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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도전하고 실패하라, 끝내 이기리라^^
-이데일리(12/31)-
^^안익태가 친일파니 애국가 바꾸자?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마이뉴스(1/2)-
[주장] 안익태 개인소유물 아닌 애국가.. 민중과 함께했던 시간 주목해야
"변화된 시대정신이 담기고, 부르면 부를수록 우리 국민의 애국심과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국가(國歌) 제정'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광복회가 조성해 나가겠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2021년 새해 신년사 중 일부다.
새 애국가 제정에 대한 의지를 피력함과 동시에 김 회장은
"표절과 친일·친나치 행위로 얼룩진 애국가 작곡가(안익태)에 대한 역사적 심판"도 이뤄내겠다고 천명했다.
이에 발맞춰 지난해 12월에는 25개 독립운동가 선양단체로 구성된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회장 함세웅) 역시
"애국가 작곡가로 알려진 안익태가 일제강점기 친일에 부역한 행적이 밝혀지고 있다"라면서
서훈 박탈을 주장해 김 회장의 행보에 힘이 실리고 있는 모양새다.
안익태가 작곡한 현행 애국가를 폐지하고자 하는 김 회장의 의지는 강력하다.
김 회장은 지나해 8월에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에서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 뿐"이라며 성토했었다.
역사인식은 동의한다, 하지만
"친일 미청산은 한국 사회의 기저질환"이라며 늦었지만 이제야말로
친일 잔재들을 뿌리뽑겠다는 김 회장의 의지와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당연히 서훈 박탈과 현충원에서의 이장 등 조치들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사 안익태의 그러한 전력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안익태 개인에 대한 '단죄'가 이뤄져야 할지라도,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안익태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대한민국 국가(國歌)로서의 애국가의 가치는 결코 폄훼돼선 안 된다.
애국가는 더 이상 안익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채택하고 광복군이 부르던 노래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한국애국가>(韓國愛國歌) 악보를 보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는 애국가의 유래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처음에는 서양의 명곡(名曲)을 가져다 가사를 붙여 노래하였으나, 그 후 한국 인사들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여겼다.
이에 10년 전 한 한국 청년음악가가 이 새 곡을 만든 것이 곧 한국의 광복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 <한국애국가고사>(韓國愛國歌故事) 중
김구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애국가는 초창기에 우리 곡조가 따로 없어,
서양 민요인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춰 불러야만 했다.
당연히 우리 곡조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1935년 안익태가 애국가의 새 곡조를 작곡하자
해외 한인사회와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적극 수용하려 한 것이다.
1941년 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공보 제69호>에는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라는 의결 사항이 등장한다.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집행위원회(中央執行委員會)로부터
안익태(安益泰)가 작곡한 애국가(愛國歌) 신곡보(新曲譜)의 사용 허가를 요구하였음으로
대한민국 22년(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의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즉 주석 김구를 비롯하여 조완구, 조소앙, 조성환, 박찬익, 이시영, 차리석 등 국무위원들이
모두 배석한 국무회의에서 북미 지역 한인단체의 안익태 곡조 애국가 사용을 공식 허가한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자연스레 안익태 곡조의 노래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1944년 8월 일본군을 탈출한 장준하 등 학병들은
안휘성(安徽省) 푸양(阜陽)에 위치한 한국광복군훈련반(아래 한광반)에 도착했다.
장준하는 이날 저녁에 열린 환영회 당시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작은 질그릇에 들기름을 바르고, 목화 심지에 불을 당겨, 불을 밝힌 것을 등이라 하여 매어놓고,
그 밑에 늘어앉아 식순에 따라 환영회가 진행되었다. 격식대로 대표가 환영회 개최사를 해주었다.
애국가 봉창이 있은 후 몇 동지들의 환영사와 격려사에 이어 우리 모두가 한 사람씩 답사를 했다.
아직도 감격스러운 그 불로하 강변의 애국가가 우리들 귓전에서 맴돌건만 이곳서 부르는 애국가는 그 곡이 달랐다.
우리가 알던 애란의 민요곡이 아니라 지금의 안익태씨 작곡의 곡이었다.
