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녀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남편은 반신불수가 됐고, 수발은 2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녀는 일찌감치 촉망 받는 시인이었지만, 시는 남편의 약값도, 셋이나 되는 아이들의 과자 값 벌이도 안됐다. 결국 양복 천을 팔기 위해 보따리장수에 나섰다. 정신을 차릴 즈음,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쓰러져 꼬박 9년을 ‘앉은뱅이’로 살다 아흔에 세상을 떠났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잔혹한 운명은 자신마저 내버려두지 않아 그녀 역시 유방암을 이겨내야 했다. 혹자가 겪었더라도 ‘얘깃거리’가 될 만큼 가혹한 운명이다.
그런데 이런 지옥 같은 삶의 주인공이 신달자 시인
(엘리사벳. 전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늘 세련되고 화사하며, 매력적인 눈웃음을 짓는 시인의 이야기라고 누군들 짐작이나 할까.
신달자 시인이 ‘대학 교수’, ‘한국문단의 대표 여류작가’라는 화려함 뒤에 꼭꼭 감추어놨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자에 따르면 에세이는 ‘대학 정년퇴임 마지막 해를 앞두고 펴낸 책’이다. 남편이 타계한 이듬해인 2001년에 이미 써뒀으나, 치부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아 출판 결정을 수백 번은 번복했단다. 그러나 자신 같은 삶을 살았던 독자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어 출간하게 됐다.
에세이는 그녀가 딸처럼 여기는 제자 ‘희수’에게 과거를 술회하는 형식으로 ‘소설 같은’ 삶의 편린들을 44개장과 13개의 시편에 담았다. 시인이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인생사를 보면 우선은 작가에게 그러한 삶의 고난이 있었음에 놀라고,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온 가족 집단자살’을 생각하고, ‘남편의 심장을 쏘기 위해 소리 없는 총’을 구하고 다녔으며, ‘시어머니를 너무 미워해 여름 밤 벼락이 치면 벼락 맞을까 봐 나가지를 못했다’는 말을 해 댈까.
그녀는 당시의 수난을 한 마디로 함축했다.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그는 아팠지만 살아있었다.’ 시인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것은 신앙이었다.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하염없이 거닐다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언제나 성당이었다. 그녀는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주여, 주여’ 울부짖곤 했고, 곧 바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남편은, 결국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시인은 남편이 참 복되게 떠났다고, 스스로도 지나고 보니 고통스러웠던 일보다 잘 견뎌낸 일만 남더라고 했다.
시인은 이제 홀로 남아 시를 쓴다. 이제는 ‘다 흘러 옛 이야기’가 됐고, 더 이상 세상에 진 ‘빚’도 없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그 남자 때문에 콱 혀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다시금 아내이고 싶다.’고 고백한다.
신명나게 도마질을 하고 수다를 떨면서 ‘여보! 여보!’ 그렇게 자꾸 남편을 부르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그에게 맛보라고 권하고 싶단다. 시인에게 남은 삶은 더 이상 고통도 아픔도 아니다. 세상에는 절제절명으로 불행한 일이 없다는 진리도 깨쳤다.
그녀는 절망의 늪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느님이 나의 게으른 습관을 잘 아셔서 나를 부지런하게 하기 위해 무거운 일거리를 주신 것인지 몰라. (중략)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았고 열정을 잃지 않았고, 무너진 산에 깔려 있으면서도 사랑을 믿었고, 내일을 믿었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축복을 받았고, 딸들을 얻었으며, 무엇이 가족 사랑인지 알았고, 어머니는 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내게 영원히 싸우고 사랑할 것은 삶이며 아름다운 일상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
-------------------------------
P#19 ■ 동아시아의 시 /임건순 철학박사
1. 시경VS 초사
시경:척박한 환경에서 애환이 닮긴 노래들,
초사:더운 낮에 잠들고 밤에 많은 활동을 하는데 그 때 펼쳤던 상상의 나래가 노래로
2.두보VS 이백
두보: 시성. 시의 관세음보살, 늘 민중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려 했던 영원한 애국시인
이백: 시선. 시의 천재, 달을 사랑한 영원한 풍류의 상징,
3. 당시 VS 송시
느낌충과 설명충
보여주며 절로 느끼게 하는 시와 설명해주고 직접 알려주는 설명
당연히 느낌충의 당시가 나은데 시각도 아닌 청각만으로 시상을 전개하는 맹호연의 시가 압권, 조탁의 흔적이 전혀 없기에 한국은 중국에 비해 이백의 시가 인기가 더 많은거 같고
한국은 시경, 일본은 초사의 영향이 두드러지는거 같은데,
일본이 한국보다 무덥고 한국의 겨울이 너무 혹독해서 그런듯
일본 애니 세일러문이 초사적 뿌리가 있어보이고 초사적 색채가 아주 강함 그리고 킹오브 파이터 시리즈에도 나왔던 아테나란 캐릭터나 그녀의 주제가 싸이코파워란 노래도 부르면 다분히 초사적 상상의 세계가 강함. 은하철도 999는 초사+화엄경 이런것 같고
세일러문만해도 그냥 단순히 애들 보는 만화, 애들 듣는 노래 같지만 그렇지가 않아 그 뒤에는 문화적 유산과 뿌리가 있다고. 피구왕통키 통키는 서유기의 홍해아, 민대풍은 서유기의 나타태자를 모티프로 한거 같더만 뭐, 스핀토네이도 슛을 날렸던 민간지. 고전에 나온 캐릭터의 재해석. (민대풍 옆에 나한상은 서유기의 이랑신, 민대풍이 어깨에 달고 댕긴 까마귀는 서유기의 효천견을 모티프로)
동아시아 시의 세계도 참 재밌음. 커다란 바다 같기도 하고. 이런것들 주제로 이야기할 사람이 많지 않아 애석하기도 함. 문학전공자라고 해도 초사와 시경, 당시 등에 대한 탄탄한 기본기 가진 분들 많지 않음. 직접 외우는 당시 50개도 안되는 경우 많고, 나도 어서 백개 채워야지. 두보와 이백도 좋지만 요새는 왕유도 좋음
저런 시들은 사실 동아시아 공통의 고전이기도 했지만 더 적절한 말로 동아시아 공통의 교양이었지
한문에 능했기에 조선의 선비들이 에도나 북경에 가서 필담이지만 서로 술술 나누었음.
동아시아는 동아시아대로 유럽은 유럽대로 서로가 공유하는 공통의 고전과 교양이 있었기에 필담 소통이 문제 없었던것. 넌 두보 좋아하냐 난 이백 좋아한다. 수호지에서 누구 좋아해? 당시 중 으뜸을 누구로 꼽고?
동아시아는 사실 절대 허구속 상상의 세계가 아님. 한자문화와, 율령체제에 바탕한 시스템, 유교와 불교 문화도 있지만, 경사(經史)문화라는게 있었고 그랬기에 동아시아 세계란 실존하는 문명의 장이었던건데.
성문법 말고도, 각자 지역의 로컬적 관습 말고도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과 이상적 인간과 세계에 대한 원칙과 방향성이 뚜렷했고 그게 경사문화에 바탕을 둔것임. 사서오경만이 아니라 사기와 자치통감 그리고 저런 시와 시의 세계
우리나라 문학전공자들도 저런 시들 공부 열심히 좀........아이구야 다 부질없다. 성적 맞춰서 인서울하려고 가는 거지 무슨놈의 당시고 초사고 경사문화냐.
-------------------------------
P#18 ■ '좋은 시와 나쁜 시'에 관하여
/(박태일 시인 경남대 교수)
1.시는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끊임없이 이어진 시공간적 단위의 구성원이 서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인 것으로 믿어온 담론 구성물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은 부분 개념이거나 역사적 정의에 머문다.
처음부터 시의 본질이니 순수한 시정신이니 호들갑을 떠는 일은 수사적 부풀림이거나, 특정 시관에 대한 배타적 우월성을 굳히기 위한 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와 비시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너무 느슨해서 오히려 경계의 나눔이 불필요해 보일 정도다.
어떤 작품이 시냐, 시가 아니냐는 물음이 어리석은 까닭이다. 그보다는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특정한 시적 취향과 그 관점을 밝히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토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일이 생산적이다.
(ㄱ)콩나물죽
후룩후룩 먹으며
아버지 생각하였다
우리 아버지 돌아오시면
죽 안 먹으려니 하고
(ㄴ)새벽빛을 보고 싶어
불을 켜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새벽빛에 젖고 싶어
한없이 젖어들고 싶어……
푸르른 몸이여
여명의 마음이여.
(ㄱ)과 (ㄴ)은 둘 다 시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먼저 이 둘은 줄글 꼴로 쓰여진 예사로운 산문과는 다르다. 겉꼴에서부터 들쭉날쭉 글줄이 들고 난 가락글이다. 오늘날 가장 흔한, 그리고 가장 낯익은 시꼴이다. 그리고 둘 다 시집에 실려 있다.
그러하니 이 둘을 두고 시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남은 문제는 있다. 이 둘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나쁜가라는, 작품에 대한 호오취향에 대한 물음이다.
