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
□ 로마서 5:12-19 □
박창환 (본원장・신약학)
I. 본문의 전후 맥락
로마서를 보는 견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재래식 견해로서, 적어도 16세기의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에까지 소급할 수 있다. 즉 로마서는 인간의 개인 구원에 관심을 둔 서신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서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문제를 취급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이러한 기본적 복음을 로마 교회에 제시하여 자기의 서방 선교에 지원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로마서를 분해해 보면, 1-4장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처음에 는 인간의 공통적인 죄 문제를 다루고, 그 뒤를 이어 그 문제에 대한 해결로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론이 나온다. 그런 생각이 자연히 5-8장으로 이어지면서 칭의를 받은 자의 결과를 논하게 된다. 즉 칭의를 받은 자는 성령 안에서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2-15장에서 구원받은 자의 실천적 삶에 대한 지시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9-11장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이 가지는 앞부분과 또 뒷부분과의 관계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
또 하나의 견해는, 로마서의 주제가 개인 구원이 아니라 세계 구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로마서에서 바울은 죄의 용서라는 하나의 내적, 주관적 경험을 말하지 않고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자기의 사명을 설명하여 용납을 받으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고, 대조를 하려는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바울은 로마로 편지를 쓰면서도 우선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해야 하는 과제를 앞에 놓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롬 15:30-33). 하나님의 해묵은 구원 계획을 개진하고 자기의 이방인 선교의 타당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로마서를 보면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1-4장에서, 역사 속에 어떤 새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고 동시에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3:26).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다는 것.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3:22).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죄를 지었고, 그 양자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 그 다음 부분(5-8장)에서 이 새로움을 그리스도와 아담의 대조를 가지고 나타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고 성령 안에서 가지는 새 경험을 가지고 설명한다. 이렇게 볼 때 9-11장은 로마서의 중심부, 혹은 절정의 역할 하게 된다. 즉 바울은 9-11장에서 그 두 개의 신앙 공동체의 관계를 취급하고 있으며, 크리스천이 유대인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될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구원 얻게 될 것을 예고한다(11:26) (David L. Barr, An Introduction: New Testament Story, 1995,p.141-142).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이 두 번째 견해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II. 주 해
< 12절 >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롬1:18). 거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재간이나 지혜나 어떤 방도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 하나님의 복음 사건이 일어났다. 그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를 막론하고 믿기만 하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16). 그 복음 사건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1:17),거기에 우선 하나님 자신의 속성적 의가 나타나며, 동시에 죄 있는 인간을 아무 차별 없이 무죄로 선언하여(의롭다고 선언하여)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아주신다(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6). 이러한 놀랍고 새로운 사건이 인간 역사 속에 일어남으로써 민족 여하를 막론하고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5:1). 즉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한 상태에 있게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린 상태라는 말이다(5:10-11).
이러므로(⌈디아 투토⌋�διὰ τούτο)라는 접속사는 위에서 진술한 하나님의 특별 조치를 회상하면서, 온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까지 소급되는 보편적 범죄 사건, 그리고 인류 전체와 관계되는 둘째 아담의 구속 사건을 연결해 준다. 여기서도 바울은 한 개인이나 조금 넓혀서 이스라엘 민족의 실존이나 구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고 전 인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의 죄 문제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바울은 우선 죄와 죽음의 보편성을 말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 창 2:17;3:19 등을 기초한 유대인의 구약적 인간 해석을 그대로 소개한 것이다. 첫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죄가 없던 세상에 비로소 죄라는 것이 들어오게 됐고, 그 결과로서 죽음이 따라서 생기게 됐다. 이와 같이 즉 첫 아담이 죄를 짓고 죽은 것처럼, 그 후손들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도 두루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에서 이르렀다(⌈디엘텐⌋διήλ- θεν)는 말은 그냥 왔다는 말이 아니라 좀더 강한 의미를 나타낸다. 즉 διά라는 전치사를 통하여 “두루,” “속속들이,” “아주”등의 보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불가타 Vulgate 역에서는 ⌈에프 호 판테스 헤마르텐⌋ ἐφʾ ᾧ πάντες ἥμαρτεν 의 ἐφʾ ᾧ를 “그 안에서” in whom 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다”는 뜻으로 보아, 원죄론의 기초를 삼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역이었고 단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시조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써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후손도 다 죄를 짓고 다 죽음을 당하게 됐다는 것, 즉 죄와 죽음의 보편성이다.
