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차이나 여행 (1)
캄보디아
스위스의 영화 제작자 베르나르 베버 씨가 2007년 7월 7일, 전 세계 네티즌을 상대로 전자투표를 통해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선정했는데, 수많은 문화유산 중 앙코르 유적이 가장 강력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트남의 하롱베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이 두 나라의 명소를 한데 엮은 인도차이나 여행 코스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도차이나(Indochina)란 말은 프랑스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쓴 말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타일랜드, 미얀마 등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인도와 차이나 사이에 있는 지역이라고 그냥 붙인 이름이지만 이 지역의 문명은 실제로 인도(캄보디아)와 중국(베트남)의 영향을 받아 이뤄진 것입니다.
인도차이나 여행 제1일(2010년 2월 23일), 첫 목적지인 앙코르 와트를 찾아 떠났습니다. 10시 25분 김해공항을 이륙, 3시간 후 중간 경유지인 베트남의 호치민 시에 도착했습니다. 옛 이름 '사이공(Saigon)'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의 이름에서 따왔듯이 상공에서 내려다본 호치민 시는 크고 작은 강줄기들에 휘감겨 있었습니다.
산이라곤 전혀 없는 완전한 평원지대에 수많은 사행천들이 구불거리며 큰 강으로 흘러들고, 큰 강 사이공은 그 많은 물들을 모아 너른 들판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호치민 시(옛 사이공)는 과거 강 상류를 거슬러 포 섬까지 여행한 중국 일본 서양 상인들에 의해 무역중심지로 발전, '동양의 진주'라 칭송받은 바 있습니다.
북쪽의 하노이가 정치적 수도인데 비해 예전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호치민 시는 베트남의 최대 도시이자 경제 수도로 불립니다. 1989년부터 베트남 정부가 쇄신(刷新)이라는 의미의 '도이모이(Doi Moi) 개혁 ‧ 개방정책으로 급격한 발전을 거듭한 결과, '베트남의 영혼' '베트남의 심장'이라 부를 만큼 역동적이고 번잡한 산업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씨엠립(Siem Reap)
1 5시 50분, 호치민 탄손누트 국제공항을 이륙, 55분 후 캄보디아 제2의 도시 씨엠립(Siem Reap)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국토는 남한 면적의 2배나 되지만 인구는 1400만 명 정도에 불과한 나라,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많은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아직도 치안이 불안한 상태의 최빈곤국가인 캄보디아 땅을 처음으로 밟게 되었습니다.
한때 나라 이름을 '크메르 루즈'(Khmer Rouge)라 부른 적이 있는데, '루즈'가 붉다는 뜻이니, '붉은 캄보디아'란 말입니다. 우리도 한때 공산당을 '빨갱이'라 부른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캄보디아, 캄푸치아, 크메르 등 여러 국명들은 모두 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말이지만 국명이 수시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족사의 아픔이 응축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현재의 국명은 1993년 이래 '캄보디아 왕국'(Kingdom of Cambodia)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씨엠립은 조그만 언덕 하나 없이 전체가 평원이었습니다. 농경지 사이로 난 붉은 황톳길들이 직선으로, 또는 곡선을 그리며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동아시아 최대의 호수인 톤레삽 호수 바로 위에 있으며, 앙코르와트 유적군의 게이트웨이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의 이름, 시엠립은 '샴족(Siem=Siam=타일랜드 사람들)을 물리쳤다'란 의미라고 합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압사라 민속춤 공연을 감상했습니다. 인도차이나 지방의 전통 무용하면 화려한 분장을 한 무희들이 긴 손톱을 손에 끼고 경쾌한 동작을 보여주는 태국의 '훤렙'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무용의 원조는 캄보디아입니다. 바로 고대 크메르왕국의 무희들이 즐겨 췄다는 '압사라 댄스'입니다. '압사라'는 춤추는 여신 또는 물 위에서 태어난 천상의 무희를 뜻하는 말입니다.
압사라 댄스는 앙코르와트의 외벽에 수천 개의 압사라 부조들이 조각되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춤입니다. 화려한 의상과 분장을 한 무희들이 느릿느릿한 전통음악에 맞춰 섬세한 동선을 표현하며 진행되는데, 15분 동안에 4천여 동작이 연속된다고 합니다.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전통무용으로 예술적 완성도가 무척 높은 춤입니다.
