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청주]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예레 20, 10 - 13
† 복음 : 요한 10, 31 - 42
★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고백록’ 가운데 마지막
다섯 번째의 내용이다. 군중이 예레미야 예언자를 ‘마고르
미싸빕’, 곧 ‘사방에서 공포’라고 놀리며 그가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는 주님께 의지하며 이를
견디어 낸다(제1독서).
★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한다.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뒤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복음(요한 8,1-11)과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는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던지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든 이유는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결국 돌을 던지려던
것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간음한 여인을 단죄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입니다.
이 두 대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유다인들이 이제 자신들의
죄를 더 이상 되돌아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마음이 완고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도 돌을
던질 자격이 없는 그들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심판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않는 사람은 언제라도 다른
이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우리의 눈과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돌을 움켜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우리 자신의 잘못과 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 10,31-42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
2013년 다해 3월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복음 : 요한 10,31-42
<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 >
자격지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방에 들어가지 않겠어요.”
켈리 여사가 호텔 보이에게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가구하나 없는 이 게딱지만한 벽장에 들면서 그렇게 많은
방 값을 지불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촌에서
올라왔다고 깔보는 모양인데... 나 바보 아니거든요?”
“부인 일단 타세요.”
보이가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부인의 방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라고요!”
자신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모두가 자신을 깔보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우게 되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은 그런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이지만, 실제로는 자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니 또 다른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미달될 때는 또 자신을 가책하며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외적인 성취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은
키 작은 열등감 때문에 세상을 정복하려 했고, 히틀러도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 유태인에게 당해야만 했던 굴욕을
전쟁과 학살로 풀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 ‘안’의 문제를
자신 ‘밖’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어야 합니다.
세상은 물질의 세계고 내 안은 영의 세계입니다. 어떻게
물질로 영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유다인들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돌을
던지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경에 사람들을
신이라 불렀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을
저평가하는 것이고, 또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에서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귀중한 존재입니다. 열등감은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면 더 커집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당당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은 그렇게 되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당신 안에서 발견해내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되지 못할 죄도 지으신 적이 없고, 또
아버지로부터 인정과 사랑 이외의 안 좋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안의 양심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 자신을 평가하여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의
골이 깊어지게 만듭니다.
영화 “메트릭스 3 (레볼루션)”에서는 기계들과 인간과의
장렬한 전쟁장면이 나옵니다.
기계들로 인해 전술과도 같은 파상공격으로 시온의
병력들은 거의 괴멸에 이릅니다. 결국 시민군 대장도
당해내지 못했고, 그가 죽어갈 때 풋내기 청년이 대장에게
다가갑니다. 대장은 그때 지금 기계들을 마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비행선이 들어오니 잠긴 문으로
가서 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장님, 저는 아직 전투훈련을 다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대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전투훈련을 끝까지
받지 못했다...” 그리고 난 후 대장은 숨을 거두게 되고
청년은 용기를 내어 대장이 탔던 로봇을 대신 타고 뒤뚱거리며
잠긴 문으로 향해 나아갑니다. 기계군의 방해가 있었지만
가까스로 문을 엽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비행선은 굉음을
내며 들어오고 비행선의 무기를 사용하여 기계들을
마비시킵니다. 풋내기 청년의 공로로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시온 전체를 살리게 된 것입니다. 할 수 있으니까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겐 능히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인 것입니다.
겸손함은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어. 난
못해.”라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함은
오히려 성모님이나 예수님처럼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고,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합니다.
겸손함은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하느님만 계시면 또한 무한히 가치 있는 존재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하느님과 비교할 때
신학교를 그만 둔 학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러다가 “앞으로 뭘 할 거니?”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 이 학생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사실 신학교를 그만둔다고 짐을 싸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나더라고요. 뭐 먹고 살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신학생 때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제 자신이 이 사회에서 그리
필요한 일꾼이 아닌 것입니다. 정말 걱정되어요.”
이 학생과의 만남을 마친 뒤에 제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만약 신부가 아니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신부가
아니라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 덕분에 이렇게 신부가 되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저입니다. 신부라는 사실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를 낮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위에 서려고 할까요?
저의 경우를 예를 들었지만,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분야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얼마나 많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습니까?
사실 2천 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아닌 이상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잣대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무조건 틀렸다면서 적의를 품고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사실 돌을 던져서 죽인다는 것은 큰 죄인일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한 것? 아니면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 분명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잣대에 눈이 가려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보려하지 말고, 당신께서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일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일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바로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향한 그런 불경은 지금 역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미약하고 부족한 우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좀 더 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생활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가짐보다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 나눔이 중요하고,
채움보다 비움이 더욱 중요핟(승효상).