< 13절 >
원문에는 ⌈가르⌋ γάρ for 라는 접속사로써 위의 말에 대한 이유를 말하려고 한다. 위에서, 사람은 다 죄를 지었고 따라서 다 죽어야만 했다고 말했으나,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입장에서는 자연히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을 뒤집으면 “율법은 죄를 죄로 판정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율법이 나타나기 전에는 죄가 없다는 말이 되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13절은 답변을 한다. 율법이 생기기 전에도 죄는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율법이 없으니까 죄를 죄로 간주하는 일이 없었을 뿐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이 후에 나타나서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쳤지만, 죄는 시조 아담 때부터 보편적으로 존재해 온 것이다.
< 14절 >
율법이 없을 때에도 죄는 죄였고, 그것이 세상에 편만해 있었다는 것을 13절에서 말한 다음 이제 14절에서는, 죽음 역시 율법과는 무관하게 자기 세도를 부렸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즉 율법이 나타나서 죄를 죄로 판정해 주는 일이 생기기 전에도 죄는 죄였기 때문에 그 벌로서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는 것이다. 왕 노릇했다(⌈에바실류센⌋ ἐβασίλευσεν)는 말은 죽음의 세력이 완전히 전제적(專制的)으로 지배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임금 앞에서 사람은 속수무책이고, 어떤 핑계나 이유를 달아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다 사는 처지와 환경이 다르다. 다른 처지에서 각각 다른 죄를 짓는다. 시조 아담의 범죄(⌈파라바시스⌋ παράβασις=overstepping=한계를 넘음)와 다른 사람의 범죄는 그 종류와 성격이 다 다르다. 죄의 종류와 성격이 다 다르더라도 죄는 죄이다. 나는 아담과 같은 죄는 안 지었으니 무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한 사람도 죄가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결국 죽음이 율법 시대 이전에도 인간을 지배했다는 말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표상 (⌈튀포스⌋τύπος)은 원래 pattern, model, ex-am-ple, stan-dard라는 뜻으로서, 전형(典型)에 찍어내면 꼭 같은 모양의 물건이 나오듯이�아담과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같은 형(形)의 존재라는 것이다. 15절 이하에서 아담과 예수의 형태적 비교론이 나온다.
< 15절 >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12-14절에서는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의 위력에 대해서 말했다. 이제 15절에서는 강한 반의적(反意的) 접속사 알라 ἀλλά 를 사용하여 위에서 말한 죄와 죽음이라는 부정적이고도 파멸적인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은사의 사건을 대조적으로 소개하며 나온다. 여기서 ‘범죄’라는 단어는 14절의 παράβασις와 동의어인 ⌈파라프토마⌋ παράπτωμα 로서, 본디 “떨어져 나간다,” “헛 집는다”등의 뜻을 가진 동사에서 왔다. 여기서는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와 ⌈파라바시스⌋ παράβασις 와�거의 차별 없이 동의어로 혼용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대조적으로 ⌈카리스마⌋ χά- ρισμα 라는 낱말을 쓰면서 파라프토마(범죄 παράπτωμα)와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첫 아담과 둘 째 아담(예수)이 각각 전 인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둘이 가져온 결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바울은 예수 사건을 포괄적으로 이 은사(恩賜 ⌈토 카리스마⌋ τὸ χάρισμα)란 말로 표현하였다. 은사 χάρισμα 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로서의 선물”을 의미한다 (Barclay M. Newman,Jr., A Concise Greek-English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1971, p. 197). 바울은 예수 사건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으로 판단하였고, 그 은총은 결국 사람에게 무상으로 구원을 주시는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것은 하나의 “은총적 선물”(카리스마)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 은사 사건은 그 범죄 사건과 다르다는 명제(命題)를 말한 후에 어째서 그러냐 하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 원문에서는 ⌈가르⌋(γάρ 왜냐하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어째서 그리고 무엇이 다르냐 하면, 아담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부정적이고도 파멸적인 결과가 나타났는데,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 인하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쳐흐르는 풍성하고도 긍정적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조가 된 것은 (1)원인에 있어서, 첫 아담의 경우에는 그의 범죄: 둘 째 아담 예수의 경우에는 은혜 χάρις, (2) 결과에 있어서는, 첫 아담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의 죽음: 예수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에게 주어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와 “선물”은 무엇일까. 16절 이하에서 그 설명이 나온다.