우리는 따라 부르지 못하고 그 경건하고 장엄한 분위기에 고개를 숙였다." - 장준하, <돌베개>, 돌베개, 127~128쪽
1944년 당시 전선의 광복군들이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미 임시정부에서도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채택해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애국가는 해방 전부터 독립운동 진영에서 독립의 의지를 다지며 부르던 민족의 노래였다.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름 모를 조상들의 한(恨)과 희망이 동시에 담긴 역사적인 노래였던 것이다.
해방 후에는 또 어떠한가.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싸우던 전선에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현장에서,
2002년 월드컵 승리의 현장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어깨동무하며 소리 높여 불렀던 노래가 바로 애국가다.
애국가 4절의 가사처럼 그야말로 우리 민족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항상 불렀던 노래인 것이다.
독립군가도 부르지 말아야 하나
대일항쟁기 당시 우리 독립군이 혈전을 다짐하며 불렀던 노래 중에 <용진가>라는 곡이 있다.
(후렴구)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삼천만 번 죽더라도 일본과 싸우겠다는 독립군의 결기가 담긴 이 노래는
사실 1908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하이카라부시>(ハイカラ節)라는 노래의 곡조를 차용한 것이었다.
<용진가>뿐만이 아니다. 그 시절 불리던 독립군가들이 대개 그랬다.
일제 침략의 상징곡으로 국내에서는 금기시되는 <군함행진곡>(軍艦行進曲)의 경우도
김좌진 장군이 해당 곡조에 가사만 바꿔 <승리 행진곡>이라는 독립군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목숨 걸고 독립운동 하던 와중에 노래까지 작곡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독립군들은 일본 노래라 하여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곡조를 차용하고 개사해서 역으로
일본을 무찌르자는 의지를 담은 독립군가로 재탄생시키는 재치를 보여줬다.
만약 애국가 작곡가의 친일 전력이 문제가 돼 애국가를 폐지해야 한다면,
일본 군가를 개사해서 만든 독립군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따라서 폐지해야 마땅한가?
친일 청산은 아무리 늦었어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민족적 숙원이고 과업이다.
그러나 친일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보전 가치가 있는 유산마저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전력보다도, 애국가가 굴곡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민중과 함께했던 그 시간에 주목해 그 가치를 다시 판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내가 안익태에 대한 단죄와는 별개로 애국가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박원호, 「1945년 重慶임시정부 발행 '한국애국가'의 현대적 의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전두환이 건넨 2억원 거부... 제대로 당했다^^
5·16 쿠데타 때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처럼
1979년 12·12 당시의 정승화 참모총장도 군사정변의 희생양이 됐다.
장도영은 쿠데타를 사전에 인지하고도 방관하다가
쿠데타 정권의 얼굴마담이 된 뒤 숙청된 데 반해,
정승화는 미리 알아채지 못했고 쿠데타와 동시에 곧바로 연행됐다.
정승화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전혀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0·26 사태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게 된
전두환의 월권행위를 정승화 역시 예사롭지 않게 바라봤다.
정승화 vs. 전두환
정승화는 4년제 정규 과정 출신인 육사 11기 이하보다는
10기까지의 비정규 육사 출신을 중용하는 방법으로 전두환을 견제했다.
또 전두환 개인에게 인사 불이익을 줄 계획도 세웠다.
전두환이 다급해진 데는 이런 요인도 작용했다.
1995년 12월 22일자 <중앙일보> 기사
'전두환·노태우씨 12·12 관련 검찰 공소장 요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79년 11월 중순께 단행된 군 인사에서 비정규 육사 출신들이 군 요직에 배치되고
정규 육사 출신의 하나회 장교들이 배제되자 자신들의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갖게 되고,
12월 초순께 전두환이 잦은 월권행위와 군 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으로
한직으로 인사 조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정승화 총장이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피고인 전두환의 인사 조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자,
피고인들은 전두환에 대한 인사 조치를 차단하고
하나회 소속 장교들의 군내 입지를 보전하기 위해선
군의 주도권 장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후략)"
정승화는 비정규 육사인 육사 5기 출신이다.
항일투쟁인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1929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한 정승화는
상업학교를 거쳐 1947년 7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제5기로 입학하고 이듬해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훗날 육사 5기는 육사 8기와 더불어 5·16 쿠데타의 핵심 세력이 됐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 KCIA 남산의 부장들 >은
"박정희 소장은 육사 8기생들의 '계획'과 '5기생들의 병력 동원'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다"고 정리한다.
