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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군 창선마을 이름과 유래
제 1절 상신리(上新里)
상신리는 오래전부터 모산동(茅山洞)이 상 하 양동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연지동(蓮池洞)이 상지동(上池洞)과 하지 동 (下池洞)으로 나누어져 4개의 마을이 한 개동으로 형성되어 진주목지(晉州牧誌)에는 지산동(池山洞)이라고 하였음은 상지와 모산 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지나 지(池1)와 산(山)은 어울리지 않는다하여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법정행정리(法定行政里) 명칭을 상신리(上新里)로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각개의 동(洞)마다 고유의 당제가 운영되고 동재산(洞財産)이 관리 되고 있다.
상지 동(上池洞)
독뫼(野山)뒤에 옛날에는 못(池)이 있엇는데 형상이 풍수지리설로 연화부수격(蓮花浮水格)이라하여 연지동(蓮池洞)이라고 했다가 훗날 2개동으로 나뉘어 윗마을을 상지동(上池洞). 아랫마을을 하지동(下池洞)으로 되었다
모산동(茅山洞)
띠가 많다고 모산동(茅山洞)이라 했고. 길을 사이에 두고 상(上) 하(下) 양 동이였으나 당제(堂祭)운영 등 어려움에 상 하 양동이 통합되었다, 속되게 “모산골”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산동 일대를 지칭함이고 “골”은 마을을 뜻하며 고을의 준말이다 , 주민들은 “아랫 상신”이라고도 한다,
하지동(下池洞-통새미
하지 (下池)라는 동명 보다는 통새미 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 공동우물의 우물 통을 큰 느티나무로 내경(內徑)을 1m넘게 쪼아낸 공동(空洞)을 땅속에 박아 지상 1m 이상 샘물이 솟아 흘러 진기한 우물이라서 “통새미“로 유명했다, 그래서 하지동이라는 원래의 이름보다는 오히려 “통새미”로 통한다, 이 나무통은 오랜 세월로 옆 구멍이 나서 해방 후 시멘트로 바뀌었고 오늘날도 여전이 지상으로 솟아 흐르나 인근의 지하수개발의 난맥으로 용출량은 줄어들었고 주민들의 상수도 이용으로 폐정(廢井)에 이르렀다, 생각건대 그만한 큰 느티나무가 과연 창선에 자생 했을까? 의문이고 설사 나무가 있었다 할지라도 운반 제작 시설 등 부담능력도 엄청난 대 역사 이었음이 짐작되는데 겨우 10여 가구 남짓의 작은 마을에서 과연 가능했을까 ?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부틋날과 선창들
앞 바다가 깊숙이 둥글게 들어와서 “나루터”가 되었고 지형이 아낙네들이 베틀에 앉아 허리에 차는 “부테“형상이라고 "부테나루“이었다, 이것이 “부텟날” “부틋날” “부뜻날”로 변하였고 앞들은 “선창들”로 아직도 불리어지고 있으며 곤유리 신촌의 동대 선창을 “새 선창”이라 고함은 이에 기인함이다.
제 2 절 동대리(東大里)
동대리의 옛이름은 “동한재“이다
서쪽 산너머 서대마을에 연결되는 큰 고개를 “한재“라고 한다. “한“은 대(大)의 우리말이다. 한재의 동쪽에 있기에 ”동한재“의 동명이 되었고 한자(漢字) 로 고치니 동대(東大)가 되었다,
일설에는 “오동동” “내동동”하다가 250년 전 쯤부터 동대동으로 되었다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재골
고개 아래 골자기 일대를 “한재골“ 또는 “한재마을“이라한다
제 3 절 곤유리(昆遊里)
원래는 “동대리”이나 분동 하면서(1949.10.10) “곤유리”로 되었다. 곤유리의 속명은“고니개”이다 “고니새가 많이 노니는 개울“이란 뜻에서 연유된 것, 고니새(鵾)는 겨울 철새다, 옛날 사람들은 천아(天鵝)라고 불렀다 “하늘 새“라 하여 신성시하였고 천연기념물로서 법적보호를 받는다기보다 민간 신앙으로도 철저히 보호받아 첫 무리가 많이 날아오면 풍년이 들고 적게 날아오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을 굳게 믿어 사랑받는 새였다, 겨울이면 떼를 지어 날아와서 장관을 이루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개울이 얼지 않게 되고 먹이도 귀해 졌는지 점차 줄어 들더니 80 년대에 이르러 종적이 끊어 졌다.
곤유(鵾遊)가 옛날의 동명인데 일제 때 곤유(昆遊)라고 쓰게 한 것, 오룡(五 龍) 가린(加燐)과 같은 맥락임
신촌(新村)
새 선창이 개설됨에 따라 인가가 불어나서 새 마을이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 “밭듭”일대의 마을을 총칭한다,
제 4 절 당항리(堂項里)
당항리의 속명은 “당목“이다. 한자로 바꾸어 쓰니 “당항“이 되었다,
이웃 율도 마을을 경계한 고개를 “당고개”라함은 신당(神堂)이 있었기에 연유한 이름이고 그 규모가 커서 옛날목관 들 회의장소를 쓰기도 한 큰 당집이라서 “클 항(項)자를 썼다는데 “당목”이라는 유래로 보기에는 부족하고 그 외는 분명 치 않다.
