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동 - 말과 자유
지난겨울 광화문 촛불혁명 때 김제동은 광화문 광장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달달 외우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뜨겁게 각성시켰다. 헌법을 근거로 정부권력을 비판하고 국민의 정당한 권리를 옹호하는 김제동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전태일와 예수를 생각했다. 더불어 국어교사로서 혹은 글쟁이로서 말과 함께 살아온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지켜지지 않는 ‘근로기준법’ 책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은 22살이었다. 어려운 한자로 빼곡히 써진 법전을 읽기 위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의 소원은 그가 죽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이 사건이 우리나라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말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곧 말이 가진 지배와 해방의 상반된 기능이다. 국가와 자본권력은 이해가 어려운 말로 써진 ‘법’을 통해 말을 독점하고 그것에 의해 국민을 지배했다. 교육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태일은 말 때문에 고통 받았다. 하지만 부당한 착취로 억압받는 동료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어려운 말의 장벽을 넘어 ‘근로기준법’을 재발견하였고, 그것을 요구하기 위해 행동하였다. 대학생이 아니었지만 어느 대학생보다 치열하게 공부의 길을 보여주었다. 그 자신이 삶에서 발견한 해방의 말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줄 알았다.
내가 김제동에게서 전태일을 상기했던 것은 ‘근로기준법’처럼 우리에게 ‘대한민국 헌법’을 다시 발견하게 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입 다물거나, 말하기 위해 주눅 들지 않아도 되었다. 국민으로서 누구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를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몰랐다. 부모도 학교도 언론도 가르치지 않았다. 김제동이 광장에서 가르쳤다.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고, 만인의 평등을 요구할 수 있음을. 물론 시민들 스스로가 또 서로 광장에서 이미 각성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김제동이 더 확실한 근거를 상기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와 비슷했다. 흔히 기독교인이 교육을 말할 때 예수야말로 참된 교사라고 말한다. 예수의 삶을 따르는 이들이 기독교인이니 예수를 참교사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말 그렇다. 예수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회당이든 시장이든 가정집이든 광야든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가르쳤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그리고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예수는 현세의 물신주의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평등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에서 새롭게 살아가라고 권고하였다. 예수의 이야기(담론)은 현세의 권력인 로마와 유대지배자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예수의 말이 그들에겐 저항의 무기로 느껴졌다. 그들에겐 해방의 말 대신 지배의 말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예수는 결국 질서유지를 위해 처형당해야 했다.
하지만 개독교라는 말처럼 지금의 한국 개신교는 해방의 말이 아니라 지배의 말에 기여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타락하고 전락했다. 대형교회들의 목사와 장로들은 권력의 횡포를 부리고 신도들을 구속한다. 하늘나라를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에 두고 이 세상은 지배와 착취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대신 거대 교회를 짓고, 이웃 사랑을 위해 착한 사마리아의 법을 따르지 않고 제 식구끼리만 잘 먹으려 한다. 미국 다녀온 목사 말만 옳고 다 그르다. 어떻게 그들의 말을 예수와 같은 해방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수를 팔아먹는 종교 장사꾼들일 뿐이다. 그러한 목사에 세뇌되어 전철 안에서 일방적으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설교하고 떠나는 광신도를 나는 혐오한다. 그들의 말이야말로 해방이 아니라 지배의 말이며 폭력의 말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제동은 엄동설한의 광장에서 시를 외었다.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히고 있는 이여.
김제동이 외운 시는 거친 외침이 아니라 따뜻한 속삭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일깨운 교사가 어디 있던가? 헌법의 말을 통해 두려움 없는 해방을 이야기하고, 시의 노래를 통해 이 땅에 내려온 하늘나라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수능시험 닷새 전 아침이다. 국민의 권리와 학생의 권리에 대해 배우기 전에 순응을 위한 시험을 치르기 위해 권력이 가진 말의 시험을 보러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김제동이 크게 외쳤던 ‘대한민국 헌법’과 작게 속삭였던 ‘비스듬히’를 떠올린다. 지배가 아닌 해방의 말을.
첫댓글 김제동처럼 각자 있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수행한다면
세상은 한 뼘씩 자라는 나무처럼 더 따뜻해지고 밝아지겠죠...
추운 날 건안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