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셨습니다.
읽는데도 한참 걸렸는데
칠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 1) 한국 여성의 어제와 오늘
:
:
: 1. 서론
:
: 현 시점에서 여성의 위치적 존재를 볼때, 사회적, 가정적, 정치적 측면 등
: 각 분야에서 매우 열악한 위치적 환경에 처해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불만
: 과 동시에 의문점을 느낄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여성적 위치가 현 시점에서
: 도래된 것인가, 아니면 과거 전통적 여성상이 이어지면서 계속 밑바탕에 깔
: 려져 있기 때문인가, 앞으로 본론에서는 바로 현 시점의 여성적 입장에서의
: 문제점과 불만이 도래된 것을 전통적 여성상과 현대적 여성상의 비교를 통해
: 살펴 볼 것이며, 또한 이런 문제점과 불만을 개선할 수 있는 발전 과제를 제
: 시하고 더 나아가 미래의 여성상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특히, 여성은 한
: 분야에 존속된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다분야적인
: 위치에서의 여성의 과거와 오늘을 보임과 동시에 여성상을 이끌어내고자
: 한다.
:
:
: 2. 본론
:
: 한국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한국 역사의 시기마다 그 정치, 경제, 교육, 그
: 리고 사회 구조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사회
: 적 지위와 변천 과정의 이해는 한국의 가부장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 가부장제는 지배체계로 볼때 남자가 가족네에서의 최고 결정권을 지니는
: 체계로 남성우위의 위계질서로서 표현 할 수 있다.
: ===========> 가부장제 =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
: * 삼국 시대에 형성되어 고려말에 주자학의 도입으로 강화되었고, 조선시대
:
: 에 유교 이념의 확립으로 사회제도로 확립되었다.
: * 조선시대 가부장적 유교 특유의 문화에 의해 크게 여성의 지위 격하되었
: 으나 해방후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산업화, 도시화는 한국 가족 구조와
: 가치관을 변화 시킴으로서 한국 여성의 위치는 과거와 비교해 많은 변화
: 를 가져 왔다.
:
: 1) 가정을 중심으로한 사회 각 분야의 여성
: (1) 가정
:
: ㄱ. 삼국시대 : 부친이 지배적인 동시에 일부일처제에 약간의 일부다처
: 제가 가미된 채로 남자에게 어느 정도의 사회적 우선권이
:
: 인정
: ㄴ. 고려시대 : 어느 정도 가부장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일반 서민
: 은 물론 6품 이상의 고관의 처첩에게도 재가가 허용
: ㄷ. 조선시대 : 남존여비사상이 강조된 시기. 여성교육은 단지 부덕을
: 쌓는 것만이 전부였으며, 나면서 천대를 받았고, 하나
: 의 재산으로 취급
: ㄹ. 현 대 : 교육 수준의 향상이 여성들의 발언권을 강화하고, 집안
: 일의 공동 결정에 참여하는 기회가 늘었다.
:
: (2) 정치
: ㄱ. 고려시대(고구려) : 직접적인 정치는 남자가 유지하였으나, 여자의
: 권한도 강했다.
: ㄴ. 고려시대 : 한족식의 문벌의식이나 봉건적 계급의식이 적었으며 여
: 성의 가문의 대를 잇는 모계계승 의식이 있었다.
: ㄷ. 조선시대 : 여말 유학이 주자학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 조선 왕조를 세웠고, 유학이 조선 왕조의 기본이념으로
: 정착되었다. 하지만 여성의 참여는 거의 불가능한 실태
: 였다.
:
: ㄹ. 현대 : a 유권자로서 정치 참여 - 여성이 남성보다 저조하나 점점
: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 b 정당활동 - 지속적인 정당 참여율을 보이지만 고위당직자
: 층이 미약하다.
: c 압력단체 - 여성 단체들의 활동과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다
:
: d 정치지도자로서의 참여
:
: (3) 문화 (특히 문학작품을 주축으로)
: ㄱ. 고대서사 무가 : '바리공주 본풀이', '심청전'에 나타난 희생적 여
: 성상
: ㄴ. 신라향가 : a '도천수관음가'에 나타난 가인으로서의 여성상
: b '헌화가', '처용가'에 나타난 가인으로서의 여성상
: ㄷ. 고려가요 : '만전춘별가', '쌍화점'에 나타난 사랑의 여성상
: ㄹ. 조선시대 : a 시조에 나타난 규원의 여성상
: b 내방가사에 나타난 여탄의 여성상
: c 고대 소설에 나타난 정절의 여성상
: ㅁ. 근대 이래 소설문학 : 보수적, 부차적 존재로서의 여성상
:
: (4) 경제
: ㄱ. 전통사회 : 여성의 노동력은 가정내에서 남편을 도와 생산에 참여
: 하는 가족을 위한 가사에 국한됐고, 사회적 차원에서의
: 경제활동, 특히 직장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 ㄴ. 개화기 이후 : 교육기회 획득과 동시에 산업구조의 변화로 직업을
: 갖는 기회가 많아졌는데,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 직업 진출
: ㄷ. 1920년대 : 여성근로자의 노동문제가 사회화됨에 따라 여성단체
: 출현
: ㄹ. 1963-1974년 : 전체적으로 경제활동 참가율이 증가했는데, 농가는
: 증가추세를 보이나 비농가는 생산적인 경제활동에
: 참여하지 않았다.