육사 5기 정승화는 만 21세 때 한국전쟁에서 크고 작은 전공들을 세웠다.
그 뒤 미국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유학하고 1956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서른두 살인 1961년 5·16 때는 12사단 부사단장으로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해 8월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방첩부대장, 제1야전군 참모장,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제3군단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1978년 5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문제의 1979년에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 이때가 그해 2월이다.
10·26 사태로 계엄사령관을 겸하게 된 그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약했기 때문에 10·26 정국 하의 실질적 1인자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는 10·26 당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초청으로 궁정동 안가 식당에 대기하고 있었다.
거기서 사태를 접했기 때문에 김재규와의 연루 혐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수사 책임자인 전두환과 충돌할 가능성을 가진 상태에서 계엄사령관 직을 수행해야 했다.
정승화에게 건넨 2억 원
그런 속에서도 전두환은 정승화와 친해지려고 시도했다.
수사 중 취득한 청와대 금고 9억 원 중 1억은 합수부 수사비로 남겨두고
6억은 박근혜에게 준 뒤 나머지 2억을 '총장님 쓰시라'며 정승화에게 들고 간 것이다.
당황한 정승화는 돈을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비서실장을 통해 은행에 예치했다.
전두환이 선심을 썼지만, 정승화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밀어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인사 조치로 전두환을 꺾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인 12월 12일 밤 '전두환 군대'가
한남동에 들이닥쳤고, 정승화는 평생 잊지 못할 수모를 겪게 됐다.
그가 수모를 당한 것은 권력을 향한 전두환의 움직임이 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전두환의 거사를 사전에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전두환이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쿠데타군에 끌려간 뒤에도 자신이 쿠데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두환 때문에 자신이 끌려왔으리라고는,
지금쯤 전두환이 실질적 1인자가 돼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수감돼 있는 동안 김재규가 없는 말을 지어내 자신을 모함한 게 아닐까,
전두환이 수사 실적을 세우려고 최규하에게 허위 보고를 한 게 아닐까,
최규하가 뭔가 오해하는 게 아닐까 등등의 생각을 했을 뿐이다.
회고록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서
그는 붙들려 있는 동안에 자신이 했던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처음엔 나도 모르는 사실을, 김재규가 자신이 살기 위하여
나를 끌고 들어가는 어떠한 공모 주장을 하기 때문에
합수본부 측에서 이를 근거로 최 대통령에게 은밀히 보고한 뒤 조사 재가를 받아
저희들 공로로 만들기 위해 수단을 안 가리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노재현 국방장관이 손을 놓고 방관할 리는 없을 터이니
곧 사실이 밝혀지겠지 하고 생각했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데는 정승화의 낙관적 시국관도 작용했다.
쿠데타 같은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
참모총장인 자신의 위상에 대한 믿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의 순수성과 애국심을 믿고 있었다.
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도전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터였다.
내가 부하들에 의해서 체포·구금된다는 것은 더구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군인의 순수성, 군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신임 등으로 스스로 판단컨대
내가 원하지 않는 한(은) 군이 정권에 도전하는 쿠데타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과 18년 전에 쿠데타 성공 사례가 있었고 그 뒤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고
자신도 5·16에 힘입어 승승장구했지만, 정승화는 자기 밑의 전두환이
자신을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데는 전두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업신여김'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2억 원을 들고 온 전두환을
'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 정도로 이해했다.
그는 "나로서는 이러한 것을 바로잡도록 교육하는 것도
군인 생활의 주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고 말한다.
전두환을 도덕적으로 바로잡을 대상 정도로 가벼이 생각한 것이다.
다른 금고도 아니고 상관의 금고를 건드린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은 것이다.
전두환 업신여겼다가
정승화가 전두환을 소홀히 대한 데는 또 다른 요인도 작용했다.
계엄사령관인 그는 전두환 같은 소장파 장군들보다는 정치권의 3김씨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정승화는 유신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따르면, 그는 1979년 11월 24일 육군 지휘관 회의 때도
'박 대통령 서거로 유신의 존립 근거는 없어졌으니
이제는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유신체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가진 또 다른 소신은 '3김씨 역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김영삼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고,
양김에다가 김종필까지 더해 3김이 향후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회고록에서 정승화는 '김대중은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그가 국민 앞에 내세우는 이상은 그럴 듯했지만,
실제로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만 담아두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1979년 11월 26일에는 언론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김대중은 사상이 불투명하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김대중에 대한 기사 쓰기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계엄사령관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영역에 사실상 발을 내디딘 것이다.