먼저 (ㄱ)을 좋은 시로 여기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시 속에 담겨 있는 현실감각을 눈여겨본 사람일 성싶다. 짐짓 배고픈 아이의 생각과 몸짓을 이음매로 내세운 가난이라는 현실이 짧은 시줄 속에 잘 옹글었다.
거기다 이 시는 나라 잃은 시기 1930년대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일간지 지면에 실리지 못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다. 조선의 빈궁 현실을 다루어 민족의식을 북돋울 수 있는 위험이 큰 작품으로 보였던 까닭이다.
이런 설명까지 덧붙인다면 (ㄱ)에 대한 독자의 호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명시인의 습작기 투고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달리 (ㄴ)을 나쁜 시로 꼽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ㄴ)은 구체적인 삶과 겉돌아 추상적이다. 작품 내용도 어름하다. 반복법에 이끌린 영탄조마저 없었다면 이 시를 객쩍은 벌소리로 볼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작품은 그렇게 낮추어 보기 힘든 시다. 명망가 시인인 정현종의 것인 데다, 그에게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상금이 많은 시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인 까닭이다.
이런 무거운 사실을 일깨워준 뒤 다시 독자에게 (ㄴ)에 대한 호오를 물어보라. 이 작품을 벌소리에 가까운 것이라 여겼던 이도 마냥 생각을 지켜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지녔던 눈길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면 유명 문학상과 그 심사위원회의 식견, 그리고 시상 주체의 사회적․제도적 명성과 권위체계를 딛고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이 떠맡기 힘든 일이다.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결정 짓는 취향의 요건 또한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시 자체에서 오는 것 못지 않게 시 바깥에도 있다. 어쩌면 시 바깥 요인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시 작품은 문학사회의 거시 제도 안에서 마련한 미시전략의 결과다. 각급학교 문학교육, 등단방법, 문학상과 같은 다양한 인정기제나 제도적 틀, 대중매체나 저널 문화면의 명성 생산과 재생산, 또는 인맥․학맥․지맥과 같은 문화자본, 서점 유통 단위에서 나타나는 판매지수나 기호도 순위와 같은 중계회로의 소비전략이 그 내면화의 세부를 이룬다.
이른바 시의 역장이다.
흔히 문학사회 안에서 시의 자리는 세 가지 역장을 보여준다. 고급시와 대중시, 그리고 교양시가 그것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시적 취향과 목표를 겨냥한다. 그러면서 서로 긴장, 대립, 보족 관계를 거듭한다.
오늘날 우리시는 이러한 세 역장을 껴안고 있는 제도의 결과물이다.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잣대와 조건은 이 역장 안에서 다시 나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여러 길항관계를 받아들일 때라야만 비로소 시에 대한 열린 개념 정의와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좋은 시의 요건을 몇 가지로 들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나쁜 시의 모습 또한 자명해질 것이다.
2.
1)첫째, 좋은 시는 무엇보다 좋은 시인으로부터 나온다. 좋은 시의 첫째 요건이 이것이다.
시인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크게 둘이 있다. 심리적 시인관과 사회적 시인관이다.
심리적 시인관이란 시인의 내면에 시인이 됨직한 특질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보통 사람과 나뉘는 특별한 이로 여겨진다.
사회적 시인관은 이와 달리 시인은 사회 안쪽의 인정기제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다. 다만 시 창작 수련과 발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이를 뜻한다. 그가 시인일 수 있는 터무니는 등단 제도나 방식을 거쳤는가, 아닌가에 있을 뿐이다.
좋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 삶에서 흔히 특별한 면모를 지닌다. 때로 안타까운 요절이나 열정적 연애와 같은 비장함, 언어 바깥의 선정성으로 겉칠된 삶이 그것이다.
특별한 삶에서 좋은 시가 나올 것이라는 소박한 인과론, 개성론의 틀은 시인 됨됨이에 타고난 각별함을 요구한다.
그래서 타고난 자질을 가진 심리적 시인관을 밀 수 밖에 없다. 시작(詩作)에 대한 즉흥성과 시인에 대한 예외성을 버릇처럼 요구하는 태도가 바로 자질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인은 세상의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끊임없이 시와, 언어와 다투고 노력하는 이다. 그의 작품이 좋은 시 자리에 오를 개연성은 그만큼 크다.
2)둘째, 언어를 중심으로 좋은 시의 요건을 따져본다. 시는 숱한 언어 관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서 언어의 특이성과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갈래다. 드높은 언어 관습이자 진지한 말놀이인 셈이다.
이 점을 일탈이라 부르든, 비틀기라 부르든 시가 언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는 달라지기 힘든 자질이다. 따라서 좋은 시는 언어의 진폭이 넓고, 다채롭게 그 활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언어 활용의 가능성이란 바로 민족어의 가능성과 같다. 근대 시기의 우리시는 노래로 불려졌던 노래시가 아니라 눈으로 읽는 문자시로서 한글의 용례를 키우고 그 쓰임새를 세련시킨 공이 크다.
좋은 시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더욱 변화, 발전시킨 경우다. 따라서 우리 근대의 제국언어였던 일본식 한자 투에 갇혀 있는 시는 좋은 시가 되기 힘들다. 영어 공용어론이 솔솔 피어나고 있는 오늘날 눈길에서 볼 때도 이 점은 달라짐이 없다.
글말이란 입말과 달리 본디부터 지식계층, 엘리트 문화물이다. 따라서 민족 구성원과 더불어 함께 하고자 하는 언어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는 특권 문화로 떨어질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근대 민족국가의 민족다움을 재는 주요 상수 가운데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의 동질성이다. 이 말의 요체는 추상적인 정치 이념의 동질성이나, 섣부른 민족혼과 같은 명분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민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손쉽게 다가서서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는 뜻이다. 담긴 뜻의 깊고 얕음이나, 언어기법의 각별함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3) 셋째, 표현에서 본 좋은 시의 요건이다. 시는 무엇보다 언어의 긴밀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수필이나 소설과 달리 압축과 생략을 바탕으로 삼는다.
시는 줄여 써서 많이 말하는 길을 따르고, 소설은 늘여 써서 적게 말하는 길을 따른다. 이 둘의 차이를 힘껏 맞세운 자리에 시와 소설의 관습적 정당성이 있다.
시가 소설에 가까워져 번잡하고 느슨해지면 더는 오롯한 시의 자리를 내세우기 힘들다. 거꾸로 소설이 시처럼 줄이고 다듬어 말과 말 사이의 긴장을 애써 키우고, 생각을 건너뛴다면 더는 소설 자리를 고집하기 힘들다.
그런데 압축과 생략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시적 요건이 뜻하는 궁극적인 자리는 어딘가?
그것은 반복불가능성, 곧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른 표현이 그것이다. 이 점이 진지한 말놀이로서 시 창작의 즐거움이고, 시가 다른 갈래와 맞서 끊임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터무니다.
좋은 시란 바로 기지의 표현과 다른 반복불가능성을 실천하고자 한 작품이다.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 말에 힘이 실리고, 그 뜻에 환한 자장이 피어나고, 그 주체인 시인에 대한 외경이 솟아난다.
그렇다면 이 점은 어떻게 확인하는가. 간단한 길이 있다. 해당 시의 특정 부분을 다르게 고쳐 보면 될 일이다. 이 경우 고쳐진 상태가 본디 시보다 더 좋아진다면 그 본디 시는 서툴고 나쁜 시다.
거꾸로 다른 이가 손을 대었을 때, 오히려 고쳐진 시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본디 시는 다르게 고쳐 쓰기 힘든 상태, 곧 반복불가능성에 가까이 다가선 경우겠다. 이른바 좋은 시인 셈이다.
아무리 명망을 얻고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 그것이 일깨워주는 표현 가치를 포기한다면 하루아침에 범상한 시인으로 떨어지고 만다.
4) 넷째, 작품 내용에서 볼 때 좋은 시의 자질에 대해서는 '낯설게하기'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 일탈에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개방, 곧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나 대거리라는 적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손쉽게 이를 수 있는 생각이나 느낌, 이미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기지의 세계를 겨냥한 시는 좋은 작품이 되기 힘들다. 널리 승인된 작품 내용이나 문화관습에 가까이 빌붙으려는 '유행시', 특정한 내용만을 부풀리는 '키치시'와 같은 것들이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 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어떤 이의 작품 가운데 한 부분이다. “사랑을 하면 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냈다.
겉만 번지르하고 막연한 생각에 머물고 있다. 키치시라 일컬을 만큼 감상성도 두드러진다. 이런 작품의 가벼움과 얄팍함 속에는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범상한 감각만이 담겨 있 따름이다.
좋은 시란 적어도 손쉬운 고정관념으로부터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서려는 작품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5) 다섯째, 독자 쪽에서 좋은 시의 요건을 살필 수 있다. 압축과 생락, 곧 줄여서 말하는 방식인 시는 독자 쪽에서 볼 때 늘여서 읽는 일을 근본 방식으로 한다.
