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출처 : 다큐멘터리 www.ental.co.kt - KBS HD )
*네덜란드 헤이그 1907년 7월 14일 PM 7
1907년 7월 14일 오후 7시 네덜란드 헤이그에선 한 한국인의 죽음이 있었다.
고종황제의 마지막특사였던 이준, 그는 헤이그에 온지 20일만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헤이그에서 치열하게 외교활동을 벌였던 이준특사 그에겐 과연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준열사의 묘 (서울 수유동 산 127번지)
(나래이터 A (한상권), B (이상호) )
A : 이준열사가 서거한 것은 1907년 7월 14일 그러니까 오늘이 이준 열사가 서거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 입니다.
그러나 이준열사는 어떻게 헤이그에 특사로 가게 되었는지 또 세계열강들이 모여드는 만국평화회의에서 그의 역할은 어떤 것이였는지 그 업적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B : 오늘 한국사전에선 이준열사 그의 헤이그에서의 행적을 따라가 볼까 합니다.
대한제국의 외교특사로 이준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머물렀던 기간은 단 20일 100년전 헤이그에서는 어떤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네덜란드 헤이그 1097년 6월 25일)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이준특사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25일 당시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간 시기다.
이들의 고종의 은밀한 지령을 받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를 찾았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명의 특사들은 우선 회의장으로 향했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린곳은 헤이그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빈렌부르크왕궁의 리더잘.


만국평화회의는 식민지쟁탈전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난 군비를 축소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된 국제회의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는 모두 45개국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곳에서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이 주권국가임을 알리는 것이 특사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드용호텔
첫 날 회의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한 특사일행은 근처 자그마한 호텔을 숙소로 정하고 행장을 풀었다.
(1907년 6월 26일)
다음날 이준은 태극기를 호텔에 내거는 것으로 특사로서의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헤이그에 한국대표가 왔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만국평화회의에 정식으로 참가하기 위해 회의장을 찾았다.
만국평화회의는 특사들이 도착하기 열흘전에 이미 시작돼 회의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이준특사 일행에게 회의장문은 열리지 않았다.
정식초청을 받지 않았다는게 이유였다.
대한제국의 대표자격으로 당당히 헤이그를 찾은 이준특사일행 하지만 이들은 왜 참가를 거절당한 것일까?

*쿤 취스테르 교수 /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 회의에 참가한 모든 열강들은 을사보호조약을 정당한 조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죠.
즉,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에 외교권을 대신 행사할 수 있다고 본거죠.
결국 공식적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이 참가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회의 참가국 모두 인정하고 있었죠.
세계평화를 구호로 내건 국제회의였지만 약소국에는 그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특사 일행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회의참가를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한다.
(1907년 6월 27일)
우선 회의장 밖에서 각국대표들을 만나 청원서를 전달했다.
한국이 처한 상황과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요청하는 일종의 호소문이었다.
-청원서내용중-

대한제국은 일본에 외교권 침탈로 인해 세계각국과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으므로 우린 각국대표들에게 헤이그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합니다.
또한 일본의 무자비한 침탈로 부터 우리의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중재를 해주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한국특사들의 모습을 스즈키 일본대표가 목격하게 된다.
그는 곧장 본국으로 이 소식을 전한다.
-스즈키의 전보내용-
한국인들은 모든나라 수석대표에게 우리의 통치에 대한 항의서를 보내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보고하겠습니다.
조선통감부에도 이 소식이 전달됐다.
당황한 이토 히로부미, 대한제국의 실권을 쥔 자신도 모르게 헤이그로 특사가 보내졌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이토는 곧장 고종황제를 찾아가 이를 심하게 따져 물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위험을 무릎쓰고 일본몰래 헤이그로 특사를 보낸 것일까?

*서영희 교수 / 한국산업대 교양학과
고종은 1900년 이후에 러.일 간의 각축속에서 군비증강을 통해서 자위력을 기르려는 노력을 하는 한편 그...열강을 중재를 통해서 한국에 중립국화를 보장받거나 독립에 대한 지지를 받는 이런 하나의 방편으로 일본.미국.러시아 등지에 1901년 이후로 계속적으로 특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국립문서 보관소>
이렇듯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해 왔다.
이에 대한 증거를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만국평화회의와 관련된 모든 문서가 함께 보관되어 있는 외교문서집.
여기에 고종의 특사외교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장의 외교문서가 있다.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요청한 외교문서 1902년 2월






당시 고종은 파리주재 한국공사를 통해 이 문서를 네덜란드에 전달했다.

*헤이드브링크 /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이 편지는 당시 파리주재 한국공사를 통해서 1903년에 접수된 것인데요, 내용은 한국정부가 1899년 1차 만국평화회의 이후에 열릴 2차 회의와 1864년 조직된 국제적십자위원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한국이 당시 국제사회에 당당한 일원으로 참여함으로써 독립국가로 인정받고 싶어한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이 당당한 주권국가로 참석할 수 있을거란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
더구나 만국평화회의를 제창한 사람이 당시 한국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2세였기 때문이다.
첫댓글 넘 조은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계쏙 올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