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일선군(一善郡:구미시) 출생. 눌지왕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신라에 들어갔으나 탄압이 심하였으므로 집 안에 굴을 파고 그를 숨겨주었다.
그후 소지왕 때 승려 아도(阿道:我道)와 시자(侍者) 3인을 집에 머물게 하고 불교 신자가 되었다. 누이 사씨(史氏)도 아도의 전교로 승려가 되어 영흥사(永興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모록(毛祿)으로 기록된 이름도 있으나 녹(祿)과 예(禮)가 자형이 비슷한 데서 생긴 와전으로 추측된다. 또 털례[毛禮]의 음이 변하여 절[寺]이라는 말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
근대의 기독교 전래과정을 반추해봤을 때 삼국사대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공인되기 과정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을 겼었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따라서 당시 불교를 공개적으로 포교하거나 믿는다는 것은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상황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저위 사전상의 '모례'의 설명과 같이 묵호자를 숨겨주거나 아도화상등을 숨겨주고 스스로 불교신자가 되는 것은 목숨을 내건 행위였을 것이며 더구나 모례의 집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다는 것은 그곳이 고대 로마의 지하교회 카타콤베같은 전도의 중심처였을 것이다.
따라서 비밀리에 전파되는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 포교과정에서 '모례'의 집은 사찰을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상징으로 회자되었을 것이며 당시에 '모례네'간다는 것은 지금의 '절'에 간다는 의미와 동의어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눌지마리한(마립간=왕)'재위시기인 417년경에는 즉 5세기초에는 한자가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이며 사람들의 이름도 특수한 귀족이 아니고는 성도 없었고 이름도 한자로 작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모례'라는 이름은 실제 후대에 불교가 공인된 후 초기 포교의 과정과 당사자들을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윤색되었을 것이다.
즉 순수한 토착어를 한자로 재귀하여 기록했을 개연성이 높다. 실제 이것은 삼국이 신라에 의해 잠정적으로 통합된 후인 8세기 경덕왕때에 우리나라의 모든 지명은 한자로 바꾸었다는 역사적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이는 상당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개연성은 기록에는 '毛禮'라 한자로 적고 있지만 실제 현상에서 인구에 회자된 것은 '뎔'이라는 것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에 사람들은 '털(누구 누구)네'간다고 했을 것이다. 그 불교 포교의 중심지의 집주인 이름이 '털(보)네'였을 것이다.
이것이 후에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털(고어는 뎔)'은 '毛'로 바뀌고 털(보)네'라는 full name에서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 '보'는 탈락하거나 생략되었을 것이며 장소를 나타내는 접사 '네'는 근사한 발음인 한자 '례'를 붙여서 '毛禮'라는 이름으로 기재 전승되었을 것이다.
이런 형식의 논리적 접근이 아니면 당시 불교 포교의 중심지였던 '뎔(보)네'가 현대어 '절'로 음운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해낼 수 없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뎔(보)네<뎔-보(탈락)-네<뎔-네(탈락)<뎔'로
음운변화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것이 다시 후에 구개음화과정을 거치면서 '절'로 정착화했다.
동시에 이 말은 일본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4세기전반에 생성되어 5세기초까지 근 100여년간에 걸쳐서 불교의 사찰을 의미하는 여러가지 어휘중에서 최종적으로 살아 남은 '뎔'이라는 말은 백제 성왕때인 538년(552년 설도 있음)에 일본에도 전승되어 '뎔<뎌+라(개음절화)<데라' 순으로 음운변화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된 것이다.
한국어-'뎔(보)네<뎔-보(탈락)-네<뎔-네(탈락)<뎔(구개음화)<절
일본어-뎔<뎌+라(개음절화)<데라(てら [dera=寺=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