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724]劉禹錫(유우석)-烏衣巷(오의항)
烏衣巷(오의항)-劉禹錫(유우석)
朱雀橋邊野草花(주작교변야초화),
烏衣巷口夕陽斜(오의항구석양사)。
舊時王謝堂前燕(구시왕사당전연),
飛入尋常百姓家(비입심상백성가)。
주작교 옆에 들풀이 꽃을 피웠는데
오의항 입구에는 석양이 비껴 있네
옛날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집 앞에 날던 제비
이제는 평범한 백성의 집으로 날아드네
원문=당시삼백수 권6 칠언절구
280.烏衣巷(오의항) - 劉禹錫(유우석)
<오의항>
[通釋] 주작교 근처에는 들풀이 꽃을 활짝 피웠는데
오의항 입구에는 석양이 비껴 있는 것만이 보인다.
그 옛날 왕도(王導)‧사안(謝安) 두 거족(巨族)의 집 앞에서
날던 제비가 지금은 일반 백성의 집으로 날아 들어간다.
[解題] 이 작품은 회고시로서 유우석의 〈金陵五題(금릉오제)〉 가운데 하나이다.
〈금릉오제〉는 〈石頭城(석두성)〉, 〈烏衣巷(오의항)〉, 〈臺城(대성)〉,
〈生公講堂(생공강당)〉, 〈江令宅(강령댁)〉 다섯 수인데,
그 서(序)에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 강남의 객이 되었는데
말릉(秣陵)을 유람하지 못해 일찍이 여한(餘恨)이 있었다.
훗날 역양(歷陽) 태수가 되어 몹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어떤 객이 〈금릉오제〉를 내게 보여주어 그때 생각이 떠오르면서
문득 깨친 바가 있었다. 훗날 친구 백낙천(白樂天)이 머리를 흔들며
고심하고 읊조리며 한참을 탄상(歎賞)하더니,
말하기를 ‘〈石頭(석두)〉 시에
「조수(潮水)는 빈 성을 때리고 적막하게 돌아가네.
[潮打空城寂寞回]」라고 했는데,
후대의 시인들은 다시는 이런 구절을 지을 수 없으리라.
나머지 네 수는 이 시에 미치지 못하나 또한 고루하진 않다.’라고 하였다.
이는 낙천의 말일 뿐이다.” 하였다.
〈금릉오제〉에 관해서는 《古今詩話(고금시화)》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 번은 원진(元稹)‧유우석(劉禹錫)‧위초객(韋楚客) 세 사람이
백거이(白居易)의 집에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금릉회고(金陵懷古)를 언급하였고, 이에 이를 시제(詩題)로 정하여
시를 짓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유우석이 시를 다 쓰자 백거이가 말하기를
“네 사람이 흑룡을 찾아 나섰는데 그대가 먼저 구슬을 얻었으니,
나머지 비늘과 물고기들은 어디에 쓰겠는가?” 하니,
나머지 사람들이 시 짓기를 그만두었다.
유우석의 〈금릉오제〉가 여의주를 얻은 작품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 작품은 다만 비늘 한 개, 발톱 하나를 얻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훗날 문단의 가화(佳話)가 되었다.
〈오의항〉 시는 암시법을 사용하였는바,
경어(景語)이면서 또한 정어(情語)이기도 하여
의미상 쌍관(雙關)을 이룬다. 앞의 두 구는 대구(對句)이면서 제목을 드러내었다.
오의항 근처 주작교는 동진시대(東晉時代) 왕도‧사안 두 거족(巨族)이
거주하던 곳으로, 당시에는 번화한 지역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지금처럼 몰락해버렸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野草花(야초화)’와
‘夕陽斜(석양사)’뿐이다. 뒤의 두 구는 예전의 왕도‧사안의 집 앞을
날던 제비가 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집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을 썼는데,
이는 왕도‧사안의 집안 자제들이 지금은 몰락하여
일반 백성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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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烏衣巷(오의항) : 옛터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진회하(秦淮河)
남쪽에 있는데 주작교(朱雀橋)와 가깝다. 본래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가
방비하던 곳으로 병사들이 모두 검은 옷[烏衣(오의)]을 입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칭해졌다 한다. 동진시대(東晉時代) 왕도(王導)‧사안(謝安) 등이 이곳에서
살았으며, 사곤(謝鯤)과 족자(族子)인 사령운(謝靈運) 등도 이 동네에 살았다.
○ 朱雀橋邊野草花(주작교변야초화) : ‘朱雀橋(주작교)’는 일명
‘朱雀航(주작항)’이라고도 하는데 진회하(秦淮河) 위에 있는 부교(浮橋)이다.
동진(東晉) 때 세워졌는데 옛터가 지금의 남경시(南京市) 진회교(鎭淮橋) 동쪽에 있다.
《六朝事跡編類(육조사적편류)》에 “진(晉) 함강(咸康) 2년에 주작문(朱雀門)을 만들고
주작부항(朱雀浮航)을 새로 건립했다. 현성(縣城)의 동남쪽 4리 되는 곳에 있는데
주작문(朱雀門)을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회수(淮水)에 닿아 있어
또한 주작교(朱雀橋)라 명명한 것이다.
[晉咸康二年作朱雀門 新立朱雀浮航 在縣城東南四里 對朱雀門
南渡淮水 亦名朱雀橋]”라고 하였다. ‘花(화)’는 동사로 꽃이 피었다는 뜻이다.
○ 王謝(왕사) : 즉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두 집안을 가리킨다.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은 육조(六朝 : 東吳, 東晉, 宋, 濟, 梁, 陳)시대를
이끈 대표적인 귀족 정치인이다.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와
시인 사령운(謝靈運)도 그들의 집안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독점했고, 그것을 배경으로 귀족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 왕도(王導) : 진(晉)의 재상(宰相). 임기(臨沂) 사람인데 원제(元帝)의 총애로
정승에 올랐고 뒤에 유조(遺詔)로 명제(明帝)와 성제(成帝)를 도와 태부(太傅)가 되었음.
○ 사안(謝安) : 동진(東晋)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자(字)는 안석(安石),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원래 은자(隱者)로 유명하여
왕희지(王羲之) 등과 회계(會稽)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에서 여러 번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40세에 처음으로 출사(出仕)하였음.
○ 尋常百姓家(심상백성가) : 일반 백성의 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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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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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禹錫(유우석) : 중국 당나라의 시인(772~842). 자는 몽득(夢得).
혁신파 관료인 왕숙문, 유종원 등과 정치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좌천되어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를 펴냈으며,
시문집에 ≪유몽득문집≫, ≪유빈객집(劉賓客集)≫, ≪외집(外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