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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에스코리알 (El Escorial)
- 스페인 왕실의 영묘가 있는, 펠리페 2세의 거대 궁전과 수도원 -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48km지점. 구아다라마 산맥 아래에 위치한
이 장대한 수도원 겸 궁전은 스페인 제국의 영광을 상징한다. 스페인 역사상 가장 영토가 넓어
'해가 지지않는 나라'를 구가하고 있을 때의 왕은 펠리페(필립) 2세 시대이다.
16세기 초반 그가 통치한 지역으로는 스페인과 포르트갈을 포함하여
이베리아 반도 전체와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시칠리아, 네델란드와 벨기에, 프랑스의 보르고뉴,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의 중남미 등 그야말로 막대한 세계 대국을 다스렸다.
그는 1569년 아시아까지 진출하여 식민지를 정복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필립핀이라 불렀다. 바로 '필립의 땅'이라는 뜻이다.
북유럽에서의 식민지 해방 운동과 더불어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저항하여
제국과 카톨릭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안간함을 쓰던 펠리페 2세는,
1557년 8월 10일 '성 로렌스의 축일'에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자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이 왕립 수도원 겸 궁전을 건설하였다.
펠리페 2세가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및 왕궁을 짓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1) 부왕인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1세는 생전에 부부가 함께 묻힐 무덤을 만들 장소를 끊임없이 물색했다.
(2) 생캉탱에서 프랑스군에게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것
(3) 순교자 성 로렌스를 기념하는 일이었다. 생캉탱 전투는 성 로렌스 축일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산 로렌스 델 에스코리알(San Lorenzo del Escorial)
수도원은 남북 207m, 동서 162m인 직사각형의 부지 위에 세워졌다.
수도원, 스페인 역대왕의 영묘(靈廟), 왕가의 휴식을 위한 별궁 등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앙에 원형 돔으로 솟은 대성당이 있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은 정치의 중추기관인 동시에 궁전, 신학교, 르네상스식 도서관, 귀족 자제의 학교,
병원 시설을 갖춘 어지간한 도시와 같은 규모였다. 이 수도원은 문인, 성직자, 공장(工匠), 음악가 등의
활동을 옹호하는 등 세기를 대표하는 문화센터이기도 하였다.
남쪽과 북쪽, 서쪽에는 산뜻한 직선을 긋는 파사드가 있으며 건물 중심축 뒤쪽에는 도서관, 제왕의 안뜰, 성가대석,
작은 왕궁, 국왕의 무덤 등이 있는데, 이런 시설들이 건물에서 가장 기품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커다란 탑을 세웠고 건물 안에는 방 300개와 안뜰 16개, 회랑 15개를 두었는데,
이를 합치면 전체 길이가 16km나 된다. 성당은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본떠 지었다.
1563년 스페인의 황제 펠리페(Felipe) 2세는
건축가 후안 바우티스타 데 톨레도(Juan Bautista de Toledo)에게
스페인 제국의 권력과 위대함을 상징하는 불후의 건축물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펠리페 2세는 ‘기품 있고 남성적이면서 엄숙하며 까다롭지 않은 건물’을 주문했고, 장소로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50㎞ 떨어진, 과다라마 산맥이 메세타 평원과 접하는 지점을
선택했다. 펠리페 2세는 건설 과정을 몸소 지시하고 감독했다.
공사 시작 21년 만에 해발 1천m의 언덕에는 단아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조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 왕실 수도원 겸 궁전인‘산 로렌조 데 엘 에스코리알(San Lorenzo de el Escorial)’은
스페인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오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세계인들의 보물이 됐다.
마드리드 왕궁과 아란후에스는 화려하기로 앞뒤를 다퉜지만 필리페 2세가 가장 사랑한 곳은
엘 에스코리알이었다. 영양과다에 의한 통풍으로 죽음을 앞둔 필리페 2세는
자신의 마지막 생을 엘 에스코리알에서 마감하길 원했다.
1598년 7월, 7일간에 걸쳐 마드리드에서 이곳으로 온 그는 그 해 9월
오물이 뒤범벅 된 방에서 외롭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죽음을 앞둔 그를 태웠던 가마는 지금까지도 엘 에스코리알의 왕궁에 남아 있다.
이 수도원은 종교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로 206m, 세로161m)로
일찍이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스페인 건축가 후안 바우티스타 데 톨레도가
1563년에 짓기 시작했다. 톨레도가 전체 설계를 맡은 엘에스코리알 수도원은
전체적으로 거대한 장방형으로 세 부분으로 구분되며 중앙에 교회가 있다.
남쪽에는 왕궁과 집무실들이 있는 5개의 작은 회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수도사들의 숙소가 있다.
1567년 톨레도가 죽자 후임자 후안 데 에레라는 교회(1572)를 새로이 설계한 것을 비롯하여
전체적인 설계를 대폭 수정한 후 1584년에 완공시켰다.
