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전연명의료서 카드를 받고 보니 마음이 담담해 지지만 후회보다는 잘했다는 마음이 앞선다.
*. 나의 납골묘(納骨墓) 이야기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매장(埋葬)하거나, 화장(火葬) 하거나, 자연장(自然葬)을 하게 된다. 시신(屍身) 중에는 임신 4개월 이후에 죽은 태아를 포함한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
염(殮)을 한 시신은 관(棺)에 모시고 장지(葬地)에 가서는 관(棺)체 묻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가문에서는 탈관(脫棺)하여 염한 시신(屍身)만을 묻는 전통이 있다.
관(棺)은 나무로 만든 것이어서 아주 고급이 아닌 경우에는 나무 속에 벌레가 있어 시신을 손상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화장을 하면 남는 분골(粉骨)을 수습하여 유골함(遺骨函)에 담는데 병원 영안실에서는 시립 화장장과는 달리 그 유골함 가격이 10만원 대에서부터 기백 만원까지 다양하다.
그 유골함을 장지에서 석조로 만든 커다란 멋진 석조 구조에 넣는 것을 납골당(納骨堂)이라 하고, 국군 묘지 같은 형태 봉분의 무덤에 몇 등분하여 유골 여럿을 모시는 것을 납골묘(納骨墓)라 한다.
우리 조부모 묘는 충남 논산(論山)에 있고, 우리 부모 묘는 충남 대덕군
(大德郡)에 있어서 성묘를 할 때 부모를 먼저 하고 조부모 성묘를 생략하는 경우가 있어 가슴 아파 하였는데 우리 형제들이 마음을 모아 3년 전에 이장하여 종중묘(宗中墓)에 모시는 김에 우리 형제 내외의 유골함도 여기에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 이장(移葬)은 내가 나이 산수(傘壽) 넘도록 평생에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라고 자부하며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다.
내가 죽어서 갈 곳을 알게 된 것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종중묘(宗中墓)이니 영원히 지속될 것이고 내 죽은 후에도 우리 조카네나, 내 자식들을 불러 모아 조부모, 부모님 묘소를 한 동안이나마 외롭지 않게 해드리겠구나 하는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를 지하 2층으로 만들면 나의 현손(玄孫) 이상까지 함께 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자연장(自然葬)이란 화장한 유골의 골분(骨粉)을 수목· 화초· 잔디 밑이나 가족의 묘 등의 주변에 묻거나 뿌리는 것을 말한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3호 및 제13호)
자연장 중에 대표적인 것이 수목장(樹木葬)이다. 한 그루당 2위~10위 까지 빙빙 돌아서 안치할 수 있어서 비용이 더 들더라도 추후 일종의 가족묘로 이용할 수도 있어 경제적이니 관심을 가질만 하다.
최근에는 바다장이 늘고 있다. 그 동안은 강이나 바다에 뿌리는 것이 불법이라고도 하였지만 작년부터인가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서 국토부(國土部)가 바다장은 하자(瑕疵)가 없다고 법적으로 유권해석하여 주며 오히려 바다장을 나라에서 장려하는 입장이 되었다. 물론 양어장 등의 부근은 금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중앙일보(中央日報)의 '바다장'에 대한 기사 내용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영종도 사이 바다에선 매일 두세 번 “뿌우, 뿌우, 뿌.” 하는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길게 두 번, 짧게 한 번 소리가 나는 것은 고인에게 절을 두 번, 반 절 한 번 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이런 바다장이 10년간 5,944건이나 되었다.
점점 각박해져 가는 사회에서 먼 곳에 묻혀 있는 조상 묘소를 우리를 자식들이 몇 번이나 오랴 해서 고인들도 생전에 선호하는 것이 수목장보다 바다에 유골분을 뿌리는 바다장이 되고 만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전문업체들은 50명이 탈 수 있는 배 한 대를 한 시간 빌리는 데 44만원으로 운영한다 하니 일정한 시한을 두고 하는 봉안 시설(奉安堂0에 맡기면 드는 최소 4~5백만원의 1/10 비용이라서 바다장은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중앙일보)
*. 봉안당(奉安堂) 이야기
금년 설 연휴에 100세를 일기로 나의 장모님이 돌아가시어 우리는 경기도 용미리에 있는 서현공원의 봉안당(奉安堂)에 임시로 모셔놓고 왔다. 유골함을 지하에 묻는 것이 아니라 건물 내의 방에 책꽂이 같이 만들어 놓은 곳에 모시는 곳이 봉안당인데 사람의 키 크기에 위치한 곳이나 양지 바른 곳은 1,00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눈 높이보다 높거나 멀수록 저가였지만 그 것도 모두 500만원 이상이나 되었다.
여유 있는 고인의 가족들 중에는 두 칸으로 터서 고인이 평소에 쓰던 안경이나 핸드폰이나 고인의 생전의 사진 등을 전시해 놓은 곳도 있었다.
*. ilman의 죽을 준비
나는 공무원 연급수급자라서 자연스레 노후를 준비하고 살게 된 편이어서, 나는 물론 내 죽은 후에도 아내의 생활을 책임지고 가게 되었으니 경제적으로도 완벽히 노후를 준비한 행복한 사람이다.
거기에다가 흙수저로 태어나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젊음을 불태우며 저축하고 살아서, 투기(投機)로 부자는 못 되었어도 아내나 내가 병들거나 죽어도 자식에게 큰 짐이 되지 않을 만한 최소한의 경제적 준비를 하여 놓았고, 우리 아버지의 유산인 건강한 몸은 83세를 살면서 현재 아픈 곳이 하나도 없으니 나는 얼마나 축복 받은 인생인가.
한 가지 걱정은 여행작가가 되어서 '한국의 국립공원 산행기'와 '한국도립공원'에 이어 마지막 작품집이 될 '한국해양공원 섬이야기'를 후세에 남기고 가겠단 욕심으로 출간을 꿈꾸며 섬 여행을 다니고 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무릎에 이상이 오고 의사가 여행을 만류하고 있는 것이다.
흙수저로 태어나서도
배울 만큼 배웠고,
살만큼 벌면서
마실만큼 마시며
여행작가란 이름으로
국내외를 다닐 만큼 다녀
한(恨)없는 인생을
첫댓글 "사전연명의향서 등록증"이란 처음 접하는 것이고.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습니다. 글의 내용을 읽어보아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아뭏든 시대를 앞서 가는 일만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