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과 전쟁에서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로 밀려들어온 진실을 개주,개경,개성을 교묘히 섞어 쓰므로서 고려는 진실을 숨겨 왔다.
<고려사> 지리지를 보니 눈에 띄는게 황제국 고려의 행정 지명이 성종과 현종을 분기점으로 바뀌고 있었다.
고려초 부터 성종때까지 10도,12주로 당나라 행정지명과 이름이 같았고 580주군으로 극히 융성했다고 스스로 자임했다.
현종대에 들어서 5도 양계에 129군,335현을 두었다고 했다. 스스로도 唐 이후 鴨綠을 경계로, 동북은 선춘령으로 고구려보다 넓고 서북은 못 미친다고 했다.
그런데 현종대에 들어서 태조때 부터 유지되던 주와 군이 반토막이 나버렸다. 그런데도 중고등 교과서에는 의주에서 원산을 잇는 북쪽경계가 고려라고 실려있다. 삼국통일한 초기 신라영역과 다를바 없다.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결정할때 도읍을 개주라고 했고 송악군이었다는 언질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다. 당시 고려와 중국의 지명을 공통으로 쓰거나 사서기록에 중국명칭을 그대로 사용한것을 간과한것이다. 개경을 송악,개주,개경,개성으로 섞어 불렀다.
고려사 지리지.
本高勾麗扶蘇岬新羅改松嶽郡太祖二年定都于松嶽之陽爲開州創宮闕. (중략)立里分五部.
전편에서 언급했지만 당시 거란 성종의 모후 소태후는 어린 성종을 즉위시킨후 섭정하며 국사를 지휘했던 여걸로 대제국 거란의 기틀을 마련했다. 산서와 하북에 걸쳐있던 후진의 석경당을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연운16주를 먹었다.구오대사에 의하면 이때 태조 왕건이 이중 요.심 2주를 차지했다.
거란은 이내 파죽지세의 힘으로 북송을 걷어차면서 '전연의 맹'을을 맺고 부자 노예를 두게된 후 고려 서쪽 경계를 일방적으로 그어 버리고 송과의 내통금지와 황제국 인정 요구를 빌미로 993년 요서지역을 쳐들어와 전쟁이 시작된다. 요사를 보면 전쟁후 거란이 자국으로 돌아가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고려를 수하에 두게되었다는 자축연으로 보여진다.
현종원년(1010)에 시작된 2차전쟁은 거란이 태조에게 빼앗은 후 성종에게 넘겨준 강동6주를 친조 불이행을 이유로 돌려달라고 요구한것이다.
거란성종 야율융서가 친정한 거란의 침략을 막아선 강감찬의 귀주대첩의 결과 처들어온 거란군의 반이 넘게 죽어 살아 돌아간 자가 많지 않아 정무를 볼수있는 인원이 모자라 글만 알면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속통감128)
그러나 고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개경이 불타고 인명이 몰살당하고 당시 태조때부터 내려져온 서적과 실록이 불탔다. 다음해에도 침략을 당하면서 현종은 안전한 내륙지에 수도 건설을 하게된다.
1011년부터 한반도에 도읍지를 알아보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고 평양과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건축에 박차를 가해 21년만인 1029년에 개성 나성(외성)이 세워졌다고 언급하면서 강감찬의 상소에 따랐음을 기록했다. (현종19년조)
고려도 자신이 거란에게 크게 피해를 보아 도읍을 옮겼다고 직설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평양과 서경 그리고 개경과 개성을 구분해 건축한 업적을 표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현종때에 와서 태조가 신라를 없애고 경주로 했다는 지역에 행정지명이 부여되고 신종때 신라복국 반란사건이 일어난다. (고려사 신종조) 고려태조가 경순왕의 신라를 멸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한후 경주는 현종때까지 동경도 아닌 경주도 아닌 옛이름 서라벌로 불려진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정한 도읍 송악 개주는 어디인가?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조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평주에 기거하다 북위때 장수왕이 옮겨서 머무른 왕성이 있던곳이다. 발해가 이곳을 차지했었다고 했다. (당서에 등장하는 요동고성이다)
즉 개주가 고구려 경주이며 발해의 동경용원부(책성) 였고 성종이 이곳을 쳐들어 왔다. 학계에서는 책성을 엉뚱하게 길림성 훈춘으로 비정하고 있다. 훈춘은 당과 신라 연합군에게 대패 당한 발해 무왕이후 문왕이 이전한 곳이다. 거란 성종이 고려의 이곳까지 쳐들어온후 청강에서 다시 돌아갔다. 청강은 요녕성 대청하로 비정된다.
