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 경(A4:170)
Yuganaddha-sutta
1. 한때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원림에 머물렀다.
거기서 아난다 존자는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도반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에게 응답했다.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어떤 비구든 비구니이든
나의 곁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설명하는 자는
모두 네 가지 특징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합니다.
무엇이 넷인가요?"
2.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사마타를 먼저 닦고 위빳사나를 닦습니다.(*1)
그가 사마타를 먼저 닦고 위빳사나를 닦을 때 도를 인식합니다.(*2)
그는 그 도를 거듭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습니다.(*3)
그가 그 도를 거듭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족쇄들이 제거되고(*4) 잠재성향(*5)들이 끝이 나게 됩니다."
(*1) “이것은 사마타행자(samatha-yānika)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첫 번째로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나 본삼매(appanā-samādhi)를 일으킨다. 이것은 사마타이다.
그는 삼매와 이러한 삼매와 함께하는 법에 대해서 무상 등으로 관찰한다(vipassati). 이것은 위빳사나이다.
이처럼 첫 번째 사마타가 있고 그 다음에 위빳사나가 있다.
그래서 ‘사마타를 먼저 닦고 위빳사나를 닦는다(samathapubbaṅgamaṃ vipassanaṃ bhāveti).’고
한 것이다.”(AAT.ⅱ.314)
(*2) “첫 번째 출세간 도(lokuttara-magga)가 생긴다는 말이다.”(A.ⅲ.142)
“여기서 첫 번째 출세간 도란 예류도(sotāpatti-magga)를 두고 한 말이다.
혹은 세간적인 도(lokiya-magga)로도 이 성전의 뜻을 알아도 된다.
예비단계인(pubbabhāgiya) 세간의 도가 생긴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AAT.ⅱ.314)
(*3) “염오를 따라 관찰하는 것(nibbidānupassanā)을 통해서 ‘거듭한다(āsevati).’
해탈하기를 원함(muccitukamayatā)에 의해서 ‘닦는다(bhāveti).’
숙고함을 따라 관찰함(paṭisaṅkhānupassanā)을 통해서 ‘많이 [공부]짓는다(bahulīkaroti).’
혹은,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bhayatupaṭṭhānañāṇā)를 통해서 ‘거듭한다.’
해탈하고자 하는 지혜(muñcitukamyatāñāṇa) 등을 통해서 ‘닦는다.’
도의 출현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vuṭṭhānagāminī- vipassanā)를 통해서 ‘많이 [공부]짓는다.’”(AAT.ⅱ.314)
(*4) 『청정도론』은 예류도부터 아라한도까지 도에 의해서 족쇄들이 제거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신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악처로 인도하는 감각적 욕망, 악의 -
이 다섯 가지 법들은 첫 번째 예류도의 지혜로 버리고,
나머지 거친 감각적 욕망과 적의는 두 번째 일래도의 지혜로 버리고,
미세한 감각적 욕망과 적의는 세 번째 불환도의 지혜로 버리고,
색계에 대한 욕망 등 다섯은 오직 네 번째의 아라한도의 지혜로 버린다.”(Vis.ⅩⅩⅡ.64)
(*5) ‘잠재성향’은 anusaya를 옮긴 것이다.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들은 고질적(thāma-gata)이기 때문에 잠재성향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반복해서 감각적 욕망 등이 일어날 원인의 상태로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청정도론』 Vis.ⅩⅩⅡ.60)
『디가니까야』 제3권「합송경」(D33) §2.3(12) 등에서 잠재성향은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
적의(敵意)의 잠재성향, 자만의 잠재성향, 사견(邪見)의 잠재성향, 의심의 잠재성향,
존재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 무명의 잠재성향의 일곱 가지가 나타난다.
『청정도론』은 이들 일곱 가지 잠재성향이 어떻게 도에 의해서 버려지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견의 잠재성향과 의심의 잠재성향은 첫 번째 예류도의 지혜로 버린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잠재성향과 적의(敵意)의 잠재성향은 세 번째 불환도의 지헤로 버린다.