: ㅁ. 1974년말 이후 : 농가에서는 가족 종사자의 비율이 높고, 비농가에
: 서는 경제활동 참가율이 계속 증가 추세이다.
:
: 2) 여성상의 확립
: 위의 시대적 각분야의 사회구조의 변화속에서 아래와 같은 각 시점에서
:
: 여성들의 특징을 볼 수 있다.
:
: * 전통적 여성 - 열녀, 효부, 조강지처, 현모양처를 지향하는 여성으로
:
: 자기희생적이고 수동적이다.
: * 현대적 여성 - 슈퍼우먼, 케리어 우먼등을 지향하는 여성으로 능동적
: 이고 자기 존중적이다.
:
:
: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여성상으로까지 확대해서 살펴보면,
: ┌────┬─────────────┬──────────────┐
: │ │ 전 통 사 회 │ 현 대 사 회 │
: ├────┼─────────────┼──────────────┤
: │ 배 경 │가부장제하의 조선 │산업 사회 │
: ├────┼─────────────┼──────────────┤
: │ │가부장제하에서 수동적이며 │여성 스스로가 직접적인관계 │
: │여 성 상│순응적이며 자기희생적인 │를 맺음으로서 만족을 얻으려 │
: │ │양상을 띤 여성상 │는 의식을 갖으며 지향하는 │
: │ │ │여성상 │
: ├────┼─────────────┼──────────────┤
: │ │사회적 현상에 영향을 끼치 │사회의 여성의 재인식이필 │
: │ 단 점 │지 못했고 더욱더 가부장 확│요 또한 여성자신의 각성도 │
: │ │립의 강화에 동조했다 │필요. 사회의 여성에 대한 │
: │ │ │재반 바탕 열악 │
: ├────┼─────────────┼──────────────┤
: │ │가부장제라는 시대적 상황에│ │
: │ │도 불구한 여성의 적응도. │여성의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 │
: │ 장 점 │그 안에서 자기 역활에 충실│사회 발전에 기여도 증가 │
: │ │한 책임성과 희생적 측면에 │ │
: │ │서 적극적이며 진취적모습을│ │
: │ │볼 수 있다. │ │
: └────┴─────────────┴──────────────┘
:
: 3) 미래의 여성상과 발전과제
: 우선 미래의 여성상을 제시하기전에 현실적 여건의 열악산 측면을 살펴
: 보고, 다음으로 미래의 여성상을 제시하겠으며, 그 미래의 여성상에 도
: 달하기 위한 발전과제를 제시하겠다.
:
: (1) 현실적 여건
: ┌ 외부요인 ┬ 고용불평등 : 임금조건, 근로여건의 열악
: │ ├ 사회재반시설의 빈약 : 탁아 시설, 여성전용 시설
: │ └ 사회의 여성 인식 : 여성의 법적 불평등, 남성들의
: │ 인식
: └ 내부요인 ─ 여성 스스로의 여성인식 : "신데럴라 컴플랙스",
: "남성우월주의",
: "남아선호사상"
:
: (2) 미래의 여성상
: 남녀평등속의 여성을 주장하는데 공동 참여와 더불어 이에 따르는 책임
: 을 함께 나누는 사회로 발전시켜 그 속에서 활동, 존재하는 여성상
:
: (3) 발전과제
: * 목표 : 남녀공동참여. 공동책임의 사회실현
: ㄱ. 여성능력개발 : 여성의 직업적 능력이 제한없이 개발되어야 하고,
: 이에 상응하는 의식개발이 이루어져 공동참여의
: 자질과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 ㄴ. 인력활용 : 여성발전을 저해해온 제요인들을 극복내지 개선하며
: 양적, 질적 양차원에서 확대되어야 한다.