< 16절 >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15절 처음에 제시한 명제를 다시 끌고 나온 것이다. 첫 아담을 “죄를 범한 자”라는 한 마디로 규정하고, 15절에서 은사 χάρισμα 라고 한 것을 여기 16 절에서는 선물 δώρημα 이란 말로 바꾸었다. 15절의 선물은 ⌈도레아⌋ δωρεά 였는데 그것은 ⌈도론⌋ δώρον 과 같은 뜻이다. 그냥 선물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16절의 선물 δώρημα 은 약간 뉘앙스가 다른 말이다. 즉 그 배후에는 ⌈도레오마이⌋ δωρέομαι라는 동사가 있고, 선물로 준다는 동작이 암시되고 있어서 “선물로 거저 받은 물건”이라는�뜻을 풍긴다. “뭐가 다르냐”라는 질문을 예상하면서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하여 여기서도 원문에서는 ⌈가르⌋ γάρ 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연결시켰다.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첫 아담은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이르렀고 결국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의 경우에는, 만민의 죄를 위한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은총의 선물이 사람들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 (⌈디카이오마⌋ δικαίωμ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에게 무죄 선언을 해 주시고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를 선포해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의 δικαίωμα는 배후에 δικαιόω라는 동사가 있다. “의롭다고 해 준다” “무죄로 선언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이며, 그러한 동작의 결과로써 얻어진 것을 δικαίωμα라고 한다. 여기서 다시 첫 아담의 경우와 둘 째 아담의 경우의 차이와 대조가 나타났다.
(1) 아담의 경우에는 그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며: 예수의 경우에는 (그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 때문에) 사람의 그 무수한 범죄에 대하여 은총을 베푸는 사건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2) 아담의 경우에는 결국 인간이 유죄판결을 받는데 이르렀고: 둘째 아담의 경우에는 죄인들의 칭의, 즉 많은 인간이 무죄 선언을 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7절 >
17절은 16절 초두에서 말한 명제를 부연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가르⌋ γάρ 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위에서 한 말에 대한 이유를 보충하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지만,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크냐 하는 것이다. 다시 그 대조를 정리해 본다면, (1)첫 아담은 범죄하였고: 둘째 아담 예수는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칭의의 은혜와 선물을 인간에게 넘치도록 주신다. (2) 아담의 경우에는 사망이 왕권을 가지고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었고: 둘째 아담의 경우에는 칭의를 받은 인간들이 생명을 누리며 왕 노릇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 두 경우가 다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 18절 >
위에서는 주로 첫 아담과 둘 째 아담이라는 사람에다 중점을 두고,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미친 영향을 논하였다. 여기 18 절에서는 그 둘이 행한 일에다가 초점을 두고 있다. 시조 아담이 선악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은 그 한 가지 범죄 사건이 그 자신의 단죄를 가져올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유죄판결에 이르게 했다. 이와 같이 예수는 한 번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간에게 무죄 선언을 주실 공로를 이루셨고 그 결과는 죽었던 인간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조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정죄를 낳았고, 그의 후손도 다 법죄함으로써 결국 모두가 정죄를 받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예수는 단회적 once for all 인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만민의 죄를 사하실 공로를 이루셨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다. 무죄 판결(⌈디카이오시스⌋δικαί-ωσις)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됐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어전에서 살 자격이 있으며 결국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아담과 예수가 대조되었지만, 결국은 예수 한 분 때문에 만민에게 무죄 판결과 생명이 초래됐음을 말하고 있다.
< 19절 >
19절은 역시 18절에서 한 말의 이유와 보충적 설명을 붙이기 위해서 γάρ(왜냐하면)라는 접속사룰 가지고 시작한다. 시조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둘 째 아담 예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무죄한 자로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연(敷衍) 보충된 것은 아담의 범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파라코에⌋ παρακοή)이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강림과 죽으심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복종(⌈휘파코에⌋ ὺπακοή)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III. 사 역
12 그러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또한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13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지만, 율법이 나타나기까지도 죄는 세상에 존재했었고
14 아담 (때)부터 모세 (때)까지, 사람들이 아담의 범죄와 같은 모양의 죄를 짓지는 않았는데도 죽음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15 그러나 그 은사(의 경우)는 그 범죄(사건의 경우)와 같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그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는 더 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쳐 흐르게 됐습니다.
