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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1 12:06
http://blog.naver.com/doyen73/120157941321
1. 개요
'밀린다의 물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빨리본 밀린다판하(Milindapanha)가 '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이다. 한역본으로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기원적 2세기 후반에 서북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인 국왕인 밀린다(Milinda)와 유명한 불교 논사인 나가세나(Nagasena)장로가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마침내 왕이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된 것이다
2. 대론서
이 경전은 파알리어로 쓰인 성전의 일종이다. 성전이라 하면 경(經)으로 생각되는데, 이 성전은 경이 아니라 대론서다. 한역 나선비구경 (那先比丘經)은 파알리어 본의 고층(古層) 부분과 거의 일치하는데, 그 제명(題名)이 경(經)이라 붙여진 것은, 일반적으로 중국인이 불교 텍스트라 해서 그리했을 것이다. 밀린다 팡하아(세이론에서는 밀린다 팡호라 함)는 현재 세이론 불교에서 장외 전적(藏外典籍)으로 치고 있다. 장외라 함은 경(經) 율(律) 논(論) 삼장에 들어 가지 않음을 말한다. 곧 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어마 불교에서는 경장(經藏)의 소부경전(小部經典) 속에 수록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성전이 아주 존중되고 있다 할 것이다.
밀린다왕문경 은 그것이 삼장 중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간에 성전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더우기 이 성전은 서기전 150년 경 서북인도를 지배한 그리이스왕 메난드로스 (인도명은 밀린다)와 불교 경전에 정통한 학승 나아가세나 사이에 오고 간 대론서라는데 또 하나의 특색이 있다.
밀린다왕문경의 특색은 다른 불교 문헌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 왜냐하면, 그 것은 불교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고, 더구나 인도문화권 밖에 있던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서 자란 그리이스인 왕이 불교 학승(學僧)을 향해 예리한 질문을 되풀이하며, 불교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이런 말을 곧잘 한다. 불교는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쩐지 거기 마음이 쏠려 불교를 알고 싶어하고 불교의 본질을 파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 교단(佛敎敎團)을 보면, 여러 점에서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유리(遊離)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 된다. 그런 점을 보기로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는 사람이, 자진해서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불교인들에게 구해 봐도,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실제 현상이라고.
이러한 사정이 이미 서기전 2 세기 후반에 그리이스 인 왕 메난드로스에 의해 제시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공감을 크게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 하겠다. 밀린다왕문경을 읽어 가면, 질문의 하나 하나가 조금도 낡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자기가 질문해서 의문을 풀고 싶다고 생각한 것들이 바로 그리이스인 왕에 의해 던져지며 구명되고 있다. 그래서, 나아가세나 장로의 해답도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풍부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은 인도 일반의 특색이지만, 이 정도의 학승이 알기 어려운 불교 교리를 굳이 빙빙 돌리지 않고, 아주 쉽게 해명하려고 하는 태도에 호감이 간다. 다만, 이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나아가세나의 해답에는 초자연적인 것도 있고, 또 우리들의 지성으로 수긍할 수 없는 설명도 있을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시대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도에 그리이스인이 침입한 시초는 알렉산드로 대왕의 인도 침략(서기전 327 년)이다. 그 뒤, 찬드라 굽타에 의해 마우리야 왕조가 건설되므로, 그리이스인의 세력이 일시 후퇴했다. 마우리야 왕조에는 아쇼카아 왕이 나와 전 인도를 거의 통일하게 되었다. 이 마우리야 왕조의 세력권(勢力圈)에 접하여 그리이스 인의 세력이 존속했을 것은 물론이다.
당시 인도보다 서방 여러 지역은 시리아 세레우코스 왕의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서기전 3 세기 반 경에 중요한 두 지방, 즉 박트리아와 파르티아가 세레우코스제국(帝國)에서 이탈하여 거의 같은 때 독립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이 중 밀린다 왕에 있어 중요한 것은 파르티아 국보다 그리이스계(系) 박트리아(중국에서는 大夏라 부름)였다.
밀린다 왕은 이 박트리아 계통의 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린다 왕 이 서북 인도를 지배한 것은, 서기전 50 년 경이므로, 그리이스 세력이 인도에 들어가, 특히 그리이스 문화가 인도에 정착한 중간 시기에 해당된 셈이다.
