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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부분은 아내의 번역입니다.
이런 식으로라도 참여할 수 있게 되어서 저 역시 좋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의 핵무기 정책의 배경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휴전 협정서 즉 질적으로 새로운 무기류의 도입을 금지하는 협정서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핵무기를 도입했다. 폭발직전의 내전을 안정화한 것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특단의 조치를 가졌다. 1953년에 이승만은 어떠한 휴전 협정을 반대했고, 협정서가 만들어졌을 때 그것에 서명하기를 거절했으며 전쟁을 재개 할 것을 빈번하게 위협했다. 1953년 11월 부통령 닉슨은 한국을 방문했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력으로 한국을 통일하려는 함으로써 미국이 개입 될 수도 있는 무모한 전쟁을 다시는 계획하지 않을 것이라는 문서상의 보증서류를 받아내길 원했다. 닉슨은 어떠한 문서화된 보증서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없을 시에도 미 사령관은 소수의 미국 지도자들에게만 통용된 보안이 높은 문서(annex)를 통해 이승만의 공격명령의 어떠한 결정에 대해서도 재빠른 경고를 하는 것과 한국 야전 사령관의 의해 이승만의 명령을 수령 또는 실행하는 것을 방지하도록 지시받았다. 물론 그 말은 미 정보부가 대통령 관저의 활동을 감시해서 전쟁에 대한 새로운 지시들을 가로 챈다는 것이었다.
이런한 방식으로 무기력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전쟁이 다시 시작되고 그 행위가 공산주의 자들 때문이라면 그의 자극적인 행동을 지지할 미국인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핵무기의 사용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 중에서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아서 레드포드 장군이 있었고 그는 1956년 9월에 주당국과 국방부 사이의 회의에서 한국에 원자탄두를 소개한 군부의 의도를 차갑게 말했다.
1957년 1월14일에 아이젠아워 대통령의 지시에서 미 안정보장 기획부는 한국을 위한 4개의 대체 군대 프로그램의 평가를 준비했다. 하나의 주요질문은 소개된 핵무기의 능력 이었고 한국에 핵무기 비축에 대한 질문이었다. 주어진 6개월간의 토론에서 Dulles 국무장관은 합동참모 본부와 그 정도의 무기들이 한국에 보내야 한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두 개의 문제가 있었다. : 휴전 동의와 이승만. 동의서의 하나의 부속조항(아래 13조)는 한국의 영토로 새로운 종류의 무기들을 도입을 양쪽지역으로부터 금지하였다. 레드포드는 그의 견해에서 핵무기를 허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일방적으로 13조항을 단순히 무시하기를 원했다. 이전 법학자였던 Dulles는 유엔과 연합군에게 그와 같은 행동이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휴전협정의 위반행위들이 충분히 공식적이라는 일반화된 증거의 단서가 있을 때에만 합동참모 본부의 제안에 그의 지지를 조건으로 규정했다. 문제는 공산주의자 진영은 13조항을 심각하게 위반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일반화된 증거는 충분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 진영은 새로운 제트기를 도입했지만 미국은 그러지 않았고 양쪽의 도입은 급진적 전투능력의 향상이라 여기지 않았다. 핵무기는 전혀 새로운 문제다. 핵무기는 영국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미국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국하고 핵무기 도입을 진행했고 1957년 6월에는 제13d 항의 의무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승만 문제가 남아있었다. 1955년 2월 확인되지 않은 정부보고서는 이승만이 한국의 군사 시민지도자들에게 북한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준비할 것을 언급한 회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이래에 북한의 영토인 개성과 옹진반도의 재탈환을 위한 계획을 수립할 것을 명령했다는 보도가 그해 10월에 나왔고 1956년에는 추가적인 경보와 국면의 전환이 나타났다. 한편 이승만에게 비밀로 한재로 1957년 8월 아이젠아워 정부는 NSC 5702/2승인 하였는데 이는 한국에 대한 핵무기 배치를 승인하고 “작은 변화”라고 말한 측면에서 보면 북한에서 헝가리식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대응하여 한국군 단독대응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인정하는 대한국정책의 중요한 변화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떠돌던 소문 즉 북한측 장성이 자기 휘하 사단병력을 데리고 DMZ를 넘어 망명하려한다는 소문에 대한 대응일 수도 있고 또는 이후 피그만 침공의 실패(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봉기를 촉발시키려 했던 소규모 침투작전)를 불러온 생각의 전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이승만과 그의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그의 측근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John Foster Dulles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Dulles는 전쟁 발발 일주일전 38선 너머 김일성을 주목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기억해두도록 