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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시대②-‘시파’와 ‘벽파’의 잉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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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세자 사건의 전말 1735년 1월, 영조는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정비 정성왕후와 계비 정순왕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데다,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얻은 첫째아들 효장세자마저 요절한 후 7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상황이었다. 세자의 어머니는 영빈 이씨였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자의 탄생은 곧 왕권의 안정을 의미했다. 더구나 마흔이 넘어 얻은 아들이었기에 왕자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각별하였다. 그만큼 아들에 대한 기대 또한 컸다. 영조는 왕자가 두 살이 되던 해에 서둘러 세자로 책봉하고 세살이 되던 해부터 제왕학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영조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책을 직접 써서 교재로 삼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임금들 중 유례가 없는 높은 교육열이었다. 아니,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기(氣)까지 팍 꺾어버리는 지독한 교육열이었다. 부왕의 기대에 걸맞게 세자는 어린 시절 영특한 자질을 보여 주었다.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까지 실천하였다. 영조는 종종 세자를 불러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곤 하였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넘치다보니 하루 속히 왕세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주길 바란, 조급한 부정(父情)의 발로였다고나 할까. 한데 언제부턴가 세자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영조는 그럴 때마다 추상과 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봐 불안했고, 그 추상같은 꾸짖음이 두려웠다. 세자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때문에 세자는 성장하면서 점차 학문보다는 무예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일 정조가 만들어낸 ‘무예도보통지’의 근간이 되는 ‘무기신식’이라는 책을 만들 정도로 세자는 무예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1749년, 세자가 열 다섯 살 때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게 되었다. 영조는 군사권과 인사권 등의 민감한 사안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사를 세자에게 맡겼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건강문제였지만, 이는 당쟁 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였다. 이를 굳이 ‘승부수’라고 하는 이유는, 영조가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세간의 혐의를 떨쳐내기 위하여 왕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자 수차에 걸쳐 세자에게 정사를 대신 돌보게 하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 끝에 단행한 결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수차례에 걸쳐 ‘임금짓 못해먹겠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릴거다)고 몽니를 부린 전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대리청정을 계기로 그들 부자사이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경륜이 부족한 세자가 국정운영에 미숙한 것은 어떠면 당연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영조는 사사건건 세자를 질책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리기 시작하였다. 세자는 대리청정 하는 동안 정국을 주도한 노론세력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노론의 전횡이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의 즉위와 관련된 「신임의리(신임사화 때 영조의 정통성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이 처형됐던 일에 대해 영조가 노론이 옳고 소론이 잘못이라고 판정한 일)」와 같은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도 아버지와 다른 견해를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 영조가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역모로 볼 소지가 있었다. 영조와 노론처럼 경종 때의 행위는 숙종과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강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위는 경종의 위치에서 볼 때 분명 역모에 가깝거나 역모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다. 영조 31년(1755년), 나주 객사에 영조와 노론세력을 비방하는 한 장의 괘서가 내걸렸던 것이다. 이는 정국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곧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고, 관련자들은 속속 체포되었다(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또한 역모 가담 누명을 쓰고 이때 체포되었다). 