: ㄷ. 가정의 성장 : 공동 참여, 공동 사회의 실현을 가능케하는 출발점
: 의 기능을 지닌 가정의 민주화가 성취되어야 한다.
:
:
: 3. 결론
:
: 지금까지 살표본 내용으로 우리 여성이 현 시점에서 가질 수 있게된 위치
: 속에서 표출되어 많은 불만족이 바로 과거의 가부장적 사회속에서 현재까
: 지 사회내면에 깔려져 이어져온 안일주의와 숙명론적의식에 있다는 것을
: 알게 되었다.
: 여성, 분명 그들은 남성과는 다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적 위치는
: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성의 종속적 존재로 존재되었
: 었고, 현재 완화되었다 할지라고 과거의 전통 사회의 인습은 이어져 가고
: 있다.
: 현재의 사회 모든 구성원의 인식속에는 과연 옳은 가치관이 자리 잡혀 있
: 는 것인지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 앞에서 여성상을 전통적 여성상과 현대적 여성상으로 나누어 살펴본 데에
: 는 그 나름대로의 차이와 변화가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그 각
: 각의 모습에서 올바른 점을 이해, 인식하며 뚜렷한 가치관아래 유지, 발
: 전시켜나가야 겠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여성 자신 스스로가 각성,
: 진취적이며 능동적 자세로 여성자신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이라 하겠
: 다.
:
:
: 3)우리 역사 속의 여성들
: (1)낙랑공주
: 낙랑공주(樂浪公主){1}2 ?∼32(대무신왕 15). 낙랑왕 최리(崔理)의 딸.32년 옥저로 놀이를 왔
: 다가 최리를 따라 낙랑에 온 고구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혼인하였다.당시 낙랑에는 적병이
: 침입해오면 스스로 울려 이를 알리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 정복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왕자
: 의 부탁으로 몰래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여 고구려군대로 하여금 낙랑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 하였다.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최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 멸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동왕자의 부인으로 맞아들인 뒤, 본국으로 돌려보내 그 북과
: 뿔피리를 부수어버리게 했다고도 한다.이때의 낙랑을 한(漢)나라의 군현의 하나인 낙랑군으
: 로 보지 않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독립세력의 낙랑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 평강공주(平岡公主)2 생몰년 미상. 고구려 평원왕의 딸. 남편은 장군 온달(溫達)이다.《삼국
: 사기》 온달전에 의하면, 공주는 어릴 때에 잘 울어서,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바보 온달에
: 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다.그 뒤 커서 시집갈 나이가 되었을 때, 왕이 명문귀족 집안에 시집
: 보내려 하였지만 공주가 이를 거부하였다. 왕이 노하여 궁궐에서 쫓아내니, 공주는 온달을
: 찾아가 혼인하였다.그녀는 눈먼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바보스러운 남편 온달에게 무예와
: 학식을 가르쳤다. 공주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 온달은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되었다.얼마
: 뒤 온달은 매년 3월 낙랑(樂浪)벌에서 열리던 사냥대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여 왕에게 알
: 려지게 되었다. 이에 온달은 고구려의 장수로 발탁되었다.그 뒤 북주(北周)의 군대가 침공하
: 여왔을 때, 온달이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웠다. 평원왕을 이은 영
: 양왕 때에, 온달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수도로 돌
: 아오던 중 죽었는데, 그 시체를 넣은 관을 운반하려 하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공주가 달려
: 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말하니, 비로소 관이 !
: 움직여 이를 매장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온달전의 내용에서 전하는 평강공주의 행적은
: 당시 사회에서는 퍽이나 파격적인 것이다. 그녀는 집안의 문벌이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 순수한 애정에 의하여 결혼을 한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되기도 하였다.또, 불우한 처지의 남
: 편을 도와 입신출세하게 한 현명한 아내의 본보기로 내세워지기도 하였다.그런데 온달전의
: 내용을 보면 설화적인 면이 짙다.그러나 그것을 전혀 허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 속에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보려는 시각이 필요하며, 다음과 같이 풀이하여 볼 수
: 있겠다.먼저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아, 그리고 위의 내용으로 볼 때도, 온달은 미천한 출신의
: 바보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그는 당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고급 귀족집안 출신은 아
: 니었고, 아마도 하급 귀족 정도 신분의 인사로서 그 자신이 무사로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발
: 탁되었던 인물로 여겨진다.그러한 그를 왕이 사위로 맞이하려고 언약하였다.그런데 이는 당
: 시 신분제도와 관행에 비추어 어려움이 있고 또 반발도 있고 하여, 왕이 이를 취소하고자
: 하였는데 공주가 언약을 지킬 것을 고집하며 온달에게 시집을가게된다.