하자. Dulles는 여생동안 마치 뱅코우의 혼령이 그 피묻은 문고리를 흔들고 있는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 일요일의 목소리와 함께 남을 생을 보냈다. 1954년 NSC 회의에서 Dulles는 북한이 전쟁을 다시 시작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보다 창조적인 방식으로 Dulles는 “공산주의자들이 한국군에 침투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전쟁을 도발하여 마치 적대행위가 한국군에 의하여 촉발된 것처럼 보이도록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고위급 회담에서 Dulles는 미국이 한국에서 전쟁이 어떻게 시작될지를 모르고 있으며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1953년 10월 NSC 168차 회의에서 Dulles는 “모든 노력은” 이승만에 의한 전쟁의 재개를 저지해야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경고하였으며 1957년 332차 회의에서도 이승만이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2주후에 Dulles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어느 쪽에서 먼저 시작했는지 알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Dulles가 합동참모부가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려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이러한 특정한 상황하에서 였다. 한국전쟁전 Acheson이 한국에 적용하였던 군사적 억지력을 추진하면서 Dulles는 양측 모두를 억누르고 싶어 했다. 이승만과 김일성처럼 성미가 급한 사람들도 한반도를 핵무기로 파괴할 수도 있는 전쟁을 시작하려면 두 번은 생각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수소폭탄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거침없이 하였고 1954년 의회 합동연설에서 수소폭탄의 사용을 요구함으로써 그를 지지하는 공화당조차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Dulles의 핵무기는 미국만이 통제할 수 있었으며 전면적이고 무차별적 북한의 침략이 있는 경우에만 사용될 것이다.
1958년 2월 미국은 남한에 280미리 전술핵포탄과 어니스트 존 핵미사일을 배치하였으며 1년후에 공군은 “Matador 핵탄두 크루즈 미사일 대대를 영구히 주둔시켰다.” 사정거리가 1,100Km에 달하는 마타도어 미사일은 북한은 물론 중국과 소련까지 조준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방어전략은 전쟁발발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하는 정해진 계획에 맞추어져 있었다. 1967년 미국방부 워게임 계획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남한에 주둔한 12개의 한국군과 미군 사단병력은..전쟁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계획에 맞추어져 있었다.” 1968년 2월 북한은 미국의 첩보선인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여 선원을 11개월간 억류하였다.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초기 대응은 평양에 핵무기를 떨어트리는 것이었다...한국의 공군기지에서 비상대기상태중인 모든 미군 F-4 전폭기들에 핵무기만이 장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지도자들이 사태를 명확하게 생각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미군의 핵지뢰(ADM)는 설계자에 따르면 “최전선을 핵으로 오염시켜 군사공격을 멈추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한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방어목적으로 제작된 무기이며, 핵지뢰의 무계는 60파운드(약 27Kg)이지만 20kton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핵지뢰를 사용하여 2주간 지역을 오염시킴으로써 그 지역을 폐쇄한다.” 핵지뢰는 군용짚으로 운반하여 이를 매고 다니는 특수부대가 매설한다. 동시에 1974년 Washington Post지가 지적한바와 같이 미국의 헬기들은 핵무기를 장착하고 비무장지대를 일상적으로 비행하였다. 한팀이 비무장지대에서의 훈련중에 실을 잃고(실제 1994년 12월 소형정찰헬기가 비무장지대에서 길을 잃었다) 북한측에 핵무기를 넘겨줄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였다. 한편, 핵무기의 전진배치는 “핵을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긴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북한에 의한 소규모 도발도 핵무기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를 사용할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전두환정권 시절 한국 대사로 부임한 Richard “Dixie” Walker는 1975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한국에 있어 미국의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의 존재는 일본에 대한 전략적 보호를 굳건히 하고 일본이 핵무장이라는 프랑스식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여러 정파들의 지도자들이 잘 이해하고 있으며 중국 또한 이를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들은 미국의 정책, 즉 공산주의 적국을 봉쇄하고 동맹인 일본을 제어하는 이중봉쇄정책의 볼모 였던 것이다.