범인은 김일경 사건에 연루되어 나주에 유배되어 있던 윤지를 비롯한 소론의 강경파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노론세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기도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영조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동안의 지속적인 탕평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론은 여전히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적 반대파까지 끌어 앉히면서 탕평을 유지하려한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소론에 대한 영조의 자제심은 무너져 버렸고, 조정에서는 이후 3개월 동안 거의 매일같이 친국(임금이 중죄인을 몸소 신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수 백명의 소론측 인사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세자의 보호세력이었던 소론은 제거되고, 정국은 노론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국정의 제1목표였던 ‘탕평책’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정국의 변화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세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론은 이 기회에 소론세력을 완전히 박멸할 것을 세자에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의 빗발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한결같이 ‘不從’, 즉 ‘따르지 않겠노라’였다. 또한 노론 유생들의 송시열, 송준길 등에 대한 문묘종향 요청과 노론 4대신에 대한 정려요청 등에 대하여도 그는 '不從'으로 일관하였다. 그런 반면 나주괘서사건과 연이어 터진 토역경과(討逆慶科-역적을 토벌한 기념으로 시행한 과거) 투서사건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소론의 반발에 대하여는 온건하게 대응하였다. 이러한 세자의 태도 때문에 노론은 세자의 정치적 입장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노론은 세자를 겨냥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이 내세운 것은 ‘세자가 영조임금이 정한 ’신임의리‘의 국시를 뒤집으려 한다’(번안국시-翻案國是)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노론의 정치적 공세에 세자에 대한 모함이 더해지면서 영조의 아들에 대한 의심은 점점 깊어져 갔다. 수시로 아들을 불러들여 질책하기를 반복하였다. 1752년에는 정사를 멋대로 하였다고 크게 꾸짖자 세자가 홍역에 걸린 몸으로 3일 동안이나 눈 속에 꿇어앉아 죄를 비는 안타까운 장면도 연출되었다. 아버지의 질책이 심해지면서 세자의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은 커져만 갔다. 세자는 평상시에도 아버지의 호출명령이 떨어지면 두려워서 벌벌 떨었고, 아버지를 뵙고 나오던 중 까무러쳐서 혼절한 사건도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생긴 마음의 병, 결코 표현할 수도 풀 수도 없었던 억눌린 감정은 자신도 모르게 공격적인 모습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내린 ‘금주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폭음을 해대는가 하면 외부 여자를 궁 안에 들여 살림을 차리는 등 점점 난폭해지고, 거칠어지기 시작하였다. 세자의 병증은 무언가에 억눌린 심리상태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정신병 증세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세자가 앓았던 병은, 공포증, 우울증, 공황발작, 강박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신경병 증상이 혼합되어 때와 장소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여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었다. 세자 스스로도 자신의 병세를 의식하였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번은 장인 홍봉한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의 고민을 어루만질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비밀리에 약제를 만들어 보내줄 것을 부탁한 일까지 있었다. 세자는 이렇듯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결코 사리를 분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아이를 낳은 혜경궁 홍씨의 몸조리를 걱정하면서 또 처가의 생일을 직접 챙기는 등 자상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병세를 걱정하면서도 장인에게 한강 이남의 지도와 군사, 말사료, 곡물 등에 관한 책을 구해줄 것을 부탁하는 등 군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서서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치적 우군을 잃어버린 데다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회복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760년(영조 36년) 영조가 처소를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기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부자 사이에 이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마저 줄어들게 된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부자는 몇 달간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세자는 병을 핑계로 부왕에 대한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고, 영조 또한 세자를 만나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자인 왕과 왕세자 사이가 멀어지게 되면 반드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세력, 특히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노론의 김상로, 숙의 문씨 오빠 문성국 등은 정순왕후, 숙의문씨, 화완옹주(세자의 여동생) 등을 이용하여 세자를 모함하면서 부자 사이를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영조는 더 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즈음 세자가 영조 눈을 피하여 관서지방을 3개월 남짓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또 발생하였다. 이는 모반을 위한 준비로 의심(김귀주의 고변)받기도 하여 세자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노론은 장령 윤재겸 등을 앞세워 세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격노한 영조는 관서여행에 관여하였던 자들을 색출하여 모두 파직시켜 버렸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회복불능 상태로까지 깊어져 갔고, 1962년(영조 38년) 급기야 파국을 예견케 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경기도관찰사 홍계희, 전 형조판서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10여 조목에 걸쳐 나열한 소를 영조에게 올리는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 소식을 들은 영조는 즉시 국청(임금 앞에서 직접 심문하는 것)을 설치하였다. 