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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게시판(자유게시판) 스크랩 메이플라워호(Mayflower)
우물가에서 추천 0 조회 602 10.08.20 05: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복원된 mayflower-2호의 그림

메이플라워호(Mayflower)

square01_red.gifMayflower의 간단한 역사와 청교도 정신

square01_red.gif종단면도

square01_red.gif항해일지

square01_red.gifWilliam Bradford의 항해보고서와 다른 보고서

Mayflower호의 정확한 구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Mayflower에 대한 묘사, 그림, 상세도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약 180톤의 적재량을 가진 배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실에 근거하여 17세기 상선구조에 밝은 전문가에 의하면 bowsprit의 beak(배 앞 부리)로부터 back rail까지 대략적으로 113피트, 용골길이 약 64피트, 폭 약 25피트로 보고 있다.

1928년 Mayflower호의 모델은 17세기 상선건조 전문가 R.C.Anderson에 의해 복원된 바 있으며, 1955년 미국과 영국의 협력으로 영국 스튜어드 압팜스 조선소에서 설계와 고증을 담당한 William. A. Baker에 의해 비슷한 유형의 MayflowerⅡ로 재생, 1977년에는 17세기초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던 조건으로 시험 항해한 바 있으며 지금은 미국 폴리머스항에 영구 보존 중에 있다.

 

메이플라워호(Mayflower)

 

 

 

 

 

 

 

 

 

 

Mayflower호의 간단한 역사

Mayflower호는 노르웨이 깊숙한 발틱해까지 순항하는 상선이었던 걸로 1609년 당시 최초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당시에는 Christopher Nichols, Richard Child, Thomas Short, Christopher Jones등의 소유로 되어있다. 선원, 목재, 생선과 약간의 그린랜드산 고래고기 등을 수송하기 위해 용선, 후 에 지중해의 포도주와 향신료 무역선으로 활약.

1620년 Thomas Weston은 John Carver와 Robert Cushman 의 지원을 받아 버지니아(처녀지라는 뜻 : 1607년 영국인 105명이 세척의 배를 타고 아메리카 북위 36도 해안지방에 상륙하여 식민을 하기 시작한 최초의 지역)북쪽의 식민지 건설을 목적으로 항해에 착수키 위해 Mayflower 와 Speedwell호를 용선 하였다. 그러나 Speedwell 호는 물이 자주 새는 관계로 Mayflower와 같은 유명한 항해를 남기지 못하였고, 1620년 뉴 잉글랜드에 청교도들을 실어 나를 때의 선장은 Christopher Jones였으며,

복원되어 영구보존중인 Mayflower호

1620년 11월 11일 케이프 코드만(Cape Cod Bay)의 한 곳에 정박, 그 지역 이름을 그들이 떠나온 폴리머스항 이름을 따서 "폴리머스 (Plymouth)", 그곳에 있는 강 이름은 선장의 이름을 따서 "죤스강"이라 하였다.그 해 겨울 Mayflower호는 아메리카에 머물렀으며 승무원과 청교도들은 혹독한 겨울 추위와 굶주림, 괴혈병으로 거의 절반이 죽는 고통을 당하였다.

1621년 4월 5일 영국에 되돌아 오기 위해 출항, 도착 후, 스페인 , 아일랜드, 프랑스까지 약간의 상거래 항해를 하였다. 하지만 죤스 선장이 얼마되지 않아 죽자 배의 평가를 위해 약 2 년동안 항해 중지되었다.
이 당시 배의 평가서(배의 평가액 128-8-4 파운드)가 Mayflower호의 마지막 기록물이다. 배의 상태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고, 당시 영국은 나무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 배의 가장 값 어치있는 부분은 나무 조각이었으며, 거의 분해되어 작은 조각으로 팔려지고 말았다

 

미국의 청교도 정신 : 이는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 이주민이 뉴 잉글랜드 지역에 정착,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메이플라워의 맹약(Mayflower Compact)으로 그들끼리 굳은 신앙심 과 용기를 가지고 뭉쳐 어느 식민지와는 다르게 높은 도덕의식을 가지고 자치적으로 모범되게 그 고장을 꾸려 나가 뉴 잉글랜드는 지금도 미국 정신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되어 있다.
지금도 뉴 잉글랜드 지역 사람들은 미국어가 아닌 영어를 고수하며 학문을 숭상하고 있으며, 특히 그 고장의 하버드 대학은 청교도 이주민들이 정착 후 목사 양성을 위하여 미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대학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Mayflower호의 당시의 항해보고서 :

Mayflower호가 항해 중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묘사가 유일한 기초 자료 보고서이다. 그것은 William Bradford의 "폴리머스 식민지의 역사" 에 쓰여져 있으며 원문은 다음과 같다.

  ~ 9월 6일, 모든 문제들이 잠잠해져 선 내에서 서로 단결되어 있었으며, 순풍을 타고 바다로 나갔으며 이러한 상태는 수일간 지속되어지고 그 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비록 해상풍토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신의 특별한 섭리를 생략해도 좋을 것 같았다.