공격과 방어적 핵무기의 사용을 가장 선호했던 지휘관은 Richard Stilwell 장군으로 그가 197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1990년대 까지 지속되었던 팀스피린 훈련을 고안해냈다. 팀스피릿훈련은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으로 200,000명의 정규군이 참여하였으며 그중 70,000명이 미군이었다 – 이미 한국에 주둔하고 있든 주한 미군과 훈련을 위하여 본토에서 파견되는 부대원을 포함한다. Stilwell의 전략에서 이 훈련은 “북한에 대한 보복공격 예행연습이자 적전선 후방에 대한 공세적 타격에 주안점을 둔 Airland Battle doctirne(공지전교리)의 모범이 되었다.” 1976년의 유명한 사건은 새로운 전쟁이 언제든 발발 할 수도 있다는 비무장지대의 대치가 지닌 독특한 “인계철선(trip wire)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부 미군과 한국군이 비무장지대 내 판문점 근처에 있는 “포플러 나무의 가지를” 치기 위하여 금지구역으로 들어갔다. 미군은 나무가 북한측을 향한 시야를 방해 한다고 말하였다. (그 포플러 나무 한그루만 서있었으며 판문점을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그 주변은 전쟁 중 포격으로 인하여 나무가 없었다.) 북한군이 이에 대치하였고 싸움의 와중에 북한군 병사가 미군의 도끼를 빼앗아 두명의 미군병사를 살해하였다. 이는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비정상적으로 무장된 “비무장지대”에서 쌓여온 긴장상태를 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건이었다.
Stilwell장군은 이 대치 상황에서 미-한연합군에 (1953년 이후 처음으로) 최고경계태세를 내렸고 한반도에 미군을 집결시켰다 – 항모기동부대가 대한해협에 진출하였고 핵탑재 B-52폭격기 전대가 괌에서 이륙하여 비무장지대를 향하여 비행하였으며 “마지막 순간 기수를 돌렸다.” 분석가에 따르면 Stilwell은 미국방부에 자신의 부하들과 통신이 두절되거나 명령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자신의 부하들에게 사격을 개시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여기에는 사령부의 통제 없이도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미-한 합동부대가 7대의 공격형 헬기의 호위를 받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무장한 1개 중대병력을 태운 20대의 헬기의 엄호를 받으며 JSA(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마침내 포플러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었다. 한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다른 워싱턴 정보원에 따르면 이 사건에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은 Stilwell 이었다고 한다. Stilwell 장군은 워싱턴에서 Henry Kissinger가 다가오는 대선에서 레임덕에 빠진 Geral Ford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하여 전쟁을 시작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였다.
1991년에 나는 은퇴관료이자 전 주한 미군 사령관이 1980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미국의 전략에 대한 비공개 발표를 들을 수가 있었다. (1) 미국은 만일 대규모 북한군이 비무장 지대 남쪽을 공격하고 있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단계 즉 개전 1시간 이후(H+1) 혹은 1시간 이내에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점이 그의 생각에 유럽에 대하여 작성한 전략과 대비되는 것으로 유럽에서의 전략은 재래식무기를 이용하여 공격을 지연시키고 공격을 멈추게 하여야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상대방 역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극도로 위급한 순간을 제외하면 우리는 감히 유럽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는 상대방에게 핵이 없으므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한 지휘관들은 북한과의 전쟁시 초기 단계에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다.