오리궁둥이처럼 엉덩이를 뒤로 내밀고 앞가슴은 앞으로 내민 모습으로 춤을 추는 모습 중에서도 가장 미묘한 것은 손가락을 휘감는 동작들이 또아리를 트는 뱀대가리를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뜻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크메르 왕조의 건국 배경이 된 힌두신화들을 신비롭게 표현하는 것이라 합니다.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 사원
제2일 아침, 반테이 스레이 사원을 향했습니다. 시엠립은 예전 한적한 시골마을이었으나 앙코르와트 관광객이 몰리면서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했는데, 관광객 중 한국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길거리엔 고려정가, 서울가든, 평양랭면, 한국관, 압사라 한식, 늘봄가든, 경복궁, 반찬가게 등 한국어로 된 간판들이 한 집 건너 한 집일 정도로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출발 10분 후 매표소에 도착했습니다. 입장객마다 증명사진을 찍었습니다. 얼굴 모습이 촬영된 입장권을 받아 목에 걸고 인원 확인을 받은 후에야 입장이 허용되었습니다. 이 입장권은 앙코르 유적 전 지역에 모두 통용된다고 합니다. 버스는 거목들이 숲 터널을 이룬 호숫가 직선 도로를 계속 달렸습니다. 힌두교에는 1000개 이상의 신이 있는데, 창조의 신 브라만, 유지의 신 비슈뉴, 파괴의 신 시바가 3대 신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신도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시바의 신이고, 반테이 스레이 사원은 유지의 신 비슈뉴를 모신 곳이라 하였습니다.
매표소에서 40분 후 반테이 스레이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사원 입구의 논에 벼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나락 잎에 메뚜기들이 붙어 있는 걸 보니 무농약 재배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사원으로 향하는 길은 모두 홍토(紅土)가 깔린 황톳길이었습니다. 반테이 스레이 사원의 건축재인 홍토석(라테라이트)은 표면에 작은 구멍들이 뿅뿅 뚫려 있는 붉은 색의 사암(砂巖)인데, 강도가 아주 세어 현대 건축에서도 바닥재로 많이 쓴다고 합니다.
사암은 앙코르 동북부 30km 거리에 있는 클렌산맥에서 채취되어 씨엠립강을 따라 뗏목으로, 육로에서는 코끼리, 물소 등이 끄는 마차를 이용하여 운반했다고 합니다. 역대 왕들이 이 사암을 경쟁적으로 많이 사용하여 13세기 초에 동이 나버리자 그 뒤로 크메르제국이 급격히 쇠락해졌다고 합니다. 반테이 스레이(Banteay Srei)는 '여자의 성채'란 뜻인데, 'Srei'가 '성채'라는 말입니다. 벽면에 아름다운 여신상들이 많아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고, 그 조각 기법이 너무도 섬세해서 여자 석공들에 의해 조성된 성채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으로 꼽힙니다.
아름다운 여신상의 황홀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1923년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 여신상을 도둑질한 후 밀반출하려다가 프놈펜의 감옥에 갇힌 일화도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굴꾼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훗날 프랑스의 유능한 문화부장관이 되었습니다. 앙코르와트 사원들 중 보기 드물게 붉은 색 사암을 많이 사용하여 석양이 질 때면 사원 전체가 붉은 빛으로 불타오르듯이 찬란한 광채를 내뿜는다고 하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 구름이나 물을 나타내는 조각들이 매우 정교하여 '크메르 예술의 극치'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앙코르 유적지 중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히는 이곳은 다른 유적지와는 달리 건축술과 장식이 인도문화에 가까운 것 같았습니다.
사원 앞에는 남근석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원 벽면의 시바 신 조상(彫像)에는 시바 신의 성기(닝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시바 신의 성기를 숭배하는 닝가사상(남근숭배사상)이 가락국시대에 우리나라에도 들어온 바 있습니다. 이중 구조의 조각상들이 특이했는데,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화려했던 앙코르 와트의 옛 문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승려들이 기거하던 방들의 문설주 위에 새겨진 부조(浮彫)들은 금방 조각을 끝낸 것처럼 정교하고 섬세했으며, 장서고 문 양쪽 옆에는 풍만한 유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두 명의 압사라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실제로 300년 전까지만 해도 캄보디아 사람들은 윗옷을 입지 않고 생활했다고 합니다.