이 자리에서 나경언은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던 고변서를 꺼내 직접 영조에게 올렸다. 여기에는 10여 가지에 달하는 사도세자의 비행이 조목조목 열거되어 있었다. 고변서를 읽은 영조의 얼굴은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영조는 고변서를 다 읽은 다음 곧바로 불태워버렸다. 따라서 구체적인 고변내용은 영조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였다. “네가 후궁을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였느냐? 그리고 성문 밖으로 나가 방탕하게 놀았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세자가 할 일이냐?” 영조의 말에 따르자면, 세자는 정신병으로 인해 수많은 비행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일개 중인 신분이었던 나경언이 어떻게 세자의 비리를 임금에게 직접 고변할 수 있었을까 의아해 하겠지만, 그의 뒤에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였던 노론세력이 버티고 있었으며 영조 또한 그즈음 노론의 정치적 파워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런대로 이해가 되리라 본다.) 나경언의 고변 직후부터 세자는 죄수복을 입고 석고대죄를 시작하였다. 죄의 유무를 떠나 일국의 왕세자로서 고변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의 부덕을 자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죄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도록 신하들 중 어느 누구도 이를 임금에게 알리는 이가 없었다. 세자가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침내 세자는, 당시 춘천에 은거하고 있던 소론의 중심인물 조재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재호는 세자를 돕기 위해 상경하였으나 홍봉한 등의 무고로 사약을 받고 말았다. 세자와 소론세력의 제거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경언은 얼마 뒤 고변내용이 거짓이었음을 실토하였다. 결과적으로 일개 대신의 청지기가 일국의 세자를 음해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셈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처벌을 미루려는 태도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나경언의 배후세력을 조사하라는 신하들의 태도를 꾸짖고 역정을 내기까지 하였다. “나경언이 어찌 역적인가? 오늘날 그대들의 당파다툼으로 인하여 부당(父黨)․자당(子黨)이 되었으니 조정의 대신들이 다 역적이다.” 이는 나경언의 고변서에 당파싸움과 관련된 정치적인 내용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세자의 죽음에는 ‘정신병’그 이상의 문제, 즉 정치적인 무언가가 숨어있었다는 얘기다. 주지하다시피, 영조가 치세 내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이 당쟁의 종식, 즉 탕평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이 원대한 프로젝트는 세자의 대리청정 이후 영조를 둘러싼 세력(노론)과 세자를 둘러싼 세력(소론) 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갈 형편에 처해졌고 급기야 나주괘서사건 같은 소론의 역모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나주괘서사건으로 비롯된 ‘을해옥사’ 이후 세자에게는 어떠한 보호세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해 세자를 모함하는 상소는 빗발치듯 올라왔고 그 중에는 세자가 직접 거병(擧兵)해서 무력적으로 대항할지도 모른다는 내용도 상당수 있었다. 영조는 본격적으로 세자의 역모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불과 얼마 전 세자가 관서지방을 몰래 다녀온 일이 또 드러났거니와 그 여행의 목적이 역모를 위한 모병문제 때문이었다는 상소까지 올라온 일이 있었다. 여기에 세자의 무인(武人)적인 기질 또한 모함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심지어 세자가 성밖으로 나가 군사를 모집하고 변란을 계획한다는 모함까지 올라왔다. 요컨대, 영조는 이런 모함의 영향을 받아 세자의 반란을 우려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0여일 후, 영조는 마침내 세자를 창경궁 취령전으로 불러냈다. 그때 영조는 비상시에 준하는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모든 호위병들에게 칼을 빼들게 한 다음 궁궐문을 걸어 잠그고 신하들의 출입을 봉쇄하였다. 자신 또한 칼을 빼는 채 영조는 이윽고 세자를 매섭게 추궁하기 시작하였다. “네 이놈! 경성왕후가 내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에(눈앞에) 있다고 하였다.” 영조가 내건 혐의는 세자가 변란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죽으면 삼백년 종사는 망하고, 네가 죽으면 삼백년 종사는 보존될 것이니 내 어찌 너 하나를 베지 않고 종사를 망하게 하겠느냐?” 그러면서 영조는 세자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명령하였다. “너는 죽을 죄가 있다.” “신은 죄가 많지만 죽을 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네가 어찌 모르겠느냐? 네가 세자궁 후원에 굴을 파고 상복과 지팡이를 갖다 둔 이유는 무엇이냐?” 영조는 세자가 상복을 입고 자신을 저주했다고 의심하였다. 사도세자는 그것이 경성왕후가 사망했을 때 사용한 것이라고 해명하였고, 확인결과 이는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영조의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상소를 통해 세자에 대한 인식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정적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세자는 울면서 잘못을 빌었고, 세손 또한 눈물로써 아버지에 대한 관용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영조의 마음을 돌려 세우기에는 이미 사태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영조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직접 뒤주에 못질을 하였다. 움직일 수조차 없는 뒤주 속에 갇혀 세자는 서서히 죽어갔다. 음식은커녕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그렇게 뒤주 속에 갇혀 지내던 세자는, 결국 8일 뒤 한 많았던 28년간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세자가 죽어가던 그 시각, 노론 대신들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조정은 두 패로 갈리고 말았다. 