이 밀린다왕문경은 밀린다 왕과 학승 나아가세나의 대론이지만, 적어도 현행 파알리어 본으로 보면, 그 전부가 다 두 사람의 문답이라 할 수는 없다. 이는 불교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트렝크너가 교정(校訂) 출판한 트렝크너 본에 의하면, 서장(序章) 부분을 제외한 89 페이지 까지가 고층(古層)이고, 나머지 부분은 뒷날 증광(增廣)부가된 것이라고 한다. 이 번역에서 제 2 편 제 1 장 제2 까지가 고층 부분이다.
밀린다 왕은 인도에 알려진 그리이스 왕 40 여명 중, 인도 문헌에 이름이 전해 온 유일한 그리이스계 왕이다.
그것은 현재 비문과 밀린다 왕 시대에 사용된 화폐, 또는 밀린다 왕과 나아가세나 장로의 대론서 등이 현존해 있으므로, 밀린다 왕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말해도 확실하며 그 업적도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메난드로스왕의 왕조는, 다른 그리이스계 나라들처럼 대개 그리이스인이 고관이고 관료였다. 그리고 크샤트리야나 바라문이자 자산자(資産者) 계급 사람들은 그 하위에 있었다. 밀린다왕문경 에 나와 있는 네 대신의 이름도 그리이스 이름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아무튼 그리이스왕을 보좌하는 대신,각료(閣僚)들은 그리이스인이었으며, 그리이스의 문화,관습,신앙 같은 것이 그리이스계 나라안에서 통용되었을 것도 당연하다.
5. 왕자론과 현자론
밀린다 왕은 나아가세나 장로와 대론함에 있어, 현자론에 근거하는 입장을 취했다. 거기에는 불교가 그리이스인에게도 개방된 종교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도는 계급 제도를 묵수(墨守)하는 나라이므로, 외국인은 모두 오랑캐(夷狄)로 취급되고, 아우트 캐스트에 속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현대까지도 그렇다. 따라서 외국인인 그리이스인은 종교나 종교관이 다르다 해서, 인도인으로부터 하천(下賤)계급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오랑캐로 취급받는 그리이스인이 인도의 사회 문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바라문교 이외의 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디에 불교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종교로 등장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불교는 교조(敎祖) 고타마 붓다 이래 계급 제도를 배제할 것을 말했다. 사성계급(四姓階級)을 타파하고, 모든 사람이 혈통이나 츨신에 의해 존비(尊卑)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이 평등하며, 각자의 행위가 기준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이 그리이스인에게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환영 받았으리라는 것은 더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이스뿐 아니라 그 뒤 인도에 침입한 여러 민족은 대개 불교를 보호하고 또는 불교 신자가 된 예가 많다.
밀린다 왕과 나아가세나 장로의 대론 근거를 고찰함에 있어,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조류을 고려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메난드로스 왕은 제왕의 덕과 위엄을 가지고 통치에 임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스스로 정의를 수호하는 왕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푸르타르크가 쓴 그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정의의 통치자였고,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대단히 두터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유골을 여러 곳에서 나누어가고, 또 그를 기념하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
밀린다 왕이 제왕의 위엄을 가지고 통치에 임했다 함은, 밀린다왕문경 첫 편에 그것을 입증하는 문답이 있다(대화를 성립시키는 기반).
대왕이여, 만일 그러나 현자의 논으로 대론한다면,나는 그대와 대론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왕자의 논으로 대론한다면 나는 그대와 대론하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고 있다.
결국, 정치적 압력이나 제왕의 위엄을 가지고 문답한다면, 자기는 대론에 응하지 않겠다고, 나아가세나 장로는 거절한다. 여기서 장로는 언론 자유와, 진리 탐구의 기치를 들어 양자가 대등하게 대론하는 현자의 논을 제시하고, 이 현자의 논에 대론의 기반이 있다고 못박은 것이다.
밀린다 왕은 불교 교단이나 교리에 관하여 자기가 의문으로 삼고 있는 점을 솔직하게 찔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론이 있다.
불교의 출가자는 고행자(苦行者)라고 왕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이다. 고타마 붓다는 고행주의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의 출가자들의 풍채(風彩)를 보면 인도 일반의 종교적 관습에 따르고 있으므로, 그리이스인 왕의 눈에도 출가자라면 불교뿐아니라 어느 종교의 출가자든 고행자로 보였을 것이다.
불교의 출가자는 고행자가 아니고 두타행(頭陀行)을 지킨다. 그들은 고타마 붓다 이래 나무 밑에서 명상한다던가, 탁발로 얻은 음식 만을 먹는다던가, 하는 열두 가지 두타행을 엄수(嚴守)한다. 이 두타행은 고행에 가까운 실천법이었고, 출가자의 이런 생활은 널리 인도의 어느 출가자에 있어서도 실행되고 있었으므로, 그리이스인왕 쪽에서 보면 불교의 두타 행자는 고행자로 보였을 것이다.