시바 신의 앞에는 엎드려 대기하고 있는 소(난디)의 조각상이 깨어진 상태로 있었는데, 소는 시바 신의 자가용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중앙 사당에 자리 잡고 있는 '테바다 상'은 풍만한 젖가슴을 드러낸 채 아리따운 자태로 서 있는데, 발견될 당시 유럽에서 '동양의 모나리자'로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서구인들의 무지와 오만에서 비롯된 가당치도 않은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사원 앞 연못에는 홍련(紅蓮)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고, 물가에는 물소 한 마리가 시바 신과 관련된 이 사원의 유래를 알리기라도 하듯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앙코르 유적지 1,000여 개의 사원 중 처음으로 만난 반테이 스레이 사원에서의 추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앙코르 와트(Angkor Wat)
반테이 스레이 사원을 출발, 45분 후 시엠립 인근 고대 유적 터의 중심을 이루는 앙코르 와트에 도착했습니다. 앙코르(Angkor)는 현지어 옹코르(Ongkor)와 관련된 것으로 왕도(王都)의 뜻이며, 앙코르 와트는 왕도의 사원이란 뜻입니다.
캄보디아 국기는 24년간 정치체제가 바뀔 때마다 바뀌었다고 하는데, 여섯 번째 바뀌었다는 지금의 국기 가운데 붉은 바탕에는 3개의 탑이 있는 앙코르 와트가 그려져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의 상표 이름도 앙코르이고, 캄보디아 화폐 리헬에는 앙코르 와트 무늬가 들어 있으며, 국경에는 앙코르 와트 모형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캄보디아 전체 국가 수입의 첫째도 앙코르 와트 관광객들로부터의 관광 수입이라고 하니 앙코르 와트는 캄보디아의 정신적 지주이며 상징입니다.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인 동시에 오늘날 전체 국민을 먹여 살리는 경제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앙코르 와트는 이 나라의 최고 유적이지만 이곳 왕도에 있는 수많은 사원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원이 동쪽을 향해 있는데 비해 앙코르 와트는 해와 달의 움직임을 반영해 서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천문대 역할도 했으며, 우주의 변화를 표현한 사원이라 합니다.
사원 입구에서 앙코르 와트로 들어가기 위해 길게 이어진 다리[神道]를 건너야 했습니다. 이러한 다리를 영어로는 코즈웨이(causeway)라 하는데, 둑방이란 뜻입니다. 대부분의 신도가 해자의 중앙에 제방길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합니다.
다리 난간은 모두 '나가'(Naga: 七頭蛇, 사원의 수호신)상으로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한 몸통에 일곱 마리씩 양면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캄보디아 사람들은 '나가'를 용으로 인식하며, 생산력의 보호자이며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는 영험스런 존재로 여긴다고 합니다.
다리를 건너 사원에 다가섰습니다. 사원의 벽면과 8개의 팔을 지닌 비슈뉴 상에 남겨진 수없이 많은 총상의 흔적을 보고 모두 안타까워했습니다. 팔이 8개 있어 8개의 무기를 들고 세상을 다스린다는 비슈뉴 상의 발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은 이뤄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석상의 발이 까맣게 돼 있었습니다.
개별 사원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60만 평)라 하는데, 동서로 약 1,500m, 남북으로 약 1,300m, 높이 65m의 중앙탑을 중심으로 이어진 앙코르 사원은 3층형 구조로 되어 있고, 중앙에 5개의 원뿔형 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층은 미물계를 상징하는데, 1층 외벽 회랑은 지구상의 예술품 중 최고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갖가지 부조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회랑의 부조 그림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으면 관람시간 1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지만 사전지식이 없거나 가이드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회랑의 외벽은 으리으리한 돌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참고할 만한 책자로 <신의 거울(원제: Heaven's Mirror)>(그레이엄 핸콕 지음, 김영사)이 많이 추천됩니다.