늘여서 읽기 어려운 시, 뻔하고 빤하지 않아 한번에 쉽게 뜻이 잡히지 않은 시, 그것이 무엇인가를 거듭 고심하게 만드는 힘이 큰 작품이 바로 좋은 시일 가능성이 높다.
적게 말하면서 많은 생각과 느낌을 일깨우고자 하는 역설적 갈래가 시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의 거듭 읽기와 독서시간의 지연, 곧 소급적 독서는 필연적이다.
좋은 시란 바로 이렇듯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작품 안에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인 셈이다.
그리고 그 힘은 여러 방향에서 작용한다. 작품 안일 수도 있고, 작품 바깥일 수도 있다.
문학교육이나 저널의 관심, 문학상과 같은 문학사회의 제도적 장치는 바깥 요인이다. 대중시에 가까울 수록 독자들은 작품 바깥에 의한 규정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 읽기는 문화 훈련이다. 일상언어 활동과는 길이 다르다. 세련된 언어관습으로서 읽기 훈련과 그로 말미암은 내면화는 필수적이다. 독자에게 손쉽게 읽히지 않는 시란 그 훈련에 거듭 이끌어들이는 힘이 강한 시다.
그들이야말로 특정 세대독자나 당대 현실독자가 아니더라도 마침내 문학사나 문화 자체가 독자가 되는 시, 오래도록 독자사회로 열려 있을 좋은 시로 거듭난다.
3. 좋은 시란 시인된 됨됨이에서부터 언어를 거쳐 표현 방법과 인식 내용, 그리고 독자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좋은 시를 좋은 시인이, 민족어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자리 위에서, 어쩌면 될성부르지 않은 반복불가능한 표현을 겨냥하며, 세계를 개방해주는 쪽으로, 멀리 독자를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으로 규정했다.
여러 편차와 다채로운 맥락에도 좋은 시는 이러한 요건의 그물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뜻하는 궁극은 마침내 하나다. 뜻있는 말놀이, 문화관습으로서 이르기 힘듦이 그것이다.
그 방위가 어디든 더욱 이르기 힘든 상태를 보여준 작품, 그것이 좋은 시다. 오늘날 문학사회의 환경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매체가 시의 취향을 이끈다. 디지털 기술에 따라 향유 방식도 바뀌고 있다. 시를 향한 취향의 높낮이나 경계, 기대지평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시의 자리가 시단을 이끌고 있다. 문학의 인정기제 또한 그에 맞물려 움직인다. 세련된 독서로서 시 비평과 연구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속에서도 시의 가능성, 곧 언어를 통한 창조적 가능성의 확대라는 쓰임새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좋은 시, 또는 시적인 것을 향한 헌신은 문학사회 안팎으로 지난날과는 견줄 수 없을 강도와 방향에서 요구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당대시의 전통과 관습의 담장을 흔드는 좋은 시가 나올 개연성은 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독자사회가 시인들에게 시를 향한 다함없을 헌신을 한결같이 기대하는 시대 분위기,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는 처음이자 끝자리다.
----------------------------------
P#17 ■ [허물] /설악무산
남의 삶은 다 보이는 데
내 삶은 보이지 않네
남의 죽음은 다 보이는 데
내 죽음은 보이지 않네
그것 참!
남의 허물은 다 보이는데
내 허물은 보이지 않네
------------------‐---------------
[당신의 언어온도는 몇 도쯤 되나요] / 이기주
섬세한 것은 대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예민합니다.
한글은 점 하나, 조사 하나로 문장의 결이 달라집니다. 잘못 말하는 순간 얼굴을 붉히게 됩니다.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습니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릅니다. 내가 표현하는 언어 온도는 상대도 귀신같이 느끼고 알아 차립니다.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줍니다. 세상살이에 지칠 때 따뜻한 말과 문장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시원할 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정서적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돌려세우기는 커녕 꽁꽁 얼어붙게 합니다.
당신의 언어 온도는 몇 도쯤 되시나요? 무심결에 뱉은 한 마디가 너무 뜨겁거나 차가워서 소중한 사람이 떠나지는 않았는지요.
뜨거운 음식을 불어가며 천천히 곱씹어 먹듯이 우리들의 문장과 문장에 호흡을 불어넣으며 따뜻한 언어 온도를 만들어 보세요.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한 우리들입니다.
----------------------------------
P#16 ■ [시 외우기] / 최진석 서강대 교수
독서를 통해서 좋은 글은 외우고, 외우기는 틀을 깨고 나올 힘을 단련시켜, 창의력 배양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외우기를 강조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경전이나 문장은 외워야 내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 나누기를 할라치면 수만 가지 기준이 있을 것이다.
시(詩)를 가지고도 나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크게 시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가를 수 있다.
둘 사이의 차이는 크다.
시를 읽더라도 내면의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내면의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통해서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감행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또 큰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들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육화(肉化) 정도의 차이다.
그런데 육화의 길에 바로 외우기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이리하여 사람은 다시 시를 외우는 사람과 외우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겠다.
시를 외우면 시인이 시를 타고 침투해 들어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더 커져서 시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시의 석양 같은 운명이다.
내가 외운 시로 시인이 내 안에서 영역을 확대한다기보다는, 시인 몰래 내가 자라 버린다.
무엇보다 시를 지배하는 인간이 가장 상급인 사람이다.
10∼20년 전부터 관공서나 기업이나 학교 등등의 기관에 ‘창의’ ‘상상’ ‘창조’ ‘선진’ ‘선도’ 등과 같은 구호가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구호를 담은 현수막은 결핍과 희망을 동시에 말한다.
없으니 가져 보자는 선동이다.
이렇게 현수막을 높게 달아 놓고 긴 시간 펄럭였지만, 지금 우리가 창의적인가.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창의력을 발휘하자고 그렇게 강조했지만 왜 아직까지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가.
혹시 접근이 잘못되고 있어서가 아닐까?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떤 창의적인 결과들도 ‘바로 그것’을 발휘하려고 의도해서 나온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표현하려는 강한 충동이나 자신에게 등장하는 문제점을 깊이 파고들다가 창의력이 그냥 펼쳐진 것들이다.
대답의 결과가 아니라 깊고 긴 질문의 결과들이다.
정답을 찾기보다는 마치 늪에 빠진 사람처럼 자기만의 문제에 집착한 결과이다.
돈오의 깨달음처럼, 축적된 내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그래서 창의력은 발휘할 수 있는 어떤 기능적인 활동이 아니라, 내면의 깊숙한 곳에 연결되어 있는 인격의 힘이다.
사회적으로 창의성이 발휘되고 있지 않다면, 그건 분명히 창의력이 튀어나올 정도의 인격적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드물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창의적이지 못하다면, 창의적인 두께의 인격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다.
창의성이 필요하다면, 창의성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격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단련된 내면을 갖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놀이나 공상에 빠지기나 지루함을 견디기나 예민한 감각이나 운동이나 글쓰기나 낭송 같은 것들이 오히려 창의력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활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외우기도 이런 것들과 함께 큰 몫을 한다.
창의성은 축적되고 단련된 내면의 폭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창의력은 지식을 축적하는 일로 길러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흔히들 창의성을 지식의 축적과 반대되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렇다고 하여 지식의 축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축적된 지식의 양은 분명히 창의성의 수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식이 ‘나’의 내면을 단련하는 일에 사용되었느냐, 아니면 내가 오히려 축적된 지식의 관리자로 남았느냐이다.
‘나’를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
지식의 인격화가 관건이다.
외우기는 나를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틀을 깨고 나올 힘을 갖도록 단련시킨다.
내가 창의성 곁에 외우기를 함께 두는 이유이다.
‐‐----------------------------
P#15 ■ 존재-무아와 인과
'과보는 있지만 지은 작자는 없다'
즉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의 법은 뚜렷하지만 그주인공은 뚜렷하지 않다.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무아의 가르침과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과의 이치인 연기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한마디로 절대적인 자아는 없다.
원인을 짓고 결과를 받는 자아는 내가 생각한 자아일 뿐, 그런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나는 없다는 말이다.
도둑놈은 없다.
그런데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된다.
도둑놈이 되는 순간 도둑의 세계가 열린다.
이 말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면 도둑놈이 되지 않고 도둑의 세계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슬픈 일, 슬픈 사람, 기쁜 일도 마찬가지다. 슬픈 사람이나 기쁜 사람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슬픈 일을 겪으면 슬픈 사람이 된다. 슬픈 사람이 되는 순간 슬픈 사람의 세계가 열리고 슬픈 사람으로 갇혀버리게 된다.
우울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울한 일이 생겨서 우울에 빠져드는 순간 자신은 우울한 사람이 된다.
우울한 사람이 되는 순간 우울증의 세계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인과는 뚜렷한 데 지은 작자는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무아'라고 한다.
이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나와 관계된 것도 아니고,
나의 본질도 아니다.
인과가 만든 나는 '업' 속의 나다. 그것은 업의 한 모습일 뿐이다.
업의 모습이기 때문에 업을 구성하는 요인을 바꿔주면 그 업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지은 인과의 업을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슬픈 일을 겪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고 무언가 내가잘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슬픈 사람이 되었다.