웃몰· 윗마을
당항마을은 윗마을 아랫마을로 나뉘어져 있는데 위쪽인 밤섬골 쪽을 “웃 몰 ”이라한다
아랫마을
벽재골 쪽 바닷가에 있다하여 “아랫마을”이라 한다
해창몰
바닷가 마을로 옛날 관수용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란 뜻이다.
제 5 절 냉천리(冷泉里)
속명은 “찬새미”이다. 원래 식수가 귀한 마을이었는데 도 이곳의 샘은 차고 물맛이 좋으며 찬물이 많이 솟아 나온다 하여 마을이름이 “찬새미”로 되었고 한자로 고치니 “냉천리” 라는 동명이 되었다
또 다른 유래는 임진란 때 왜적을 치러 온 군사들이 샘물 맛이 시원하고 좋다 해서 “찬샘”이라 한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 원래는 당항리에 속하였으나, 1936년5월1일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제 6 절 단항리(丹項里)
단항리의 속명은 “단목”이다 마을 뒷산의 연태산(삼막산)이 삼천포로 향하여 길게 누워 있는데 그 산의 모양새가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고 산 아래 마을이 학의 머리에 있는 붉은 댕기 모양이라 하여 붉을 단(丹)자를 썼고 그 마을의 위치가 학의 목 부분이라 하여 “단목” 이라했다, 이를 한자(漢字)로 고치니 단항(丹項)이 되었고, 후인과 거문기미를 지칭한다, 원래는 ”대벽리“이나 1941년4월1일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검은기미 · 흑금동(黑金洞)
땅의 색깔이 검다하여 붙여진 것인데 오늘날도 땅 색깔은 검다,
원촌(院村)
“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 조선시대때 관리들의 내왕이나 길손에게 숙식(宿食)을 제공케 위하여 나라에서 원답(院畓- 農土)을 주어 여관을 운영케함. 지리적으로 거처가는 길목에는 반드시 “원“(院)이나 “역“(驛)이 운영되었다 대개 나루터 근방에는 ‘원”이 있었고 육지에는 규모가 큰 “역“이 운영되어 “역“에는 역마(驛馬)도 여러마리 갖추어 관리들의 내왕에는 조정에서 내리는 마패(馬牌)에 의하여 다음의 역 까지 말을 이용토록 되어 있었다.
후인(厚仁)
후(厚)는 후박 (厚朴)을 뜻하는 말이고 인(仁)은 열매의 씨앗을 가리키는 것으로 후박나무의 씨앗을 한약명(漢藥 名)으로 “후인“이라 한다, 마을 이름을 “후인“으로 함은 마을 당산나무로 수령 400년을 넘기는 거대한 왕후박나무 (天然記念物299호)에 연유함이 아닌가 보아진다.
제 7절 대벽리(大碧里)
대벽리의 속명은 “벽재”로서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은 벽치동(碧峙洞)이었다,
마을 뒤에 금오산과 상투산이 마주하고 있다 이곳에 두 갈래로 나뉘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중심으로 양쪽 산이 울창하여 사철 푸르다고 하여 푸를 벽(碧)자를 쓰고 두 산 사이를 넘는 재(고개)가 있다 하여 벽재”라고 했다, 그 아래 마을이 두 곳 있는데 큰 마을을 “큰벽재”, 작은 마을은“작은 벽재”라고 부르다가 한자음을 따서 대벽 소벽으로 불리고 있다,
서촌골(徐村谷|)
벽재(대벽)마을이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윗마을은 서씨 집성촌(集姓村)이라서 또 그곳이 벽재골의 상부에 걸쳐 있다 해서 아랫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
후리막골. 후리망골
미을앞 바다가 만(灣)으로 되어 수심이 깊지않고 암초나 바위가 없어 “후리어장” 하기에 적합하여 하동사천 등지의 어민들이 이곳에 막을 치고 몇일식 후리어장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하 중략)
제 8절 소벽리(小碧里)
소벽리의 속명은 “작은벽재”이다, 한자음을 붙여 소벽(小碧)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벽치 동 (碧峙洞)에 속했는데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율도리(栗島里)에 이속 되어 법정 행정리 로는 율도리 였다, 1982년,9월1일 분동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제 9절 율도리(栗島里)
율도리의 속명은 밤섬이다 마을 앞에 섬이 있는데, 바다에 접한 부분은 암석으로 되어 있고 윗부분은나무가 자라서 밤 같다하여 “밤섬”(栗島,)이라고 하는데 마을 이름도 이 밤섬에서 따온 것, 간조(干潮)때는 육지와 연결되어 사람의 목 위의 머리와 같다고 “목섬,”이라고도 한다,
성명굴(聖明窟)
1976년 이곳 출신 정태용(鄭太鏞192 ~199 -창강獎學財團設立者)씨가 유서(由緖)에 애집(愛執)을 갖고 정재(淨財)를 들여 성명사(聖明寺)를 짓고 암굴 앞에는 불당을 모셨는데 1999년 실화로 불당을 소실하여 암굴의 원래모습이 되어 돌아와 새로운 각도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려조(高麗朝)때 나라의 역사(歷史)를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창선에 두면서 현(縣)으로 승격도 했는되 왜구(倭寇)의 우려로 원종 10년(元宗十年 -1269) 9월에 전남 진도(珍島)로 옮겼다는데 그 사고지(史庫趾)가 어디였는지 ? 섬을 한때 비웠다가 진주의 직촌(直村)으로 관리하는 등 하여 역사와 전설이 단절된 것인데 이 암굴이 자연굴(自然窟)이 아니고 사람의 손으로 쪼아낸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고 외부를 불당으로 위장(僞裝) 하였다면 외침에도 그럴싸한 은익처가 되겠고 금오산성의 수비병력도 연관이 될 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것이 충주사고(忠州史庫)도 암굴에 불당으로 위장 한 사례도 있으므로 그 방면의 자문을 받었드니 굴내에 수천(水泉)의 험을 들어 사고지로는 부적절하다는 충주대학 모 교수의 평이었으나 암각(岩刻)의 과학적인 연대측정 등 정밀조사가 필요하다,
제10절 고순리(古順里)
속명은 “고신개”이다, 속명은 “고신개”이다, 초득 등성이가 끝나는 자락에 남과 북으로 조그만 자연마을이 두개인데 합쳐서 “고순”이라 한다 “고신개”로 불리게 된 동기는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온순하고 예의 바르며 얌전하여 이웃 마을에서 별명 처럼 부른 것인데 고신개는 고순개의 변형된 사투리 발음이다, 1982. 9, 1일 율도리에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건너몰(건너마을)
초득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고랑마을에서 보면 고랑 건너편에 있다하여 고랑마을 사람들이 지어 붙인 이름이다,
고랑몰(고랑마을)
서대 불무골 쪽 고순의 골장안에서 고랑(내)이 남쪽 마을 앞으로 흐르는데 마을이 고랑 주변에 있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고랑”은 하천(河川)반열에 못 끼이는 소하천(小河川-시냇물)을 일컫는 창선의 사투리이다.
