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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paribbajako
출처: 자연문화 동호회
윤기진
2009-11-19
북미 열전(1)
흔히 군사충돌까지 이르지 않는 적대관계를 냉전이라고 부른다. 북한과 미국은 일반적 개념으로는 냉전관계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 푸에블로호 나포와 미 해군정찰기 EC-121 격추, 그리고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과 같은 소규모 군사충돌을 제외화고는 직접적 충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로 접어들면서 냉전과 물리적 충돌을 기본으로 하는 열전 사이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게 된다. 초속 8km로 날아가는 핵탑제 미사일들은 아무리 길어도 수십 분이면 상대지역을 풀 한포기 남기지 않는 불모지로 만들어 버린다. 짧아도 수 년 길면 수십 년에 걸쳐서 벌어지는 지난날의 열전과 현대전에서의 열전은 그 형식과 과정에서 차이가 크게 날 수 밖에 없다. 이제부터 다루게 되는 지난 20여 년 북미대결사는 이러한 현대전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냉전보다 열전의 수식이 한결 어울려 보인다.
북한과 미국은 모두가 고도의 군사국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 국방위원회가 있다면 미국에는 군산복합체가 있다. 사실 북미열전의 실질적 주체들이기도 하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을 마지막으로 주석제에 마침표를 찍고 98년 최고인민위원회에서 2009년 최고인민위원회까지 계속해서 국방위원회의 권능을 사실상 나라의 최고 수위에 올려놓은 헌법수정 작업을 하였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도 나름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 막판에 대북 신공세와 전술핵무기 사용이라는 ‘용단’도 내린 바 있는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도 61년 퇴임사에서 군산복합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거론하며 ‘막대한 규모의 군사시설과 방대한 무기산업의 결합’은 미국을 병영국가로 만들 수 있다며 ‘예견성’있는 경고를 하였다. 반세기가 지나고 있는 시점에서 그의 예견은 적중하였고 경고는 무시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국방위원회 대 군산복합체, 자위 선군 대 침략제국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이 곧 북미열전이다.
북한과 오마바 행정부가 6자회담과 양자회담의 우선 순위를 두고서 평평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양자 간 밀고 당기는 대결양상을 보더라도 북미관계는 정세향배의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세계 모든 나라를 미국식 자본주의의 피가 자연스레 통할 수 있는 지장과 수탈자로 만들고 팍스아메리카나의 속국화하려는 미국과 이북식 사회주의 노선 고수로 사회주의의 종언을 장담한 미국을 민망하게 만들고 이란과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제 3세계 나라들에게 반미반제 승리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제공하는 북한과의 그 무엇은, 그것이 대결이든 협상이든 국제사회의 비상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북미 간 관계의 기상상태에 다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우리 민족에게야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또한 북미대결 과정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한 이유로 대결국면과 협상국면의 계속된 반복으로 일각에 생길 수 있는 패배적 관점을 들 수 있다.
인류역사에서 하나의 제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나의 자주적 강국이 나타나고 하는 과정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이 대규모의 역사적 장면들이 우리가 지금 돌아보려고 하는 20여 년에 집중되어 있다. 긴 호흡으로 정세를 조망해보면 한반도를 넘어 세계 역사의 흐름이 바뀌고 소위 ‘강대국’의 순위가 앞자리에서부터 재조정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때로는 현미경으로 세밀한 관찰도 해야겠지만 멀리에서 정세를 크게 조망하는 것도 필요한 때가 있다. 그리고 과정에서 드러난 양자간 군사력과 전략, 전술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평가가 필요하다. 북미간 긴장 발생의 근원이야 말할 것 없이 미국에게 있겠지만 매 장면마다에서 주동성을 누가 발휘하는지와 수읽기와 실력행사의 물고 물리는 과정에 대한 연구는 북한에 대해서도 미국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게 도와준다. 북한도 놀라운 군사력과 고도의 전략전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미국도 ‘제국’이라는 명패가 절대 헛으로 얻은 것만은 아님은 막강한 군사력과 교활함, 악랄함으로 보여준다.
