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 큰스님 / 고승법어
항구 도시인 부산에는 수영만을 굽어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산이 하나 있다.
그 산이 바로 장산(長山)인데,
관음정사는 그 청솔 우거진 산자락과 번다한 저자거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중생들을 위해 관음의 원력을 펴고 있다.
처처가 청산이라는 말이 있다.
관음정사(부산 해운대구 반여 3동)에 들어서 보니
실제로 더 깊은 청산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거리의 소란스러움이 갑자기 뚝 끊어지는가 싶더니
풍경소리만 뎅그렁 뎅그렁 들려오고,
노승이 햇볕을 쬐며 무슨 소리를 느릿느릿 웅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귀를 세워 들어보니 선시 한 구절이다.
‘마르지 않는 산 밑의 우물 산중 친구들께 공양하오니
표주박 하나씩 가지고 와서 저마다 둥근 달 건져가오.’
이 97세의 노사가 바로 둥근 달이 담겨 있는
산 밑의 옹달샘 같은 박문성(朴汶星) 큰스님.
통념으로 알고 있던 큰스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더욱이 문성 큰스님은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에 참여하셨고
조계종 감찰원장을 네 번이나 역임한 이력을 가지신 분이었으므로
강직한 인상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졸고 있는 모습을 뵈니 노고추(老古錐)라는
낱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음이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봉(機棒)이 이제는 완덕이 되어버린 경지이리라.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인자한 할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을 묻듯 이런 저런 일들을 물어보았다.
一큰스님, 관음정사가 참 좋습니다.
바로 저기가 저자거리인데 꼭 심산유곡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거든요.
큰스님도 좋으시지요?
“허허. 즐거운지 어쩐지 잘 모르겠어.
나이를 먹으니 귀가 어둡고 잘 안보여. 관음정사 밥맛이 좋아.”
一몇십년 하루 한 끼만 드시고 오후불식 수행을 계속하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탐식에 빠져 있는 저희들에게
충격을 주는 구도자의 모습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건 와전이야. 누가 날 깎아내리려고 했는지 추켜올리려고 했는지
거짓말을 한 것이오. 삼식을 다 먹고 있소.”
보살이 옆에서 귀가 어두운 큰스님을 대변해 준다.
큰스님은 아침에는 죽, 점심에는 밥,
저녁에는 간장에 두부 두세 조각을 드신다고 한다.
一큰스님, 거동이 불편하신 요즘도 하루 일과는
털끝만큼도 어김없다고 들었습니다.
“100살을 밑자리 깔고 앉았지만 여력이 있는 한
예불도 하고 주력도 하고 그래야지요.
그냥 있으면 싱겁기만 하거든.
게다가 불교란 불사의 도리가 아니오?
밤을 새워 공부를 해도 시간이 모자라거든.”
상좌 법성스님이 얘기해 주는 큰스님의 일과는
모래와 돌이 드러난 맑은 시냇물처럼 투명하기만 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 3시가 되면 틀림없이 일어나신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는 손수 이부자리를 개고 청소를 한 다음 주력을 하신다.
예불은 무릎에 힘이 없으므로 법당에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반드시 법당마당 한가운데 홀로 서서 참예하며,
예불이 끝나면 40여 분쯤 보현행원품을 독송하신다.
낮 시간에는 절대로 방바닥에 등을 대는 일이 없으며,
녹차를 드시기도 하고 은사스님이 물려준 좌복에 앉아
틈나는 대로 새벽에 독송한 보현행원품을 앞에 두고
정진을 하신다는데, 울력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신다고 한다.
사실 이제 큰스님을 연상할 때는 호미와 빗자루가
먼저 떠오른다고 대중들이 입을 모은다.
울력의 시간 말고도 큰스님의 손에는 늘 호미와 빗자루가
들려져 있기 때문이다.
一큰스님, 요즘도 들고 있는 화두가 있습니까?
“화두? 허허허”
평상심이 도라던 남전스님처럼, 날마다 좋은 날이다 던 운문스님처럼
참으로편안하게 파안대소하신다.
“화두를 드니 골이 아퍼 날마다 빗자루를 들고 있소!”
그러고 보니 큰스님은 당신이 들고 있는 빗자루로
법당 마당에 쌓여 있는 낙엽을 쓸어왔던 게 아니라
깨달음을 얻고자 받아들였던
방편의 부스러기들을 비워내고 있음이 틀림없다.
아까부터 가끔 기침을 하듯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내 머리는 텅 비어버렸지 하는 의미가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이다.
고불이란 이러한 스님의 모습과 다름 아니리라.
말하자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천진불로 입산한 후
다시 처음의 불성으로 되돌아와 있음이다.
“산에 들어올 때는 아버지 따라 들어왔어. 열세살 때였지요.
어린 자식을 두고 가려니 마음이 아팠겠지.
아버지가 울길 래 나도 울었지.
하지만 속세의 형편이란 것이 나를 데리고 있을 수 없었거든.
내 입산은 그랬어요.”
그러나 그때의 아버지가
지금은 극락정토에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또 나무아미타불 하시면서 허허허 웃으신다.
큰스님은 경주 노서동에서 1897년 부친 박형일,
모친 김해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1910년 당시 통도사 대강백이었던
채서응스님을 은사로 옥천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하고,
이후 통도사 보통학교, 해인사지방학림,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조계종 감찰원장, 옥천사 마하사 등에서 주지를 역임했으며,
특히 옥천사 선방 백련암에서 성철, 서옹, 청담스님과 6년간
마루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질 만큼 혈혈적지 정진을 하셨다고 한다.