이 슬픈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까?
모든 원인을 나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슬프다. 모든 사연은 같이 동시에 일어났다. 무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와 존재들끼리 동시에 일어난 일을 모든 게 내 책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모든 일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면 이 일을 일으킨 당사자는 자유가 전혀없는 사람이 된다. 당사자도 모든 가능성을 갖춘 자유의 존재이다.
나의 일정한 역할이 있었고 거기에 대응하는 저 사람의 역할이 있어서 나에게 슬픈 일이 생겼을 뿐이다.
이것이 내 책임이라고 한정지으면 나는 슬픔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인과가 확정되어 버린다.
있는 그대로 봤을 때는 그렇게 확정되어서 받을 수 있는 내가 없다. 나의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업의 한 모습이 그렇게 결정하고 있을 뿐이다. 과보가 결정되는 업의 모습일 뿐,
그런 존재는 내가 아니다.
어제의 나는 10만큼의 크기로 모든 문제에 대응해서 오늘10만큼의 결과를 받았다.
그런데 오늘 내가 100만큼 커졌다면 10의 영역에서 슬퍼해야만 하는 일이 100이라는 영역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는 다른 것으로 바뀐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면 지금 내가 무엇인가에 갇혀 있는 것은 나의 모습이 아니다.
이런 나는
내가 아니고
나의 관계도 아니고
나의 본질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온통 나의 원인으로 탓한다.
나의 원인으로 탓할 때 나는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고 나의 진정한 모습은 울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을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평안하기를 바랄까 아니면 괴로워하기를 바랄까?
그 사람도 내가 평안하기를 바랄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가 원하지 않는 나의 우울 상태나 슬픔 상태를 내 책임으로 고집히여 괴로워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일일까?
있는 그대로를 본다면 이는 서로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 그런 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업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가 없고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성공도 실패도 기쁨도 슬픔도 항상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커질 때 어제의 과보를 받을 나는 없게 된다.
작은 성공을 더 큰 성공으로 키울 내가 있을 뿐이고, 어제의 기준에서 슬펐던 일이 오늘은 더 큰 넉넉함으로 바뀔 수 있는 내가 있을 뿐이고, 어제의 기쁨을 더 큰 보람으로 만들 수 있는 내가 있을 뿐이다.
과보는 뚜렷하고 작자는 없다지만 그 과보를 받아들여서 더욱 큰 공덕으로 키우고 복으로 바꿀 수 있는 나는 존재한다.
어제의 나는 어제로서 지나가 버렸으므로 인과를 지은 작자는 달라졌다. 그래서 어제의 나는 없는 것이다.
참다운 나의 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실아가는 걸림없고 보람 가득한 행복의 날로 살아야 한다.
과보는 있지만 지은 작자는 없다.
그 과보를 받을 나를 더욱 키워고 본래의 나를 회복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
P#14 ■ 공기, 빛, 시간, 공간 / 찰스 부코스키
‘저에게는 가족도 있고 직장도 있었어요.
언제나 무엇인가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집도 팔고
여기로 이사왔어요.
커다란 작업실로!
이 넓은 공간과 빛을 보세요.
내 생애 최초로 무엇인가를 창작할
시간과 공간을 갖게 된 거예요.’
그렇지 않아, 친구.
창작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탄광 속에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일해도
창작을 해내지.
작은 방 한 칸에 애가 셋이고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해도
창작을 해내지.
마음이 분열되고 몸이 찢겨 나가도
창작할 사람은 창작을 하지.
눈이 멀고
불구가 되고
정신이 온전치 않아도
창작을 해내지.
도시 전체가 지진과 폭격과
홍수와 화재로 흔들려도
고양이가 등을 타고 기어올라도
창작할 사람은 창작을 해내지.
이보게 친구, 공기나 빛, 시간과 공간은
창작과는 아무 상관없어.
그러니 변명은 그만둬.
새로운 변명거리를 찾아낼 만큼
자네의 인생이 특별히
더 길지 않다면 말야.
해석)
진정한 창작의 본질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열망과 의지에 있다. 창작에 대해서는 핑계대지 말아라.
하루라도 창작하지 않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 시인이라고 소개하거나, 시인의 명함을 가지고 있다면 매 순간마다 창작하고 대화도 시적언어를 창조해 내야 한다.
그저 그런 시를 쓰는 걸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저 그런 시는 보통사람 누구라도 슬프거나 감동에 젖는 특별한 경험을 갖게 되면 얼마든지 시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늘 평범에서 시를 창조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싱클레어 루이스에게 미국 전역의 작가지망생들이 강의를 요청했다.
그때 루이스는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수강생 모두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루이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 강의는 필요없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집에 가서 쓰고, 쓰고, 또 쓰라는 것 밖에 없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강의실을 떠났다.
찰스 부코스키 시인은 대학 중퇴후 생계비를 벌기 위해 접시닦이, 트럭운전사, 하역부, 경비원, 창고일꾼, 주차장 관리원, 승강기 운전원, 사료공장직원, 도살장 인부, 우체국 집배원 등 스무가지가 넘는 하급직원을 전전하면서도 수천 편의 시와 수백 편의 단편소설, 6권의 장편소설을 썼다.
위의 시는 그가 죽기 2년 전에 남긴 시다. 그가 남긴 말은 모든 위대한 시도는 어리석은 충동, 즉 비현실적인 충동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왜 할 수 없는지 어떤 사람은 이유를 찾아 변명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해내는 사람이 있다. 거기서 인생이 나누어진다.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불행과 원하는 것을 하는 행복의 차이로 나타난다
------------------------------‐-----
P#13 ■ 시인 / 알렉산드르 푸시킨
아폴로 신(神)이 신성한 희생자로
시인을 불러내기 전에
그는 부질없는 세상의 변민 속에
무기력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의 성스러운 리라는 울리지 않고,
영혼은 얼어붙은 꿈을 먹는다,
이 세상 보잘것없는 아이들 가운데,
아마도 그는 가장 미미하리라,
그러나 신의 음성이
예민한 청각에 와 닿기만 하면,
시인의 영혼은,
잠을 깬 독수리처럼 약동한다.
그는 이 세상의 위안 속에서 괴로워하고
사람들의 소문을 멀리한다,
민중에게 숭배받는 것의 발치에
자랑스런 머리를 숙이지는 않는다,
야성적이고 엄숙한 그는
소리와 혼돈에 가득 차
황량한 바닷가로
또 넓게 술렁이는 떡갈나무숲 속으로 달려간다.
(해석)
시인의 본질, 소명, 고독, 그리고 신성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시인을 철학적으로 조명하는 시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미미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신의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존재가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시인의 존재론적 숙명을 이야기한다. 시인은 세상의 소음과 위안, 권력의 유혹을 벗어나, 자연 속, 외진 곳, 혹은 내면의 진실을 향해 달려간다는 상징적 결말을 표현한다.
-‐----------‐--------------------
P#12 ■존재의 본질
원래 상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우주의 최초의 상태에 관한 의문이다.
"형상(물질)과 공(마음 또는 의식) 중에서 무엇이 먼저인가?"
과학의 세계에서는 물질이 의식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양의 종교인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는 마음(의식)이 먼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구절은 궁극적 진리이다.
이 진리는 논리적 사고로 설명될 수 없다. 오직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이 진리를 말할 수 있다.
그 답은, 공(空)이 먼저이다.
공에서 색(色, 형상, 물질)이 일어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
우리는 색(色, 형상, 물질)의 상태에 있다.
깊은 수행을 통해서 '공'속으로 들어가면, 공(空)의 상태에 있게 된다.
'색즉시공'
물질이 곧 텅 빈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공'에서 벗어나 다시 이 형상의 세계로 돌아올 때, '공즉시색'을 깨닫는다.
이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원래 상태는 공(空)이다.
그러므로 깊은 명상 수행을 통해 '공'의 상태를 찾는 것이 궁극적 목표이다.