이 책은 고대 유적지들이 태평양, 이집트, 멕시코, 남미, 캄보디아 지역의 고대 유적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데, 산타 파이아라는 사진작가가 촬영한 아름다운 사진들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절판되어 서점에서 구입할 수 없으므로 도서관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대신할만한 책으로, 도올 김용옥의 <앙코르 와트 ‧ 월남 가다(부제: 조선인의 아시아 문명탐험)>(통나무)가 있습니다.
1층 오른편 서쪽 회랑의 48.35m 길이의 벽면에 새겨진 부조물에는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쿠루평원의 전투' 내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촌간의 피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의 이 전투 이후로 인간이 급속히 타락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불교신화의 원형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남쪽 회랑으로 돌아들면 왕좌에 앉아 제후들의 충성 서약을 받고 있는 수리야바르만 2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곳곳에 붉은 색으로 채색했던 흔적도 남아 있었습니다. 수리야바르만 2세 머리 위에는 수많은 일산(日傘 ‧ 해를 막는 우산)이 세워져 있는데, 일산의 숫자는 권위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간을 심판하여 찬국으로 보내기도 하고 지옥으로 보내기도 하는 염라대왕과 그 뒤에서 손을 들고 있는 수리야바르만 2세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 부조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왕이 염라대왕의 판결을 뒤집는다는 이야기인데, 수리야바르만 2세는 염라대왕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역설함으로 해서 백성의 믿음을 사고자 한 것이라 합니다.
비슈뉴 신이 타고 다니는 새의 왕[鳥神] 가루다의 모습, 낙태한 여자들만 있는 불지옥, 선신과 악신의 줄다리기 모습 등 앙코르제국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던 이야기들이 두루마리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가니 인간계를 상징하는 천상의 무희 압살라가 끝없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고 머리카락부터 보석 장신구까지 너무도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왕과 승려들만 출입이 가능했다는 중앙탑이 있는 3층은 천상계를 상징한다는데, 중앙 사당으로 향하는 길은 경사가 무려 70도나 되는 계단을 올라야 했습니다. 오른다는 표현보다 기어서 올라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함까지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주기 위해서 가파른 계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천상계에 올라서니 앙코르 와트의 배치와 구조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도 좋을 만큼 앙코르 와트의 경관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제공하였습니다.
앙코르 톰(Angkor Thom)
앙코르 와트를 나와 북쪽 방향에 있는 앙코르 톰으로 향했습니다. '앙코르'는 도시, '톰'은 크다는 뜻이니 앙코르 톰은 '거대한 도시'란 뜻입니다. 크메르제국 후기의 성군인 자야바르만 7세와 그의 승계자들이 이룩해 놓은 도시로, 과거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런던의 인구는 5만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앙코르 톰은 100m 정도의 폭을 지닌 해자가 사각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그 길이가 13.2km라 합니다. 사방에 모두 문이 있는데 동쪽에는 두 개의 문(승리의 문과 죽은 자의 문)이 있어,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5개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는 남문으로 갔습니다. 문으로 들어서려면 해자에 걸쳐진 다리(코즈웨이)를 건너야 했습니다.