90년대의 초부터 이루게 될 북미열전은 클린턴 전, 부시 전, 오바마 전으로 나누려고 한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이 기간 동안 북한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는 일관된 주체가 있었고 반면에 미국은 8년을 주리고 해서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구별에 편리하게 하려고 한다. 클린턴 전과 부시전은 각각 일단락되었으니 별 문제가 없지만 오바마 전은 좀 더 두고 본 후에 정리를 할 계획이다. 그렇다고 앞서 정권 마냥 8년을 기다리자는 것은 아니다. 오바마의 상대 쪽에서 또 다시 ‘8년 주기’를 반복할 생각도 없고 여유나 아량도 없어 보이기에 가까운 시일 내에 오바마 전도 마무리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클린턴 戰
북미 간 긴장이 높아질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인 영변핵시설은 1985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국은 사찰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진달래꽃으로 일찍이 유명세를 가지고 있던 영변은 이때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아비’ 부시가 집권하고 있던 이 시기에 소련은 몰락과 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었으며 91년 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통해서 미국 중심의 일극패권시대가 ‘화려한’ 막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런 기세로 부시는 북한에게 영변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강요하였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하기는 하였지만 ‘안전조치협정’에는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사찰에 대한 법적 근거는 없었다. 북한은 이미 전부터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표명해왔기에 문제의 소지가 없었지만. 당시 이남에 1720여 개에 달하는 전술핵무기를 배치해 두었던 미국으로서는 뭐 눈에는 뭐 만 보인다고 영변핵시설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에 북한은 미국에게 남과 북 전 지역에 대한 동시사찰을 역제안 한다. 모두가 ‘예’ 만을 외치던 때에 ‘아니오’를 거침없이 날리는 북한의 강경한 자세에도 놀라고 역으로 돌아온 동시사찰 주장의 정당성에도 꼼짝을 못하게 된 부시는 북한과 주고받기를 한다. 북한이 ‘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함과 동시에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수용하고 미국은 91년에 이남 지역에서 전술핵무기 철수를 선언하고 92년에는 지금의 키리졸브 전신인 한국전쟁 훈련 팀스피리트를 중단을 선언한다. 소련 해체와 이라크 전쟁이라는 국제 정세와는 달리 한반도에는 때 아닌 유화적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러한 정세에 힘입어 남북 사이에서도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설마 부시보다야 못하랴라는 2009년 오바마에게 했던 많은 이들의 착각처럼.
북한의 약속이행에는 문제가 없었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6회나 순조롭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클린턴은 특별사찰이라는 돌발적 주장을 하고 응하지 않는다면 선제공격도 할 수 있다며 대북강경책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도 선언한다. 영변 핵시설처럼 한정된 지역이 아닌 미신고 시설들과 군사 시설들에 대한 불시 방문을 포함한 특별사찰은 주권국가라며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강도적 요구였다. 일례로 미국이 주도한 특별사찰이 이라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는가. 전쟁과 예속을 가져다주었는가. 중동의 강국, 이라크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하물며 자주를 생명으로 여기는 북한의 반응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했다.
클린턴은 왜 이런 강경책을 택햇는가. 단순히 이전 정부와의 차별성을 위한 제스쳐인가. 아니면 당시 46세라는 젊은 객기로 모험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군사경험이 일천한 탓에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덤비는 것인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먼저 클린턴이 민주당 소속이라는 사실에 대한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비둘기파이건 매파이건 클린턴이건 부시건 오바마건 국방부건 국무부건... 미국의 집권세력이 누가 되고 정책주도를 누가 하게 되든 미 제국 대외정책의 근본적 지향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제국의 국인 앞에서는 모두가 한마음이다. 그렇게 다양한 간판과 색다른 얼굴들은 결국 군상복합체가 주도하는 제국의 본 모습을 치장하고 감추어주는 가면들에 불과하다.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가면을 쓰고서 수십 년 동안 세계 도처에 있는 반미반제 세력들과의 싸움을 승리적으로 이끌고 유일 패권의 시대를 안겨준 군산복합체의 존재감은 삼성공화국과는 비견조차 할 수 없는 절대적 영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군산복합체들이 보기에는 미소냉전이 끝나고 무기시장이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에 대한 대책들이 절실한데 그나마 동북아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의 불씨가 되어줄 북과의 관계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유일패권구도에서 유일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한 북과의 공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임은 뻔하다. 이런 의도에서 그들은 클린턴이라는 가면을 쓰고 국제원자력기구의 거수기들을 동원하여 북에 대한 특별사찰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클린턴전의 막은 오르게 되었다.
‘전쟁을 한 판 벌려봅시다.’