제10절 서대리(西大里)
한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서대리의 속명은 “서한재”이다, 한재의 동쪽마을을 “동한재“라 함과 같은 맥락이다,
산두곡재(山二谷峙)
속금산과 응자봉자락이 마주하는 잘룩한 고개를 산(山)이 두 개가 마주한 곳이라고“산두곡”이다, 원래의 “한재"
라는 이름은 쓰지 않는다.
이 고개에는 행인들이 쉬어가도록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이는 옛날 박첨장과 서수문장이 마주 들어다 옮긴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이는 전설에 불과한 것이고 근년에 이르러 새 도로가 뚫리면서 바위의 기단(基壇)이 헐리어 지석묘(支石墓)의 형태가 드러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어 창원대학교 박물관 팀이 1999년7월에 학술조사 한 바 가 있다 (別途 西大里 破壤支石墓 緊急 發掘 調査報告書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
집건내. 집건너
서대마을은 거이 양지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너편 마을인 음지쪽을 일컬어 “집건내”(집건너)라고 부른다,
제12절 보천리(保川里)
보천리의 속명은 “보전내”였는데 부르다 보니까 “보지내”로 발음 하게 되어 이름이 속되다고 분동(1982.9,1)하면 서 “보천”으로 고쳤다. 마을의 동남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川,)가 있다 내의 수원은 바위틈에서 솟고 있는데 그 밑에 웅덩이가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선녀들이 내려와서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백중날 마 을 부녀자들이 이 샘물을 길어다가 목욕을 한다. 또 이 웅덩 샘물을 약수라고도 하여 보배롭다고 보천(寶川)이라 한 것인데 보천(保川)으로 변한 것은 내가 동남쪽에서 서쪽으로 마을 주위를 흘러서 마을을 보호해 준다 하여 도울 보(保,) 내천(川)자로 쓰게 되었고 지금은 상수원으로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제 13절 광천리(廣川里)
대방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간 골짜기가 넓고 크다 하여 마을의 속명은 “넓은내”“너린내”이다. 이를 한자로 고치니 광천리이다.
광싱이고개
사포쪽으로 가는 고개를 옛 사람들은 광성현(廣城峴)으로 써왔다, 어원은 어디서 연유 된 것인 지 분명치 않다, 마을사람들은 “광싱이고개”로 통한다
광싱이끝
광싱이고개 아래 바닷가 돌출부를 “광싱이 끝” 이라고 부른다 “곶”(串)에 못미치는 지형에 는 “끝”을 붙인 곳이 많이 있다.
제14절 사포리(沙浦里)
마을앞 해변에 모래가 많이 밀려와서 마을이름이 “모래개”이다, 한자(漢字)로 바꾸어 쓰니 사포(沙浦)가 되었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그냥 “모래개” 또는 줄여서 “모락” 이라고도 한다, 그 많은 모래도 세월따라 줄어 들더니 바닷가는 매립되어 대지나 도로로 변하고 “모래개”의 모습은 이름뿐이다 원래는 법정리로 광천리이나 1941년4월1일 분동하
여 오늘에 이르렀다,
제 15절 신흥리(新興里)
마을 남서쪽 앞산이 거북이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말(韓末)에는 구영동(龜靈洞)으로 속명은 “구영개”였다, 발음이 좋지 않다고 구용포(九龍浦)에 연유하여 한때는 구용동(九龍洞)이라고도 하였으나 속된 “구영개 ”명칭이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1936년5월 1일 지족리(只族里)에서 분동하면서 창선보통학교(昌善普通學校-初校) 박종수(朴鐘洙)선생 작명으로 “신흥”(新興)리가 되었다,
구룡포(九龍浦)
오늘날은 매립이 되어 “언개”(堰浦0라는 새로운 지명으로 바뀌었지만 이곳이 용 아홉 마리의 전설어린 소택(沼澤)의 개울이라고 “구룡포“이다, 일정 소화12년도(1937) 제작한 남해군도에는 ”구룡포“(九龍浦)라고 표기 하고 있다.