밀린다 왕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고 질문한다. 불교의 출가자는 고행을 실천하여 깨달음을 얻지만, 한편 고행을 실천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은 재가 신자(在家信者)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자가 되어 고행을 실천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급소를 찔렀다.
이런 점, 그리이스인 메난드로스왕은 당시의 불교교단이나 불교도의 생활을 관찰해서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대론에 나오는 인도 불교에 향한 그리이스인의 관찰이란 것은, 다른 불교 문헌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또 당시 생활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한 문헌도 별로 없다. 그러므로, 출가와 재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깨달음을 펴는 사람은 출가자 뿐이고, 재가 신자는 스님의 설법을 들으며 깨달음을 펴지 않더라도 사후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하여 대승불교 시대로 들어오면, 재가 신자도 부처와 똑 같은 깨달음을 열 수 있다고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 이전에 재가 신자들은 어떠한 생활을 했으며 어떠한 이상(理想)을 가지고, 그 이상을 어떻게 실현하고 있었는지, 문헌 상에는 별로 기록이 없다. 그러한 감추어진 사항이 이 밀린다왕문경에 드러나 있다.
7. 문헌 번역 연구 등
앞에 상세하게 해설했지만, 여기서 다시 그 요점과 동시에 한 두 가지 자료를 추가해 말하고자 한다.
출판본으로는, 첫째 트렝크너의 비판적 교정 출판본(로마자로 바꿔 써 출판했다)이 있다. 이것은 1880년에 출판되었으며 트렝크너가 얼마나 우수한 학자였는지 알 수 있다. 그 뒤 두 번 쯤 리프린트되었다.
다음, 샴판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샴본이 있다. 이것은 Milindapa이 시일론에서는 Milindapa 증광(增廣)되어 있고 어구의 착간(錯簡)이 보인다.
번역본으로는, 시일론의 신하리이스가 번역한 것이 있다. 이것은 히이나티 쿤불레에 의해 1877 년에 출판되었다.
또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읽혀 온 영역본으로, T.W.Rhys Davids 것이 두권 있다. 여기서는 이 영역본을 대본을 하였다. 그 밖에 완역된 것은 아니라도 니야아나티로카, 옷토 슈레다아 등의 독역(獨譯), 휘노의 불역(佛譯)등이 있고, 훌륭한 연구도 나와 있다.
그런데 리스 데이비스의 영역이 나온 뒤 그것을 능가 한다는 영역이 간행되었다. King Milinda's Questionns,2 Vols. tr. by Miss I.B.Horner, SBB. No. 22, 23, 1963∼64. 역자는 호너 여사(女史)로, 본문중 파알리어성전의 인용을 정사(精査)하고 있는 점에서는 리스 데이비스의 것보다 우수하다.
일본에서는 야마우에(山上曹源)역 국역 미란타왕문경(國譯彌蘭陀王問經)이 국역 대장경 (國譯大藏經) 속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리스 데이비스의 영역을 일본말로 옮겼기 때문에 원전의 번역은 아니다. 또, 가내모리(金森西俊)역 미란왕문경 (彌蘭王問經) 두 권이 남전대장경 (南傳大藏經)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종전 여러 번역과 달리 샴본을 대본(底本)으로 하여 역출(譯出)했고, 또 트렝크너본과도 비교하어, 주(註)에 다 그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역본의 상단(上段)에는 샴본의 페이지수를, 하단에는 트렝크너본의 페이지수를 표시하고 있으므로, 그 두 번역본을 대조해 보기에 편리하다.
또 동양문고(東洋文庫)판 밀린다와의 물음 이란 일본역이 있는데, 이것은 가내무라씨와는 반대로 트렝크너본을 대본으로 하고 샴본을 참고하는 방법을 썼다.
밀린다 팡하아 에는 주석서가 없다고 했는데, 최근에 발견되었다. 그것은 캄보디아에 전해 온 밀린다 티이카아 란 책이다. 자이니 교수가 1961 년에 출판했다. (Milinda-Tik PTS., 1961.)
트렝크너본 89 페이지까지 이 경전의 고층(古層)인데, 이 고층에 해당되는 부분이 한역(漢譯)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다. (서화 부분은 파알리어본과 한역이 다르다). 이것에 대한 일본역과 해설이 호시가다(干瀉龍群)씨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 논집부(論集部) 에 수록되어 있다.