이제 북한이 대답할 차례다. 그 정에 북한 소설의 한 장면을 소개하려고 한다. 북의 소설은 사회주의 문학의 특성상 사실주의를 지향한다. 그 중에서도 ‘불멸의 향도’ 시리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하여 역사적 사실들에 철저하게 근거해서 쓰여지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불멸의 향도’ 시리즈 중 ‘역사의 대하’ 라는 책에는 93년 3월 전쟁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그리고 조선인민군 대장들이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이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김일성 주석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미국이 핵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때 모두가 침묵을 하고 있는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이 답하였다는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만약 적들이 핵무기를 퍼부어 이 땅을 불모지로 만든다면 미국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단 한 알갱이의 핵먼지라도 떨구는 날엔 미국은 불바다가 되고 말 것 입니다.” 소설로써 어느 정도 각색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 장면은 이 소설의 핵심이자 이어지는 북의 실천적 조치들을 보면 소설 속 회의상에서 한 선언들이 상당히 사실에 부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김정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 93년 3월 8일 제 0034호 명령서를 하달하는데 제목은 ‘전국 전민 전군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함에 대하여’였다.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보였다. 그리고 열흘 만에 150만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자원입대 신청을 하였다고 한다. 원래부터도 적지 않은 군대를 보유한 북에서 이 정도의 숫자가 더 해진다면 사실상 전민이 동원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클린턴은 이제 본격적인 전쟁돌입에 들어가기 위해서 북의 멱살잡이까지 했을 정도인데 상대는 눈빛이 형형해지고 온 몸에 근육들이 솟고 옷도 찢어지고 당장에라도 무섭게 달려들 기세를 한 헐크처럼 변했다. 이 때 이미 클린턴은 자신의 만용을 후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이제 막 지휘봉을 빼들고 연주의 지휘를 시작했다. 발단은 되었으니 다음은 전개. 북은 3월 12일 곧장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한다. 미국이 주도해서 만든 국제조약과 기구들이 모두 그렇듯 이 조약도 비핵보유국들의 의무만을 강조하며미국의 독립적 이익만을 보호해 왔다. 이러함에도 북은 영변핵시설의 운용과 동시에 조약에 가입하고 평화적 핵활동을 보장받으며 핵보유국들의 의무조항인 핵위협 핵공격 금지라는 보장도 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3세계의 정당한 평화적 핵활동 만을 문제시하고 노골적인 핵공격위협을 가하는 미국의 행태를 보면서 더 이상 이 조약에 남아있을 필요를 못 느끼게 되었다. 이미 부시 대통령 시절에 우여곡절을 거쳐서 어렵게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합의하며 북의 핵개발과정을 핵확산금지조약과 국제원자력 기구의 통제 하에 묶어 두는 것에 성공했음에도 탈퇴선언 뒤 석 달 만 경과하면 북은 다시 미지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로써 클린턴은 오히려 자신을 시간에 좆기는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위기가 도래할 순서인가. 위기의 주인공은 북의 미사일 발사 실험이었다. 93년 5월 29일부터 6월 2일 동안 7발의 미사일이 한반도 상공을 날아올랐다. 평시라도 수 천 킬로미터를 나는 미사일 발사는 관련국에게 긴장을 고조시키겠지만 준전시상황이 선포된 상황에서야 더 말 할 것이 있겠는가. 권총 한 발이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사일 중 노동 1호(노동은 노동자 할 때 노동이 아니고 함경북도 무수단리에 있는 노동이라는 지명으로 북 이외의 나라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북에서는 노동호가 아닌 화성호라고 불린다. 대포동도 지명일 뿐, 북에서는 백두산, 은하로 불리고 있다.)가 1300km급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미사일 한 발은 일본 열도를 지나서 하와이 호놀룰루 태평양군 총사령부 앞바다에 떨어졌고 한 발은 괌 앤더슨 미 공군기지 앞 바다에 떨어졌다고 한다. 수 만기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보유했던 구소련도 감히 이 정도 도발적 행동을 시도하지 못했었다. ‘최소한’ 주일미군과 주한미군 기지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언대로 ‘불바다’가 될 수 있다는 뒤늦은 불안감이 백악관을 강타했음은 물론이다.
위기의 고조가 이어져 절정이다. 절정의 국면에서 미국은 대화에 나선다. 6월 2일 미사일 발사 직후에 북미 1단계 고위급 회담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이 때 까지도 미국은 회담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는 마음보다는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유예 만료일인 6월 12일 전에 최종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가 우선이었다. 당시 미국 측 대표와 북 측 대표가 주고 받은 대화를 요약해 보자. 먼저 미 측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철회하십시오. 3일 이내에 철회하지 않으면 무력행사 카드를 배제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은 강석주 북 외무성 부상 ‘오늘은 여기서 회의를 마친다고 발표합시다. 3일 후 양국이 서로 선전포고하고 전쟁을 한 판 벌려봅시다.’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상황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 갔다. 그리고 이러한 절정을 미리부터 각오한 측에서는 담담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측에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보편적으로 절정은 매우 짧다. 갈루치는 즉각 이렇게 답한다. ‘아닙니다. 이 회의는 평화를 위한 회의입니다. 절대로 깨지면 안 됩니다.’ 이 순간 결말은 뻔해진다.