16 그 선물로 주신 것은, 범죄한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결과와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 때문에 심판이 왔고 그 심판은 정죄를 가져왔지만, 많은 죄를 용서하시는 그 은사는 결국 (죄인들에게)무죄 선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17 그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는 사람들이 죽음에게 지배를 받아야 했지만, 무죄 선언의 은혜와 선물을 넘치게 받은 사람들은 더 큰 혜택을 받습니다. 즉, 그들은 생명을 누리면서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저 것도 아담 한 사람 때문이며 이 것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입니다.
18 그러므로 그 한 개의 범죄 사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게 된 것처럼, 그 한 번의 칭의 사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무죄 선언을 받아 생명을 얻게 됐습니다.
19 그것은 그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인정을 받은 것처럼, 그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로운(무죄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메 시 지
1. 죄와 죽음의 보편성.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죄에 익숙해 졌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 죄불감증(罪不感症)에 걸려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시조 아담 이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범죄하였고, 또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예외 없이 죽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방인(우리)은 율법이 없으니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궤변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적으로 말해서 누가 감히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요한 1서는 공박한다(요일 1:10). 사람치고 죽지 않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죄는 누구에나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알게 된다. 옛날에는 사람이 미개해서 죄가 있었고 지금은 사람이 개명했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말도 할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를 짓는 사람들이고, 또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들이다. “죄 짓고 살다가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은 죽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닌 것을 어쩌랴.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로서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육체가 다시 부활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으며, 죄 있는 자는 영원한 형벌, 즉 영원한 슬픔과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죽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은총적 조치. 죄 있는 인간, 죄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하는 인간,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이나 재간으로는 그 벌을 면할 도리가 없는 것이 인간의 절망적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 암흑을 깨뜨리고 하나님 편으로부터 벽력과 같은 광명이 터져 나왔다. 재창조의 역사가 하나님 주도 하에 나타났다. 그것을 일명 하나님의 은사 사건이라고나 할까. 인간이 다 죄를 짓고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하늘로부터 광명이 비쳐 왔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모두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졌다. 죽어야 마땅한 우리 인간에게 이것은 문자 그대로 선물이요 은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죄 투성이인 우리들을 하나님은 값없이, 즉 공짜로 용서해 주시고, 죄 없는 자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다. 무죄 선고를 받은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에서 풀려 난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아가며, 감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어전에서 쫓겨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이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생명으로 충만할 것이다. 즉 영생을 만끽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3. 구원받은 자의 태도. 이 은사는 유대인에게만 주어지거나, 반대로 이방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공개된 축복이요 보편적 선물이다. 요는 하나님의 그 복음을 우리가 받아들이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로(1)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지는 일이다.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는 일이다. (2)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고통과 복종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언제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잘 나서나 나의 어떤 공로는 조금도 없는데도 이루어진 사건이기에 우리는 어디까지나 겸손한 가운데 기뻐하며 자랑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은 죄가 미워서 인간을 벌하셨고, 반드시 죄 값을 받아 내시고야 마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독생자의 대속적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으니, 구원받은 사람은 철저히 죄를 멀리하고 무든 면에서 성결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4. 아버지 하나님의 관심사. 우리는 많은 경우 모든 것을 자아 중심적으로 생각한다. 나 개인이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한국 기독교의 특색 중의 하나가 바로 개인 구원 또는 영혼 구원에 치중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생각의 패턴을 따라서 개교회주의, 교파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 인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들의 좁은 관심을 초월한다. 세상이 구원 얻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세상이라는 말은 임종, 성별, 빈부, 계급 등을 초월하고 포섭하는 모든 인간 세계라는 말도 되지만, 인간의 종교 차원뿐 아니고 기타의 모든 분야를 포함하는 세계까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구원이란 영혼의 구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이 하나님의 법과 뜻에 맞는 정상 선에로의 복구 내지는 도달을 의미해야 한다. 인간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기타 모든 방면이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만연되어 있는 죄와 악을 제거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내 영혼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천당에 가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사고를 탈피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 지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
넷째주일 |
□ 로마서 5:12-19 □
박창환 (본원장・신약학)
I. 본문의 전후 맥락
로마서를 보는 견해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재래식 견해로서, 적어도 16세기의 마틴 루터와 종교개혁에까지 소급할 수 있다. 즉 로마서는 인간의 개인 구원에 관심을 둔 서신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서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문제를 취급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이러한 기본적 복음을 로마 교회에 제시하여 자기의 서방 선교에 지원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로마서를 분해해 보면, 1-4장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처음에 는 인간의 공통적인 죄 문제를 다루고, 그 뒤를 이어 그 문제에 대한 해결로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론이 나온다. 그런 생각이 자연히 5-8장으로 이어지면서 칭의를 받은 자의 결과를 논하게 된다. 즉 칭의를 받은 자는 성령 안에서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2-15장에서 구원받은 자의 실천적 삶에 대한 지시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9-11장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이 가지는 앞부분과 또 뒷부분과의 관계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한다.