제16절 지족리(只族里)
지족리의 속명은 “새밑날“ 이다, 이는 ”샘 아래 나루“라하여 ”샘밑나루“가 ”새밋날“로 변한 것,, 경상도 지리지(地理志)와 진주목지(晋州牧誌)에는 족 자를 “모일족(簇)자로 쓰였는데 언제 부터인가 ”겨fp 족(族)자로 바뀌었다, 나루의 북쪽 기슭에 원사(院舍)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원사의 흔적은 전하여 진 것이 없다.
창선교(昌善橋)
이 다리는 군사정부의 실세인 신동관(申東寬)국회의원의 선거공약으로 약속되어 볕바른 건설부의 사업도 아 닌 국방부의 구석진 귀퉁이 예산을 뜯어서 1975년에 폭 8m 교각 11본 길이440m의 콘크리트로 조악하고 볼품 없는 다리였지만 뭍으로 연결되는 섬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 만으로 도 흡족했다, 당시의 정 황이 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 12월에 호남고속도로 개통, 71년 남해대교 준공, 73년 남해안 고속도로 준공 등, 그때의 여건이 창선에 다리가 노여진다 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던 시대였다.
시공업자 선정에도 무리가 있었는지 공사 진행 중 우물통을 유실하는등 시공업자를 3개사나 바뀌어 만 4년 만에 1979년 박대통령이 시해된 무렵 근근이 완공되어 볕바르게 준공 테프도 못 끊어 본 비운의 다리였다,
그동안 몇 차례의 안전진단 보수공사 건의를 소홀히 하다가 1992년 7월30일 13년만에 붕괴되어 두 사람의 인명피해 까지 내고 , 당시 제반 건설공사가 불실 풍조로 서울의 삼풍백화점붕괴 성수대교 붕괴와 아울러 사회문제로 비약하여 이를 계기로 시공 감리에 새로운 지표가 정립되어 새 다리를 교폭 14·3m 길이438m 교각 4개의 강상판(鋼上板) 현 대교가 2년 7개월의 산고를 치르고 1995년 12월30일 완공하여 국도 3호선을 연결 하고 있다.
17절 옥천리(玉川里)
옥천리의 속명은 “마은골”이다, 이 속명에 관하여 골이 마흔개라서 “마gms골”이라는 설, 목장 관리로 토 성을 쌓아 “막은골”이라는 설, 등 억측이 분분하였는데 금반 면지(面誌) 자료를 뒤지다보니 뜻밖에 사실이 밝혀져 (다음 “토성몰”참조) “토성(土城)을 쌓아 골을 막았다” 하여 “막은 골”이 “마은골”로 된 것 으로 보아진다, 경상도 지리지(地理志)와 진주목지(晉州牧誌)에는 막은동(莫隱洞)으로 쓰여 있어 오래된 이름이다. 발음이 속되다고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맑은 시냇물을 상징하여 “옥천”으로 바꾸었다,
토성(土城)몰
이웃 상죽 마을과 경계한 첫 마을로. 옛날 외적을 막기 위해 이곳에 토성을 쌓았다고 “토성마을”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 2년(1420년) 1월27일 경상도 관찰사 장계에 거제 남해 창선의 3개섬에 개간한 토지가 모두 1,130여결인데 부근에 있는 각 고을 인민들이 몰래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으니 만일 도적의(왜구) 변을 만나게 되면 약탈이 두려우니 금후에는 들 어가서 농사짓지 못하게 하소서, 라 하니 상왕이 의정부의 육조와 전임 경상도 감사 및 수륙절제사로서 그곳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를 상의하게하고 드디어 3개섬 가운데서 전지가 많은 곳에 목책(木柵)을 만들거나 혹은 토성(土城)을 쌓고 백성이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하며, 낮에는 망을 보아 변고에 대응하고, 밤에는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며, 또 부근 각 진의 병선으로 하여금 그들을 수호하게하고 전지가 적은 곳에는 농사짓는 것을 금지케 하였다,
(慶尙道觀察使 啓 道內巨濟南海昌善三島 開田凡一千一百三十餘結 附近各官人民 多滯入耕稼 如遇賊變 被掠可畏 乞今後禁民入耕 上王下政府六曹與曾經慶尙道觀察使水陸節制使 備知形勢者議之 承 命三島中田多處 作木柵或築土城 聰民持兵器入耕晝則偏望應變 夜則入城固守 又令附近各 梁兵船守護 其田少處 禁民入耕)
대방산(臺方山)
창선의 주산으로 해발 468,2m 주봉인 “벼락재”와 “봉수대”(烽燧臺)가 있고 이 정상부에 일제가 지맥을 끊은 “쇠말뚝”12개가 발견되어 19 년 월 일 쇠말뚝 제거 작업을 KBS가 전국에 방영하기도 했다, 이 쇠말뚝은 정밀분 석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 보관 중에 있다, 이 쇠말뚝 제거작업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황대성(黃大成) 씨가 발견 제거 작업을 주도했고 그에 따르면 창선에 절충장군 묘비가 30기가 넘게 있는 만큼 일제가 지맥을 끊은 요인 일 것이라고 했다.