핵확산금지조약 탈퇴가 적용되기 하루 전인 6월 11일에 강석주 외무성 부상과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는 북미공동성명을 채택한다. 핵무력의 사용과 위협을 금지하고 서로 간 자주권을 존중한다는 낸용과 핵확산금지조약 탈퇴효력의임시정지가 합의되었다. 이어서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고 북한은 핵사찰을 다시 받아들였다. 짧지만 굵었던 93년 봄의 쌍방교전은 향후 펼쳐질 북미간 대결의 양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누가 이 싸움의 주동에 설 것이고 승리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인가.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역사적 명장면의 연속이었다.
클린턴의 담보서한
협상탁에서 돌아서자마자 클린턴은 자신의 나약함과 경솔함에 대해서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제국의 명예에 누를 끼쳤다는 자책감은 북미공동성명을 전면 부정하고 재도전의 기회를 노리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더욱이 미 제국의 등장 이래 처음으로 펼쳐지는 일극패권의 장밋빛 미래가 북한이라는 자그마한 나라만 넘어서면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또한 재도전의 요구성을 높여주었다. 그렇다해도 세상에 보는 눈들이 있는 터라 미국은 새로운 조연을 등장시키는데 대북특사가 아닌 대북강경책 대리인 ‘김영삼’이었다. 미국은 북과의 협상과정에서 뜬금없는 남북 간 특사교환을 제안한다. 김영삼도 북미회담이 더 이상 진행되기 전에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을 반드시 진행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렇게 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는 남북 간 실무접촉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북의 상대로 회담장에 나온 이는 한국 대표가 아니라 클린턴의 대리인 대변인 이었으니 회담의 결과는 뻔하였다. 소위 남 측 대표는 남북회담 자리와는 동떨어진 핵문제 해결 만을 앵무새처럼 읊었다. 회담이 답보상태인 가운데 북측에서는 한국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이 진행되고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배치되는 것과 관련해 항의 차원의 발언을 하게 된다. 인용하면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그쪽이 전쟁을 강요한다면 피할 생각이 없다. 전쟁의 효과에 대해서 송선생(남측) 측에서 심사숙고 행한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라는 내용이었다. 회담전후 상황에서 볼 때 도발적인 남측 대표를 설득하는 기조였다. 하지만 이 발언에는 김영삼과 클린턴이 원하는 단어들이 들어있었다. ‘전쟁’ ‘서울’ ‘불바다’ 54분 동안 진행된 회담에서 앞의 단어들과 북 측 대표의 몇 가지 표정과 행동만을 조합한 1분짜리 동영상이 곧바로 제작되고 9시 뉴스에 방송되었다. 그리고 북측의 ‘불바다’ 발언과 전쟁도발을 규탄하는 캠페인들이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클린턴은 대북강경책을 부활시킨다. 이번에도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문제로 꼬투리를 잡는다. 국제원자력 기구는 북한이 영변핵시설에서 진행한 핵연료봉 교체를 문제시 하면서 94년 6월 10일에 대북제재결의안을 채택한다. 북은? 당연히 3일 후 국제원자력기구 탈퇴를 선언한다. 이번 대결국면에서는 클린턴도 초반부터 북의 초강경조치를 따라해본다. 영변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한다는 협박을 언론에 흘리기 시작하고 구체적인 날짜까지도 6월 18일로 정하였다. 미국 CNN방송은 곧 있을 한반도 전쟁을 생중계 할 계획을 세우고 휴전선 인근에서의 위성방송을 위해 MBC에 협조요청을 하였다. 그 정도로 전쟁은 구체적으로 준비되었다. 3월에 있었던 불바다 소동보다도 심각한 전쟁위기감이 한국의 민중들에게도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정세 탓도 있겠지만 전쟁억제보다 전쟁불사를 다짐하는 김영삼의 영향이 그에 못지않았다. 멀리로는 이승만이 그랬고 가까이는 MB가 그렇듯 김영삼은 흡수통일의지를 공공연히 내보이며 반북여론조성에 총력을 기한다. ‘6.25를 잊지말자.’ ‘월남전을 잊지말자.’는 멸공표어가 찍혀진 반공방송차량이 거리를 누비기 시작하고 6월 15일에는 전시대비 민방위 훈련이 실제상황을 방불케하며 치러지기도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 특히 수도권에 거주하는 이들의 사재기도 전쟁위기를 실감나게 하였다. 서울 일부지역에서는 라면과 생수, 통조림 등이 동이 나는 사태도 있었다. 주식 대폭락도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용감무쌍한 김영삼에 비해서 클린턴의 심정이 어땠을지도 궁금하다. 도벽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다. 제국주의에게는 목적의식적인 침략전쟁도 있겠으나, 몸에 배어있는 전쟁벽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전쟁벽이든 자존심 때문이든 당연하게 영변폭격을 일정에 올린 클린턴의 만용은 곧 냉엄한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94년 5월 19일에 클린턴의 집무실로 미 합참의장이 보낸 보고서가 급하게 도착하였다. 미국이 자랑하는 슈퍼컴퓨터가 정보당국이 입력한 각종자료들을 근거로 워게임을 진행한 결과를 보고한 것이었다. 미 당국은 보고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막대한 피해규모에 경악하게 된다.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겠으나 90일에 달하는 기간 동안 미군 3만 명과 한국군 45만 명이 사망하고 600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비가 소요될 것이라는 보고였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 가상전쟁에는 아직까지 확보하지 못한 북의 핵과 미사일 기술을 반영할 수 없었다는 것과 북 지도부의 지휘능력, 정신적 무장정도 역시 미지의 세계라는 것이다. 자신이 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극도의 불안감은 미국의 전쟁벽을 다시금 꺾어버렸다.