또 하나의 견해는, 로마서의 주제가 개인 구원이 아니라 세계 구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로마서에서 바울은 죄의 용서라는 하나의 내적, 주관적 경험을 말하지 않고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객관적,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자기의 사명을 설명하여 용납을 받으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고, 대조를 하려는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바울은 로마로 편지를 쓰면서도 우선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해야 하는 과제를 앞에 놓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롬 15:30-33). 하나님의 해묵은 구원 계획을 개진하고 자기의 이방인 선교의 타당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로마서를 보면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1-4장에서, 역사 속에 어떤 새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고 동시에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3:26).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다는 것.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3:22). 유대인도 이방인도 다 죄를 지었고, 그 양자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 그 다음 부분(5-8장)에서 이 새로움을 그리스도와 아담의 대조를 가지고 나타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고 성령 안에서 가지는 새 경험을 가지고 설명한다. 이렇게 볼 때 9-11장은 로마서의 중심부, 혹은 절정의 역할 하게 된다. 즉 바울은 9-11장에서 그 두 개의 신앙 공동체의 관계를 취급하고 있으며, 크리스천이 유대인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될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구원 얻게 될 것을 예고한다(11:26) (David L. Barr, An Introduction: New Testament Story, 1995,p.141-142).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이 두 번째 견해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려고 한다.
II. 주 해
< 12절 >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롬1:18). 거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재간이나 지혜나 어떤 방도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 하나님의 복음 사건이 일어났다. 그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를 막론하고 믿기만 하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16). 그 복음 사건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1:17),거기에 우선 하나님 자신의 속성적 의가 나타나며, 동시에 죄 있는 인간을 아무 차별 없이 무죄로 선언하여(의롭다고 선언하여)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아주신다(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6). 이러한 놀랍고 새로운 사건이 인간 역사 속에 일어남으로써 민족 여하를 막론하고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5:1). 즉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한 상태에 있게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린 상태라는 말이다(5:10-11).
이러므로(⌈디아 투토⌋�διὰ τούτο)라는 접속사는 위에서 진술한 하나님의 특별 조치를 회상하면서, 온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까지 소급되는 보편적 범죄 사건, 그리고 인류 전체와 관계되는 둘째 아담의 구속 사건을 연결해 준다. 여기서도 바울은 한 개인이나 조금 넓혀서 이스라엘 민족의 실존이나 구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고 전 인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의 죄 문제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바울은 우선 죄와 죽음의 보편성을 말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 창 2:17;3:19 등을 기초한 유대인의 구약적 인간 해석을 그대로 소개한 것이다. 첫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죄가 없던 세상에 비로소 죄라는 것이 들어오게 됐고, 그 결과로서 죽음이 따라서 생기게 됐다. 이와 같이 즉 첫 아담이 죄를 짓고 죽은 것처럼, 그 후손들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도 두루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에서 이르렀다(⌈디엘텐⌋διήλ- θεν)는 말은 그냥 왔다는 말이 아니라 좀더 강한 의미를 나타낸다. 즉 διά라는 전치사를 통하여 “두루,” “속속들이,” “아주”등의 보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불가타 Vulgate 역에서는 ⌈에프 호 판테스 헤마르텐⌋ ἐφʾ ᾧ πάντες ἥμαρτεν 의 ἐφʾ ᾧ를 “그 안에서” in whom 라는 뜻으로 해석했고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다”는 뜻으로 보아, 원죄론의 기초를 삼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역이었고 단지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시조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써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후손도 다 죄를 짓고 다 죽음을 당하게 됐다는 것, 즉 죄와 죽음의 보편성이다.