조주선사가 말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경전과 불교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궁극적 진리는 오직 깊은 수행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
P#11 ■ 자화상 /조광현 (25.6.12)
나는 가끔 거울을 뒤집어 놓는다
반사되지 않는 나를 보고 싶어서다
내 눈동자 속엔
익사한 하루들이 떠다닌다
나는 나를 그릴 때
선보다 쉼표를 먼저 긋는다
입꼬리는 늘 반올림
웃음도, 울음도 아닌 각도로
이 삶을 대충 해석해보는 표정
어쩌면, 나는 내가 쓴 주석일 뿐
가슴 한쪽엔 오래된 흉터 대신
무언가를 안고 잠들던 자세가 박혀 있다
이 시를 쓰는 동안
나는 또 한 장의 자화상을 남긴다
물감 대신 말로,
붓 대신 침묵으로
결국 나라는 사람,
완성되지 못한 그림
그러나
계속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여백이 있는 인생
아직 늙음도, 아름답다
---‐‐‐------------------------------
P#10 ■ 코트와 나> / 한 강(노벨문학상 수상)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었네
서른 살 겨울에 산
긴 겨울 외투는 평생
이거면 되겠다 했던
종아리를 덮는 검정색 코트
안감은 미어지고
밑단 재봉은 두어 번
터졌다 다시 감쳐지고
양쪽 소맷단에 까만 보풀이
물방울들같이 맺힌 코트
오십 년 늙은 내가
이십 년 늙은 코트를 입고
겨울벌 아래로 걸어가네
벽에 걸어놓으면
코트는 나를 닮아
어깨가 수굿하고
텅 빈 안쪽 어둠을
안고 있는지 그저
놓아두고 있는지
반으로 접어 의자에 걸쳐두면
코트는 나를 닮아
먼지투성이 몸을
곧잘 구부릴 줄 알고
어깨를 집고 들어올리면
바닥에 스치며
무겁게 허리를 펼 줄도 알고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어
팔을 뻗으면
소매가 순순히 따라오고
깃을 세우면
내 목은 움츠려져 거기 잡히고
내가 코트를 입을 때
코트도 나를 입는지
겉감이 안감을 당기고
안감이 겉감을 두르듯
코트는 나를 안고
나는 코트를 입는지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어
함께 이별한 것 끌어안은 것
간절히 기울어져
붙잡았던 것 그리다
끝내 놓친 것
헤아릴 수 없네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어
어느 날 헤어질
서로를 안고 업고
겨울벌 속으로 걸어가네
----------------------------------
P#9 ■ 나침반
행복은 지배하면 엔돌핀이고
불행은 극복하면 세로토닌이다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말은
항상 간단하다
울림이 있는 시도 늘 간단하다
오늘 시 연습(詩作)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 한다면
내일은 한 걸음 더 진보한다
그저 그런 시가 되는 건
게을러서 그런 것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시는 혼자 읽을 때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남의 시라도 암기해서
낭송하면 내 것이고
내가 쓴 시라도
암기하지 못하면
사라지게 된다
하지 않은 말은
한 번쯤 후회하지만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자주 후회할 것이다
시인은 자격증이 아니다
시인끼리 모여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남의 시를 많이 낭송하고, 문학관을 많이 답사한다고 시인이 아니다
시인은 조직 속의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오로지 자기의 시로써 세상에 나타나 세상을 밝히는 사람.
시인은 어제도 오늘도
쉬지 않고 시를 쓰는 ing이다
시는 모든 것의 사랑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과업 중 가장 어려운 마지막 시험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 준비 작업일 뿐이다
-----------‐‐------––------‐---‐--
P#8 ■ 깨달음의 수준 /선(禪)
깨달음의 수준에는 높고 낮음의 여러단계가 있다.
가장 높고 깊은 단계는
공(空)을 보는(見) 것이다.
진리를 아는(知) 단계의
깨달음도 있다.
어느 순간에
진리란 이런 것이구나!!
알아차림은 낮은 단계의 깨달음이다.
가장 높은 깨달음은
공 속에 깊이 들어가서
오래 동안 그 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의 깨달음은
깨어난 후에도 공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아는 것(知)의 깨달음은
그저 진리의 한 부분만을 알았을 뿐,
그 진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아는 것(知)과 보는 것(見)의 깨달음에 대한 수준의 차이이다.
인생을 사는 데
욕심을 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깨달음을 얻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다.
아재 아재 바라 아재.
P#7 ■ 깨달음 /법사가화
‘그 말에 깨달았다’는 표현은 논리를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논리적 이해를 구할수록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목적에서 멀어진다.
깨달음은 언어를 초과한 자리에
논리적 분별의 이전을 가리킨다.
분별의 이전에서 말은 끝나고, 무심(無心이 열린다.
길은 판단이 멈춘 바로 그곳에 있다.
깨달음은
‘이것이 선이다'라고 명명되지 않으며
‘그것은 악이다’라고 구별되지 않는다.
그 자리는 말도, 개념도, 이름도 없다.
다만 응답이 있고, 관계가 있으며,
살아 있는 감응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말이 벼랑 끝에서 터뜨리는 존재의 침묵이다.
P#6 ■ 윤회
죽음이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 세상에서 죽은 뒤 그 다음이 어떻게 될 지, 다음 생애에 무언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지금 네가 해놓은 결과로서 너의 다음 생이 있어
그리고 결정권을 가지는 건 아니야
그런 결정권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해 가는거야. 전생에 무엇을 했다고 그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생은 앞과 뒤를 연결시키지 않는다.
한 번은 왕이었다가, 한 번은 상인이었다가, 또 한 번은 악인이었다는 식으로 갈 뿐, 절대 패턴을 이루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 윤회의 특징으로 앞과 뒤의 연결점이 없다는 얘기다.
깨달음의 공부는 어느 정도 이상의 단계에 못 올라가면 0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해놓은 공부를 이어서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즉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자격증 시험과도 같다. 합격점수 커트라인이 60점에서 59점을 받고 떨어졌다면 그 다음 시험에 59점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다시 0점부터 모든 문제를 다시 풀어야 한다. 그래서 전생에 깨닫지 못한 도는 꼭 이어지는 게 아니다.
지금 살아있는 현생에서 깨달음의 수준에 합격해야 다음 생에서 0점부터 시작하는 지독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P#5 ■<넓어지는 원>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체코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나 부모가 9살에 이혼하고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워낙 병약해 중퇴했다. 그로부터 각지를 유랑하는 생활로 고독, 불안, 죽음에 번뇌하다가 만년에 산 속의 성에서 고독하게 생활하다가 갔다. 그는 한평생 자아의 원을 넓히는 일에 몰두해서 대작이 만년에 탄생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살아 나가면서 원이 넓어지는 사람과 좁아지는 사람이다. 타인이 들어올 수 없는 옹색한 이가 있고 세상에 대한 무한한 수용으로 신까지도 그 원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릴케가 인간에게 묻는다.
"지금 어떤 원을 그리며 살고 있는가"
P#4 ■<어떤 사람> 레이첼 리먼 필드
'이상한 일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몹시 피곤해진다는 것.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속 생각이 모두 움츠러들어
마른 잎처럼 바삭거린다는 것.
그러나 더 이상한 일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 생각이 갑자기 환해져서
반딧불이처럼 빛나게 된다는 것.'
레이첼 리먼 필드는 시인, 소설가, 극작가, 아동 문학가로 아동문학의 노벨상인 뉴베리상을 수상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반딧불이처럼 밝히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기를 빼앗고 인생을 재미없게 만드는 사람과 봄날처럼 마음이 밝아지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둘 중 하나일 수 있다. 당신이 만약 시나 글을 쓴다면 궁극적인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실어 힘을 주기 위함이다.
P#3 ■ 시의 도구
전투에 필요한 건 총을 비롯한 여러가지 무기입니다. 그 무기를 완벽히 사용하는 법을 배워서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만의 주특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무기를 시에서는 각종 도구라고 하지요. 도구를 잘 사용하려면 풍부한 독서와 남의 훌륭한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선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진을 모아서 그림으로 그려야 합니다.
✨ 시의 기본 요소와 표현 도구
1️⃣ 주제 (Theme)
시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생각이나 메시지.
사랑, 자연, 죽음, 인생, 희망 등 시인이 전하려는 근본적인 의도.
예: 사랑의 덧없음, 계절의 변화 속 삶의 의미.
2️⃣ 소재 / 재제 (Material / Motif)
시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대상이나 아이디어.
주제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이미지나 상징.
예: 꽃, 바람, 달, 빗소리, 어머니의 손길.
재제는 특히 전통 시에서는 계절감을 살리거나 시의 틀을 만드는 역할을 해요. (예: 하이쿠의 계절어)
3️⃣ 비유 (Simile)
"같다", "처럼", "같이" 등의 말을 써서 두 가지 대상을 비교.
예: "달은 접시처럼 둥글다"
비유를 쓰면 감각적이고 쉽게 이해되는 이미지가 형성.
4️⃣ 은유 (Metaphor)
"같다"라는 말 없이, 직접적으로 대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
예: "그녀는 봄날의 햇살"
은유는 더 압축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줌.
5️⃣ 상징 (Symbol)
특정 사물, 색, 개념이 어떤 추상적 의미를 나타냄.
예: 비는 슬픔, 새싹은 새로운 시작, 달은 고독.
시에서는 상징을 통해 직접적 언급 없이도 깊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어요.
6️⃣ 이미지 (Imagery)
오감을 자극하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독자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을 느낄 수 있게 함.
예: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뒹군다."
이미지는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줌.
7️⃣ 운율 (Rhythm)
소리의 반복과 규칙성을 통한 리듬감.
음의 장단, 강약, 반복되는 어미 등으로 시의 흐름을 부드럽게 만들거나 강조.
예: 시조의 3장 6구, 4음보 등.
8️⃣ 반복 (Repetition)
단어나 구절, 소리를 반복하여 강조하거나 리듬감을 줌.
예: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라…"
9️⃣ 대조 (Contrast)
서로 반대되는 이미지나 감정을 나란히 배치하여 극적인 효과를 줌.
예: 빛과 어둠, 사랑과 이별.
🔟 아이러니 (Irony)
기대와 다른 반전된 의미로 독자에게 놀라움과 깊은 여운을 줌.