봉수대(烽燧臺)
고려 때부터 군사 통신수단으로 연기를 올려 이곳 상황을 전국의 봉화망(烽火網)으로 묶어 연락을 하였다.
밤에는 초저녁에 봉화를 올렸고 낮에는 연기를 피어올렸다, 평상시애는 한가닥(1炬)을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두가 닥 (2炬), 접경에 이르면 세가닥(3炬), 국경을 침범하면 네가닥(4炬), 접전에 이르면 다섯가닥(5炬)을 올렸다,
봉화 시간에 못 올리거나 아닌 시간에 봉화를 올리면 변이 있는 것으로 추측 되니 그 관리가 엄격하여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릴 경우에는 특사가 달렸다, 대방산은 남으로 금산(錦山)에 응(應)하고 북으로 각산(角山-泗川)에 응 한다 했으니 웬만하면 육안으로 확인되는 거리이며, 봉수대는 높이 8,6m 폭 13,6m로 5거(炬)가 동시에 올라가는 보기드믄 요충지의 시설로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문헌에 의하면 여러사람이 교대 근무 했다는데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한사람의 “봉화직이”가 상주했다 하며 그곳에는 조개껍질 등 “개바리”하여다먹은 흔적이 남아있다.
망경암터(望景庵趾) (수리절터)
봉수대에서 동쪽으로 뻐더내려 “명득곡”이라는 협곡을 이룬 “구녕바위”“칠성암”등 총석(叢石)으로 이루어진 등성이는 망경암(望景庵)의 옛터이다, 이곳에서 건너다보는 “진등”쪽에 약수터가 있서 밧줄을 메어 줄을 타고 물을 기르다 먹었는데 수도승이 낙상 사망하여 암자가 비어젔다는 전설이 있다,
칠성암(七星岩)과 좌선대(坐禪臺)
“칠성암“이라는 바위가 평평하여 ”좌선대“라고 하는데 옛날 수도하는 사람들이 육경(六庚)을 치루는 곳이라 하여 이고장 출신의 문무인(文武人)들이 반드시 이곳에서 육경의 고행을 치루었다는 고로들의 말이다,
육경(六庚)이란? 경일(庚日)에 좌선(坐禪)으로 밤새움 하는 의식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동안에 여섯차례의 고행을 거처야 도량(度量)이나 국량(局量)이 키워지고 예지력(叡智力)과 통찰력(通察力이 키워진다 했는데 끝을 못 채우고 실패하여 평생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살다간 사람도 있었다 했다.
운대암(雲臺庵)
망경암이 폐사(廢寺) 오랜 기간 비어 있다가, 임란(壬辰亂- 1592~1598)이후 세월선사(洗月禪師)께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운대암”으로 개칭하였고, 계유(癸酉)에 한창 번성하여 불교의 꽃을 피었고, 정사홍수(丁巳洪水)때 문화재와 함께 유실되고 부도(浮屠) 1점 만 겨우 전하여졌고, 정삼화상(井三和尙)께서 근근이 중창 (경남사찰 총람에 의 함) 하였다가 1990년에 이르러 강봉수(姜奉受)씨 시주로 산신각(山神閣) 4평 본당(本堂-無量壽殿) 20평을 삼창(三創)하였 고, 신도들이 성금을 뫃아 40평의 블록조의 요사채 2동을 건립하였으나 2005년 서광(徐광)큰스님이 블록조를 헐고 목조의 전통사찰(傳統寺刹)의 면모(面貌)를 갖추어 문화공보부의 등록 사찰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옥천저수지(玉川貯水池)
옥천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시작하여 시대가 바뀔때 마다 확장 되기는 하였으나 오늘날 같은 규모를 갖게 확장된 것은 65년도 이후이다, 당시의 양동식(梁橦植)면장이 뜻을 갖고 줄을 대어 농림부 농정과의 실무담당을 만났더니 뜻밖에도 농촌지도소 창선지소장직으로 재직하였던 하동군 악양 출신 강00씨였다, 그는 창선의 실정을 환이 꿰뚫어 보고 있어 어지간한 규모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장차 동대만(東大灣) 매립을 전제로 하여 오룡매립지와 아울러 몽리면적에 합산한 사업계획서를 다시 제출하라 해서 결정 집행된 것이, 둑 높이28m 기리 229m 저수량 594,000t의 위 용을 자랑하는 오늘의 시설물이다,
노촌(盧村)
옥천저수지 제방 하단부 서쪽에 있는 마을로 노씨 집성촌이라 하며 그 앞들을 노촌들 이라 한다,
정촌(鄭村)
토성마을에서 옥천저수지로 가는 중간 노촌의 옥천천 건너 마을로 정씨들이 주로 많이 산다하여 “정촌“이라한다,
탁촌골(卓村谷)
큰골에 사는 사람들이 탁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탁씨 촌 이라고 하는데 그냥 “탁 촌”이라고 부른다,
제18절 당저 1 리 (堂底1里)
당저리의 속명은 “댕밑”이다, “당집 아래에 있는 마을”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창선의 조세와 특산물을 모아 해창이나 보미창을 통하여 운송할 때 서울까지 탈 없이 운송케 하여달라는 제(祭)를 올리는 당집이 있었고 그 당집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당밑마을”이다, 아직도 당집터가 남아있고 커다란 고목이(당산목) 있으며 마을에서는 매년 동짓달 그믐날 호롱불을 밝히고 풍농 풍어를 비는 동제를 모신다.