맛 없어 보이죠? 그러나 보이는 것과 달리 아주 맛있답니다.
아픔과 상처를 맞이하는 방법
컴퓨터로 글을 쓰는 글쟁이들의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쓴 원고를 날려 보내는 사고(?)입니다. 물론 원고를
쓰다가 지워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워드프로세서의 ‘되돌리기’ 기능을 이용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이 파일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백업을 시키다가
잘못되어 예전의 파일 위에 덮씌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예전의 파일이 지금 새롭게 쓴 파일을 덮씌워서 글 쓴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에는
참 막막합니다. 어쩔 수 없이 원고를 다시 써야 하니까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렇게 다시 쓴 글이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정말로
술술 풀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쉽게 쓴 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반응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결국 아픔이 없는
글은 그만큼 내용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픔도 있고 상처도 있어야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깊은 내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픔과 상처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또 다른 깊은 내용을 만드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기쁘게 아픔과 상처를 맞이해야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돌멩이에 담긴 의미
2013년 다해 3월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
요한 10장 31-42절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돌멩이에 담긴 의미>
예나 지금이나 단단한 돌멩이는 대단히 위험한 ‘살상도구’
입니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돌에 맞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개구쟁이였습니다.
틈만 나면 동네 형들 사이에 끼어 산으로 들로, 천방지축
여기저기 몰려다니고, 놀러 다니기를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크고 작은 사건사고도 많이 겪었습니다.
한번은 형들 따라 다른 동네 ‘원정’ 갔다가 별것도 아닌
것으로 시비가 붙었는데, 마침내 동네 아이들 사이의
패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처음에는 두 편 사이로 연탄재나
작은 돌들이 날아다녔는데, 나중에는 주먹만한 돌들까지
던져댔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제 뒤통수에 뜨거운 느낌이 있었는데,
그길로 저는 쓰러져서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서 보니 적십자 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피를 얼마나
흘렸던지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 어질어질한게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가던지.
사실 돌멩이 맞기 전까지 저는 나름대로 ‘한 공부’했었는데,
그 뒤로 성적이 많이 떨어진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살상도구가 ‘돌멩이’인 것입니다. 사실
유다 근동지방, 아랍 세계에서는 사형방법 가운데 하나로
꾸준히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께 던지려고 다들 주먹만 한 돌멩이를
하나씩 각자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명백한 살상 의지를 갖고 예수님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가 막히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 멀고도
어려운 ‘육화강생의 여행길’을 걸어오셨는데, 그들의 보답은
돌팔매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눈동자는 멸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가련한
동족들을 향한 구원의지와 연민의 정으로 이글거리는데,
그들의 눈동자는 너무도 뜻밖에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이글거렸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손에 돌 하나씩 들고 부릅뜬 눈으로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만일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 것인가
묵상해봅니다.
제 마음 안에 ‘폭풍 분노’가 일었을 것입니다. 제 눈동자는
분노로 타올랐을 것입니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이룰 수 있는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싹쓸이 했을 것입니다.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폭력 앞에 결코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십니다. 차근차근 조리 있게 말로 설득하십니다. 제발
그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마지막 1%의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십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그저 홀연히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의 예수님이십니다. 끝까지 참아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하시는 자비의 예수님이십니다.
거듭되는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배은망덕, 무지와 그로 인한
숱한 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참아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비 자체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복음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1보 후퇴 2보 전진하시는 주님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상대를 죽이려는 게 인간 근성인가
봅니다. 욕하거나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곤욕을 치르게 하면
승리한 줄 알고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인간들은 도전에 도전하며 심지어 하느님께도 그렇지
않나요? 예수님도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선교활동에서
도전자들을 만난 거지요. 1보 후퇴 2보 전진하시는 주님은
결국 죽음을 이기셨고 부활하셨네요.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요한 10,40)”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부산] 장벽을 허물어라
예수님과 유다인들과의 논쟁이 계속된다. 요지는 간단하다.
어떻게 인간인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할 수 있느냐는
것, 인간이면 인간이고 하느님이면 하느님이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일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유다인들 주장의
핵심이다. 한낱 인간이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다.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는 분명했다. 이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느님을 그렇게 가까운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저 멀리, 저
높이 계신 분이어야 했으며, 세상도 인간사도 초월하는
분이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 한 인간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나자렛 사람 예수로 인해 하느님은 인간과 ‘함께’
계시는 분, 인간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 새롭게 계시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그 두터운 장벽을 하느님 스스로
허물고 다가오신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 강생의 신비다. 그
허물어진 장벽 사이로 새로운 하느님, 진짜 하느님의 모습이
고개를 내민다. 경직되고 고착된 사고 속에는 이 신비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진리란 늘 유연하고 열린 사고 안에서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진리에 다가서려면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삶의 장벽이든 사고의 장벽이든 마찬가지다.