一큰스님 독립운동을 하신 얘기 좀 들려주시죠.
“통도사에서 만해스님 차시봉을 한 일년 한 적 있소.
만해스님은 작설차를 아주 좋아했어요.
찾아오는 사람은 형사 나부랑이나 속인 애국자들이었는데
차는 내가 다 끓였어.‘니 손을 거친 작설차 맛이 좋다’고
나한테만 시켰으니까.”
一차 심부름도 도 닦는 것 아닙니까?
“그런 생각은 없었지. 나이가 어렸으니까.
아무튼 만해스님의 영향이 컸을테지요.
내가 해인사에서 만세운동을 한 것은 그 당시 해인사에는
대중스님들이 80여 분, 학인들이 많이 잡아서 20여 명이 있었어.
그때 만해스님이
육혈포삼발이 승어독천권(六穴包三發 勝於讀千卷)이라는
내용으로 강연을 하여 학인들의 의기를 북돋았지요.
하도 오래된 기억이라 생각이 잘 나지 않지만
해인사에서 만세를 부르고 학인스님들이 경찰과 대치를 하다가
경찰 두 명을 때려 눕히고 수도암으로 피신한 적이 있어.
어찌나 급하게 피했던지 법당에 부처님이 안 보였어요.
거기서 더 머무를 수가 없어 나중에는 은사스님이 계시는
진주 호국사로 가서 살았지.”
一일제시대 33본산 주지회의 대표인 강대련스님을
명고출송(鳴鼓出送)시킨 일화도 들려주시지요.
“허허허. 당시 주지들은 대개 친일승 들이었어.
그중에서도 33본산 주지들이 일제에 협력을 많이 했지.
본사 주지가 그러니 말사 주지도 따라서 친일파가 됐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같이 공부하던 도반 칠, 팔 명과
의기 투합해 33본산 주지회의장을 쳐 들어갔지요.
그런 다음 수원 용주사 주지였던 강대련을
광화문 네거리로 끌어내 명고출송시켰어.
일본 경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지.
그 길로 잡혀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4개월을 살았지요.”
큰스님의 파사현장의 정신은 해방 후에도 서슬 퍼런
불교 정화운동으로 이어진다.
옥천사에서 선방을 열고 눈 푸른 수좌들과
용맹정진을 하던 중의 일로 못내 아쉬운 일이었지만
청담스님이 문성스님의 의기를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청담스님이 참 날 좋아했지. 하루는 옥천사로 나를 찾아와서는
서울에서 같이 살자고 그러길래 처음에는 거절했어.
포교도 못하고 법문도 못하는데 올라가서 뭐하느냐고 거절했지요.
그랬더니 청담스님이 ‘지금 마구니들이 불법을 더럽히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스님께서 올라와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되니
서울에 올라와 정화운동에 동참하시지요.’하면서
하도 그러 길래 정화운동에 참여하게 됐어.”
一큰스님, 그때에 비해서 요즘 불교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날 미워할지 모르지만 옳은 중 한 번에 만나려고 하지 마시오.
요즘도 서울에서는 중들이 싸워쌓는 모양인데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소.
진승(眞僧)은 하야하고, 외도가 입산한다는 말이지.
참 중은 마실로 내려가고 외도의 무리는 절을 망치려고 입산을 하고 있어.
허나 이 옛말이 일불제자인 우리 모두가 부처님 법이 좋아서
따르고 믿는다면 거꾸로 바뀌어져야 하지 않겠소?”
아침 해가 장산 너머로 중천에 오르자
관음정사를 찾는 이의 발길도 잦아진다.
젊은 학인 한 사람이 큰스님에게 다가와 삼배를 올리고 있다.
그러자 큰스님의 꾸지람이 터진다.
“눈을 부릅뜨고 수행해도 바쁜데 왜 헛 돌아다니는가?
염라대왕이 신발값 청구한다는 얘기 못 들었는가?
중생 한 사람 제도하고 가기도 바쁜데 말이여.”
이번에는 한 보살이 다가와 공손히 합장하자 일갈을 하신다.
“부처님은 시주 돈 달라고 한 적 없다.
불전으로 어서 가 니 마음을 찾거라.
그래야 부처님 법 좋은 줄 알게 돼.”
어느새 큰스님의 손에는 당신의 화두 같은 빗자루가 들려져 있다.
믿음을 도의 근본으로 본, 새벽마다 보현행원품을 독송하는
보현행자의 구도자세와 다름 아니다.
바람이 불었는지 법당 마당에 중생의 번뇌 망상 같은
낙엽이 한웅큼 떨어져 있다.
이리저리 뒹구는 저 낙엽은 큰스님에게 있어 무엇일까.
혼잣말로 툭 던져놓은 큰스님의 한마디를
그저 숙연하게 헤아려볼 뿐이다.
“법당 마당 꼬라지를 보니 눈물이 나!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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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 스님 행장
1897년 경주 노서동에서 태어난 문성스님은 13세에 입산.
1910년 당시 통도사 대강백이었던 채서응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
이후 통도사 보통학교와 해인사 지방학림, 휘문고보,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통도사 만세운동과 친일주지를 몰아내는데 앞장섰으며,
이 일로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불교정화에도 참여해 조계종 감찰원장을 네 차례에 걸쳐 역임하기도 했다.
출처 : 정찬주가 만난 97세 문성 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