< 13절 >
원문에는 ⌈가르⌋ γάρ for 라는 접속사로써 위의 말에 대한 이유를 말하려고 한다. 위에서, 사람은 다 죄를 지었고 따라서 다 죽어야만 했다고 말했으나,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입장에서는 자연히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을 뒤집으면 “율법은 죄를 죄로 판정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율법이 나타나기 전에는 죄가 없다는 말이 되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13절은 답변을 한다. 율법이 생기기 전에도 죄는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율법이 없으니까 죄를 죄로 간주하는 일이 없었을 뿐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이 후에 나타나서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쳤지만, 죄는 시조 아담 때부터 보편적으로 존재해 온 것이다.
< 14절 >
율법이 없을 때에도 죄는 죄였고, 그것이 세상에 편만해 있었다는 것을 13절에서 말한 다음 이제 14절에서는, 죽음 역시 율법과는 무관하게 자기 세도를 부렸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즉 율법이 나타나서 죄를 죄로 판정해 주는 일이 생기기 전에도 죄는 죄였기 때문에 그 벌로서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는 것이다. 왕 노릇했다(⌈에바실류센⌋ ἐβασίλευσεν)는 말은 죽음의 세력이 완전히 전제적(專制的)으로 지배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임금 앞에서 사람은 속수무책이고, 어떤 핑계나 이유를 달아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다 사는 처지와 환경이 다르다. 다른 처지에서 각각 다른 죄를 짓는다. 시조 아담의 범죄(⌈파라바시스⌋ παράβασις=overstepping=한계를 넘음)와 다른 사람의 범죄는 그 종류와 성격이 다 다르다. 죄의 종류와 성격이 다 다르더라도 죄는 죄이다. 나는 아담과 같은 죄는 안 지었으니 무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한 사람도 죄가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결국 죽음이 율법 시대 이전에도 인간을 지배했다는 말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표상 (⌈튀포스⌋τύπος)은 원래 pattern, model, ex-am-ple, stan-dard라는 뜻으로서, 전형(典型)에 찍어내면 꼭 같은 모양의 물건이 나오듯이�아담과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같은 형(形)의 존재라는 것이다. 15절 이하에서 아담과 예수의 형태적 비교론이 나온다.
< 15절 >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12-14절에서는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의 위력에 대해서 말했다. 이제 15절에서는 강한 반의적(反意的) 접속사 알라 ἀλλά 를 사용하여 위에서 말한 죄와 죽음이라는 부정적이고도 파멸적인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은사의 사건을 대조적으로 소개하며 나온다. 여기서 ‘범죄’라는 단어는 14절의 παράβασις와 동의어인 ⌈파라프토마⌋ παράπτωμα 로서, 본디 “떨어져 나간다,” “헛 집는다”등의 뜻을 가진 동사에서 왔다. 여기서는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와 ⌈파라바시스⌋ παράβασις 와�거의 차별 없이 동의어로 혼용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대조적으로 ⌈카리스마⌋ χά- ρισμα 라는 낱말을 쓰면서 파라프토마(범죄 παράπτωμα)와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첫 아담과 둘 째 아담(예수)이 각각 전 인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둘이 가져온 결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바울은 예수 사건을 포괄적으로 이 은사(恩賜 ⌈토 카리스마⌋ τὸ χάρισμα)란 말로 표현하였다. 은사 χάρισμα 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로서의 선물”을 의미한다 (Barclay M. Newman,Jr., A Concise Greek-English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1971, p. 197). 바울은 예수 사건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으로 판단하였고, 그 은총은 결국 사람에게 무상으로 구원을 주시는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것은 하나의 “은총적 선물”(카리스마)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 은사 사건은 그 범죄 사건과 다르다는 명제(命題)를 말한 후에 어째서 그러냐 하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 원문에서는 ⌈가르⌋(γάρ 왜냐하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어째서 그리고 무엇이 다르냐 하면, 아담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부정적이고도 파멸적인 결과가 나타났는데,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 인하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쳐흐르는 풍성하고도 긍정적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조가 된 것은 (1)원인에 있어서, 첫 아담의 경우에는 그의 범죄: 둘 째 아담 예수의 경우에는 은혜 χάρις, (2) 결과에 있어서는, 첫 아담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의 죽음: 예수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에게 주어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와 “선물”은 무엇일까. 16절 이하에서 그 설명이 나온다.