세자가 광폐하여 변을 자초하였으니 동정할 필요가 없다는 측과 세자가 억울하게 폐위되었다며 이를 동정하는 측으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전자는 노론의 주장이었고, 후자는 일부 비판적인 노론과 남인, 그리고 소론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각 정파가 표면에 내세운 명분일 뿐 그 이면에는 숙종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노론과 남인 간의 해묵은 감정대립이 도사리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책을 써서 당파싸움을 막으려 했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는 자신도 서서히 그 수렁 속으로 빠져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장기집권자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친위세력구축에 대한 집착이 영조에게도 예외 없이 나타났던 것이다. 영조는 '정파간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완론탕평(緩論蕩平-노.소론 온건론자들이 지지하는 탕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지지하는 노론측 대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안정된 국정수행을 위한다는 구실로 척신정치를 시작하였다는 얘기다. 나주괘서사건 이후 이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그 중심인물은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김귀주를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은 남당(南黨)이라 불리는 척신당을 조직하였고, 반면 영조로부터 세손(후일 정조) 보필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 홍봉한 일파는 북당(北黨-홍봉한의 집이 정순왕후의 집 북쪽 안국동 위치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척신당을 만들어 이에 대응하였다. 북당은 세손 보호의 임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한편으론 남당으로부터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시세에 편승한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양 당 모두 노론 핵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당시 소론과 남인 쪽에 경도(傾度)되어 있었던 사도세자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였다. 더욱이 '포스트영조'시대에도 노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하여야 할 '공적1호'가 사도세자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물론, 생모인 영빈 이씨와 세자의 누이 화완옹주 등 혈육까지도 노론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세자 제거에 전력투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은 김귀주를 앞세운 남당이 주도하였고, 홍봉한의 북당이 동의하였으며, 영조가 최종 판단을 하게 된, 범 노론세력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비록 표면적으로야 강경론(남당)과 온건론(북당)으로 갈리는 모양새를 취하긴 하였지만. 그러나 사도세자 사건을 놓고 펼쳐진 보다 큰 틀의 대립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의 책임론을 놓고 불거진「노론 주류」 대 「노론 일부를 포함한 반(反)노론 연합」 간의 대립이었다. 세자와 대립각을 세웠던 노론 주류는, 국왕으로서의 자질에 큰 하자가 있는 세자를 죽인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므로 노론대신의 처신에 큰 잘못이 없다고 본 반면, 일부 비판적인 노론 및 소론과 대다수의 남인은 세자가 개인적인 결함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나 죽일 만 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음에도 정국의 전권을 장악하였던 노론의 집권 주류가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이 싸움을 노론 내부의 분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노론과 남인 간의 해묵은 감정다툼의 연장선상으로 놓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 것이다(이를테면 '노론 벽파', '노론 시파'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노론 벽파', '남인 시파'로 보는 학자도 다수라는 것). 말하자면 노론 주류세력에 대항마로 나선 남인세력을 노론 일부 비주류와 몰락한 소론세력이 지원해준 형국이었다는 분석인 것이다. 다만, 비록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양측의 다툼의 결과가 바로 ‘벽파’와 ‘시파’의 분기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시각이 아니다. 이러한 입장차이가 「시파」와 「벽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정파 분립으로 구체화 된 것은 정조(正祖) 대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다. 본시 「시파」와 「벽파」라는 말 자체가 정조의 정책에 어떤 입장을 취하였느냐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즉 ‘시파’란 정조가 펼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책들에 동의하지 않은 무리(주로 노론 주류세력)가 이에 동의하는 무리를 ‘시류에 편승한다’ 고 얕잡아 부른데서 기인하였고, ‘벽파’란 정조의 정책에 동의하는 무리(시파)가 그 반대되는 세력에 대해 ‘시류에 따르지 못하고 편벽(偏僻)되다’고 하여 붙여준 이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조실록'에도 정조 4년부터 시.벽의 분리가 진행되다가 정조 12년 정민시의 상소를 통하여 처음으로 시파.벽파의 호칭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대부분의 문헌에서 시.벽의 용어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정조 8년 이후부터였다고 하니 이 점에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그렇다면, 조선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개혁정치의 원조’ 정조시대에 ‘시파’와 ‘벽파’는 어떻게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생멸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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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1|작성자 김삿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