:
: (2)논개
: 논개(論介)2 ?∼1593(선조 26). 진주목(晉州牧)의 관기(官妓)로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중
: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 본관은 장수(長水)./<1.
: 의기 논개>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
: 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사실이
: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英맛?멸시를 받던 기
: 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
: 야담 於于野談》에 채록함으로써 문자화되었던 것이다.한편 진주 사람들이 그녀의 애국적
: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
: 도 이 무렵의 일이다./<2. 순국인정의 전말>그러나 그녀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 불구하고 임진왜란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
: 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순국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윤리에 젖어 있던 일부 편집자들
: 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
: 潔駭? 보수적인 집권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그녀의 애국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었
: 던 것이다.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혼(義魂)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
: 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
: 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그녀의 의로운 행위는 마땅히 정
: 부가 표창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이같은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
: (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녀의 의열에 대
: 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
: 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하여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
: 증자료의 제시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를 건
: 립하고 난 다음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던
: 것이다./<3. 의기사건립과 추모행사>
: (3)매창
: 매창(梅窓)2 1573(선조 6)∼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
: (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
: 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
: 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
: 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
: 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허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
: 稿》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
: 다.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
: 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여성적 정서를 읊은
: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
: 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며,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부안의
: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
: (4)명성황후
: 명성황후(明成皇后)2 1851(철종 2)∼1895(고종 32). 고종의 비. 흔히 민비(閔妃)로 불린다. 본
: 관은 여흥(驪興).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1. 출신과 간택>여덟살의
: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민비
: 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년간의 세
: 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
: 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2. 대원군과의 갈등>소녀시절
: 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 春秋》를 읽?정도로 총명했으며, 수완이 능란한 민비
: 는 수년 후부터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구부간
: (舅婦間)의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민비가 대원군과 사이가 갈라진 것
: 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공작
: 때문이라 하나,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 老論)의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 갈등이 작용했다.민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여 마침내
: 대원군의 정적(政敵:趙成夏를 중심으로 한 趙大妃 세력, 趙斗淳·李裕元 등 노대신 세력, 金
: 炳國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세력, 대원군의 장자 載冕과 형 李最應 세력 및 崔益鉉 등 유
: 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대원군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하게끔 하여 양
: 주(楊州)곧은골〔直谷〕에 은퇴시켰다./<3. 친청정책>대원군의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
: 다.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
: 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민비는 재빨리 궁중
: 을 탈출하여 충주목(忠州牧)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그러나 이때부터 민비는 친
: 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開化派)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4. 을미사변과 민
: 비시해>이때의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詔勅)!
: 을 내렸다.
: (5)신사임당
: 신사임당(申師任堂)2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시·글씨·그림에 능하였?조선시대의
: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 본관은 평산(平山)./<1. 가계와 성장>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
: 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
: 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
: 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
: 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 나가지 않았다.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
: 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
: 덕 (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2. 출가후의 생활>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
: 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
: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19세에 덕수이씨 (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
: 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
: 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
: 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38세에 시집살림을 주
: 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
: 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3. 자질과 재능>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
: 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4. 그림재능>/<5. 글
: 씨재능>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
: 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6. 예술적 환경>!
: /<7. 후손과 작품>
: (6)어우동
: 어우동(於于同)2 생몰년 미상. 조선 성종 때 양가의 여자로서 행동이 문란하여 사회의 물의
: 를 일으킨 인물.《용재총화潘》에는 어우동(於于同),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 하였
: 으며, 《송계만록 松溪漫錄》 및 《대동시선 大東詩選》에는 어우동이라고 나온다. 아버지는
: 지승문(知承文)을 지냈으며 성은 박씨(朴氏)이다.종실 태강수(泰江守)의 아내가 되었는데, 행
: 실이 방탕하여 여러 조관 및 유생들과 관계하였다. 조정에서 알고 그와 관계한 자들을 문초
: 한 것이 수십명이었다. 결국 어우동도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사형당하였다.《대동시
: 선》에는 그가지은 〈부여회고 扶餘懷古〉라는 시를 싣고, 《송계만록》의 글을 소개하였는
: 데, “호서(湖西)의 창(娼)으로 농부의 딸이었으나, 단정하지 않아 그 시가 뛰어나나 싣지 않
: 는다.”고 하였다.