예: 웃고 있는 얼굴 속에 슬픔을 숨김.
P#2 ■ 시와 글을 쓰려면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게다가 시인은 독서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헤아릴 수 없는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어서 스스로 감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인은 홀로 외로운 생활을 감내하며, 책을 많이 읽는 지독한 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 창의성은 홀로 있는 '홀로움'에 있으면서 몰입할 때 나타납니다.
‘외로움’과 ‘홀로움’을 구분하고,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을 말합니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 있음은 사무치는 외로움이 아니라 혼자서도 충만한 ‘홀로움’입니다.
독서와 사유를 위한 자발적인 자기 시간 확보가 창의성과 생산성을 담보하는 것이지요.
독서는 빡세게 하는 거랍니다.
독서는 취미로 하는 게 절대 아니며, 책과 모질게 씨름하며 읽는 게 독서입니다.
오천권 정도는 읽어야 자유자재로 글이 쓰여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책은 안 읽는데 글은 잘 써요.”
그 말은 믿지 않는 게 좋습니다. 들어간 게 있어야 나오죠.
코끼리 똥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그 엄청난 양에 놀랍니다. 원체 많이 먹으니까 똥도 많이 싸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글도 잘 쓰고 많이 씁니다. 많이 읽은 사람의 글이 훨씬 풍성하고 질적으로도 우수합니다.
많은 독서를 하지 않고 쓰는 시와 글은 낭독해 보면 표시가 납니다. 논리적이지 않고 단순하고 단편적 감성에 글 장난과 단어 희롱에 때로는 분노가 일기도 합니다. 그 답은 지독한 독서에 있는 것이지요.
P#1■ <모두 다 꽃> 하피즈
장미는 어떻게
심장을 열어
자신의 모든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주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비추는
빛의 격려 때문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언제까지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
하피즈는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으로 가잘 형식(2행 연작형식)의 시를 완성시킨 사람으로 괴테가 하피즈와 영혼의 쌍동이라고 칭송했던 인물이다.
첫댓글 준회원이 올릴 게시판은 여기 밖에 없군요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어느 평론가의 말
사람들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사로잡기 위해 시인, 예술인은 감성적이어야 한다. 진정한 감성이란 논리적 사유가 뒷받침 되어 줄 때라야 가능하다.
논리를 확보함으로서 감성이 깃들 수 있는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토대가 결여되어 있는 감성적 사고란 아무리 무지갯빛으로 아름답게 빛난다 할지라도 한낱 소녀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이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에 젖게 하는 것은 작품이 지닌 지당한 설득력 때문이다.
설득력이란 전후좌우 타당성을 가짐으로 해서 상대방을 나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다. 시적,예술적 설득력이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전후좌우 타당성을 갖는 논리적 사고와 별반 다름없다. 논리의 압축과 비약이 곧 예술적 감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자아도취형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눈을 안과 밖으로 돌려 자신의 분수를 헤아릴 수 있는 논리적 사고가 약하고 빈곤하다 보니 우선적으로 드러나는 폐단이 상대방의 존재 이유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감성도 논리다. 그러니 밑도 끝도 없는 감성주의에서 벗어나 최소한 논리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성숙한 감성의 시인, 예술인이 되어야 한다.
[과식] / 한성희
누군가 식탁 곁을 떠날 때마다
나는 당신 몸에 숨는다
식욕에 대해
오래 들여다본다 배가 터지도록
나는 나를 먹는다
무기력한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어딘가로 둥글게 휘어지며
당신은 나를 사육하고
나의 무덤 속
따뜻한 허기를 감싼다
당신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한 움큼씩 머리카락이 떠날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채운다
죽을 때까지 불룩해지려는
죽음 뒤에서도 나를 먹어 채우는
이것들은 등의 반대편 슬픔
누가 혀를 몸 밖으로 뻗는다
온 힘을 다해 선뜩한 공복을 끌어올려
당신의 입에 삽목한다
입술에서 숟가락 하나가 자란다
瞻星臺(첨성대) / 圃隱 鄭夢周(정몽주)
瞻星臺兀月城中 첨성대올월성중
玉笛聲含萬古風 옥적성함만고풍
文物隨時羅代異 문물수시나대이
鳴呼山水古今同 명호산수고금동
월성안 첨성대 우뚝솟아
옥피리 소리에
만고의 바람이 일어
시대가 흘러감에
신라의 문물이 달라졌지만
아아!
산과 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고녀.
'동방의 등불' 타고르
"시를 쓰면 시에 미쳐야 한다"
스물두 살에 결혼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2남 3녀의 자식을 두었으나,
자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큰 아들 라딘드라나트는
"아버지는 자식들보다
문학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시간을 글쓰기로 보내셨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차츰 아버지의 그 열정이 아버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는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을 사셨지만 자신의 소명을 완전히 실현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짧은 시 형태의 전통으로 유명한 나라는 일본과 중국, 한국이다.
일본:고대부터 전해져 온 와카(和歌), 특히 하이쿠(俳句)와 단카(短歌) 형태는 전 세계적으로 ‘짧은 시’의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하이쿠는 특히 5-7-5의 음절 구조로 짧지만 깊은 울림을 지닌다.
중국: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와 같은 짧은 형식의 시들이 매우 오래전부터 발전했다.
한국:향가나 시조로 짧은 형태의 시문학으로 전통을 이어왔다. 시조는 특히 3장 6구 형식으로, 짧지만 깊은 울림과 정서를 담았다.
짧은 시의 전통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짧은 시 하면 일본의 하이쿠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그 영향으로 세계에서 일본을 "짧은 시의 원조"라고 생각하고 있다.
심오한 내용들
짧은시는,,역시 일본
김훈의 칼의노래에 보면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죽기전에 남긴말
일본인이 환장하는 단카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은유-류시화
문학은 은유에 있다. 은유는 그 안에 많은 의미의 층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해석이 달라진다. 문학이 주는 울림과 깊이가 은유에 있다. 직설적 표현이 지배하는 사회는 획일적이고 얕다. 사람들이 은유를 이해할 인내와 상상력을 잃어 버릴 때, 지도자들은 직설적인 구호를 남발한다. 은유는 풀꽃이고, 찔레장미이고, 블랙베리의 검붉음이다. 어린아이일 때부터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세계는 은유로 가득했다.
시가 그대에게 위로나 힘이 되진 않겠지만…
'우리 자신을 가지고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불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꽃을
불완전한 것조차 감추지 않는 꽃을'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은
"시는 '유리병 편지'와 같다"고 했다.
그것이 언젠가 그 어디인가에,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의 해안에 가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시인이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
나는 내가 누구이며 어디쯤 서 있는지 알기 위해 시를 읽는다.
삶은 불가사의한 바다이고,
시는 그 비밀을 해독하기 위해 바닷가에서 줍는 단서들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아니어도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인생학교에서 시읽기 중에서)
신성(神性) 이승헌
어느 날 캄캄한 밤이었노라
갑자기 찬란히 빛나던 별 하나
내 머리에 들어와서 내게 속삭이는 말
반짝이는 저 하늘의 별이
보이는 것은 눈이 보는 것이오
창 밖에 흐르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것은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귀가 듣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별을
내가 보았고
창 밖에 흐르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 것을
내가 듣는 것으로 알았노라.
이제 내가 눈을 한 번 더 뜨고
귀를 한 번 더 열고
바라보니
내가 곧 별빛이요,
내가 곧 빗방울이어라.
아아, 찬란한 빛이
한번 더 빛나매
나는 별빛도 아니고
빗방울도 아닌 것을
참으로 내가 모든 것을 알고
나를 깨달으매
나는 스스로 홀로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인 것을..
하늘에,
창 밖에
별 빛은 반짝이고
빗방울은 하염없이 내리는구나
-------------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며 하염없이 울었던 그 때가 생각납니다.
바쇼하이쿠(짧은 시) 선집/마쓰오 바쇼(1644~1694)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
◇내리는 소리
귀도 상큼해지는
매실 장맛비
◇꽃 아래서도
열 수 없어 슬프다
시의주머니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 허물은
◇눈 내린 아침
파만이 채소밭의
유일한 표시
◇의지할 곳은 언제나
잎사귀 하나
벌레의 노숙
◇손에 잡으면 사라질
눈물 뜨거운
가을의 서리
◇ 나팔꽃은
솜씨 없이 그려도
애틋하다
◇바람의 색깔
어지럽게 심어진
뜨락의 가을
[어디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 니체
독실한 크리스찬이던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에서 사람은 3가지의 삶이 있다고 합니다
● 낙타의 삶
● 사자의 삶
● 아기의 삶
<인간은 지평을 넓히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 You Should~ (낙타)
★ I will~ (사자)
★ I am~ (아기)
● You Should~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고 합니다.
종교가 가르치는대로 따라가는 삶.
부모와 스승, 선배멘토가 가르쳐 주는 대로 사는 삶.
세상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삶.
어릴 때는 그렇더라도 성인이 되어서도 이러면 자기의 삶은 무엇일까요?
이런 삶을 낙타의 삶이라고 합니다.