고종8년(1871)에 발간한 진주목읍지의 목장지(牧場誌 )편에는 마을이름이 해창동(海倉洞)이었는데 1906년 남해군으로 이속 되면서 창선 16법정리로 당저리(堂底里)로 한것이고 1971년3월11일 자로 분동(分洞)되면서 “해창마을”은 “당저 2리”로 떠러저 나가고 “당밑마을”은 “당저 1리”로 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제19절 당저2리(堂底2里)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해창”이라는 마을이름이 더 익숙하다, 옛날 창선의 조세나 상납하는 토산물을 해창에 있는 창고에 뫃아서 조운선(漕運船)으로 서울에 운송해 “해창(海倉)이라는 동명이 되었다, 그래서 원래의 이름은 해창(海倉)이다, 옛날에는 “댕밑”과 “해창”은 한 동리로 “해창동(海倉洞-晉州牧誌)으로 되어 있었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어쩐 연유인지 ”당저리“(堂底里)로 개명되었다가 분구(分 區)로(1971. 3.11) ”당저2리“라고 하게 되었다,
추섬(萩島)
마을앞 무인도로 “사철 쑥이 다북하다”하여 “추도”(萩島)라고 이름 지어진 것이나 쑥보다 소나무가 울창하다.
제20절 상죽리(上竹里)
“ 호음동(好音洞)”과 “웃대밭(上竹-동산동)”“아래대밭(下竹)”3개 마을이 1개리로 형성되어 상죽리가 되었다,
옛 문헌에 따르면 창선리 19개동에 “호음동”과 “죽전동(竹田洞)”2개동이 따로이 있었는데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호음동과 죽전동이 통합되어 “상죽리”로 축소 된 것은 잦은 홍수로 호수가 많이 줄었음을 뜻 한다,
호음동(好音洞)·홍골
마을 뒷산이 급하게 비탈저 마을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 소리가 맑고 고운소리가 들려온다하여 마을 이름이 호음(好音)이라 했다. “호음”발음이 변하여 “홍”으로 된 것이고 “골”은 곡(谷)이 아니라도 취락에 조사(助辭)로 흔이 부친다, 예, 모산골 대산골 신골 따위
댓모을·웃대밭(上竹)
“대마을”이 변하여“댓모을”로 변한것, “웃대밭”(上竹)이 원래의 이름이고 가구수(家口數)도 많어서 마을을 대 표했다, 하천의 범람에 대비하여 큰 대밭을 이루어 마을이 형성 된 것인데 정사홍수(丁巳洪水-1917)에 많은 피해를
보고 “동산”으로 옮겨 호수(戶數)가 급격히 줄었고 중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나마 몇 집 남은 것도 없어 졌다,
동산동
"웃대밭“에서 수해를 피해 높은곳 ”동산“으로 이주했다 하여 상대적으로 ”동산“이란 말을 자주 쓰게 되어 마을 이름이 되었다, ”동산“(童山)이란? 나무가 없는 얕은 야산을 ”민동산“또는 ”동산“이라 한다,
하죽(下竹)· 골목
아래편 마을이라고 “아래대밭”(下竹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었으나 오늘날은 없어졌다,)이다, 마을 안길인 골목길이 길게 이어저 “골목마을”이라고도 하여 주민들은 그냥 “골목”으로 통용한다,
구 목관터(舊牧官趾)
창선초교 서쪽 산록 일대가 옛날의 면청사 터 일뿐 아니라 옛날의 현청(縣廳)터이다, 1956년 면청사를 현위치로 옮기기 전애는 구옥(舊屋)을 지붕과 창문 실내구간을 개조하여 썻고 남쪽에는 구옥이 원형대로 남아있어 창고로 사용 했다, 창선초교 서편 느티나무 옆에도 구옥이 남아있었고 학교 부대시설로 쓰다가 학교 증축 때 헐리어지고 흔적조차 남은 것이 없다.