: (7)인현황후
: 인현왕후(仁顯王后)2 1667(현종 8)∼1701(숙종 27). 숙종의 계비.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
: 흥(驪興).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 준길(浚吉)의 딸이다.1681년(숙종 7)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예의가 바르
: 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 되었다.특히, 장소의(張昭儀)에게서 왕자 균(: 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장소의에게
: 쏠리게 되었다.1689년에 숙종이 왕자 균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宋
: 時烈) 등 노론파 인사들이 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 이들을 면직, 사사시키고,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 등 남인들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
: 사환국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
: 댁(本宅: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그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 1694년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해
: 하려는 남인 민암(閔)·김덕원(金德遠)·권대!
: 운(權大運) 등을 유배,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다.그뒤 덕을 베풀고 희빈
: 장씨와 화기(和氣)를 도모하면서 살았으나, 원인모를 질병으로 1701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 요절하였다.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
: 陵)이다. 한 궁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 (8)장녹수
: 장녹수(張綠水)2 ?∼1506(중종 1). 연산군의 총희(寵姬).본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
: 婢)로 대군(大君)의 가노(家奴)에게 출가하여 자식 하나를 두었고, 뒤에는 가무(歌舞)를 익혀
: 이름을 떨쳤다.나이 30이 되었어도 용모가 뛰어나 연산군에 발탁되어 총애를 받았고, 내명부
: (內命婦)종4품 관작인 숙원(淑媛)에 피봉, 무수한 금·은·주옥·노비·전택(田宅) 등을 하
: 사받았다. 연산군을 어린애 다루듯 하였고 모든 상형(賞刑)이 그녀의 입에서 행하여졌
: 다.1503년(연산군 9) 종3품인 숙용(淑容)에 봉하여지고 이듬해에는 그녀의 집 주변 민가를
: 모두 철거,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새로이 단장시켰다.1506년 오빠 복수(福壽)와 자녀들
: 을 모두 양인신분으로 올리고, 관선(官船)을 이용하여 평안도 미곡 7, 000석을 무역하였다.왕
: 이 비록 격노하였으나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띨 정도로, 교태스럽고 요사스러워 연산군
: 실정의 한 요인을 만들었다.1506년 중종반정 때 참형(斬刑)에 처하여지고 적몰가산(籍沒家
: 産)되었다.
: (9)죽향
: 죽향(竹香)2 생몰년 미상. 시와 그림에 뛰어난 기녀(妓女). 호는 낭간(浪)·용호어부(蓉湖漁
: 夫).평양에서 19세기 전반에 활동하였다.그녀에 대한 언급은 신위(申緯)의 《경수당집 警修
: 堂集》, 이만용의 《동번집 東樊集》,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집 阮堂集》 등 여러 문집에
: 보이고 있다.이 중 죽향의 《묵죽첩 墨竹帖》에 묵죽의 대가인 신위가 제시(題詩)를 쓴 사실
: 은 크게 주목되며, 김정희도 칠언시 두 수를 희증(戱贈)한 점 등으로 당시 그녀에 대한 세평
: (世評)을 짐작할 수 있다.대나무뿐 아니라 난초와 꽃과 나비 등도 잘 그린 것으로 전하여지
: 며 죽향이 지은 한시(漢詩)도 남아 있다. 아름다운 대나무를 칭하는 죽향이라는 이름(妓名)
: 이나 호인 낭간은 이러한 점에서 그녀에게 걸맞은 명칭들인 셈이다.아쉽게도 대나무그림은
: 지금까지 공개된 것은 없으나 유전작(遺傳作)이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국립중앙박물관에 10
: 폭과 3폭으로 된 두 《화훼초충첩 花卉草蟲帖》이 죽향전칭(竹香傳稱)으로 소장되어 있다.이
: 전칭화첩은 같은 크기(絹本彩色, 24.8×25.4㎝)로 한 화첩에서 나누어졌음이 분명하다. 이 화
: 첩을 살펴보면 19세기 일반 화훼초충과 동일한 ?
: 척毓營컥?보이며 대체로 섬세한 필치, 고른 선묘, 화사한 설채(設彩), 화면구성의 단순성과
: 동일성 등이 간취된다.대체로 고른 솜씨로 모두 수작(秀作)으로 보기는 힘들어도 그 중 몇은
: 자못 화격(畵格)을 지닌 그림들로 생각된다.특히, 중국그림을 방(倣)하였을 경우 그 연원을
: 밝히고 있어 중국그림에 대한 이해의 폭을 알려준다. 소재의 꽃들을 살필 때 원추리·개양
: 귀비·금낭화 등 조선초부터 줄기차게 그려진 꽃 외에 장미·목련·모란·연꽃 등에서는 화
: 본풍(畵本風)이 짙어 양면성을 보인다.화접(花蝶)에 능하였다는 문헌기록에 맞게 나비가 등
: 장한 그림에 보다 뛰어난 화격이 보인다. 원형·삼각형 구도도 있으나 변각(邊角) 구도가 주
: 류를 이루며, 그림마다 화제(畵題)나 제시를 적은 묵서(墨書)는 화면구성의 요소로도 운용되
: 고 있다. 이 화첩을 죽향의 진적(眞跡)으로 본다면 일급화가로 간주되기는 힘들 것이다.