< 16절 >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15절 처음에 제시한 명제를 다시 끌고 나온 것이다. 첫 아담을 “죄를 범한 자”라는 한 마디로 규정하고, 15절에서 은사 χάρισμα 라고 한 것을 여기 16 절에서는 선물 δώρημα 이란 말로 바꾸었다. 15절의 선물은 ⌈도레아⌋ δωρεά 였는데 그것은 ⌈도론⌋ δώρον 과 같은 뜻이다. 그냥 선물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16절의 선물 δώρημα 은 약간 뉘앙스가 다른 말이다. 즉 그 배후에는 ⌈도레오마이⌋ δωρέομαι라는 동사가 있고, 선물로 준다는 동작이 암시되고 있어서 “선물로 거저 받은 물건”이라는�뜻을 풍긴다. “뭐가 다르냐”라는 질문을 예상하면서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하여 여기서도 원문에서는 ⌈가르⌋ γάρ 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연결시켰다.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첫 아담은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이르렀고 결국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의 경우에는, 만민의 죄를 위한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은총의 선물이 사람들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 (⌈디카이오마⌋ δικαίωμ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에게 무죄 선언을 해 주시고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를 선포해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의 δικαίωμα는 배후에 δικαιόω라는 동사가 있다. “의롭다고 해 준다” “무죄로 선언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이며, 그러한 동작의 결과로써 얻어진 것을 δικαίωμα라고 한다. 여기서 다시 첫 아담의 경우와 둘 째 아담의 경우의 차이와 대조가 나타났다.
(1) 아담의 경우에는 그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며: 예수의 경우에는 (그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 때문에) 사람의 그 무수한 범죄에 대하여 은총을 베푸는 사건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2) 아담의 경우에는 결국 인간이 유죄판결을 받는데 이르렀고: 둘째 아담의 경우에는 죄인들의 칭의, 즉 많은 인간이 무죄 선언을 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7절 >
17절은 16절 초두에서 말한 명제를 부연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가르⌋ γάρ 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위에서 한 말에 대한 이유를 보충하려는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지만,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크냐 하는 것이다. 다시 그 대조를 정리해 본다면, (1)첫 아담은 범죄하였고: 둘째 아담 예수는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칭의의 은혜와 선물을 인간에게 넘치도록 주신다. (2) 아담의 경우에는 사망이 왕권을 가지고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었고: 둘째 아담의 경우에는 칭의를 받은 인간들이 생명을 누리며 왕 노릇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 두 경우가 다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 18절 >
위에서는 주로 첫 아담과 둘 째 아담이라는 사람에다 중점을 두고,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미친 영향을 논하였다. 여기 18 절에서는 그 둘이 행한 일에다가 초점을 두고 있다. 시조 아담이 선악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은 그 한 가지 범죄 사건이 그 자신의 단죄를 가져올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유죄판결에 이르게 했다. 이와 같이 예수는 한 번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간에게 무죄 선언을 주실 공로를 이루셨고 그 결과는 죽었던 인간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조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정죄를 낳았고, 그의 후손도 다 법죄함으로써 결국 모두가 정죄를 받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예수는 단회적 once for all 인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만민의 죄를 사하실 공로를 이루셨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다. 무죄 판결(⌈디카이오시스⌋δικαί-ωσις)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됐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어전에서 살 자격이 있으며 결국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아담과 예수가 대조되었지만, 결국은 예수 한 분 때문에 만민에게 무죄 판결과 생명이 초래됐음을 말하고 있다.
< 19절 >
19절은 역시 18절에서 한 말의 이유와 보충적 설명을 붙이기 위해서 γάρ(왜냐하면)라는 접속사룰 가지고 시작한다. 시조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둘 째 아담 예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무죄한 자로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연(敷衍) 보충된 것은 아담의 범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파라코에⌋ παρακοή)이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강림과 죽으심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복종(⌈휘파코에⌋ ὺπακοή)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III. 사 역
12 그러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또한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13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간주되지 않는 것이지만, 율법이 나타나기까지도 죄는 세상에 존재했었고
14 아담 (때)부터 모세 (때)까지, 사람들이 아담의 범죄와 같은 모양의 죄를 짓지는 않았는데도 죽음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15 그러나 그 은사(의 경우)는 그 범죄(사건의 경우)와 같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그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는 더 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쳐 흐르게 됐습니다.
