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속사적 성경묵상 ● (둘째 해_2월 7일)
<욥기 6장> “속이는 시내와 같은 친구의 조언”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 (욥6:1-20)
“(엘리야가)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왕상19: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욥의 탄식을 들은 엘리바스가 욥의 고난은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끝내자 이제 욥이 반박을 합니다. 욥은 자신이 비록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죽음을 갈망하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거역하지 않고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추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의 벗(친구)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할 텐데 지금 자기의 친구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신을 정죄하고 있음에 대해서 실망의 감정을 토로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고 하는데, 이것은 중동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와디(wadi;간헐하천)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와디는 큰 비가 내릴 때에는 일시적으로 물이 넘쳐흐르다가 비가 그치면 이내 강바닥이 바짝 마르고 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물이 필요한 나그네들은 이 마른 시내에 가더라도 물을 얻지 못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기에 ‘속이는 시내’라고 묘사되기도 합니다(렘15:18).
그런데 지금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들도 일시적으로 와디에 넘쳐흐르는 물처럼 유창하고 장황하기는 했지만 막상 그 말들 속에는 생수와 같이 마실 수 있는 유익한 말은 하나도 없음을 욥은 비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제처럼 여겼던 친구인 엘리바스가 지금은 ‘속이는 시내’처럼 조금도 의지할 수 없음을 개탄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바스가 욥을 위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정죄함으로써 더 큰 고통만 주게 된 것은 엘리바스에게 공감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엘리바스는 욥이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죽음을 구한 것을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으로 여겼는데, 그것은 자신이 욥과 같은 처지에 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극한 상황이 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또 입으로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모든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영적으로 침체가 되자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며 생명을 취해 달라고 기도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왕상19:4). 마찬가지로 욥이 죽음을 갈망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 너무 극심했기 때문으로서, 그것이 연약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리 고난이 크더라도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죽음(자살)이 고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죽고 싶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아픔을 공감하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아파하는 것이 그를 돕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체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오늘의 기도 ● “고통 받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소서!”
https://cafe.daum.net/waterbloodholyspirit/MuKU/43
첫댓글 아멘
공감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