: (10)진채선
: 진채선(陳彩仙)2 1847(헌종 13)∼?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판소리 명창. 전라북도 고창군 무
: 장에서 출생하였다.신재효(申在孝)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풍류·가곡(歌曲)과 무용에 능하
: 였고, 여성이면서도 웅장한 판소리 성음(聲音)을 내고 기량도 대단하였다 한다.20대에 경복
: 궁 낙성연에서 판소리를 불러 좌중을 감탄하게 하였다.이때 신재효가 지은 〈성조가 成造
: 歌〉를 불렀다는 설도 있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서울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신재효
: 는 〈도리화가 桃李花歌〉라는 노래를 지었다 한다.이 노래는 가사체로 지금 전하고 있다.
: 신재효가 죽은 뒤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하였고, 특히 〈춘향
: 가〉 중 기생점고(妓生點考)하는 대목을 잘 불렀다 한다.그가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 뒤, 허금파(許錦坡)·강소춘(姜笑春) 등 여류 명창이 나왔고, 오늘날 여자 명창들을 더 많이
: 배출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 (11)허난설헌
: 허난설헌(許蘭雪軒)2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
: 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의 동
: 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
: (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
: 희·균 3남매를 두었다.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
: 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
: 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
: 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
: 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
: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
: 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
: 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
: 던 것으로 보인다.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
: 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
: 되었다.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
: 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
: 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 (12)황진이
: 황진이(黃眞伊)2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
: (妓名)은 명월(明月). 개성출신. 확실한 생맙Т遊?미상이나, 중종 때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
: 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으며, 간접사료인
: 야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 매우 어렵다.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
: 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
: 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기생이 된 동기에 대
: 하여도 15세경 이웃 총각이 혼자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
: 고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또한,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당대의 석학 서경덕(?
: 井綾?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당시(唐詩)를 정공
: (精工)하였다고 한다.그러한만큼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
: 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고, 당대
: 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 또한,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그가
: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
: 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 〈청산리 벽계
: 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산이로되〉·〈어져 내일
: 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
: 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 (13)장희빈
: 희빈장씨(禧嬪張氏)2 ?∼1701(숙종 27). 조선 숙종의 빈(嬪). 본관은 인동(仁同). 역관 장현
: (張炫)의 종질녀이다.어머니의 정부(情夫)였던 조사석(趙師錫)과 종친인 동평군 항(東平君杭)
: 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
: 고, 1688년 소의(昭儀)로 승진되어 왕자 윤(: 뒤의 景宗)을 낳게 되자 왕은 기뼈하여 세자로
: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
: 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이에 서인의 노론·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閔氏)가
: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 정월에
: 세자를 봉하고, 장소의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 상소하자,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 진노하므로,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
: 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賜死)하게 하였다.그러나 송시열은 중로
: 정읍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
: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
: (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고 한다.이해 5월에
: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올려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
: 輔) 등 80여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폐비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 그러던 중 1694년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꾀하다
: 가 고발되었다.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閔)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
: 다.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
: 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
: (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 (14)유관순
: 유관순(柳寬順)2 1902∼1920.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흥(高興). 충청남도 천안출신. 아버지는
: 중권(重權)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선교
: 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비생으로 입학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 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그뒤 일제가 이화학당을 휴교시키자 고향으
: 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찾아다니며 서울에서의 독립시위운동상황을 설명하
: 고, 이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
: 의 마을지도자를 규합하여 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유림계를 규합, 이해 음력 3월
: 1일 아오내〔川〕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이날 수천명의 군중을
: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전개에서 잔인한 일
: 본헌병의 총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아오내 만세시위주동자로 잡혀 일제
: 의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
: 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
: 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
: 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
: 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
: 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유관순이 참살된 지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이
: 화학당 교장 푸라이와 월터선생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체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 이를 거부하였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위협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 일제는 할수없이 시체를 인도하였다. 시체를 인수한 이들이 석유상자 속에 든 유관순의 시
: 체를 열어보니 토막으로 참살된 비참한 모습이었다.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15)윤심덕
: 윤심덕(尹心悳)2 1897∼1926. 우리나라 최초의 성악가·배우. 호는 수선(水仙).평양에서 출생
: 하였다.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으며, 강원도
: 원주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
: 학과에서 수업받았다.1921년 동우회(同友會) 등의 순회극단에 참여하면서 극작가 김우진(金
: 祐鎭)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년
: 6월 귀국하자마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 가수로 데뷔하였다.이때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 프로에는 항상 윤심덕을 넣을 만
: 큼 일약 스타가 되었다. 양악이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또 제대로 성악을 공부한
: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또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가
: 대중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그러나 정통음악을 가지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 강사생활과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세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하였다. 한때
: 극단 토월회에 주역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하였으나 연?