넓이가 약 3,600㎡인 교회는 대략 그리스 십자형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중앙에 높이가 약 18m인 큰 돔이 있다.
에레라가 이 건축물을 설계하면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보다는 훨씬 더 엄숙한 느낌을 준다.
장식이 많지 않은 채 도리아 양식의 벽기둥만 두드러진 내부의 육중한 벽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여느 건축물보다도 간소하다.
수도원의 거대한 규모와 은근한 회색인 외부 화강암 벽은 당당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건축물로 에레라는 유명해졌으며
그후 반 세기 동안 에레라 양식이 스페인 건축에서 주류를 이루었다.
서쪽면 중앙 출입구 윗편에 석쇠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고기와도 같이 불 위의 석쇠에 올려져 순교한 '성 로렌스'를 기념하기 위함이다.
성 로렌스는 지글지글 살이 타들어 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얘들아, 다 구웠으면 뒤집어야지" 했다던가.
입구를 들어서면 '제왕의 안뜰'이라 부르는 중정이다.
이 이름은 유대 왕국의 역대 군주상이 성당 정면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는데서 유래했다.
그 안쪽이 성당(Basilica)이다.
대성당(Basilica) 내부
높이 30m의 제단장식은 에레라의 작품이다.
성당의 천장은 루카 조르다노가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됐다
자연 채광이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성가대석을 밝혀준다
'복음서 기자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대 회랑
수도원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대 회랑은 '복음서 기자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상하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도리아 양식, 2층은 이오니아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2층 모두 장식 아케이드가 있다.
‘복음서 기자의 안뜰’은 미켈란젤로에 대해 공부한 톨레도가
이 수도원에서 제작한 최고 걸작으로,
그의 고전주의에 대한 열정을 잘 말해 준다.
왕궁과 성당, 수도원을 잇는 회랑에는 화려한 벽화가 줄을 이어 펼쳐진다.
전투에 승리한 이야기도, 성경의 구절을 담은 그림도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도서관
엘 에스코리알 도서관에는 대부분이 화려하게 장식된 4,700가지 이상의
귀한 필사본과 4만 권의 인쇄본이 소장되어 있다.
오래 세월을 엘 에스코리알과 함께 한 도서관의 책들은 모두 거꾸로 꽂혀 있다.
이는 종이가 숨을 쉬어 썩지 않도록 하는 작은 배려라고 한다.
가톨릭 신앙을 굳건하게 지키려했던 왕은 종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이곳에 모았다.
장서들은 회랑 형태의 도서관 벽면을 따라 늘어선 책장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벽면과 아치형 천장을 채운 티발디의 프레스코화도 방문자들의 눈길을 빼앗는다.
엘 그레꼬의 <성 마우리시오의 순교>
미술관 첫 번째 방에 있는 엘 그레꼬의 '성 마우리시오의 순교'는
그림을 주문한 펠리페 2세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 그로 인해 엘 그레꼬는
궁정화가가 되지 못하고, 그림은 지하창고에 그대로 방치되었었는데
지금은 엘 에스코리알 궁전의 보물이 되었다.
역대 국왕들이 잠들어 있는 왕가의 영묘
(Los Panteones)
성당 제단 아래(지하)에 있는 판테온으로 들어 가는 문
펠리페 2세는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카를로스 5세 이하의 모든 스페인 통치자들의
무덤을 모시기 위한 왕립 판테온으로 삼았는데, 실제로 펠리페 5세, 페르난도 6세,
알폰소 8세 이외의 모든 왕들은 계획대로 이곳에 묻혔다.
스페인 국왕부부의 묘소는 지하 원형묘실에 집단 설치되어 있다.
1584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1세가 안치된 금속관이 맨밑에 자리잡은 이래
현재의 부르봉 왕가에 이르기까지 12명의 국왕과 그 부인 등 24명의 유해가 원형묘실의
4층으로된 아파트처럼 세워진 묘실인 니초(Nicho)형 칸 칸마다에
숨진 연대순으로 모셔져 있다.
에스파니아 전성기 시대의 왕 펠리페 2세
회화 등 미술품을 보호하여 에스파냐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음
라 그랑하 궁전
La Granja de San Ildefonso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라 그랑하 (La Granja)는 스페인어로 '농장'이란 뜻이다.
근처의 세고비아가 스페인 수도일 당시,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 1세가
수도승들에게 농장으로 하사한 땅이라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1700년대 초, 스페인 왕 펠리페 5세 (프랑스 브루봉 왕가의 첫 스페인 왕)가 카톨릭 교회로 부터
땅을 매입하여, 모국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따 지은 것이 '라 그랑하 궁전'이다.
스페인 왕가의 대를 잇기 위해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서 건너온,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작은 베르사이유'라고 불리는 이 궁전을 건축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정원이 매우 화려하다.
1724년 1월 국왕 펠리페 5세(Felipe V)는 첫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발표를 한 후
이 도시로 옮겨와, 새로 건축한 화려하고 장대한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
(Palacio Real de La Granja de San Ildefonso)에서 8개월 후 복위할 때까지 지냈다.