제21절 수산리(水山里)
문헌상으로나 전하여 온 말로 미루어 보면 수산마을의 옛 지명이나 취락의 형태는 여간 복잡하다,
중종실록 38년(中宗實錄·1543)10월조에 “진주에 있는 창선도와 흥선도의 두 섬은 서로 부터 있어 목마가 내왕 생식한다 하니 관(關-城門)의 설치가 시급하다”(晉州界 昌善興善兩島相連牧馬往來生息最是緊關)는 기록으로 미루어 마을이름이 “성머리”(城頭村)로 된것은 500년 전으로 생각되며 “성목”이라는 지명도 이에 관련된 것으로 짐작 되고 취락형태도 “조산등”에 몰려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에 잦은 화재를 걱정하던 중 지나가던 어느 탁발스님에게 의논하니 남산에 있는 큰 바위가 불을 일으키는 화암상(火岩像)이니 마을 이름을“물뫼”라고 지어 주셨다, 그후 “뭍뫼” 를 한자로 고치니 수산(水山)이 되었다,
“수산”이라는 동명도 꽤나 오래된 이름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고종 8년(1871)에 펴낸 진주목읍지 목장지(牧場誌)에 수산동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130년은 더 오래된 이름이다,
장내(昌善川)
창선천의 속명은 “장내”이다, 가장 크고 길다하여“장내”(長川)로 통하고 “창선천”은 행정용어일 뿐이다,
옛날에는 홍수 때 마다 이리 저리 구비처 제멋대로 흘렀고 산림이 얕아 홍수는 불가항력이었다, 태고 적에는 당저 들을 가로질러 “배미창”으로 흘렀고, 어떤 때 에는 창선초교 있는 곳으로 흘러 상신교회 앞을 거처 모산 고개 아래 로 바짝 붙어서 바다로 흐르기도 하였고, 혹은 상죽 마을인 “웃대 밭 마을을 휩쓸어, ”아래대밭“마을을 가로질러
“사창개”로 흘렀을 테고 그럴 때마다 수산에는 많은 사력(沙礫)을 밀어다 붙였으리라, 이는 경지정리 때의 지층 구조라던 지 또는 가정용 우물 팔 때의(수도시설이 안된 옛날에는 집 집 마다 우물을 갖는 것이 유행 하였다) 지층구조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제22절 부윤 1리(富潤 1里)
부윤리 본부락의 속명은 “물뫼”또는 “물미”라고 부르고 있다, 그 까닭은 옛날에는 마을 앞은 “베미창”개울이 깊숙이 들어와서 농토도 얼마 되지 않고 호수(戶數)도 많지 않았고 (진주 목지에 소개된 창선리 19개동 총 호수는 800호 미만 )취락형태도 “조산등”을 위주로 수산(水山-물뫼)마을과 같은동리로 되어 있었는데 세월 따라 “장내”(昌善川)도 고정되어 농토 따라 “번덕”쪽으로 이동하여 수산마을로 형성되었고, 일부는 농토 따라“물뫼”쪽으로 이동하여 호수도 불어나, 1906년 남해군으로 이속되면서 창선이 16행정리(行政里)로 개편하면서 죽산(竹山)마을과 구도(舊島-舊梁洞)마을을 묶어 “부윤리”라는 새로운 동명이 되었고 1941년 4월1일 구도마을이 분동(分洞)하여 1리로 남게 되었으나 구전(口傳)되어온 “물뫼”라는 이름은 좀처럼 가시어 지질 않는다, “물미”는 “물뫼”에서 와전된 것으로 보아진다,
대산골.(竹山)
물뫼마을에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편 야산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대산골”이라 했다,
제23절 부윤 2리(富潤 2里)
마을의 속명은 “구도”이다, 마을앞에 있는 구도(龜島)에서 따온 이름이라고도 하나 구(龜)와 구(舊)는 억양이 틀리다, 진주목지편에는 구량동(舊梁洞)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양(梁)은 관방진(關防鎭)을 뜻하는 것으로 “옛 진터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진을 옮겨간 시기에 관한 것으로는 진양지(晉陽誌)의 기록에 “옛적에는 창선도 남쪽에 있더니 지금은 창선도 동쪽으로 옮겼다 무슨 일로 옮겼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진을 옮길 때 옛 진소 (鎭所)에서 태어난 세 살짜리 아이가 만력(萬曆)이었으니 새 진에서 죽지 않았다면 101살이 된다. 이로써 계산한다면 진을 옮긴 해는 105년이 된다고 승람(勝覽-東國輿地勝覽)에 보인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애매모호(曖昧模糊)한 계산 방식이고 만력(萬曆)은 중국 연호로 서기1753~1619년 사이로 선조(宣祖)6년에서 광해군(光海君) 10년이다, 진을 옮겨간 시기는 이보다 100년이나 앞서 실록에 적량진이 소개되고 있어 고려 말기가 맞는 말이고 이는 설화일 뿐이다,
1906년 지방관제 개편 때 “물뫼”“죽산”(竹山-대산골) “구량동”등 3개마을을 1개 행정리로 묶어 “부윤”이라는 새로운 동명을 갖게 되었고 1941년 분동(分洞)하면서 “부윤 2리”로 되었다,
제24절 오룡리 (五龍里)
산하(山河)의 지세가 다섯 마리의 용(龍)이 승천(昇天)하는 격(格)이라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오룡(五龍)”이라는 동명이 붙었다, 속명인 “오링개”는 오룡포(五龍浦-바다가 埋立되기전에는 해안이라서)에서 와전 된 것이고,웃마을인 연곡(蓮谷)마을을 “웃오링개”아랫마을인 오룡마을을 “아래오링개”라고도 했다, 일제가 강점하면서 마을이름을 쓰기 쉽도록 “오용(五用)으로 고처 부르게 하였으나 아무도 ”오용‘이라고는 않고, “오룡”으로 불러왔다,
깔밭개(蘆田)
깔대가 많아서“깔밭개”라고 하였으나 앞바다가 매립이 된 후로는 깔대밭은 농지로 바꿔지고 이름만 남었다
걸문개 (巨乙亡浦)
지도상으로는 동대만(東大灣)으로 표기 하였고 속명으로는 “걸문개”이다,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7월 조에 걸망포(巨乙亡浦-걸망개)”로 나오는데 그 이름의 연유는 분명치 않다,“걸망개”가 와전되어 “걸문개”로 된 것이고, 이곳에는 해조류(海藻類)“진질밭”이 형성되어 어족의 산란지대로 유명하다,
제25절 연곡리(蓮谷里)
“먹골”에 큰 연못이 있어 연꽃향기가 온 마을에 가득하다 하여“오룡리”에서 분동하면서(1946.1.1)“연곡”이라고 이름 지었다, 옛날에는 속명으로 “웃오링개”라고 했으나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는 부르 지 않는다, 연곡은 “먹골”“중촌”“송정”3개마을이 합해서 이루어젔다,
먹골, 못골
“ 큰 못이 있는 골자기“ 이말을 줄여서 ”못골“이라 한것이 변형되어 ”먹골“로 된것이라 했다,
중촌(中村)
동리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고 중촌(中村)마을이다,
송정(松亭), 송지이
솔머리 끝에 작은 정자가 있어 소나무 그늘에 정자가 있는 마을 이라 하여 “송정”이라 한다,
제26절 식포리(湜浦里)
구전에 의하면 옛날 하씨 성을 갖인 사람이 이곳에 살았는데 부자인데다가 인심이 후하여
걸인들도 이마을에 오면 포식(飽食)한다 하여 식포(食浦)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확실한 연대는 모르지만 식포(湜浦)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이는 숫돌봉 골에서 포구로 흐르는 골자기의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하 다 하여 식포이다. 법정리로는 가인리 이나 1948년12월9일 “가인리”에서 분동되었다,
제27절 언포리(堰浦里)
마을 앞 개를 막기 전에는 지형이 연꽃 봉우리 같이 생겨서 “연포”라고 부르다가 그 후에 바다를 막아 방죽을 만들었다하여 언포(堰浦)라고 부르게 되었다
1982년 9월 1일 식포리에서 분동하여 속명은 “언개”라고 했다,
제28절 고두리(顧頭里)
협소한 농토를 갖고 조상들이 고초를 겪으면서 생활했다하여 고도(孤島)라고 했다가 그 고생을 잊지 않겠다고 고두(顧頭 )라고 했다, 속명인 “고디”는 고도에서 와전된 모양이다.