: 綏쩜?없어서 실패하였다. 대형 오폐라가수를 꿈꾸었던 그녀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대중가요
: 를 부를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꿈꾸었던 예술조국을 만들기에는 이 땅이 너무 낙후되어 견
: 고한 유교적인 인습은 그녀를 더욱 못견디게 하였다.특히, 유부남 김우진과의 사랑은 진보적
: 인 도덕관을 지닌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다.1926년 여동생 성진(聖眞)의 유학 배웅을 위하여
: 일본에 간 그녀는 닛토(日東)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먼저 와 있던 김우진과 함
: 께 현해탄에서 정사하였다. 그녀가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까지 널리 불려지고 있다.
: (16)나혜석
: 나혜석(羅蕙錫)2 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양화가. 본관은 나주. 호는 정월(晶月).한
: 말에 사법관을 거쳐 군수를 지낸 기정(基貞)의 5남매 중 둘째딸로 수원에서 태어났다.서울의
: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신미술인 양화를 전공하기 위하여 동경의 여자미술학교로
: 유학을 떠났다.1918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 지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來
: 靑閣)에서 첫 유화개인전을 가졌으며, 4월에는 제1회서화협회전람회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 출품하였다.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과 특선을
: 거듭하였으며, 1931년에는 동경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하였다.1927년에는 만주 안동
: 현(安東縣) 부영사로 일본정부 외교관신분이던 남편 김우영(金雨英)과 함께 세계일주여행에
: 올라 파리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면서 야수파계열의 화가가 지도하던 미술연구소에서 수업
: 하였다.이어 유럽 각국의 미술관순례를 통해서 미술시야를 넓히고, 미국을 거쳐 1929년에 귀
: 국하였다.그뒤 화가로서의 정상적 활동은 1935년 서!
: 울에서 가졌던 소품전을 마지막으로 중단하고, 이혼과 정신장애, 반신불수의 비극 속에서 세
: 상의 버림을 받다가 생애를 마쳤다.작품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파리에 가기 이
: 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뒤로는 야수파와 표현파 등의
: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그밖에 문재(文才)도 뛰어나 많은 문필업적을
: 남겼으며, 동경유학 때부터 여권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대표
: 작으로 파리에서 그린 〈무희〉(국립현대미술관 소장)와 〈스페인해수욕장〉 등이 있다.
: (17)노천명
: 노천명(盧天命)2 1911∼1957. 여류시인.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기선(基善), 천주교의 영
: 세명은 베로니카. 황해도 장연출신. 아버지는 계일(啓一)이고, 어머니는 김홍기(金鴻基)이
: 다./<1. 학력·경력>아버지가 죽자 1919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진명보통학교에
: 입학,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
: 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문단 친우로는 모윤숙(毛允淑)·김광섭(金珖燮)·이헌구(李軒求)
: 등이 있다. 홍해성(洪海星)·유치진(柳致眞)·김진섭(金晉燮)·서항석(徐恒錫) 등이 주관하여
: 결성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1938년 체호프(Chekhov,
: A. P.)의 〈앵화원 櫻花園〉을 공연할 때 모윤숙과 출연하여 아냐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화
: 여자전문학교 졸업 직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3년 뒤
: 신문사를 사임하고 잠시 북간도의 용정(龍井)과 연길(延吉) 등지를 여행하고 나서, 《여성
: 女性》의 편집부와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다.8·15광복 후에는 서울
: 신문사 문화부와 부녀신문사 편집차장을 역임하였다.!
