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아동 연쇄 살인범과 형사가 벌이는 치열한 심리전을 그린 시즈쿠이 슈스케의 장편소설 『범인에게 고한다』가 레드박스에서 출간됐다. 『한자와 나오키』로 유명한 이케이도 준, 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 이사카 고타로를 제치고 제7회 오야부 하루히코 상을 수상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독서광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이 작품은, 대표적인 경찰 소설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격찬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밖에도 주간 분슈운 ‘미스터리 베스트 10’, 주간 겐다이 ‘최고로 재미있는 책’, 서점 대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등 각종 문학상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수많은 영화사들로부터 경쟁적으로 영화화를 제의받기도 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한 번 출간된 적이 있으나 번역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하지만 그 작품성과 재미는 모두가 높이 평가해 이건 꼭 읽어야 한다는 추천이 끊이지 않았고, 절판된 뒤에는 헌책으로라도 사서 읽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번에 레드박스에서 새로 출간한 『범인에게 고한다』는 그런 독자들의 요구를 세심히 반영했다. 흥미 위주의 가벼운 장르 소설에 질린 독자라면, 일본 경찰 소설 분야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자리를 지키며 판매 누계 134만 부를 달성한 이 소설의 묵직한 감동과 재미를 느껴 보길 바란다.
자취를 감춘 연쇄 살인범 vs 집념으로 뭉친 형사 지금 카메라를 사이에 둔 치열한 심리전이 시작된다
가나가와 현경에 새 경시감이 부임해 온다. 엘리트 출신에 대외적인 이미지가 중요한 야심가. 그는 가나가와 현경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남아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자 현역 수사관을 뉴스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무리수를 감행하기로 한다. 그 역할을 떠맡은 이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마키시마 경시다. 형사답지 않은 곱상한 외모에 왠지 괴롭히고 싶은 분위기를 풍겼던 남자. 육 년 전, 유괴범 검거에 실패하고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의 추궁에 폭주했던 남자. 그 결과, 시골 경찰서로 좌천된 그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을까. 세상 모든 범죄와 자신에 대한 증오를 겹겹이 쌓아 온 그는 과연 형사로서의 삶, 인간으로서의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증오를 먹고 살아온 형사의 통렬한 부활극 “놈을 잡을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형사 일을 하다 보면 문득, 자신이 쫓는 범인에게 왠지 모를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아무리 쫓아도 상대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캄캄한 밤이 사람의 마음에 괴물을 만들듯 형체가 보이지 않는 범인은... 형사의 마음속에서 어느새 괴인으로 변해 간다. 때로는 수사 중에 그 괴인의 기운을 느끼기도 한다. 몰래 이쪽을 엿보는 것 같은 어두운 눈빛이 녹아든 공기……. 그것을 느끼고 형사는 멈춰 선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역시 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 작품 중에서
『범인에게 고한다』는 일본에서 속칭 ‘철야(徹夜) 소설’이라 불린다. 밤을 지새워서라도 결말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높은 흡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작가 시즈쿠이 슈스케의 뛰어난 캐릭터 조형 능력 덕분이다. 『범인에게 고한다』는 짧게 말하면 흉악한 범죄자, 경찰 조직, 매스컴에 휘둘렸던 한 형사의 통렬한 부활극이다. 작가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범죄에 대한 증오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미소마저 잃은 주인공의 마음속 깊숙이 파고들어 가 아주 작은 심리 변화까지 실감 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소설을 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경찰이라는 특수한 조직 안에서 형사로서의 사명을 다하려는 주인공에게 감동하며, 요코야마 히데오, 이사카 고타로를 비롯해 수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최고라고 격찬하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줄거리 남자아이가 실종, 살해당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피해자만 네 명, 첫 사건 발생 일 년이 다 되도록 해결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경찰은 현역 수사관을 뉴스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무리수를 감행한다. 그 역할을 떠맡은 이는 육 년 전, 수사 실패의 책임을 지고 좌천됐던 형사. 그는 과연 경찰 내부의 알력, 특종에 눈이 먼 매스컴의 공격 속에서 카메라 너머에 숨어 있는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까.
“우리 아들 녀석도 이제 막 다섯 살이 됐어.” 오가와 옆에서 낙엽을 헤치기 시작한 도베가 중얼거렸다. “이제 첫 반항기도 지나서 한창 귀여울 때야.” “……그렇겠네요.” 생각지도 못한 진지한 말투에 오가와는 조심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용서 못 해.” “그렇죠.” 요즘에는 아이가 희생당하는 사건도 적지 않지만, 현장에 직접 발을 들여 보면 그것이 얼마나 무도한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아무리 살인 사건이 흔한 세상이라지만 시신의 크기가 작아도 너무 작다. 도베뿐 아니라 현장 수사원들 모두 범인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수사에 임했다. (148~149쪽)
“제일선에 다시 세워 주지.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 봐.” 마키시마의 얼굴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말하고 나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지난 육 년간 내가 자네에게 칼을 갈 시간을 줬다는 의미야.” 한 발, 두 발, 그에게서 멀어지고 다시 뒤돌아봤다. “시간이라는 건 참 대단해. 우리를 이렇게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만나게 해 주잖나. 아니, 실제로도 별일 없었지. 세상만사는 원래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법이야. 정말 유능한 인재는 그 어떤 책임도 지거나 하지 않지. 사회가 그 능력을 계속 필요로 하거든. 자네는 유능한가? 무능한가? 그 사건에 대해 책임을 졌나?” (174쪽)
육 년 전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은 변해 버렸다. 그만큼 크나큰 업보를 떠안고 말았다. 가족이 행복할수록 죄악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그럼에도 이 행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삶밖에 모를뿐더러 그러는 편이 자학적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좌천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주어진 임무에 몰두해 온 것도 그 안에서 일종의 자학성을 느끼고, 그것이 간신히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임무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에 잡아먹혔던 자신이 다시 텔레비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학 행위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였다고도 할 수 있다. 단지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자학성이 전혀 쓸모없지는 않다는 것 정도일까. 여러 무거운 현실을 겪으면서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할 만큼 둔감한 지경에서는 벗어났다. (229~2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