펠리페 5세는 퇴위 후에도 여전히 국정에 관여했으므로 그가 머무는 동안에는
이 도시가 사실상 에스파냐 정치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궁전 주변을 둘러싼 넓이 6km²의 광대한 정원은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장식한 많은 분수와
조형미가 빼어난 크고 작은 수목이 어우러져 18세기 유럽의 가장 훌륭한 정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현재 이 궁전은 국가유산(Patrimonio Nacional)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분수가 물을 내뿜기에 지쳤는지 잠시 쉬고 있다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 태어났으며, 제우스 및 하데스 등과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 돌고래, 물고기, 말, 소가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주로 삼지창(트리아이나)을 들고 물고기나 돌고래 떼와 함께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리며 파도를 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엄청나게 큰 향나무였다.
얼마나 큰 향나무인지 가늠하라고 나무 아래에 최진석 교수를 세웠다
궁전 출입문 왕관엔 브루봉 가의 ' 백합 문장'이 새겨져 있다.
길손들은 떠나고 원주민들의 대화는 끝 없이 이어지고......
-공부합시다-
엘 그레꼬의 <성 마우리시오의 순교>
Martyrdom of St. Maurice and his Legions - GRECO, El (1580-1581)
Oil on canvas, 448 x 301 cm. Chapter House, Monasterio de San Lorenzo, El Escorial
엘 그레코가 펠리페 2세의 궁정과 맺은 관계는 짧았고 별로 순조롭지 못했다.
〈펠리페 2세의 꿈 Dream of Philip Ⅱ〉, 1578~79)에 이어
〈성 마우리시오의 순교 Martyrdom of St. Maurice〉(1580~82)를 그렸는데,
2번째 그림은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당장 똑같은 주제로 다른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했고 이로써 이 위대한 예술가와 스페인 궁정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왕은 성 마우리시오를 포함한 주요집단의 군청색 옷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충격적일 만큼 눈부신 노란색이 마음에 안들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요즘 사람들에게는 엘 그레코의 대담한 색채 사용이 특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색채가 형태를 암시하는 기법과 공간을 자유롭고 환상적이며 몽롱하게 창조하는 기법에는
베네치아 양식의 붓놀림이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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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미안 황제 치하에서 테반의 헤르쿨리우스 부대는 이집트 상류에서 온
크리스천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부대의 대장인 마우리시오와 수많은 동료들은
바고데족을 격퇴한 승전 축하연에서 이방신에게 희생드리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이방신 제사에 참여케 하는 것은 당시 크리스챤을 박해하는 수단으로
흔히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방신 제사에 참여를 강요하는 명령이 거듭하여 떨어졌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황제는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6천 명이나 되는 이 부대를 아가우눔(현재 스위스 근처)에서
처형(287년경), 전멸시켰다. 이들의 지도자는 마우리시오와 엑수뻬리오 그리고 깐디도였다.
이 이야기를 기술하신 분은 리용의 주교이던 성 에우체리오이다(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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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로렌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중 일부
왼쪽 사다리(석쇠)를 짊어진 사람이 성 로렌스이다
성 로렌스 St. Lawrence(라우텐티우스)는 로만 (천주)교회를 위해 봉사한
최초 일곱 명의 부제(deadon)중의 한사람인데, 당시의 교황 씩스투스 Pope Sixtus가 보는
미사를 돕고, 영성체를 분배하는 일도 도왔다. 또, 크리스챤들이 봉헌한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분배하는 것도 이 성인의 임무였다고 한다.
교황 씩스투스가 끌려가 죽음 당할 때, 성 로렌스는 자신도 함께 죽을 수 없음을 슬퍼했는데,
교황은, "울지 말아라. 너도 3일 안에, 나를 따를 것이니까." 했다고 한다.
성 로렌스도 체포되었다. 시의 장관은 3일 안에 교회의 보물과 재물들을 다 모아서 바치라고
명령했다. 성 로렌스는 재물은 가난한 이들에게 다 분배하고, 빈곤하고 병들은 사람들을 모아
장관에게 데리고 가서 "이 사람들이 교회의 실제 보물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전설을 따르면, 성 로렌스가 순교당할 때(258 AD) 그의 몸은 석쇠 위에 눕혀졌고, 불이
석쇠 아래에 지펴져서 살이 구워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내 몸을 뒤집어도 되겠다, 한쪽은 이제 충분히 구워졌으니까."
로렌스 성인의 축일은 8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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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로마기독교회에서 재정을 담당했던 로렌스 성자는 그 이름이 이태리어로는 ‘Lorenzo’로
미켈란젤로를 돕고 지원하였던 ‘로렌조 가문’과 동일하기도 하다. 성자 로렌스는
교회의 진정한 부(富)는 금(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신도들의 신앙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위해 시스틴 채플로 돌아온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바로 성 로렌스의 그것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