: 6·25남침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임화(林和) 등이 주도하는 문학가동맹
: (文學家同盟)에 참여한 혐의로 수복 후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이어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 있으면서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 있으면서 《이화 70년
: 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극도로 쇠약해져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1957년에 죽었
: 다./<2. 작품과 그 경향>노천명의 시작 활동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에도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어린이 잡지에 응모하여 입상하는 등
: 시재(詩才)가 뛰어나, 시를 지어 학우들 앞에서 낭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이화여자전문학
: 교 시절에 발표한 시는 〈고성허(古城墟)에서〉(뒤에 滿月臺로 개작)외 5편을 《이화》지에,
: 〈밤의 찬미(讚美)〉 외 2편을 《신동아》에, 〈제석 除夕〉을 《신가정 新家庭》에 발표하
: 였다. 졸업 후 1935년에는 《시원 詩苑》 동인으로 시 〈내 청춘(靑春)의 배는〉(1935.2.)을
: 발표하였다. 노천명을 ‘사슴의 시인’이라 하는데, 〈사슴〉은 1938년 간행된 제1시집 《산
: 호림 珊瑚林》에 실린 49편 중에서 대표작의 하나이?
:
: (18)육영수
: 육영수(陸英修)2 1925∼1974. 제3·4공화국 박정희(朴正熙)대통령 부인. 충청북도 옥천출신.
: 종관(鍾寬)과 이경령(李慶齡)사이의 차녀이다.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
: 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란중일
: 때 육군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志晩)·근혜(槿惠)·근영(槿映) 등 1남2녀를두
: 었다.1961년 박정희장군이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총선거에
: 서 6대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영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만년의 공직
: 은 양지회(陽地會)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
: 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으며 남산에 어린이
: 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기술직업훈련원
: (正修技術職業訓練院)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금조성과 정신박약아돕기운동 등 그늘진
: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 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正英舍)를 건립하였다. !
: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
: 길을 미쳤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까지 일일이 순방하면서 온정을 베풀었다.1974년
: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문세광(文世光)에 저격당하여 최후를
: 마쳤다. 박정희대통령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
: 였는데,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오전 10시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에서 각국 조
: 문사절과 내외인사 3, 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 안장되었다. 묘비는 백일탈상 하루 전인 1974년 11월 21일에 제막되었으며, 이듬해 기념사업
: 회도 발족되어 추모책자를 펴냈다.
: (19)최승희
: 최승희(崔承喜)2 1911∼? 무용가. 서울출신. 준현(濬鉉)의 딸이며, 어머니는 박용자(朴容子)
: 이다.15세 되던 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연습과
: 에 진학하여 음악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낙방한 뒤, 큰오빠 승일(承一)의
: 권유로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石井漠)의 공연을 보고
: 무용가로의 입신을 결심하게 되었다.1926년 5월 본격적인 무용수업을 위하여 동경으로 건너
: 간 뒤 3년여 만에 주역급 무용수로 발탁되었고, 수석대교(首席代敎)로 후진을 지도할 만큼
: 급성장하였으나, 1929년 여름 이시이의 돌연한 실명은 그녀의 진로에 커다란 변수가 되었다.
: 고향으로 돌아와 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세 차례의 공연을 가지면서
: ‘민족무용의 현대화’를 표방한 〈영산무〉를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인도인
: 의 비애〉·〈해방을 구하는 사람들〉·〈방랑인의 설움〉과 같은 현대무용 계열의 작품이
: 었다.이들 작품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기도 하였으나, 경제면에서는 어려움을 면치
: 못하였다.1933년 3월 이시이문하로 재입문하여 1년여!
: 만에 청년회관에서 전통과 현대무용의 접목을 꾀한다는 의도에서 창작된 작품 〈에헤야 노
: 아라〉가 대성황을 이루면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신인으로 무용평단과 언론의 각광을 받
: 게 되었다.1936년말부터 4년간 세계무대로 진출하여 유럽에서는 〈초립동〉·〈화랑무〉·
: 〈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무〉·〈옥저의 곡〉·〈보현보살〉·
: 〈천하대장군〉 등 신무용사의 기념비적 작품이 나왔고, 그 명성은 아르헨티나(Argentina,
: La)·상카(Shankar, U.) 등에 비유되면서 세계정상의 무희로 지목되었다.1938년 브뤼셀에서
: 개최된 제2회 세계무용경연대회에서는 라반(Lavan, R.)·비그만(Wigman, M.)·리파르
: (Lifar, S.) 등과 나란히 심사위원이 되기도 하였다.또한, 뉴욕에서는 파리무대의 후광을 업
: 고 당시 흥행계의 제왕으로 불리던 휴록(Hurok, S.)의 기획 아래 NBC전국체인과 제휴하면
: 서 미국전역은 물론,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였다.1940년 여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무
: 용에 대한 동포들의 열기가 더해가자 일본의 경시청은 이것을 민족의식의 고양으로 간주하
: 여 앞으로 연목(演目)의 3분의 1을 일본적인 소재로 바꿀 것을 강요!
: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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