나선비구경 까지 포함해서, 밀린다왕문경 에 대한 일본 학자의 연구로는, 나까무라(中村元), 와스지, 미쓰노(水野弘元)씨의 것이 있다.
8. 본서의 구성
트렝크너본에서 본서의 구성을 보기로 하자.
처음에, 서장(序章) 부분이 있다. (트렝크너본 1 페이지에서 25 페이지까지) 이 서장 부분은 두 사람의 전생이야기 곧 자아타카에 해당한다. 밀린다 왕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자아타카와 나아가세나 장로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자아타카를 서술했다. 파알리어본의 자아타카는 밀린다 왕이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텍스트 제명(題名)이 밀린다 팡하아 즉 밀린다 왕의 물음이라 되었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한역 나선비구경은 나아가세나(那先)의 전생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어느 것이든 그 뒤에 오는 고층 부분이 생긴 뒤 부가되었다.
다음, 본론에 들어간다. 나아가세나와 밀린다의 대론이 시작되는 셈이다. 25 페이지에서 64 페이지까지가 제 1 회의 대론 이고, 65 페이지에서 89 페이지까지가 제 2 회의 대론 이다. 이 제 1, 제 2 회 대론 부분이 고층이오, 또 나선비구경 과 대응하는 부분이다. 90 페이지에서 326 페이지까지가 난문 (難問) 부분이다.
난문이란 모순문(矛盾問)이라 해도 좋은 것으로, 이 번역에서 양도론법(兩刀論法)의 질문을 말한다. 329 페이지에서 362 페이지까지가 추리에 관한 물음 부분이오, 363 페이지에서 419 페이지까지가 비유에 관한 물음 이다. (이 번역에서는 아라한의 경지를 증득하려는 비구가 알아야 할 105 개 요목만을 드는데 그쳤다).
마지막으로 419 페이지에서 420 페이지까지 겨우 두 페이지가 맺는 말(結語)로, 밀린다 왕이 아라한의 경지를 증득했다고 끝맺었다.
제 1 회, 제 2 회의 대론은 고층에 속한 것으로, 우리들의 흥미를 돋군다. 그러나, 거기에 이어지는 난문, 즉 양도론법의 질문도 상좌부(上座部) 불교 교단을 감도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점에서, 귀중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양도론법의 질문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사항을 가져와 사실의 모순을 찌른 셈이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는데, 또 딴 곳에서는 그와 전혀 모순되는 것을 말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고 대든다.
이를테면, 부처님에게 드리는 공양(供養)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는 대론에 있어, 밀린다 왕은 물었다. 나아가세나존자여, 다른 학파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일 부처님이 공양을 받는다면 부처님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 고. 즉, 부처님이 살아 있다면 음식공양을 받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죽고 없다면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된다. 또, 만일 부처님이 공양을 받는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부처님이 죽은지 몇 백년이 지난 뒤의 것이므로, 부처님은 이미 죽고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 이어 질문을 한 이유가 들어 있다. 즉, 왜냐하면 부처님은 세상과 얽혀 있고 세상 속에 있으며, 세상에서 세상과 함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용하고 결과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또 한편 만일 부처님이 완전히 죽어 버렸다면 부처님은 세상과 얽혀 있지 않고 모든 존재로부터 이탈해 있으므로 그에 대한 공양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히 죽어버린 사람은 아무 것도 받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받지 않는 분(부처님)에게 드리는 공양은 무효하고 결과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고.