다리의 양쪽에는 각기 54개의 석상이 서 있는데, 왼쪽의 54선신과 오른쪽의 54악신들이 몹시 거대하고 사나운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다리 난간은 모두 돌로 만든 것인데, 쪼아서 거대한 뱀의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다리 양쪽 끝에 나가(Naga : 七頭蛇, 사원의 수호신)가 있고, 양쪽의 54신들이 모두 뱀을 잡아당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선신과 악신들이 각기 뱀을 잡고 있는 것은 불멸을 획득하기 위한 신과 악마의 싸움과 관련한 '우유바다 휘젓기'신화 내용을 표현하려 한 것입니다. 앙코르와트의 부조는 수미산을 정중앙에 두고 그것을 휘감은 한 마리의 뱀을 잡고 양쪽에서 줄다리기하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여기서는 수미산을 상징하는 바이욘을 축으로 하여 다리 양쪽에 선신과 악신을 각기 나열시켜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유바다 휘젓기'신화 내용을 알지 못하면 한 마리의 뱀을 잡고 양쪽에서 줄다리기하고 있는 모습의 앙코르 와트 부조와 앙코르톰의 석상들이 왜 늘어서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김용옥의 <앙코르 와트 ․ 월남에 가다>란 책 58-83페이지 부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앙코르 톰으로 통하는 문들은 모두 동일하게 만들어졌는데, 높이가 23m로 코끼리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의 높이와 너비로 지었다고 합니다. 사암 통돌들을 37키로 밖의 꿀렌산에서 수로를 통해 운반하여 지은 이 성문 위에는 4개의 커다란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사원을 지은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자야바라만 7세는 우리나라로 보면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합친 왕으로 문무에 모두 출중했던 왕이었다고 합니다. 캄보디아의 영원한 성웅으로서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자야바르만 7세(1181-1219 치세)는 여러 전쟁의 승리를 통해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장군으로서는 투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조각상에는 지그시 눈을 감고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바이욘(Bayon) 사원
거대한 계획도시이자 크메르 왕국의 수도였던 앙코르 톰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바이욘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통돌로 지어졌는데, 중앙탑을 중심으로 하여 피라미드형으로 조성돼 있었습니다. 54개의 탑에 200여 개의 큰바위 얼굴들이 조각돼 있는데, 그 모습이 보는 각도와 빛의 방향에 따라 때론 엄하게 때로는 온화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대부분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어 '앙코르의 미소'로 더욱 알려진 사원입니다.
자야바르만 7세가 크메르왕조가 붕괴되기 직전인 13세기 초(추정)에 세운 이곳 바이욘(바욘) 사원의 큰바위 얼굴 석상들을 바라보면 왠지 모를 충만감과 평온함을 얻게 되는데, 자신을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칭한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얼굴을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탑과 벽에 사람 키보다 더 큰 얼굴들이 서너 개도 아니고 수십 개가 존재하는 모습은 신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캄보디아 사원 중 최후에 지은 것으로 바로크양식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탑은 54개의 탑에 4면 석상을 세웠는데 모두 216개로 그들이 좋아하는 숫자 9(2+1+6)와 연관시켰다고 합니다. 아래, 위에 선신 54명과 악신 54명을 모신 것도 합치면 108(1+8), 9과 상관이 있습니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9라는 숫자는 '완성, 완전, 성취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기수의 최소 단위인 3을 가장 안정감이 있는 것으로 보는데, 9는 3의 제곱이므로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길(吉)한 숫자로 인식하였습니다. 하늘에서도 신이 계신 가장 높은 곳은 구천(九天)입니다.
캄보디아 사원의 정문은 대개(95%) 동문인데, 동쪽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경할 때도 시계 방향으로 돌아야 합니다. 앙코르 와트는 서문이었던 탓에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왼쪽에서부터 회랑 외벽을 돌며 크메르족과 참족(베트남)의 전쟁 장면과 도박, 투계, 물물교환 등 당시의 생활상들이 묘사돼 있는 부조물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불상과 동물 조각상은 목, 꼬리, 성기 등이 다 잘려 있었는데, 참족들의 소행이라 하였습니다. 사자등 뒤로 치켜 올린 꼬리를 모두 잘라버린 것은 크메르족의 기를 꺾기 위함이었고, 동물들의 성기를 잘라버린 것은 씨를 말린다는 의미로 훼손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피메아나카스(Phimeanakas)사원
보수공사 중인 바푸온 사원은 그냥 지나치고 '천상의 궁전'으로 불리는 왕실사원 피메아나카스(Phimeanakas)에 들렀습니다. 제일 하단에서부터 상단까지의 양식이 달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합니다.
밤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의 정령과 왕이 4시간 동안 교접하던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왕궁의 제단이기도 했던 사원의 꼭대기로 올라가니 바푸온 사원의 웅장한 모습을 불 수 있었습니다. 내려올 때 계단이 너무도 가팔라 모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원 옆에는 과일이며 기념품을 팔고 있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박통 같은 코코넛의 윗부분을 도려 낸 곳에 빨대를 꽂아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며 휴식을 취한 후 왕의 집무실이었던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십자형의 자리가 왕좌가 있던 곳으로 이 자리에서 그 앞에 도열해선 부하들을 호령했다고 합니다.