● I will~~
(나는 이렇게 살거야~~ 반드시 이렇게 살거야~~)
세상 인구의 일부는 이렇게 산다고 합니다.
정상에 서 있는 훌륭한 리더들은 모두 이런 삶을 산다고 합니다.
자기주관적인 의지와 나름대로 모험에 도전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삶을 '사자의 삶'이라고 합니다.
● I AM.
(나는 나다.나는 존재한다.)
낙타와 사자의 삶을 깨우치고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할 때 자기를 찾는다고 합니다
자비는 도덕적 승인을 받아야 하는가 /법사가화
자비로운 사람을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이해되고, ‘선한 인간'은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이상을 실천하려는 존재로 간주된다.
이 전제는 자비를 윤리적 자격으로 변환시키며, 자비(사랑)를 실천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짓는 도덕적 위계 구조를 형성한다.
그래서 자비는 단지 감정이나 반응이 아니라 도덕적 승인을 획득한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특권으로 간주된다.
자비가 도덕적 승인을 전제하게 될 때, 그 자비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응답이 아니라 도덕적 자아를 연출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는 종종 기부나 자원봉사 같은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선한 인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나는 도와주는 사람이다”
“나는 착한 시민이다”라는
자기 규정을 획득함으로써
사회적 승인과 도덕적 정당성을 함께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불교에서 그러한 자비는 이미 자비가 아니다.
그것은 감응이 아니라 계산된 정체성, 즉 ‘선해지려는 자기’의 구축 프로젝트에 불과하다.
[AI는 자가용이 된 세상]
“‘클루엘리(Cluely)’가 출시됐습니다. 모든 것을 속입시다.”
‘부정행위(不正行爲)를 돕는 인공지능기술(AI)’ 을 핵심으로 내세우는 클루엘리의 최고경영자는 로이 리(한국명 이정인)다.
이 소식에 당신이 세상의 진보라기 보다 불쾌감을 느낀다면
이는 AI기술을 여전히 윤리적 금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구시대적 사고발상의 고정관념을 가진 꼰대일 것이다.
‘치팅(cheating)’이라는 단어의 도발적 사용은 역설적으로 AI 사용이 더 이상 부정행위로 간주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는 방식이다.
이제 AI는 자가용 자동차처럼 일상의 도구가 되었다는 의미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을 때 “왜 자가용을 타고 오느냐”고 묻지 않듯이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
AI를 사용했는가의 여부는 더 이상 본질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가이다.
AI는 더 이상 치팅의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자율성과 창의성을 열어주는 더욱 더 높은 수준의 기술적 기반이 되어가고 있다.
AI를 타고 가지 않는다면,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공부할 수 있는 세상에 당신은 혼자 여전히 별만 쳐다보며 걸어갈 것이다.
편집부에서 온 편지 /헤르만 헤세
‘귀하의 감동적인 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옥고는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면에는 약간 어울리지 않음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편집부에서 오는 이런 거절 편지가
거의 매일 날아온다. 문학잡지마다 등을 돌린다.
가을 내음이 풍겨 오지만, 이 보잘것없는 아들은
어디에도 고향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목적 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를 써서
머리맡 탁자에 놓인 램프에게 읽어 준다.
아마 램프도 내 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빛을 보내 준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괴테는 60살이 넘어서 하는 사랑이 진정한 진짜 사랑이라고 말했다.
모든 감각을 경험한 노년에 이르러서 빠지게 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하피즈는 쓴다.
오늘밤의 주제는 사랑
내일밤의 주제도 사랑
우리가 나눌 대화의 더 좋은 주제를
나는 알지 못하네.
우리 모두 이곳을 떠날 때까지.
한 여자의 육체 / 파블로 네루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버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버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주신(酒神)의 노래/푸시킨
어찌 기쁨의 목소리는 잠잠해졌는가?
울려퍼져라, 주신의 노래여!
가난한 처녀들이여,
그리고 우리를 사랑했던 젊은 아내들이여 만세!!
잔을 더 가득 채워라!
경쾌한 소리 울리는 술잔 바닥으로
독한 술 속으로
거룩한 반지를 던져버려라!
잔을 들자꾸나, 잔을 모두 함께 부딪쳐보자꾸나!
뮤즈여 만세, 이성(理性)이여 만세!!
그대, 신성한 태양이여 불타오르라!
환하게 떠오르는 새벽 노을에
이 촛불이 희게 희미해지는 것처럼,
거짓된 현명함이 지혜의 영원한 태양 앞에
가물거리며 어렴풋이 빛을 내는 것처럼.
태양이여 만세, 어둠이여, 숨어버릴지어다!
시는 시대로 산다
<나무의 나이> 정낙추
나무가 늙어 스스로 생을 거두는 걸 딱 한 번 봤다
아무도 그 나무가 몇 살에 목숨을 거두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운동장에 버티고 섰던 아름드리 양버즘나무는
한 번의 벼락에 팔이 잘려나갔고
또 한 번의 벼락에 가슴을 반쯤 도려냈다
그래도 나무는 죽지 않고 무성히 잎을 피워
매미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마을의 노인이 죽을 때마다 바뀌는
나무의 나이를
초등학교 때는 나무의 둘레로
조금 자라서는 나무의 그늘로
사랑에 눈뜰 때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어림했다
나무는 거대한 일기책이었다
나이테마다 마을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한
그 나무 아래에 모이면
옛 이야기가 살아나서 같이 웃기도 하고 언쟁도 했다
아무도 진짜 나이를 모르는 그 나무가
생을 거두는 순간은 장엄하지도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가을이 오기 전에 잎이 지기 시작하더니
봄이 와도 잎이 피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톱에 잘려 어디론가 실려 나갔다
마을의 일기책이 사라졌어도
마을 사람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베다와 우파니샤트는 고대인도의 종교서이다.
베다는 신화적인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 고대 인도의 문헌으로 초창기는 확실히 다신교였다.
태풍,폭풍이 불 때는 태풍의 신이 있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의 신이 있는 등 자연계의 여러 현상들을 신격화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들이 무한한 숫자로 생겨나게 되고 인간들은 신에게 예배드리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다 나중으로 가면서 신들에 대한 깊은 회의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에'무유찬가'라는 노래 즉 무(無)와 유(有)에 대한 찬가가 나타난다.
"태초에는 무도 없고 유도 없었다. 무엇이 이 허공을 뒤덮었을까. 저 밑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는 물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는 알리라
이 모든 것을 창조한 그 유일자는 알리라.
그러나 어쩌면
그도 또한 모르리라."
다신교에서 신들의 성격이 바뀌는 교체신교를 거쳐서 유일신교로 이르는데, 나중에는 이 유일신까지 의심한다.
과연 유일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 창조자의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 라고 의심한다.
놓아라
또 내려놓아라
지금 여기 있는
나 그대로가
깨달음 자체인데
어느 곳에서
다시 깨달음을
구하는가?
집착하는 생각을
바로 내려놓아라
얻으려는 욕망을
그냥 내려놓아라
내가 인간이라는
몸이 나의 것이라는
착각을 놓아라
배워서 알고 있는
개념과 관념을
내려 놓아라
시간이 없고
공간도 없으니
깨닫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고
깨닫는데
공간적인
거리가 없으니
이동할 수단과
다양한 방편이
필요하지 않다
변하지 않고
움직임이 없는
내가 바로 그것
나 그대로 나
지금 이대로가 진리인 걸.
'나'
나는 나를
본 적이 없다
거울 속 얼굴이
내 전부는 아닐거고
어느 결의 숨결로
나는 나를 말하다가
숨어진다
생각은 늘 흐르고
감정은 파도로 일렁이며
기억은 뿌연 수면 경계를
맴도는 언저리 부근에
무너지지 않는 바람으로
나는 걸어간다
나를 찾기 위해
나는 나를
지우고 지운다
찰나에 깃든 순간
나는 나였고,
아니었고,
그 사이였다
물처럼,
모양 없이 담기고,
비추고,
스며들다가
다시 흘러간다
나는 늘
나를 찾으러 다닌다
인연 통장
이수만
사람들은 누구나
소중한 인연 통장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한때는 유명 인사들이
내 인연 통장에 계좌를 트려
전화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기대에
못 미쳐서인지 슬며시
계좌를 해지하고 떠나갔다.
또 어떤 이들은 계좌만 남긴 채
거래 없이 휴면 상태로 남아 있다.
인출해 간 이들 중에는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고,
내가 싫어 떠나간 사람도 있다.
내 소중한 인연 통장에
수익과 무관하게 묻어둔
예금 잔고는 지금 얼마나 될까?