한국에서 공습경보와 한께 대대적인 전쟁훈련이 벌어지던 6월 15일 클린턴은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으로 보낸다. 카터는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 재개와 핵동결이라는 약속을 받아낸다. 물론 반대급부도 있어야했다. 더욱이 1차 방어전에 이어 2차 방어전을 치루었던 만큼 물어야 할 대전료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현대식 원자로 제공을 북에 약속하였다. 평양회담 결과를 듣고 가장 마음이 놓인 사람은 클린턴이었다. 판을 너무 크게 벌여놓은 탓에 판을 자기 손으로 수습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진짜 싸움을 하자니 자신이 없던 차에 전해진 타결소식은 정책전환의 훌륭한 명분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2차 방어전도 북의 승리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다시 김영삼의 어색해진 처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과 함께 충직하게 사냥감을 쫒던 ‘사냥감’과의 극적인 화해를 보면서 느꼈을 정신적 공황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하지만 놀라운 종속성은 곧 다시 확인되는데 6월 24일 북미회담이 재개되고 나흘이 지난 28일에 김영삼은 7월 25일 평양방문과 남북정상회담을 한다는 계획을 전격 발표한다. 이러니 통미하면 통남은 저절로 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개된 북미협상은 10월에 들어서 제네바합의라고 불리는 북미기본합의서 채택을 위한 막판 총력전에 접어든다. 이 시기 한 달 동안 진행한 회의가 40차례, 120시간이었다고 하며 도중에 미국 측 대표는 두 번이나 본국에 호출을 받기도 했으며 결렬의 위기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미 기세가 한 풀 꺾어졌다고는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이 얼마나 질긴지를 알 수 있는 경우다. 제네바 합의에서는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경제제재 해제, 경수로 2기 제공, 핵 동결이 주요 내용이었다. 내용적으로도 북미공동성명보다 구체화된 것이 많이 있지만 제네바 합의에서 가장 큰 특징은 기본합의서 채택 하루 전에 클린턴 대통령의 담보서한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제출된 점이다. 북은 이미 약속파기의 ‘전과’가 있는 클린턴에게 분명한 담보를 요구했다. 그 대답이 94년 10월 20일 클린턴 담보서한이었다. 이런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서 담보서한은 평양 대동강에 전시된 푸에블로호만큼이나 북한에게는 빛나는 전리품이 되고 있다. 여기에 그 전리품을 가감없이 소개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 각하
각하
나는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될 경수로 발전대상의 자금 보장과 건설을 위한 조치들을 추진시키며 1호 경수로 발전소가 완공될 때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될 대용에너지 보장과 필요한 자금 조성과 그 이행을 위한 조치들을 추진시키겠다는 것을 당신께 확언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나는 이 원자로 대상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책임이 아닌 다른 이유들로 하여 완공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미합중국 국회의 승인 밑에 미합중국이 직접 맡아 완공하도록 할 것입니다. 동시에 나는 대체에너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책임이 아닌 다른 이유들로 하여 제공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나의 모든 직권을 행사하여 미합중국 국회의 승인 밑에 미합중국이 직접 맡아 제공하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기본합의문에 지적된 정책들을 계속 이행해나가는 한 이 행동방향을 견지할 것입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미합중국 대통령 빌 클린턴 1994년 10월 20일 워싱턴 백악관 』
고난의 행군
클린턴의 담보서한은 진심이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클린턴이 생각하기에 북한에서 반세기 동안 ‘절대적’ 지도자로 자리를 지키던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공백은 자신의 대북강경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대화와 전쟁이라는 단순한 양자택일 노선에서 교훈을 찾고 철저한 고립과 봉쇄정책으로 북한을 고사시키는 새로운 전략도 마련하였다. 마침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연이은 붕괴로 클린턴의 ‘새’전략은 ‘대제국’으로서 자존심은 상하지만 챔피온 벨트를 되찾아 올 수 있는 승산있는계획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유명한 대학교수가 TV에 출현해 빠르면 3일, 아니면 3개월, 늦어도 3년이면 북한이 붕괴한다는 3-3-3 설을 주장하고 봉기와 쿠데타로 늦어도 2000년까지는 붕괴한다는 내용이 전부인 ‘미리보는 코리아 2000’이라는 책이 버젓이 서점가에 진열되기도 했다. 북미관계도 남북관계도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물론 김영삼도 ‘주인’의 변심에 빠르게 발맞추어 조문파동을 계기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흡수통일을 공개적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미국의 상황판단이 상당부분에서 ‘정확’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북한에서도 90년대 중반의 이 시기를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고난’과 ‘행군’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 의미 이상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이 한창이던 1938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압록강 연안의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까지의 행군을 가지고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지칭한다. 