남쪽으로 문둥왕 테라스(Leper King Terrace)도 보였습니다. 한 승려가 야소바르만 1세 왕 앞에 엎드리기를 거부하자 왕이 승려를 죽였는데, 그때 승려의 침이 왕에게 튀어 문둥병에 걸렸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크메르 사람들은 왕이 걸린 병이라 문둥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왕은 숲 속으로 은퇴하여 슬픈 여생을 보냈는데, 문둥왕 테라스는 후대에 그를 위해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코끼리 테라스(Elephant Terrace)
피메아나카스에서 동쪽으로 걸어 나오니 거대한 광장이 나왔습니다. 인드라신이 타는 3개의 코를 가진 코끼리가 새겨진 코끼리 테라스입니다. 코끼리가 조각돼 있기 때문에 코끼리테라스라 부르고 있지만 가루다와 사자도 번갈아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바푸온 사원에서 문둥왕 테라스까지 뻗어 있는데 길이가 무려 300m라 합니다. 평소에는 왕의 정원으로 사용되고 국가 공식행사나 군대 사열, 외국사신 영접 때에는 관중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했습니다. 이 테라스의 외벽은 말 그대로 코끼리를 형상으로 한 부조물과 머리가 셋 달린 코끼리가 코로 연꽃을 모으는 조각이 기둥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타 프롬(Ta Prohm)사원
코끼리 테라스를 출발, 10분 후 타 프롬사원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타프롬 사원은 바이욘사원의 주인공인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른 지 5년만인 1186년에 어머니에게 봉헌한 사원이라 하는데, '타 프롬'이란 사원의 이름은 후대 캄보디아인들이 '나무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통행로만을 제외하고는 전혀 복원을 하지 않은 유일한 사원이었는데, 2년 전부터 복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티크나무 등이 우거진 밀림 속 넓은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습니다. 수십 미터 높이의 이앵나무 고목도 보이고 사원 건물을 붕괴시키는 주범 스펑(spung)나무와 그 가지에 달린 거대한 벌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원을 복원하면서 베어낸 스펑나무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사원으로 들어서니 스펑나무에 기생하는 나무가 스펑나무를 휘감아 말려 죽인 채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수백 년간 방치되었던 석조건물 사이를 스펑나무의 뿌리가 곳곳에 비집고 들어서 건물들을 휘감아 사원의 일부가 붕괴된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스펑나무의 뿌리 중 어떤 놈은 가로로 길게 뻗어 뱀처럼 보이다 보니 앙코르 유적다운 인상적인 경관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이 스펑나무란 놈은 워낙 지독하게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나무라 독극물을 주입해 말려죽이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목질이 단단하고 휘어짐이 강해 가구로도 쓸 수가 없으며, 불에 타지도 않아 땔감으로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사원을 파괴하며 뿌리를 내린 모습이 다른 유적지에선 볼 수 없는 신비한 광경이지만 한편으론 자연 앞에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덧없고 부질없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숲(자연)을 제거하고 만든 도시(문명)였는데, 인간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자 숲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토인비는 '자연의 회귀'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문명의 흔적을 깡그리 삼켜버리려는 듯한 스펑나무를 보면서 인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통곡의 방'이란 별명이 붙은 석실은 천장 정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어 한가운데에 서서 박수를 쳐도 메아리가 일어나지 않지만 벽에 붙어서 자기 가슴을 치면 움푹 파인 벽이 공명을 일으켜 메아리가 일어났습니다. 또 중앙탑 중심부의 어느 방으로 들어가니 벽면에 수없이 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보석으로 방을 장식했던 흔적이라 하였습니다. 사원 전체에 모두 43,000개의 구멍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산과 생산을 상징하는 남근(링가)과 여근(요니)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영화 '툼 레이더'의 첫 장면에 졸리가 낙하산을 타고 프놈 바켕사원에 떨어지는데, 프놈 바켕에서부터 아버지의 유언대로 재스민꽃이 피어 있는 '춤추는 빛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곳이 바로 타 프롬입니다.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건물을 휘감아 마치 폐허 같은 배경이 눈길을 끌었는데, 연옥을 연상시키는 몽환적인 풍경을 보여주던 그곳이었습니다.