16 그 선물로 주신 것은, 범죄한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결과와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 때문에 심판이 왔고 그 심판은 정죄를 가져왔지만, 많은 죄를 용서하시는 그 은사는 결국 (죄인들에게)무죄 선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17 그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는 사람들이 죽음에게 지배를 받아야 했지만, 무죄 선언의 은혜와 선물을 넘치게 받은 사람들은 더 큰 혜택을 받습니다. 즉, 그들은 생명을 누리면서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저 것도 아담 한 사람 때문이며 이 것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입니다.
18 그러므로 그 한 개의 범죄 사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게 된 것처럼, 그 한 번의 칭의 사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무죄 선언을 받아 생명을 얻게 됐습니다.
19 그것은 그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인정을 받은 것처럼, 그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로운(무죄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메 시 지
1. 죄와 죽음의 보편성.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죄에 익숙해 졌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 죄불감증(罪不感症)에 걸려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시조 아담 이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범죄하였고, 또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예외 없이 죽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방인(우리)은 율법이 없으니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궤변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적으로 말해서 누가 감히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요한 1서는 공박한다(요일 1:10). 사람치고 죽지 않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죄는 누구에나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알게 된다. 옛날에는 사람이 미개해서 죄가 있었고 지금은 사람이 개명했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말도 할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를 짓는 사람들이고, 또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들이다. “죄 짓고 살다가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은 죽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닌 것을 어쩌랴.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로서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육체가 다시 부활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으며, 죄 있는 자는 영원한 형벌, 즉 영원한 슬픔과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죽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은총적 조치. 죄 있는 인간, 죄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하는 인간,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이나 재간으로는 그 벌을 면할 도리가 없는 것이 인간의 절망적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 암흑을 깨뜨리고 하나님 편으로부터 벽력과 같은 광명이 터져 나왔다. 재창조의 역사가 하나님 주도 하에 나타났다. 그것을 일명 하나님의 은사 사건이라고나 할까. 인간이 다 죄를 짓고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하늘로부터 광명이 비쳐 왔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모두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졌다. 죽어야 마땅한 우리 인간에게 이것은 문자 그대로 선물이요 은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죄 투성이인 우리들을 하나님은 값없이, 즉 공짜로 용서해 주시고, 죄 없는 자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다. 무죄 선고를 받은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에서 풀려 난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아가며, 감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어전에서 쫓겨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이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생명으로 충만할 것이다. 즉 영생을 만끽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3. 구원받은 자의 태도. 이 은사는 유대인에게만 주어지거나, 반대로 이방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공개된 축복이요 보편적 선물이다. 요는 하나님의 그 복음을 우리가 받아들이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로(1)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지는 일이다.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는 일이다. (2)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고통과 복종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언제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잘 나서나 나의 어떤 공로는 조금도 없는데도 이루어진 사건이기에 우리는 어디까지나 겸손한 가운데 기뻐하며 자랑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은 죄가 미워서 인간을 벌하셨고, 반드시 죄 값을 받아 내시고야 마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독생자의 대속적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으니, 구원받은 사람은 철저히 죄를 멀리하고 무든 면에서 성결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4. 아버지 하나님의 관심사. 우리는 많은 경우 모든 것을 자아 중심적으로 생각한다. 나 개인이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한국 기독교의 특색 중의 하나가 바로 개인 구원 또는 영혼 구원에 치중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생각의 패턴을 따라서 개교회주의, 교파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 인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들의 좁은 관심을 초월한다. 세상이 구원 얻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세상이라는 말은 임종, 성별, 빈부, 계급 등을 초월하고 포섭하는 모든 인간 세계라는 말도 되지만, 인간의 종교 차원뿐 아니고 기타의 모든 분야를 포함하는 세계까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구원이란 영혼의 구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이 하나님의 법과 뜻에 맞는 정상 선에로의 복구 내지는 도달을 의미해야 한다. 인간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기타 모든 방면이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만연되어 있는 죄와 악을 제거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내 영혼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천당에 가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사고를 탈피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 지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