실제 거리는 도보로 대엿새면 닿을 수 있는 짦은 거리였지만 항일유격대는 100일 이상을 걸려서야 행군을 마쳤다고 한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추위도 문제였고 일주일 동안 곡기를 끊고 행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을 정도로 기아도 문제였다. 더욱 심각한 난관은 하루에 스무 번까지도 뒤쫓는 일본군대와 접전을 병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에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혁명가는 아사, 동사, 타사를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 수없이 떠올랐으리라. 후세의 우리들은 그렇게 엄혹한 조건이라면 한동안 적들이 없는 후방 밀영에서 전열을 추스르며 기회를 엿보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반문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때는 국내의 항일지하조직들이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에 와해되기도 하고 움츠려들기도 하는 상황이었고 항일유격대가 전멸했다는 일제의 왜곡선전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유격대의 활동에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조국의 현실은 유격대의 현상 유지가 아닌 정면돌파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도 역경을 맞받아 나가는 전술을 택하고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적들의 추격과 봉쇄망을 뚫고서 국내 민중들에게 유격대의 총소리를 들려주고자 100일 행군을 감행하였다.
항일전의 그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심각한 위협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북한이라는 나라의 존망까지를 우려하기도 하고 점쳐보기도 하였다. 기록적인 홍수 두 번과 가뭄이 연이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고 석유와 원자재에 대한 미국의 철저한 고립, 봉쇄는 나라의 모든 공장을 멈춰세우고 불빛을 꺼뜨리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식량난은 사람들을 하나둘 쓰러지게 만들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부정하기 어려운 분명한 효과를 내고 있었다. 94년 6월 18일에 개시하려고 하였던 전쟁이 이렇게 변형된 형태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책은 무엇인가. 처한 객관적 환경이 ‘고난의 행군’과 같다면 대응방향도 그 때와 같을 수밖에.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시련들에 대한 일시적인 대책이 아닌 장기적이며 근원적인 대책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선군정치’의 전면화였다. 총소리가 울리지는 않지만 미국이 고안한 ‘새전쟁전략’에 따른 위기인 만큼 대응도 군사적 조치로 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선군정치’ 전면화 방침에 따라서 북한은 군사를 앞세우는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다. 무기들을 현대화, 첨단화시키고 군대와 인민들에 대한 간부화, 무장화를 심화시키고 정치체제도 군사 우선의 시스템으로 완전히 개변시킨다. 항일전 당시 ‘고난의 행군’이 유격대오를 단련하고 유격전 전법과 전술을 종합적으로 시험, 완성하는 과정이었듯이 현대의 ‘고난의 행군’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한 ‘선군정치’가 그 완성도를 더해 가는 과정으로 되었다. 그 누가 떠들던 ‘3년’도 다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클린턴전을 슬슬 마무리할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광명성 충격
3일도 지나고 3개월도 지나고 3년도 훌쩍 지났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완벽하게 봉쇄된 그 땅에서는 원하는 붕괴음을 들을 수가 없었다. 클린턴의 마음은 다시 조급해졌다. 대북고립과 봉쇄정책의 실패를 부정하기 어렵게 되고 있었다. 클린턴은 다시 만용을 부린다. 역시 전쟁벽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98년 6월 초에 미 공군은 한국전쟁을 가상한 장거리 핵투하훈련을 벌인다. 그리고 기존의 전쟁계획5027을 한층 침략적으로 갱신한 5027-98을 만들고 그에 따른 북한 지역의 주요 군사목표에 대한 선제타격설을 언론에 흘리기 시작한다. 또한 3차 도전의 명분으로 평안남도 금창리에 있는 거대한 동굴을 등장시킨다. 이곳이 비밀 핵개발 시설이라는 주장과 함께 사찰을 요구하고 나섰다. 클린턴의 마지막 승부수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기존에 고려하던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전쟁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핵전쟁이라는 극단의 선택까지 하게 되었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 핵투하를 할 수도 있었다는 사상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진다. 