바레이(Baray)호수
바레이호수로 가는 길에 잠시 캄보디아 주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재래시장에 잠시 들렀습니다. 메기, 붕어와 같이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처음 보는 생선들도 있었습니다. 가지, 미나리, 상추 등의 채소들과 바나나, 망고를 비롯한 갖가지 과일도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붉은 겉모습의 '람부탄'이란 과일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습니다. 뷔페식당에 가면 냉동된 채로 진열돼 있었던 열대과일로, 붉은 껍질을 까면 하얀 알맹이가 나오던 것이었습니다.
물방개를 튀겨서 팔기도 하고, 우리가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음식들도 있었습니다. 일별해 보아도 우리나라 50-60년대 수준의 시장 풍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시장 부근에서 즐겁게 노는 어린이들은 순진무구한 모습이었고,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도 각기 주어진 삶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듯했습니다.
앙코르 톰의 서쪽에 위치한 바레이(Baray)호수에 도착했습니다. 세로 8km 가로 2.2km, 약 1000㎢의 규모로 1050년에 만들어진 인공호수입니다. 땅을 파서 만든 것이 아니라 둑을 쌓아서 만든 것이라 하였습니다. 땅보다 물의 높이가 높지만 보기에는 땅을 파서 만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심은 그리 깊지 않지만 최고 수심은 9미터 정도 된다고 하며, 물은 중력 차에 의해 논으로 보내진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동쪽에, 아들은 서쪽에 호수를 만들었고, 손자는 호수 가운데 섬을 만들어 사원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호수를 파는 과정에서 세계 최고(最古)의 청동 비슈뉴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일몰을 감상하기 좋은 프놈바켕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곳 바레이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보는 일몰 또한 그 감흥이 남다르다고 합니다.
선착장에 도착하여 호숫가로 내려가면 학교에 가야할 또래의 아이들이 팔찌나 목걸이를 팔려고 "1달러" "원달러"를 외치며 관광객들에게 다가옵니다. 나이와는 관계없이 남자면 무조건 '오빠', 여자면 '언니'라 부릅니다. "언니 예뻐요. 하나만 사주세요." "오빠, 꽃미남이에요" 사진을 같이 찍을 때면 '김-치'하며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끈질기게 따라다니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기가 겁날 정도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이고,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돼 매우 어려운 상황의 나라 형편을 이해해야만 했습니다.
바레이호수를 출발하여 10분 후,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황버섯 판매장에 들렀습니다. 2009년 'VJ 특공대'라는 TV프로에서 봤던 김태경 사장은 캄보디아 최초로 상황버섯 채취 면허를 따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태국과 인접한 국경지대인 카르다움 산맥의 정글지대 밀림 속에서 산뽕나무 군락지를 찾아내어 상황버섯을 채취하는데, 오랜 내전으로 지뢰밭이 돼 있는 곳을 드나들며 채취한 버섯의 80%는 한국으로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톤레 삽(Tonle Sap)
이른 점심을 먹고 시엠립에서 남쪽으로 15km쯤 거리에 있는 톤레 삽이라는 호수로 향했습니다. 크메르어로 '톤레'는 강(호수)을 뜻하는 말이니 '톤레 삽 호수'란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길이가 160km, 폭이 36km로 우리나라 전라남북도를 합한 면적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중국의 동정호(洞庭湖)를 무색케 하는 동아시아 최대의 호수라 합니다.
호수는 바다라고 착각할 만큼 넓었고 중국 황하처럼 황토색 물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우기 때가 되면 건기에 비해 수면이 6배로 불어나며 호수 안에는 소수의 수상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물 위에 떠 있어야 하는 그들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호수에는 풍부한 민물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어 주민 대다수의 주업은 어업이라 합니다.