이 양도론법의 질문에 대하여, 나아가세나 장로는 부처님이 입멸(入滅)한 뒤 불교도가 왜 부처님이 사리탑(舍利塔)을 쌓고 부처님을 공양 예배하는가 하는 의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즉, 모든 신(天)과 사람들은 완전히 죽어 이미 아무런 공양도 받지 않는 여래(如來)의 유골보(遺骨寶)에 의거하고, 또 지혜보(智慧寶)를 대상으로 하여 올바른 행위를 할 때, 세 가지 경계(죽어서 인간으로 태어나며, 신으로 태어나며, 아라한으로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는 것 중의 한 가지 경계)를 얻습니다. 대왕이여, 이런 이유로도, 여래는 완전히 죽어 이미 공양을 받지 않지만, 부처님에 대하여 행하는 공양은 무효하지 않으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불교가 우상(偶像) 숭배가 아니라는 이유의 하나가 나아나세나 장로에 의해 분명하게 해답되고 있다. 장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세존께서 완전히 사멸(死滅)하시므로, 세 가지 경계를 얻는 가능성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생존의 고뇌에 싸인 사람들은 유골보와 교법(敎法)과 규율(規律)과 교계(敎戒)에 의지하여 세 가지 경계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양도론법의 질문이 성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한 밀린다 왕은 불교교리나 대장경(大藏經)에 정통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장경 속에서 서로 모순된 데를 끌어내 나아가세나 학승에게 날카로운 질문의 화살을 쏘아댄 셈이므로, 이 그리이스인 밀린다 왕은 상당한 학자가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이런 점으로 미루어, 난문 부분 이하는 후인들이 증광 부과해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성전의 원형이 성립된 것은 서기전 1 세기 내지 서기 후 1 세기이므로, 난문 속에 나오는 교단의 여러 사정이라던가 교리 해석등은 서기 전후의 것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 틀림 없을 것이다.
9. 대승불교 흥기와의 관계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서기전 150 년의 두 사람의 문답이라기 보다, 그것이 사실이었더라도 그 당시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에 틀림 없다. (인도에서 문헌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라 한다). 그러나, 일반 지식인의 뇌리에는 그 두 사람의 문답이 기억 속에 전해 갔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그 기억도 희미해 간다. 그래서, 기록에 남겨 놓으려고 한 것이 백년은 훨씬 지나서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원전 50 년 경이 된다. 그리이스인이 인도로부터 자취를 감춘 것은, 서기전 80 년에서 기원에 이르는 사이로, 그리이스문화가 실제로 인도에 꽃을 피운 것은 백년 뒤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이스풍의 블교미술, 소위 간다라 미술이 나온 것은 서기 전후 경부터이다. 대개 그러한 풍조(風潮) 속에서 밀린다왕문경 이 쓰여졌음에 틀림 없다.
또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처음에는 아마 그리이스 식민지인 서북인도에서 만들어지고, 그것이 동쪽 마가다지방으로 전해져 파알리어로 고쳐진 다음 그것이 증강 부가되어 시일론에 전해지고, 곧 시일론에서 버마와 타이 등 나라로 전해졌다고 한다.
또 다른 학자는 이 성전의 고층 부분은 혼합 산스크리트로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그 성립을 서기전 1 세기 내지 서기후 1 세기로 잡고 있다.
서기를 전후한 시대는 꼭 대승불교가 흥기하는 시대이다. 이 시대를, 우리들이 고고학적 유품(考古學的遺品)·미술품, 비명(碑銘), 그 밖의 문헌을 근거로 구명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곤란이 따른다. 또 이 시대의 전통불교 여러 파에 대한 연구도 불명확한 점이 아주 많다. 그러한 사정에서 이 밀린다왕문경 은 하나의 유력한 문헌으로, 당시의 양상을 잘 밝혀 준다.
대승불교가 일어나자 이때까지의 전통적 보수적 불교는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인도에서 병존(倂存)하고 있는 전통불교에 대하여, 여러 파의 교단 사정이라던가 교단인의 실천이란 것이 밀린다왕문경을 통해서 분명해졌다고 할 것이다.
10. 본서의 특색
―석존 입멸 후 교단의 소원―
밀린다왕문경의 특색을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보고싶다.
제 1은 석존이 입멸한 후 불교교단을 어떻게 지켜 후세에 전해갈 것인가라는 교단의 불교 호지(護持) 정신이 얼마나 강렬했는가를 쉽게 엿볼 수 있다. 결국 전에는 역사적 실재(實在)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설한 석존이 이 시대에는 먼 옛날 사람이 되었다기보다 손이 닿지 않는 최고 인격자로 신격화(神格化)되고 절대화된 존재로 나타나 있었다. 그같이 신격화되고 절대화된 부처님에게 귀의해서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교단을 지켜 나가려는 것이므로, 상당한 결의(決意)가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가자의 입장이 강조된다.
이리하여, 출가자 우위라 해도, 그것은 출가자에 대하여 출가자로서의 자각을 재촉함과 동시 한편으로 교단을 지키는 재가신자에 대해서도 출가자를 보호하여 출가자의 실천, 수행을 도우면서, 그들 재가신자도 출가자와 동일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출가자 우위라 해서 출가자만이 위대하며, 또 깨달음의 경지에도 출가자만이 이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단을 지킨다는 것은, 부처님의 교법 대로 실천한다는 의미에서는 출가자가 우위이어야 한다.