1979년 8월20일 “가인리”에서 분동하여 “고두리“로 되었다.
제29절 가인리(加仁里)
가인의 속명은 “개린개”이다, 이는 옛 이름인 “가린포“에서 나온 이름 이다, 진주 목읍지에는 ”
“”고두“ ”언포“ ”식포“를 통합하여 가린동(加燐洞)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그 연유는 분명치 않다,
일제가 강점하면서 쓰기 쉽도록 가인(加仁)으로 쓰게 한 것이나 옛 지명을 고집할 각별한 사유는 없다,
공룡 화석지
마을앞 바다가 암반에 남아있는 공룡 발자국으로 1997년 7월에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다른 지역의 경우와는 다르게 특이하게 익룡 발자국 이라는 것이다, 전남의 해남 등지에서 발견 된 것과는 달리 뒷발 자국만 나타난 관계로 2족보행(二足步行) 익룡일 것 이라는 주장이 굳게 대두하고 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근방 다른 곳에도 그와 비슷한 많은 것이 있었으나 선착장 석재로 깡그리 뜯겨 나갔다.
제30절 적량리(적량리)
“적량(赤梁)이라는 마을이름은 관방진(關防鎭)설치와 동시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왜냐면 진(鎭)을 뜻하는 양(梁)자의 지명은 관방진 이외는 함부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량“이라는 마을이름은 적어도 600년은 더 오래된 이름이고 그 이전의 이름은 전하여 진 것이 없다,
1906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장포동”과 통합 1개 행정리(行政里)로 되면서 “진동리(鎭洞里)가 되었다, 그러나 두 마을은 급속도로 발전, 호수도 불어나 일정 때 분구되어 각기의 동명을 갖게 되어 한동안은 ”진동리“를 고집하여 “적량”이라는 유서 깊은 이름을 외면한 적도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목장개설(1400년대)이후 이의 관리 감독을 위하여 감목관(監牧官)을 둔 것이 1600년대로 그동안의 200년간은 적량진의 수군 만호(萬戶)를 첨사(僉使-僉節制使의 略稱)로 격상, 감목을 겸직케 한 역사적 유래를 갖고,
아직도 마을사람들은 자존심(自尊心)이 대단하다, “면 소재지에 나간다”고 말하며 “들어간다”는 않는다, 이는 같은“진 동 리”라는 집단의식(集團意識)에서인지 장포 대곡사람들도 마찬가지며, 몇 세기를 거치면서 고착(固着)된 역사의 단면(斷面)이기도 하다,
제31절 대곡리(大谷里)
골이 깊고 크다고 “큰골”이 속명이다, 원래는 적양리에 속해 있었으나 1981년 8월20일 분구되어 “대곡리”가 되었 다,
제32절 장포리(長浦里)
개울이 길다고 옛날에는 “장개”라고 했는데 발음이 촌스럽다고 아무도 그렇게는 않고 그저 “장포”로서 통 한다,
이 마을도 진동리(鎭洞里)의 일원임의 자존심이 대단하다. 옛날사람들은, 수산 상죽(중앙)에 출입할 때 “목장에 나간다”“목장 장(재래시장)에 나간다”했고 수산 등 마을 이름대신 “목장”으로 통칭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은 그러한 어투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나간다” “들어온다”는 말투는 여전하며 여간해서 없어질 것 같지 않다.
장포리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면, 세종실록 13년(1431)7월조에 “장곶”(長串)이라는 지명으로 소개되어 있고 조선 후기(後期)에 이르러 진주목읍지 목장지(牧場誌-1871)편에는 “장포동(長浦洞)으로 표기되어 있었고, 일제 강점 하의 세부측량(稅賦測量)후(1914) 적량과 통합되어 “ 진동리“로 되었다가, 1931년 4월에 진동에서 분구되어 “장포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