호수의 풍부한 수산자원은 물새와 수생동물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수도 프놈펜과 이어지는 주요 수로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넓은 호수. 배를 타고 나가 30분 후 호수 한가운데 있는 수상 휴게실에 도착했습니다. 큰 배를 개조하여 만든 휴게실에는 대형 기념품 판매점이 있었는데, 주인은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말린 열대과일과 앙코르 유적의 사면 인물상 하나를 구입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배의 스쿠류에 무엇인가 감겨 배가 멈춰 섰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선장의 두 아들이 선원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한 아들이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 떼어낸 후 배는 다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우리 한국 관광객들은 그 시간부터 모두 숙연한 마음이 됐습니다.
'대구칠곡선상교회'란 간판이 걸린 배, '캄보디아 다일공동체-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란 간판이 걸린 배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물 위엔 캄보디아 사람들의 처연한 삶의 모습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기독교 단체 외에불교 조계종 스님 한 분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탤런트 강부자 씨가 중심이 된 자비실천모임에서도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킬링필드 위령탑
톤레 삽을 출발하여 30분 후 킬링필드 위령탑이 있는 시엠립의 와트마이 사원에 도착했습니다. 폴 포트의 급진 공산정권 시대(1975-1979)에 학살된 반대세력과 지식인 등의 유골들이 유리창 안에 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섬뜩함과 숙연한 감정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에서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를 일별하였습니다.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가 스며있는 곳이다. 인간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광기로 무장된 혈기왕성한 한 공산주의자로 인해 300-40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죽었다. 이데올로기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같은 민족을 이렇게 많이 죽일 수가 있다니.."
이곳에 왔던 한 관광객이 한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캄보디아라는 나라 이름이 나오면 가장 먼저 '킬링필드'를 떠올립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은 말했습니다. '킬링필드(Killing Fields)'란 롤랑 조페(1945- )라는 영국 런던 출신의 감독이 1984년에 만든 영화 제목일 뿐, 실상 캄보디아 역사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용어라고.
도올은 킬링필드가 허구라고 하였습니다. 킬링필드의 실상을 알기 위해 길게 이어지는 그의 말을 계속 들어 보겠습니다. "한 독재자가 자기 인민을 이념적으로 개조하기 위해 200만을 학살했다! 과연 가능할까?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200만을 학살했을까? 하여튼 세계여론에서 '킬링필드=200만 학살=폴 포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식이 되었다. 글쎄올시다."
"미국이 론 놀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운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호지명루트를 봉쇄하기 위해서 마음 놓고 캄보디아에 폭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1973년 미 의회가 폭격중지를 명령할 때까지 4년 동안 캄보디아 동반부에 해당되는 광활한 지역에 B-52 폭격기로 무려 53만9,129톤에 이르는 막대한 폭탄을 투하하였다.
캄보디아 양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폭격 속에 집을 잃고 가족을 잃었다. 최소한 60-80만의 인구가 이미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장악하였을 때는 미군 폭격의 피해가 극도에 달했으며 온 국가가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게다가 미국은 일체의 경제원조 뿐 아니라 인도주의적 지원까지도 중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폴 포트가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생존의 길은 무엇인가? 하루바삐 피폐화된 농촌을 재건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도시로부터의 강제 소거가 시작되었고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불평분자들, 론 놀 정권에 아부하고 타협한 반동분자들은 가차 없이 처형되었다. 약 10만 명의 반동 불평분자들이 처형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폴 포트 정권의 킬링필드에서 200만이 희생되었다는 세설은 과장된 허언이다. 폴 포트 정권 시기에만 한정하면 30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책임은 미국의 것이다. 민중이 죽어간 것은 단시간에 국가를 재건하려는 무리한 과정에서 일어난 기아와 질병이 원인이었다."
17시 50분 시엠립 공항을 이륙, 베트남을 향했습니다. 늘씬한 몸매가 잘 드러나는 베트남 항공 여승무원들의 아오자이 패션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나라도 개량 한복이 있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도 개량 아오자이였습니다. 몸의 치수를 17군데나 재어 옷을 만들고, 27개의 단추를 열어야 옷을 벗을 수 있다는 아오자이가 베트남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하였습니다.
이륙 후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일몰 풍경도 환상적이었습니다. 비행기가 붉게 물든 시엠립 평원에서 더 높이 솟아올라 구름 위를 날 때 운평선(雲平線) 위로 비끼는 낙조는 핏빛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황홀한 풍경을 보여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