(2) 1970년대에 개발된 “공지합동 전투” 전략은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가지고 개전 초기 적진 깊숙한 곳에 신속한 타격을 요구하며, 특히 요새화된 지하 시설에 대한 타격을 필요로 한다(북한에 이러한 지하화된 기지가 많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침략을 견제한다기 보다는 “격퇴”를 함축한 전략이다.
(3) 중성자탄 – 강화방사선 무기 – 역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경우 적병력만 살상하고 건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4) 북한은 공지합동전투 교리에 대한 대응으로 1970년대 후반 군을 확대하고 재배치하였다. 이 재배치로 지상군 병력의 80%가 비무장지대 근처에 주둔하게 되었다. 미국과 남한의 자료는 이러한 군의 확대와 재배치가 북한의 호전성의 증거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실 북한은 핵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가능한 많은 수의 북한 군인이 남한으로 넘어가(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관계없이) 한국군과 민간인들과 뒤섞임으로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구상이 1980년대 표준 작전 규범이 되었고 이와 같은 내용이 야전교범에 수록되었으며, 매년 시행된 팀스피릿 훈련에서는 모의 공지합동전투를 시행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북한의 공격을 초기에 봉쇄하고 북한으로 진격하여 궁극적으로는 평양을 점령하여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것을 의미하였다. (1993년 12월 New York Times지는 표지기사에서 이러한 계획을 자세히 다루었으며 놀랍게도 이 계획이 방금 수립된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모의 전투는 한국내에서 실시 되었는데 그 이유는 NATO 정부들과 강력한 평화 운동이 유럽내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의 훈련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비공개 발표에 따르면 걸프전은 핵무기의 역할에 대한 재 평가를 초래하였다. 목표물에 정확하게 도달하는 “스마트” 폭탄과 더불어 높은 효율성을 지닌 재래식 무기가 대규모의 통제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하는 핵탄두보다 유용하였던 것이다. 미군은 가능한 빨리 핵전장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였다고 전직 장군은 말하였다. 결국 미국의 핵정책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1991년 가을 한국에서 구형 핵무기를 철수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철수한 핵무기에는 40발의 203mm 핵탄투 포탄과 30발의 155mm 핵탄두 포탄, 다량의 핵베낭(ADM, Atomic Demolition Munition 이었다. 정부대변인은 1985년 군산의 미군기지에 저장되어 있다고 보도된 약 60발의 F-4,와 F-16용 중력투하 핵탄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걸프전쟁 수행을 위하여 지구를 반바퀴 돌아 대규모 미군 부대를 전개하는데 있어 명시적인 성공으로 인하여 주한 미지상군을 철수하라는 압력(주로 비용절감을 주장하는 하원의원)에 대하여 대응하는 것이 수월해 졌다. 그러나 한국에는 여전히 38,000명의 미군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이러한 핵무기로 인한 협박에 대하여 지하나 산악 요새에 주둔지와 보급창부터 군수공장 심지어는 지하 전투기 격납고까지 엄청난 수의 시설물들을 건설하였다. 걸프전에서 미군에 의한 제공권 장악은 “스마트” 무기체계 – 즉, “당신이 목표물을 보기만 하면 그 목표는 이미 파괴된 것이다” - 의 개발과 더불어 발전된 전쟁 억제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이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원칙에 따라 움직여 왔다. 1970년대 중반 평양은 핵능력을 개발하려한 박정희 정부라는 또 다른 위협에 직면하였다. 이 핵개발계획은 미국의 엄청난 압력으로 중단되었으나 상당한 잠재능력은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건조할 독자적 능력”을 보유하기 위한 비밀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남한은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서로 전쟁중인 이란과 이라크 양국과 같은 불량국가에게 “무뢰한” 무기 공급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글 중 상당부분이 마치 남한이 아닌 북한을 위하여 글을 쓴 것처럼 보이고 평양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평양의 활동 대부분은 미국의 압력과 한국의 도발에 대한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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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주 쉬고 다음 주에 하니 나머지 올려주세요 쉰다는 말을 안 드려서 죄송합니다
마무리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