선원 중에 매우 비속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큰 덩치의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그를 거만하게 만들었다. 그는 항상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었으며 가혹한 저주를 매일 퍼부었다. 그는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그들 중 반을 바다에 투기하고자 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 기쁨을 얻으려 하였다. 남들이 타이르면 가장 저속한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신은 기쁘게도 항해의 절반도 되기 전에 이 젊은이에게 가혹한 질병을 내려 절망적인 몸짓으로 죽게 하여 그 자신이 해상 투기된 첫번째의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신이 그에게 내린 형벌로 인식되어 그의 모든 친구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어느 정도 순풍과 좋은 기상상태에서 항해하고 난 뒤 그들은 세찬 바람과 폭풍을 만났으며 배가 심하게 흔들려 상갑판은 누수징조가 있었으며 선박 중앙의 중심 Beam이 구부러져 균열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는 이 항해를 마치지 못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그들에게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 일부 조장들은 선원들의 중얼거리는 소리에서 선원들의 감항능력에 의문을 품고 있음을 알고 그들이 절망적이고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 빠질 수 있다는 생각에 선장과 다른 사관들과의 협의에 들어갔다.  

그들의 노임을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항해는 이제 절반만 왔음으로)와 반면 절망적인 위험에 그들의 삶을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선원들간에도 큰 의견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의견을 종합하여 선장과 그 외 다수는 선박의 항해능력에 확신이 있었으며 Main Beam을 조이기 위해 승객들이 폴랜드에서 가져온 대형 쇠 나사못을 이용하여 Beam을 일으켜 세워 그 밑에 기둥을 세움으로써 밑바닥 갑판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갑판과 상갑판 구조물에 방수작업을 하였으며 돛에 과부하만 걸리지 않는다면 크나큰 위험이 없음에도 그러한 방수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의 뜻에 맡겼으며 계속 항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다발적인 폭풍 중에 바람은 거세고 파도도 높았으며, 따라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고 수일간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폭풍 속을 표류 중 John Howland라는 청년이 바다에 떨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신께서 topsail halyards에 그를 걸리게 하여, 그가 이미 바다 속 깊이 갈아 앉았지만 로프에 의해 수면위로 떠오를 때까지 의식을 잃지 않았으며 보트의 갈코리 와 기타 장비에 의해 다시 배 위로 올려져 생명을 구하였다. 그는 그 뒤로 오래 살아 교회와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 전 항해기간중 그들이 연안에 가까워졌을 때 한 사람만 사망하였는데 Samuel Fuller의 젊은 하인인 William Butten이다.

생략...,

그들은 길고 긴 처절한 항해 끝에 케이프 코드만에 도착하였으며 별로 기쁘지도 않았다. 선장과의 심사숙고 끝에 허드슨강 유역에 그들의 거주지를 찾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반나절 정도 연안을 항해한 뒤에 그들은 위험한 암초지역에 걸렸으며 바람은 그들을 심하게 몰아 붙여 Cape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둠이 덮치기 전에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 Cape는 Captain Gosnold와 그의 동료, Anno에 의해 1602년 최초로 명명, 후에 Captain Smith에 의해 "Cape James"로 불리어 졌으나 전의 이름이 선원들 사이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위험한 모래톱이 보였던 이 지점을"Point Care"와 "Tucker's Terror"로 불렸다. 그러나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그들이 그곳에서 받은 손실과 위험한 모래톱 때문에 "Malabar"로 불렀다. 무사히 항구에 도착 후 상륙하여 그들은 무릎을 꿇고 거대하고 무서운 대양에서 그들을 인도하고, 모든 위험과 바람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안정되고 단단한 땅에 인도한 하늘의 신에게 감사드렸다.

Mayflower호의 항해보고서 중 다른 유일한 하나는, 그것이 Mayflower호의 승객에 의하여 쓰여지지 않았지만, 1624년 John Smith 선장에 의하여 그가 들었던 오래된 이야기와 영국으로 보내졌던 편지를 읽고서, 이를 근거로 작성되었다. John Smith 가 썼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좋은 뜻을 가진 몇 명의 런던상인과 신사들이 두 척의 배를 제공하였다. 한 척은 160톤 가량의 Mayflower호 이며, 다른 하나는 70톤의 Speedwell호이다. 그들은 8월 23일 120여명과 함께 영국 해안을 떠났으나, 다음날 작은 배의 누수가 발생하여 폴리머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며 그곳에서 작은 배와 20명의 승객을 내리고 큰 배와 선원을 제외한 100여명의 승객만 9월 6일 다시 출항하여 11월 9일 Cape James(Cape Cod)에 당도함.
그러나 9주 동안, 이 불결하고 물이 새는 배에 갇혀 있었고, 침실은 젖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약해져 있었고 파도에 지쳐 있었다."

당시의 항해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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