[저녁강에서] / 복효근
사는 일 부질없어
살고 싶지 않을 때 하릴없이
저무는 강가에 와 웅크리고 앉으면
내 떠나온 곳도
내 가야 할 그 곳도 아슴히 보일 것만 같으다
강은 어머니 탯줄인 듯
어느 시원(始原)에서 흘러와 그 실핏줄마다에
하 많은 꽃
하 많은 불빛들
안간힘으로 매달려 핀다
이 강에 애면글면 매달린 저 유정무정들이
탯줄에 달린 태아들만 같아서
강심(江心)에서 울리는 소리
어머니 태반에서 듣던 그 모음만 같아서
지금은 살아있음 하나로 눈물겹다
저문 강둑에 질경이는 더욱 질겨
보일둥말둥 그 끝에 좁쌀 같은 꽃도 부질없이 핀다
그렇듯
세상엔 부질없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
오늘 밤 질경이 꽃 한 톨로
또한 부질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직 하류는 멀다
언젠가 이 탯줄의 하류로 하류로 가서
더 큰 자궁에 들어 다시 태어날 때까지는
내일도 나는 한 가닥 질경이로
살아야겠는 것이다
저 하류 어디쯤에 매달려
새로이 돋는 것이 어디 개밥바라기별뿐이겠느냐
나는 다시 살고만 싶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김용택 시인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믿음직한 독서/이경임 시인(1997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때로는 이름만 보고서도 값을 치르는
믿음직한 시인이 있다 그런 시집이 있다
고요한 음역을 가져 더 아름다운 까닭이다
늦은 밤 잠 못 들고 일어나 앉은 시각
연애편지 뒤적이듯 책장을 펼쳐 든다
예전에, 누구를 그토록 사랑한 적 있던가
그 사랑에 상처 입어 흐려지는 행간으로
환하게 건너오던 따뜻한 문장들
한없이 어둡고 깊은 밤을 견디는 기도였다
『농담』/ 이문재 시인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세상에 날 사랑할 이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날 사랑한 이는 세상에 이미 없거든요
세상이 날 사랑해서 내가 세상에 온게 아니고
내가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온게 아닐까요
세상에 날 사랑할 이가 없으니까 세상이 보이지 않거던요
그러니 세상에서 사랑 받을려고만 하지 마세요
그런데 아시나요?
사랑이 없으면 세상에 올 수 없다는 걸...
어디 우산 놓고 오듯 / 정현종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정현종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문학과지성사,2018
정현종(鄭玄宗, 1939년 12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서울 출생으로 대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82년부터 2005년까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일했다
너의 이름을 부르면/신달자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에
울음을 참아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부르면
이름을 부를수록
너는 멀리 있고
내 울음은 깊어만 간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여보 비가와요/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내 영혼아, 바람을 닮은 너여 /조광현
내 영혼아
너는 왜 자꾸 저녁 하늘 끝에 기대어
노을빛으로 스러지는가
너의 눈은
한 번도 빛난 적 없는 별을 담고
너의 손은
닿지 않는 것들만을 향해 뻗는다
나는 너를 품었지만
너는 늘 나보다 먼저 울었다
가장 깊은 고요 속에서
먼저 젖는 것은 너였다
내 영혼아
넌 어쩌면
눈물보다 더 투명한 생을 살고 있는지도 몰라
말 대신 흐르는 것,
빛 대신 남는 그림자
밤의 가장자리에 앉아
너는 나를 부른다
다 타버린 이름으로,
다 타지 못한 기도로
내 영혼아
바람을 닮은 너여
세상 끝에도 너는
끝내 지우지 못할 한 점 떨림으로 남아라
당신이 저의 도반입니다
[도반] / 김덕권시인
도반은 함께 수행하는 벗으로서, 도(道)로서 사귄 친구란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연도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하게 만들어 가는 도반이고 동행입니다.
인생은 머 언 길
혼자 가지 마옵소서.
임 아니시면
내 영혼 또다시 유랑하여
정처 없이 떠도는
설운 나그네.
산 넘으면 물
강 건너면 또 산
산 막으면 두 손 끌고
물 만나면 업어 건너
임과 함께 가는 길
피안(彼岸)의 길
인생은
머나 먼 길
홀로 가지 마옵소서.
임과 함께 가는 길
이생을 마다하고
또 어느 생을 기다려
성불하리요
송인(送人) / 정지상
正殿一葉落 (정전일엽락)
上下百蟲悲 (상하백충비)
翛翛不可止(홀홀불가지)
悠悠何所之(유유하소지)
片心山盡處 (편심산진처)
孤夢月明時(고몽월명시)
南浦春波綠(남포춘파록)
君休復後期(군휴부후기)
뜰 앞의 나뭇잎 하나 떨어지더니
평상 밑에서 온갖 벌레 슬피 우네
홀연히 떠남을 말릴 수 없는데
유유히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나의 마음은 산모퉁이에 가 있고
달 밝은 밤에는 외로운 꿈을 꾸네
남포에 봄 물결이 푸르러지면
그대는 뒷날의 기약을 저버리지 마오
송인(送人) / 정지상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더욱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남포로 임 보내는 구슬픈 노래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보태는 것을 『東文選』 卷之十九
빛이 되어 머물던 너 /조광현
해 질 무렵,
가장 오래 머문 그림자가
꽃잎보다 먼저 젖는다
숨은 소리로 번진다
이름 없던 떨림이
풀잎 끝에 내려앉을 때
돌이 잠드는 시간에
흙 아래선 한 점 빛이 자란다
입술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너
멀리 떠난 것이 아니라
단지 깊어진 것이다
물속에 가라앉은 별처럼
이 세상에 없는 말로
누군가를 오래 기억한다는 건
눈을 감고 빛을 만지는 일
눈물은 없다
그러나 젖은 기도는 있다
지워지지 않는 나의 가슴에
인생 / 나태주
소낙비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날씨 탓만 하며 날씨한테 속았노라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좋았노라 그마저도 아름다운 하루였노라
말하고 싶어요
행복 / 나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죽기 직전의 7분]/뇌과학
죽기 직전에 뇌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파노라마 장면이 있다고 한다.
먼저 뇌는 행복했던 기억부터 꺼낸다. 심장이 멈춘 뒤에도 약 7분간, 생전 가장 따뜻했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과학에서는 이것을 '마지막 보상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영화 장면처럼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임종 직전 뇌파 실험에서 꿈을 꿀 때보다 훨씬 더 큰 뇌파가 강력하게 폭발했다. 뇌는 죽음의 순간 그 끝까지 삶의 의미를 되새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면서 '가장 사랑한 순간'이 떠오른다고 한다.
가장 사랑 받았던 순간, 가장 웃었던 순간, 행복이라 느꼈던 장면들이 마지막 필름이 된다.
그래서 더 많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 받으며, 더 많이 행복해 하며 살다 가라는 것이다.
이게 인생의 의미라는 거다.
시인이네 / 권지영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전화가 와서 밖으로 나갔다. 받았더니 나태주 시인이셨다.
"근데 왜 울었어?"
"모르겠어요. 그냥 눈물이 나더라구요. 죄송해요."
나직이 읊조리듯 하시는 말씀 ㅡ
"시인이네."
아이쿠,
이런저런 얘기로 통화가 끝나고서 풀잎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울적하던 마음을 달래주는 아이인가 보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건 없다. 작은 순간도 빛나고 있다. 사랑이어도, 아니어도 빛난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너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낮과 밤을 여행해
눈보라와 사막의 열기를 뚫고
급류를 건너고
좁은 길들을 지나.
하지만 그는 알까,
어디서 너를 찾을지.
그가 너를 알아볼까,
너를 보았을 때.
너에게 건네줄까,
너를 위해 그가 갖고 있는 것을.
– 존 애쉬베리, 「북쪽 농장에서」 일부
[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법사가화
불교는 일찍부터 ‘나’라고 내세울 만한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무아(無我, Anatta) 사상이다.
붓다는 ‘나’라고 부르는 것을
다섯 가지 요소의 일시적인 집합체
형체를 지닌 몸(色)색
외부 자극에 대한 느낌(受)수
개념과 생각(想)상
의지적 작용(行)행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분별하는
마음(識)식이라고 설명했다.
이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 五蘊)는 마치
레고 블록처럼 인연(因緣)에 따라
잠시 모여 ‘나’라는 형태를 이루었다가
조건이 다하면 흩어질 뿐이다.
그 어디를 들여다봐도 ‘주인’이라 할 만한
영원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강’과 같은 동사다.
[오늘이 가면]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平生我所悲 평생아소비
今日逝成昨 금일서성작
昨積便成昔 작적편성석
應戀今日樂 응연금일락
欲爲後日忘 욕위후일망
今日極歡謔 금일극환학
내 평생에 슬픈 일은
오늘이 흘러 어제가 되는것
어제가 모이면 곧 옛날이 되어
즐거웠던 오늘을 그리워 하리
훗날 오늘을 잊지 않으려거든
오늘을 한껏 즐겨야 하리
[양주역]
눈 내리는 양주역에
바람이 일어
님이 내리시려나
정처없이
기다리는 사랑
오늘도 가슴속에
그리움만 남기네
아아아
기약없는 세월아
흘러가는 흰구름아
내 님곁에 나를 데려다 주오
바람부는 양주역에
인적은 없고
해만 저물어가네
언제 올지
기약없는 사랑
눈물이 가슴속에
추억처럼 쌓이네
아아아
기약없는 세월아
흘러가는 흰구름아
내 님곁에 나를 데려다 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