자만의 잠재성향과 존재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과 무명의 잠재성향은
네 번째 아라한도의 지혜로 버린다.”(Vis.ⅩⅩⅡ.73)
3.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위빳사나를 먼저 닦고 사마타를 닦습니다.(*6)
그가 위빳사나를 먼저 닦고 사마타를 닦을 때 도를 인식합니다.
그는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습니다.
그가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족쇄들이 제거되고 잠재성향들이 끝이 나게 됩니다."
(*6) “이것은 위빠사나 행자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앞서 말한 사마타를 성취하지 않고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에 대해서 무상 등으로 관찰한다.”(Vis.ⅩⅩⅡ.73)
초기 경에서 세존께서 고구정녕하게 강조하시는 것으로
많은 경들에서 거듭 나타나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라.’는 가르침을
바로 실천하는 것이 위빠사나를 먼저 닦는 수행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다.
4.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습니다.(*7)
그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을 때 도를 인식합니다.
그는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습니다.
그가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족쇄들이 제거되고 잠재성향들이 끝이 나게 됩니다."
(*7) “‘쌍으로 닦는다(yuganaddhaṃ bhāveti).’고 하였다.
그러나 중득[等至]에 든(samāpattim samāpajjitvā) 마음(citta)으로
형성된 것(saṅkhāra)들을 명상할 수는 없다.(sammasituṃ na sakkā)
그러므로 이것은 증득에 든 만큼 형성된 것들을 명상하고
형성된 것들을 명상하는 만큼 [다시] 증득에 든다는 [말이다.]
어떻게?
초선을 증득한다(samāpajjati). 거기서 출정(出定) 한 뒤 형성된 것들을 명상한다. …
비상비비상처의 증득에 든다. 거기서 출정한 뒤 형성된 것들을 명상한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을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는다고 한다.”(AA.ⅲ.143)
주석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는다는 의미를 이렇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본삼매 즉, 禪에 들어서 위빳사나를 닦는 것이 지관겸수 혹은 정혜쌍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표상이라는 개념에 집중된 사마타와 법의 찰나성(무상) 등을 통찰하는 위빳사나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즉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은 이처럼 반드시 사마타에서 출정한 뒤에야 가능하다.
이것이 상좌부의 정통 견해이다.
5.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가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8)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마음을 안으로 확립하고 안정시키고
하나에 고정하여 삼매에 들 때 그는 도를 인식합니다.
그는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습니다.
그가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족쇄들이 제거되고 잠재성향들이 끝이 나게 됩니다."
(*8)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림(dhamm-uddhacca- vigghita)’이란
사마타와 위빳사나 [도중에 생기는] 법들 가운데 열 가지 위빳사나의 경계(dasa-vipassan-upakilesa)라 불리는
들뜸에 의해서 붙들렸다, 완전히 붙들렸다는 뜻이다.”(AA.ⅲ.143)
한편 『청정도론』 ⅩⅩ.106은 이 문장에 대한 『무애해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어떻게 [성스러운]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 들뜸에 의해서 마음이 붙들리게 되는가?
그가 [상카라들을]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 할 때
①광명이 일어난다. 광명이 법이라고 생각하고 광명으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 할 때
②지혜가 일어난다. … ③ 희열이 … ④ 경안이 … ⑤ 행복이 … ⑥ 결심이 …
⑦ 분발이 … ⑧ 확립이 … ⑨ 평온이 … ⑩ 욕구가 일어난다.
욕구가 법이라고 생각하고 욕구로 전향한다. 그것으로 인한 산만함이 들뜸이다.
그 들뜸에 붙들려 그들이 일어남을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일어남을 무아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Ps.ⅱ.100~101)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든 비구니든 나의 곁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설명하는 자는
모두 이러한 네 가지 특성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합니다."
대림스님 옮김 『앙굿따라니까야』 제2권 367-3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