그러나, 출가자를 그같은 우위에 있게 하는 지지자들은 누군가하면 일반 재가 불교신자여야 한다. 그들 신자는 출가자와 동일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요컨대 출가자는 출가자로 생활하고 재가신자는 재가신자로 일상생활을 하면서, 생활하는 분야는 다를지언정 양자는 똑같은 긍극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밀린다왕문경 은 역설한다.
그러면 이러한 설법을 정면으로 펴고 있는 문헌이 또 있을까? 보통 출가자만의 일을 말하고, 아무쪼록 재가신자는 출가자에게 보시를 올려 예배 공양만 하면 된다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 성전은 출가자 우위를 표면에 내세우면서, 재가신자와 출가수행자가 궁극목적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인도 상좌부(上座部) 불교교단이 세존이 입멸한 후 교단으로서, 어떻게 석존의 불교를 지키고 후세에 전할 것인가 라는, 영법구주(令法久住)이 높은 이념과 비원(悲願)을 들고 있다. 밀린다왕문경을 편찬한 불교학자가 누군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학자에 의해 승·속(僧·俗) 공통의 원이란 것이 증광 부과된 부분 안에서 분명히 칭송받고 있는 것이다.
제 2의 특색으로, 당시 불교교단 안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던 중요한 테마, 이를테면 심리론(心理論), 선악업보론(善惡業報論), 윤회론(輪廻論), 해탈 열반론(解脫·涅槃論), 수도론(修道論), 아라한론(阿羅漢論), 불신론(佛身論), 재가자론(在家者論)등이 이 대론을 통해 모두 논급되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이 성전을 읽으므로서, 서기 전후에 있어 불교교단의 관심사가 일괄해 표시되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런데, 북전불교(北傳佛敎)의 아비달마(阿毘達磨)등 논서에서는 위의 심리론이나 수도론 같은 의론(議論)이 아주 난해하게 되어 있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성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 논서(論書)가 한역이라는 이유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본서의 대론에서는, 날카로운 질문과 교묘한 해답에 의해 아주 선명하게 문제점이 해명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우리들은 적어도 아비달마의 아주 귀찮은 논서를 읽느니보다 밀린다 왕과 나아가세나 장로의 대론서를 읽는 것이 훨씬 손쉽다.
11. 우리들의 의문을 소중히 하자
우리는 어릴적부터 서구적인 교양을 몸에 익혀 왔으므로, 그리이스인왕의 질문이 실은 우리들 자신의 질문인 것처럼 생각되는 점이 아주 많다.
이를테면,석존은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러 부처가 되었다. 일반 수행자도 석존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으면 아라한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아라한이라던가 부처님이라 불리는 분들은, 심신이 다 같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걸림(障碍)이 없는 궁극의 경지를 지니고 있으므로 범인(凡人)들처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나 상해에서 오는 고통은 없을 것이라고, 밀린다 왕은 솔직하게 질문하고 있다. 이는 우리들도 보통 생각하는 것이다. 신격화되고 절대화된 석존에 대하여, 그리이스인왕은 석존도 원래 인간이 아닌가하는 의식에서, 당시 교단인이 갖고 있는 불타관에 예리한 메스를 대어 의문점을 해명해 가려고 하는 것이다.
거기서 나아가세나 장로는 왕의 질문에 대해, 당시 교단 안에서 설해지고 있던 해석, 설명을 끌어내온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도저히 통하지 않으므로, 밀린다대왕이 이해할 수 있는 해답에 대하여 아주 고심한다. 우리는 장로가 고심하는 모습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불교인들은 일반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고도 조금도 고심할 줄 모른다. 고심은 커녕 도리어 빠져 나갈 길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옛날 불교학에서는 이 빠져 나가는 길을 회통(會通)이라 했다. 또, 그런 것은 경전에 없다는 등으로 피해버린다. 실은 그들의 소박한 질문이 기본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을터이므로, 불교인들은 상대방의 질문을 자기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와 함께 해답해 가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 불교의 실천적 성격이 있는 것이다.
옛날 조사(祖師)들은 모두 그렇게 노력해 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인들은 선인들이 남긴 문헌에만 의지하여 자기 자신의 해답을 얻는 데 마음 쓰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역시 불교는 그 시대의 산 현실(現實)에 대한 해답을 항상 지녀야 한다. 그 해답들의 집적(集積)이 불교문헌이 되어 불교를 살아 있게 해 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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