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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혹시 가입하신 팬 클럽이 있으십니까? 저는 좋아하는 스포츠맨이나 연예인이 있지만, 성격상 혼자서 좋아하고 멀리서 응원할 뿐, 어떤 팬 클럽도 가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팬덤 문화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젊은 이들뿐 아니라 중장년, 노년층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유명인의 팬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이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팬덤이란 말은 사전적으로, ‘가수, 배우, 운동선수 따위의 유명인이나 특정 분야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나 그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특정 가수를 좋아하는 팬들은, 팬 클럽을 통하여 그 가수의 일정이나 기타 정보들을 공유하고, 일사분란하게 응원도구도 갖추고 공연장을 찾아가서 노래를 즐기며 가수를 응원합니다. 가수가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는 팬들은 그 즉시 음원을 찾아 듣고, 그 노래를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올려놓는 작업을 합니다. 기금을 모아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연예인의 열애나 결혼소식이 언론에 보도되면 팬클럽은 크게 위축된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정치인을 중심으로 모인 팬덤도 있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데서 더 나가,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과 다른 의견을 가졌거나 서로 경쟁하는 입장에 있는 다른 정치인에게는 무서운 문자 폭탄을 퍼붓습니다. 그래서 같은 정당 내에서도 자유로운 토론이나 의사 소통이 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팬이라는 말 자체가 광신자, 열광자를 뜻하는 Fanatic을 줄인 말이고, 거기에 dom이라고 하는 접미사가 불었습니다. ‘영지, 혹은 나라’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팬덤은 마치 그들만의 왕국, 혹은 교주를 따르는 광신자 집단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고, 실수도 할 수 있는데, 팬들은 옳고 그름은 따지지않습니다. 무조건 믿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빗나간 팬덤 문화를 정치인들은 오히려 즐기기도 하고, 교묘하게 부추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인기가 엄청 많은 분이셨습니다. 팬들이 많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도 보면,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지나는 각 성, 각 마을마다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그 여정에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며,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이나 헤롯과 같은 당대의 권력자들의 위선과 부도덕성과 부패를 공격하셨습니다. 병든 자,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그 능력에 환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수퍼 스타였고, 가는 곳 마다 수많은 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은혜를 받고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좋아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라든지, 위로든 명예든,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불의한 세력들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실 터인데, 자신도 또한 그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기도 하였습니다. 저마다 서로 다른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팬이 된 것입니다.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즐기려 하고, 더 많은 관심과 인기를 얻기 위해서 애를 쓰기도 합니다. 더 멋진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자기를 포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허위 과장 광고인 경우가 많습니다. 허위 과장 광고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인기와 명성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정치인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교회들은 더 많은 교인들을 모으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기복신앙이나 번영신학은 대중들의 관심이나 기대에 부응하는 훌륭한 부흥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흥은 성도의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흥은 성도들의 심령에 변화가 찾아와서, 빗나간 삶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힘써 감당하는 제자가 되고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거나 팬덤을 넓히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팬들을 향하여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 만족과 자기 위안만 구하는 팬덤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됨의 조건을 몇 가지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황스런 말씀입니다. 어떻게 부모님을 미워합니까?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의 삶을 바쳐 희생하신 분들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아내나 남편, 자식이나 형제 자매가 못마땅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을 미워할 수 있습니까?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미워하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미워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미세이’는 그 원형이 ‘미세오’라는 동사입니다. 우리는 미워한다고 하면 감정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 미세오는 감정이 아니라 선택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여러 대상 중에서 상대적으로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덜 귀하게 여길 때, 그것을 묘사하는 말이, 우리 말로 ‘미워한다’라고 번역된 ‘미세오’라는 동사입니다. 감정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상대적으로 적게 사랑한다,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부모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 소중하기에, 나의 부모나 자식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고 나의 삶의 의미이고 나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소중한 것도 많고 사랑하는 것도 많지만, 내 삶의 최고 우선 순위를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이고 가족입니다. 물질이 곧 힘이고 진정한 삶의 만족을 가져다 준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물질이라면 양심도 팔아 넘깁니다. 우리 시대의 부모들 중에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체면이고 양심이고, 모든 것을 다 버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해외에서 대학에 다니는 자녀가 시험을 치르는데, 서울에 거주하는 부모가 함께 답안지를 작성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진리와 정의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러나 자녀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이 주신 양심도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저버린다면, 그 목표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에 속한 모든 것과 모든 관계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고, 하나님의 뜻 아래 둘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목숨을 귀하게 여겨야지, 자기 자신을 함부로 다루고 목숨을 미워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왜 부인했습니까? 자기 목숨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죽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나를 부인하면, 나의 목숨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재정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내 체면이 손상되거나, 내가 어떤 목표를 이루는데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그 십자가에 처형될 죄수가 지고 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에,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려면 저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팬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한다면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충분한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공사를 시작하고 그 기초만 쌓아놓고 돈이 없어서 준공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보는 사람들이 다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만 하고 마치지도 못했다고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치루어야 할 대가가 많다는 것입니다. 포기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치루어야 할 댓가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 나섰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사람들의 비웃음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는, 먼저 앉아서, 내가 가진 군사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다른 나라 임금을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서 만일 전혀 승산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망대를 세우거나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쟁을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생각하고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예수를 따름으로써 자기 만족이나 얻기를 기대하는 수많은 팬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제자들은 한결같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곧 모든 것을 버려두고’ 스승의 뒤를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이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 버려두고, 자기 자신까지도 부인하고, 오직 스승의 인격과 신앙을 닮아가기를 소원하며, 스승의 발자취를 그대로 뒤따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엘리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제자됨을 위하여 치루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그의 제자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를 택하여 그를 제자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열두 겨릿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겨리라는 말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커다란 쟁기를 의미합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였으며, 열두 겨릿소를 소유하였고, 열 두 겨릿소를 끌고 갈아야 할 만큼 넓은 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엘리야가 찾아와 자기의 외투를 벗어서 자신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고대에는, 누군가가 자기의 외투를 벗어서 다른 사람에게 외투를 입혀줄 때, 그 외투를 입었던 사람의 인격이나 그의 능력이 그 외투를 입는 사람의 몸 안에 그대로 스며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외투를 벗어서 다른 사람에게 입혀주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으로서, 예언자나 혹은 왕의 지위를 물려줄 때 외투를 벗어서 후계자에게 입혀주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야 예언자가 찾아와 그의 위에 외투를 던진 것입니다. 엘리사는 지금 엘리야가 자신의 제자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엘리사는 소를 버려두고, 즉시 엘리야에게로 달려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습니다.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 엘리야의 대답이 좀 당황스럽습니다. 분명히 겉옷을 벗어 던져준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그것은 곧 ‘너는 나의 제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부르심에 대하여 엘리사는 ‘가서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린 후 선생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는데, ‘돌아가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분명히 제자로 부른 것은 엘리야입니다. 하지만,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전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엘리사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엘리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소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소의 등에 지웠던 기구를 쪼개어 불을 때서 고기를 삶았습니다. 엘리사는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서 그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농사꾼으로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소를 잡고, 소를 모는데 필요한 기구들을 불살랐다고 하는 것은 철저한 옛 생활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과거이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연인으로서 일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꿈꾸는 똑같은 삶의 목표를 가지고, 똑같은 문화와 가치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터전이요 수단인 밭과 소들과 기구들도, 부모와 가족, 그리고 이웃들과의 모든 관계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제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형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아버지 세배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미워하고, 그 모든 것들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자기 자신까지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위대한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팬이 아니라 제자가 되라고,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각자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