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대방출
소흔 이한배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이 없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얘기를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내가 할아버지 나이가 돼서야 왜 얘기를 안 해주었는지 알았다. 어린 시절이 너무 아득해 사라졌기 때문이란 걸….
할아버지는 잘못하면 혼내시는 엄한 분이셨기 때문에 나처럼 장난치고 까부는 어린 시절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공부하시고 글방을 차려 근동의 젊은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셨다. 나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후 3년 정도 할아버지 슬하(膝下)에서 천자문을 배웠다. 그때가 할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었든 유일한 기간이다. 물론 방학 때면 으레 큰집엘 가곤 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많지만 어린 시절 얘기는 없다. 당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 놓으셨다면 후손들이 읽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할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한다.
요즘 나의 손자들도 가끔 집에 오지만 잠시 다녀가다 보니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다. 게다가 학원까지 다니느라 볼 기회가 더 없다. 그러니 내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 줄 기회는커녕 손자들을 끌어안아 주고 궁둥이 한 번 두드려 주기도 쉽지 않다. 손자들도 나처럼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없는 줄 알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이 생기는 이유다.
나의 이야기들을 글로 남겨 두면 손자들이 내 나이쯤 됐을 때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면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 말로 하면 잔소리일 테지만 글로 남기면 잔소리라는 느낌도 덜 할 것이다. 꼭 손자가 아니어도 행여 신기해서였든 심심해서였든 책을 펼쳐보는 후손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후손이 있어 읽어 준다면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럴 때까지 서가에 먼지가 쌓여서라도 있을까 싶지만, 후손은 혈연이라는 진한 끈으로 연결돼 있으니까 기대를 걸어 본다.
가족이나 후손이 아닌 일반 독자가 있어 읽어 준다면 더 좋겠지만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쌔고 쌨는데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뒤늦게 늦깎이로 글짓기 조금 배워서 쓰는 주제에 욕심일 뿐이다. 그렇지만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며칠 전 귀소하는데 골목 바람벽에 ‘창고 대방출’이라는 광고지가 많이 붙은 걸 보았다. 각종 의류회사의 마크가 붙어있는 걸로 봐서 계절이 바뀌니까 발 빠르게 떨이로 팔려고 하나 보다. 같은 광고지를 연거푸 붙여 놓은 걸 보니 광고지까지 대방출인가 싶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 붙는 광고지. ‘창고 대방출’이라고 하니까 ‘바겐세일’, ‘떨이’라는 말보다 싸구려라는 생각이 덜 든다. ‘장고 대방출’이란 말이 어려서부터 듣던 말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기억 속에 쟁여 놓고만 있는 게 많다. 아예 잊어버린 것도 있고 가물가물해지는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오래됐는데도 또렷하게 생각나는 기억도 있다. 또 어린 시절이 너무 아득하여 그때 기억들이 내가 겪은 건지 들은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총기나 인지 능력도 빠르게 사라져 가는 걸 요즘 자주 느끼고 있다.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듯 나의 계절도 끝이 보이는데 잔뜩 끌어안고만 있으면 아무짝에 쓸모없는 폐품으로 버려질 것이다. 아니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스러질 게 뻔하다. 그래서 계절이 바뀌면 창고 대방출을 하듯, 나도 나의 계절이 사라지기 전에 창고 대방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죽을 때는 돈이고 뭐고 빈손으로 간다고 하지만 글로 남겨 놓으면 그건 남아 있을 게 아닌가? 게다가 이 사람 저 사람의 말로 조각조각 전해지는 것보다 덜 싸구려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농부들에게는 힘겹고 어려운 농사일이지만 보는 사람은 아름답게 보듯, 나의 힘들고 어려웠던 고단함이 남들에게는 아름다움이고 동경의 아이콘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나는 그렇게 안 살 거야 하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 됐던 창고 대방출을 해서라도 글로 남겨놔야 가능한 일이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평균 수명이 서른 살밖에 되지 않아서 삶에 관한 지혜가 모자라 발전이 안 된다고 한다. 오래 사는 사람이 있어야 지혜도 생기고 그걸 이어받을 수 있는데 수명이 너무 짧다 보니 앞서가는 사람도 모르고 뒤에 가는 사람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고령사회가 돼 가고 있다. 오히려 노인네의 지혜가 차고 넘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대 간의 단절은 그 지혜의 흐름을 막아 아프리카 부족이나 우리나 이어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어 가는 바람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본질적인 삶의 지혜는 앞서가는 사람들로부터 이어지는 경험적인 지혜가 최고가 아닐까 한다.
아무도 읽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일 수밖에 없다. 조금 아는 걸 갖고 많이 아는 걸 헤아릴 수 없음이 나의 한계지만, 그 근천스러운 글솜씨라도 나의 계절이 끝나기 전에 창고 대방출을 계속할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