참으로 거대한 사이코패스 집단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또 북한에서 무언가 내놓을 순서였다. 클린턴도 초조한 심정으로 북한의 대응조치를 기다렸다. 93년에 당한 초강경과 연속타격의 기억이 선명하기도 했고, ‘고난의 행군’을 거치고 있을 수 있는 변화에 대해서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대응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예상치 못했던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 인공위성 발사였다. 98년 8월 31일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로켓 백두산 1호(미국에서는 대포동1호라 지칭)에 실어서 미국의 봉쇄망이 미치지 못하는 하늘을 뚫고 우주로 날려보냈다. 9월 4일에 북한 관영 중앙통신은 ‘우리는 다계단 운반로켓으로 첫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같은 날 러시아 위성관측센터 대변인도 ‘북한이 지난 달 31일 북위 40.8도, 동경 129.7도에 위치한 무수단리에서 성공적으로 최초의 자국산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9월 5일 중앙일보는 광명성1호 발사에 대하서 ‘스푸트니크 못지않은 과학기술적 충격’이라고 보도하였다. 스푸트니크는 1957년 10월 4일에 소련이세계최초로 성공시킨 인공위성이다. 냉전의 시대였던 만큼 반응은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특히 미국이 받은 ‘부정적’충격은 진주만공습에 버금간다고 할 정도였다. 미국의 한 주지사가 스푸트니크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날 밤에 썼다는 시를 소개한다. ‘오, 하늘을 높이 나는 / 소련제 작은 스푸트니크여 / 너는 말하지 / 빨갱이 하늘이 됐어 / 그런데 샘 아저씨는 잠자고 있네.’ 샘 아저씨는 미국을 뜻한다. 그날 밤 그 주지사처럼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을 미국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로켓기술에서 소련에 뒤쳐진다는 것은 정치적 패배로서도 낭패지만 군사적으로도 핵폭탄을 이용한 소련이 전략과 전술이 차원을 달리하는 영역에 들어선다는 점에서 심각한 불안감을야기할 수밖에 없다.
스푸트니크 충격의 전례와 비교해 볼 때 광명성 충격은 더 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광명성 1호의 성공적 발사 이전에도 미국은 가상전쟁에서 북한을 제압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대륙간탄도미사일의 문턱을 넘었다고 평가되는 광명성 이후에야 더 말할 것도 없게 되었다. 북한은 사람, 즉 군인에서 비교우위를 가지고 미국은 무기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기존 평가도 전면 수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98년 12월 2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대변인의 경고는 이러한 미국의 우려를 한 순간에 굳은 확신으로 전환시켜 주었다. ‘선제공격은 미국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지구상에 조선의 공격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대놓고 피할 곳이 없다는 북한의 ‘협박’에 3차 타이틀 방어전의 승패로 이미 갈린 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광명성1호의 발사 굉음은 ‘고난의 행군’이 끝마치는 소리이기도 했다. 행군 과정은 피눈물의 언덕을 넘어서는 고통을 수반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적 선택인 군사우선의 방침은 적중하였다. 현상유지나 일시적인 난관극복을 위한 미봉책에 유혹되지 않고 장기적인 국가발전 전망을 가지고 한 길을 헤쳐서 마침내 ‘광명’을 맞이했다. 99년 1월 1일 신년 공동사설은 ‘고난의 행군’에서 마련된 성과를 토대로 ‘강성대국’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다. 그리고 99년 2월 8일에 처음으로 ‘선군정치’라는 단어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북한의 모든 국력을 총집중 시켜서 북미대결의 전환적 순간을 마련했으니 이제부터는 그렇게 마련한 군력과 인민력과 지도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광명성과 함께 우주로 향하게 되었다. 광명성 충격과 더불어 광명성 효과도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시 금창리 동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미국이 광명성 발사 이전에 요구했던 사찰에 북한은 조건부 허락을 한다. 그런데 그 조건부가 무슨 정치적 조건이 아닌 3억 달러의 참관료였다. 참관료라니. 국제원자력기구 사찰 역사는 물론이고 국제 외교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조건이었다. 북한은 ‘동굴 사찰’은 안 되지만 ‘동굴 관광’은 허가할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제시된 금액이 너무 엄청났다. 클린턴의 선택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사실 클린턴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이미 광명성 충격에 노출된 순간에 세 번째 만용은 끝이 났기 때문이다. 결자해지. 북한과 대화재개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제기했던 금창리 핵 의혹은 스스로 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클린턴은 북한의 조건에 조건을 다시 건다. 3억 달러를 5억 달러 상당의 식량으로 대체하겠다는 조건을. 물론 북한은 흔쾌히 수락하였고 ‘동굴 관광’은 99년 3월에 이루어졌다. 동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아쉽게도’ 아무것도 없는 동굴이었다고 한다. 그냥 텅 빈 거대한 동굴. 아무런 재미도 없는 비싼 관광이었다. 빈 동굴은 이후에 무엇으로 썼을지 모르겠다.