당시 고려사를 살펴보면 요사에서 청강으로 한곳을 우리 기록은 압록강으로 기록했다.
고려사 현종원년
辛卯 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 渡鴨綠江, 圍興化鎭, 楊規·李守和等固守不降.
서진이후 고구려 장수왕때 평양성으로 왕건이 이곳을 서경으로 했다. 압록수(현 요하) 동남 천여리에 있는데 13세기 고려의 서경은 옛 평양이 아니다. 고려인 이연령과 최탄이 1261년 몽골 쿠빌라이에게 갖다 바친 서북 60개성중에 심양과 요양이 있었다.
요양에 고려가 군진은 설치했다고 금사지리지는 설명한다.
결정적으로 명나라때 저작된 독사방여기요는 왕경에서 서남쪽으로 2백리에 개주성이 있다고 했고 왕경은 고려초와 공민왕이 수복했던 요양으로 그곳에서 서남으로 2백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개성으로 옮기기전 현종원년에 공사를 착수하여 21년만에 개성에 왕도를 완공한다. <고려사>에는 거란 성종이 개경에 침입하여 궁을 불태우자 개경을 수복하고 나성을 완성하였는데 무릇 21년 공력이 들었다고 했다.
고려사는 요녕 개주에서 개성으로 옮긴것을 기록하지 않고 수복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당시 모든 기록의 정황과 다르다.
고려사 현종 21년 8월 (1029)
契丹聖宗, 侵入開京, 焚燒宮闕. 顯宗收復開京, 築羅城, 是月, 開京羅城成, 凡二十一年而功畢.
남송의 서긍이 고려의 개경을 방문하여 고려도경을 남겼는데 당시 인종과 이자겸 그리고 김부식을 만났다. 그당시 남긴 기록과 2천년 초반부터 남북합동으로 개성 궁궐을 발굴한 결과가 대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공민왕이 요동을 수복한후 명 주원장이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요동을 명나라에 귀속시키려하자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주원장에게 보내 표문을 올리면서 철령 이북은 역대로 高州, 和州,靜州,咸州와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땅이었는데, 거란 건통7년(1107)에 이르러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 함주 북쪽의 땅을 탈취하자 예종이 망해가는 요에게 요청하여 병사를 보내 토벌후 다시 찾고 함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았다고 했다. 윤관이 수복한 공험진이 지금의 흑룡강성 수분하 근방 동령진에 고려령으로 존재한다.(이인철 논문)
고려 철령이 왕경(요양)으로부터 3백리에 있으며 동북으로 공험진은 한계로 국경을 한다고 했다.
원사
東甯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壤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
14세기에 쓰여진 원사는 고려말 평양이 고구려때 평양이 아니라고 했다. 한반도 평양을 서경이라고 했다고 기록한다. 서경이 한반도로 옮겨진 11세기후 기록이다.
문고리
여기서 보고가서 내용을 베껴 자기 카페에 올려놓고 오히려 내용을 까는놈들이 있다. 몇몇 교수란놈도 마찬가지 ..
첫댓글 문고리님, CE918년 王建立高麗時境의 開州는 昨今世 開平이 있는 今"唐山市"地域을 뜻하는 것인지요?
심경이 소란할 때면 사흘을 뚜벅뚜벅 말을 타고 폐허가 된 高句麗의 亡都 평양성(望京지역)을 갈 수 있었던 작금 "開平"地境의 韓城...?
서남방으로 흐르는 두 물줄기의 북쪽에 三山이 있고, 그 중 北峯(中山?)이 最高이며, 그 두 물줄기 사이의 거리가 동북은 1백리이고 서남은 3백리인 그 곳...큰 물줄기가 3백여리 개주 땅을 (남류)관통하는 그 개주...
개평이 개주는 아닌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건이 개창한 초기 고려와 고구려 초중기의 강역은 겹치지 않습니다.한성은 태조대왕이 쌓은 요서10성중에 하니인 것으로 봅니다. 고려도 거란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하기위해 부심한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사도 고구려 전성기때의 지역을 요녕으로 옮겨다놓고...
그곳 하류엔 섬(소위 벽란도)이 있어 상선들이 즐비하게 정박했던 그 섬에서 구불구불 주구장창 물줄기를 따라올라가서 당도할 수 있는 開京/松嶽이 있는 곳에 高麗가 都邑했었다고 일컬어지는 곳..? 또한 興國寺가 있던 곳..?
그 지역에서 출생한 王建의 딸 樂浪공주(崔理 樂浪國 땅에서 태어났나?)가 있었고 그 樂浪공주가 敬順王 金傅에게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