- 홍경완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기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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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당신이 믿고 있는 그 하느님을 아직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가장 올바른 방법은 당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진정 우리가 그분을 믿고 사랑하고 있다면 그 체험을
노래하고 타인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진정 그분의 삶과
말씀에 매료되었고, 삶의 방향의 기준으로 삼았다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향기가 완벽한 향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록
부족한 향기라 할 지라도 그 향기는 타인에게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힘을 충분히 발휘하고 남는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얼마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지 자신의 삶을 살펴보자. 만일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분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은 거짓이
되고 만다.
우리 안에 심어진 그 그리스도의 향기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자기 싸움이 있을 때,
그리고 구체적인 삶으로 이어지려 할 때 비로서 피어
오르게 될 것이다.
예수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우리의
향기를 맡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하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나의 삶을 보고 하느님을 믿으시오”라고
말 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해본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2,17)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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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영성의 알파요 오메가
- 이해욱신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영성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최초 영성입니다.
구약성경에 하느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시고
"후회하셨다.(창세6,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후회하셨습니까?
당신의 뜻대로 살라고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고 지 뜻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하느님께서는 최초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습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그러한 하느님의 뜻에 순명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의 계약에 있어서의 중요한 의미는, 아브라함이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 하느님이 정해 주신 땅으로
이동했다는 "장소 이동"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의 뜻"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다는
사실 (뜻의 이동)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김"으로
하느님 신앙에 대한 "원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브라함은 자기의 뜻을 하느님께 내맡김으로써, 지
뜻대로 삶으로써 하느님께 죄를 범한 인류의 원조의
큰 실수를 하느님 앞에 대신 보상해 드리는 첫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신약(새로운 약속의 시대)에 와서
최초의 참 신앙인이 누구입니까?
"성모님"이십니다.
왜 성모님을 신약의 첫 신앙인이라고 합니까?
새 시대로 접어들어 최초로 자신의 모든 것(일생)을
하느님의 뜻에 아주 철저하게 내맡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내맡기심"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내맡기신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은 성부의 뜻에 당신을 내맡기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약"이 닫히고, "새로운 약속(신약)"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성모님", "예수님"은 거룩한 내맡김의
모델이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바로 그분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 내맡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맡김의 영성을 사는 사람은
영원히 하느님께 내맡겨진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영성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3월22일
어제는 신학교엘 다녀왔습니다. 아침 미사를 마치고
6시 50분에 출발했습니다. 구리까지는 5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부순환도로에서부터 길이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수업은 9시인데 8시 52분에 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부제님들과 상의를 해서 다음부터는
3, 4교시로 수업시간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편안하게
기차로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는 참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말은 했지만 정작
제 앞에 길이 막히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왜 이렇게 차가
많은지 불평이 입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러기에 직접 체험하는
것과 말로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동창신부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동창신부에게 고백성사를 청하였고,
동창신부는 저의 고백을 들어주었습니다. 품앗이를 하듯이
동창신부도 제게 고백성사를 청하였고, 저도 동창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고백성사를 함께 할 수
있는 동창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큰 은총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성탄에는 다리의 골절도 있었고, 어찌하다
보니 성사를 볼 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남들에게는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하지만 정작 저 자신은 게으름 때문에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제님들에게 ‘가톨릭의 강론, 개신교의 설교, 불교의 법회
그리고 다양한 가르침’에 대한 동영상을 찾아보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조별로 그것을 분석해서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도록
했습니다. 어제 발표하신 분들은 외국의 주교님 강론을
분석하고 발표하였습니다.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준비를
하고 발표를 해 주었습니다. 나의 강론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의 강론, 설교, 법회를 분석하면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이 방법을 수업시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과 자신들의 신앙을 간직하였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기만 해서는
더 큰 발전과 깨달음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틀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수님을 향해서 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꼴찌가 되라, 회당에 앉을 때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라,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밀알 한 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분이 하신 말씀들은
현실의 삶에서는 실천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 돌을 던지려 했던 것입니다.
내가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나의 고집과 나의 편견과 나의 자존심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깨달음은 더 채우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내가 버릴 때, 나의 마음을 비울 때 그때 깨달음은
바람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순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편견과 오만 그리고
교만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
이기심, 자존심, 명예 그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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