금창리 의혹이 ‘근거 없음’으로 판명되고 미국은 대북협상에 나서게 된다. 이번에는 전 국방장관 페리를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하고 99년 5월에 대통령 특사자격까지 얹혀서 북한으로 보낸다. 그리고 페리가 돌아와 그 해 9월에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가 ‘한반도 냉전종식을 위한 포괄적 접근’이고 흔히 페리보고서라고 불린다. 보고서의 중심기조는 대북포용정책이고 구체적으로는 외교관계 수립, 제재철폐, 원조제공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보고서의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페리가 방북 후에 남긴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시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대해야 한다.’
이정도면 상당한 관점의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강경파로 분류되는 페리를 무엇이 바꾸어 놓았는가. 페리는 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북 소설 ‘총대’에서 당시와 관련된 두 장면을 소개해 보겠다. 이 소설도 ‘불멸의 향도’ 시리즈다.
한 장면은 페리 일행이 방북했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인민군 병사의 사격술에 대한 내용이다. 시작은 사격술 구경이었지만 자동소총 한 발에 집채만 한 목표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면서 끝은 페리일행의 자국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성능을 가진 자동소총에 대한 놀라움으로 마무리 된다. 광명성 1호 발사가 북한이 가진 첨단과학기술의 전부는 아니다. 그에 비견될 만한 첨단기술이 국방의 각 분야에서 벌써부터 실용화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북한의 조사기술력에 대한 더욱 충격적 사실을 암시하는 장면도 소설에는 등장한다. 98년 9월에 발사된 광명성 1호가 갓 개발된 따끈따끈한 신제품이 아니고 김일성주석이 생존해 있던 시절에 발사를 보류하고 있던 구제품이라는 언급이다. 이름과 종류를 밝히지 않은(군사기밀일테니) 신제품이 있지만 세계적인 소동과 불필요한 군비경쟁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광명성 1호‘나’ 발사할 것을 지시한다. 광명성 충격으로 서둘러 북한을 방문한 페리가 이런 현실의 일단이라도 접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전변된 방북소감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페리보고서가 내놓은 대북포용정책의 제안에 따라서 북미관계는 물론이고 남북관계에도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15일에 발표된 조국통일의 이정표인 6.15남북공동선언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주요한 배경도 되어 주었다. 바야흐로 반세기동안이나 한반도를 뒤덮고 있던 항시적 전쟁위기의 먹구름과 대결의 장막이 걷혀지는 순간이었다. 변화는 계속되었다.
2000년 10월 9일에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인 조명록 차수가 클린턴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 백악관을 찾았다. 놀라운 사태 발전이었다. 그리고 그 만남에서는 ‘조미공동코뮤니케’를 합의한다. 서로 적대의사 포기와 새로운 관계 수립, 자주권 호상존중과 내정불간섭, 호혜적인 경제협조와 교류, 그리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 유예 등의 내용이었다. 이 만남에서는 클린턴의 평양방문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도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11월에 클린턴의 방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전에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회담을 가진다. 그러나 아쉽게도 클린턴의 평양행은 그 해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당선자 부시가 반대의사를 밝히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클린턴전’을 마치게 되지만 북미열전은 아직 이다. 싸움을 결속 짓지는 못했지만 클린턴전 8년의 기간은 한반도 내외의 많은 나라와 민중들에게 북한과 미국의 모습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역사적 계기와 사건들을 만들어 냈다. 클린턴은 삼 세 번을 덤벼서 삼 세 번을 완벽하게 패하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민주당을 비둘기와 함께 연상하는 사람들, 클린턴을 협상파라고 기억하는 사람들, 민주당 오바마에게 기대를 가지는 사람들에게 클린턴전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93년 북미공동성명, 94년 제네바 합의와 클린턴 담보서한, 2000년 공동코뮤니케는 북한이 클린턴전에서 싸워서 쟁취한 전리품들이다. 클린턴의 선사가 아니다. 2009년 8월 클린턴 전 대통령의 평양행을 보면서 2000년 11월의 지켜지지 못한 약속을 떠올리게 됐다. 필자가 보기에는 소환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불편한 평양방문이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어쨌든 아비 부시 못지않은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패한 클린턴 다음 주자는 다시 클린턴 못지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미 제국과 군산복합체의 보이지 않는 손들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한다. 다음 대북 카드를 준비하기 위하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