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믿고 사랑한 ‘체 게바라’
최 화 웅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이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6월. 영화의 전당에서는 칸영화제사상 최연소 수상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연출한 ‘체 게바라’ 1부 아르헨티나(쿠바 혁명 전쟁의 기억)와 2부 게릴라(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가 함께 개봉했다. 혁명이 휩쓸고 간 쿠바, 멕시코, 볼리비아를 비롯한 중남미에서 7년에 걸쳐 체 게바라의 지인을 통해 일화를 수집하고 캐릭터를 촘촘히 구상했다. 특히 체 게바라를 통해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고 인간과 정의를 사랑하는 시대정신을 추적했다. 러닝타임 4시간이 넘는(1부 126분, 2부 127분) 2편의 영화로 ’체 게바라‘의 혁명기(革命記)를 통해 주연배우 베니시오 델 토로는 제61회 칸영화제에서 영예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개봉되기까지는 11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림에 애태웠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난 60년대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에 대한 보도를 접하면서 관찰한 그를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어려움 없는 엘리트 지식인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인간의 정의와 진실을 위해 험난한 혁명의 길에 나선 체 게바라는 혁명의 성공에 머물지 않고 끝까지 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향한 투쟁에 목숨을 걸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자본가들의 ‘부의 독점’과 미 제국주의의 횡포를 통렬히 비판하고 ‘혁명이 곧 사랑’임을 선포했다.
‘체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두 살 때 발병한 천식이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로 ‘체 게바라’는 애칭이자 별명이다. 평전에 따르면 체(Che)의 뜻은 이탈리아어 "케 코사 체(Che cosa c'è, 무슨 일이냐?)"라는 뜻으로 이민선을 타고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주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 'c'è'를 '체(Che)'로 바꿔 쓰고 발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체'는 '나' 또는 '나로서는'라는 뜻이기도 하다. 게바라는 과테말라에서 운명적인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동지들로부터 'Che'라는 애칭을 얻었다. ‘Che'는 이탈리아어로 ‘단짝’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는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정복과 지배가 잉태한 빈부의 격차와 폭동이 소용돌이친 콜롬비아와 페루 등지를 여행하면서 병들고 가난에 찌든 인디오 원주민들이 당시 유럽 가톨릭 국가들의 선교를 빙자한 침략 과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체 게바라는 그러한 역사적 비극에 공부하면서 페루의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는 한때 마야와 잉카문명에 빠져 과테말라에 머물면서 미CIA의 반혁명 대리공작을 목격하고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과테말라 사회주의 정권이 망한 1954년 맥시코로 옮긴 그는 맑시스트 가디아(Hilda Gudea)와 카스트로의 조직원 로페즈(Nico Lopez)와 만나 그곳에 망명 중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조직에 가담함으로써 게릴라 조직의 밀고와 배신, 험난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인간과 정의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게릴라 활동 중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체 게바라를 생각하면 살아 있는 성인 중에 성인을 만난 듯 하고 동학혁명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과 의열단 단장으로 무장 항일 독립혁명에 헌신한 약산 김원봉의 민족정기를 소환하게 된다. 그 만큼 체 게바라는 순수한 이상을 불태웠는지 모른다. 영화 ‘체 게바라, 1부 아르헨티나’는 그의 저서 ‘쿠바 혁명 전쟁의 기억’을 기초로 삼았다.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에서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에 침투한 82명의 게릴라는 12월 2일 쿠바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들은 상륙과정에서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 공격으로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체포되고 열두 명만이 살아남는다. 1958년 12월 28일 게바라 사령관이 이끄는 한 무리의 혁명군은 수도 아바나로부터 280km 떨어진 산타클라라에 주둔하고 있던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을 총공격한다. 그 다음날 무장열차편으로 이동하던 정부군 지원부대를 기습하여 궁지에 몰아넣는다. 결국 산타클라라를 혁명군이 장악하고 쿠바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바티스타에게 “더 이상 당신을 도울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날리고 바티스타는 마침내 망명길에 오른다. 혁명군은 그 곳을 기점으로 바티스타 정권에 시달려온 민중을 해방시켜 열렬한 호응과 지지를 받으며 2년 뒤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혁명을 완성시키게 된다.
1959년 쿠바 혁명에 성공한 체 게바라는 1964년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며 새로운 혁명의 길에 나선다. 그때 체 게바라는 ‘Hasta la victoria siempre’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 말은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라는 뜻이다. 혁명은 끝이 없고, 영원한 승리를 위해 투쟁할 뿐이라는 다짐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영화 체 게바라 1부 마지막 부분에서 혁명에 성공한 게릴라 주력부대가 아바나로 가는 도로에서 정부군의 고급 오픈카를 빼앗아 타고 달리는 한 무리의 군인들을 멈춰 세운다. 그리고는 “독재 정권의 유산을 훔쳐 타느니 걸어가라.”고 단호히 명령한다. 영화 속에서 체 게바라는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한 뒤 서슴없이 “혁명은 이제 시작”이라고 외치고 혁명 정부의 장관과 중앙은행 총제 자리를 박찬다. 그로부터 8년 11개월 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게릴라활동(1966년 11월-1967년 10월)에서 끝내 산화한다. 볼리비아 게릴라 시절 체 게바라는 현지 주민들을 만나면, 반드시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사고 병을 치료하며 어려운 일을 도우려 했다. 그만큼 현지인을 존중하며 보호하려고 애썼다. 체 게바라는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 잘 권리가 없다.”고 스페인 독립전쟁 때 외친 쿠바 혁명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의 혁명정신을 이어받았으리라.
영화 ‘체게바라’ 1부 ‘아르헨티나’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및 다른 혁명가들이 카리브 해의 작은 섬에 상륙한 때로부터 바티스타정권을 전복시키는 과정을 소개했고 2부 ‘게릴라’에서는 쿠바 혁명 이후 브라질,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국경을 이룬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전개한 게릴라활동을 추적했다. 그는 1964년 뉴욕의 국제 연합 본부에서 쿠바의 실상을 알리며 단호한 어조로 미 제국주의를 비판하느데 한 치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는 혁명의 주체가 인민임을 역설했다. 손발이 묶인 채 숨을 거둔 마지막 모습에서 보듯 혁명가, 군인, 의사로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의지으로부터 투쟁에 어려움을 겪는 인간적인 모습까지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와 60년대, 쿠바와 볼리비아 계층 간의 삶을 살피며 가난한 민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체 게바라의 굳은 신념을 낱낱이 표현하여 공감을 형성했다. 1967년 10월 7일 체 게바라는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되어 라 기에라의 작은 학교 교실에 갇혀 사경을 헤맬 때 “신을 믿느냐?”는 심문에 단호하게 “인간을 믿고 사랑할 뿐”이라고 대답한다. 체 게바라를 향해 총성이 울린 그곳에는 이미 미CIA 요원이 볼리비아 장교들과 헬기를 타고와 있었다. 이 영화는 미국의 대중영화 감독인 소더버그가 연출한 영화임에도 단돈 한 푼의 미국 자본이 투입되거나 배급 계약 없이 만들어졌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객석에서는 어떤 미동도 없었다.
첫댓글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내용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를 세 편을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