정승화는 크게 보면 아군인 김종필에 대해서도 반감이 있었다.
김종필은 육사 8기였다. 박정희는 이들 8기를 이용해
5기를 견제하고, 11기 이하를 이용해 8기를 견제했다.
그래서 5기와 8기 사이에는 마음의 거리가 있었다.
거기다가 정승화는 박정희가 김종필을 소외시키는 것을 보면서 승승장구했다.
박 정권 내에서 정승화가 차지한 기반은 김종필에 대한 견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승화의 눈에는 양김(김대중·김영삼)이 아닌 3김이(김대중·김영삼·김종필) 다 불편한 존재였다.
정승화는 '유신을 극복하되 3김은 안 된다'는 정세 인식을 갖고 10·26 이후에 대처했다.
"군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신임 등으로 스스로 판단컨대"
자신에 대한 군부의 도전이 없을 거라 기대한 그는 3김 견제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법리에도 둔하고 탐욕스럽고 주제넘은'
전두환 같은 '소인배'가 들어올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 소인배는 도덕적으로 바로잡거나 인사 조치로 내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소인배 같은 전두환보다는 지도자급인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움직임이
정승화에게 더 중요했다는 점은, 전두환이 옛 주군의 금고를 훔치는 선에 머물지 않고
아예 세상을 통째로 훔칠 가능성에 대해 정승화가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정승화는 3김을 라이벌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진짜 라이벌은 3김이 아니라 1전(全)이었다.
라이벌을 잘못 설정한 것이 정승화의 파국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ㅡ전두환12.12 쿠테타 와 이방원1.2차 왕자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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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전두환에 의해 12.12 쿠데타가 일어난지 딱 41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41년 전 오늘 바로 이 시간 새벽 네시 쯤,
아마 전두환은 총리공관에서 마지막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은 바로 전날 (12.12저녁 7시 쯤)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를 불법으로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당 우두머리 전두환은 총리공관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12.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대통령으로 뽑혔으나 아직 정식취임은 안 한 상태)의 재가를 받기위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의 감금 상태로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규하는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승인이 나지 않는 한
재가를 못 하겠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은 당시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행태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곤일척 위기 시 가장 책임있는 리더가
왜이리 한심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지 참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회는 반란 초기에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최규하를 구금하다시피 했고,
참모총장인 정승화는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당시 상황에서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동원해 반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노재현 국방장관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반란군도 반란을 진압하려던 장군들도 노재현의 행방을 찾고자 했고,
최대한 자의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한 장태완 사령관을
육군본부 측에서 말릴 때도 이유가 "국방부 장관이 있어야 된다."였습니다.
하지만 국방장관 공관에 있던 노재현은 인근의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지 확인조차 안 한채 가족들과 도망가버려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노재현 국장방관의 구체적인 도망 행적을 보면,
먼저 근처 단국대학교 교내로 가족과 함께 피신했다가
부하의 집에 가족을 맡긴 뒤 육본 B-2 벙커로 가서 상황을 보고받은 뒤
다시 미 육군 제8군 영내에있는 한미연합군사령부로 피신했다가
국방부의 장관집무실로 갔는데 이때 국방부로 쳐들어온 반란군에게 체포당합니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예비역 육군 대장에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모두 거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총소리에 놀라서, 근무지인 국방부 청사로 복귀한 것도 아니라 단순히 도망을 간 것입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정승화 체포가 법적으로 위법한 행동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에 있었으므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는
전두환의 직속 상관이 되기 때문에 지휘체계상 전두환이 함부로 체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계엄사령관보다 위에 있는 것은 국방장관과 대통령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의 허가를 받아야만 계엄사령관 겸 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체포가 합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도망다니다 스스로 붙잡힌 노재현은 눈치껏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고,
최규하에게 "옳지는 않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고
군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 서명을 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재판 당시 노재현은 이러한 이유를 변명이랍시고 자기 입으로 말했습니다.
결국 최규하는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재가 서명을 했는데,
다만 이때 동의안 표지에 재가 날짜와 시간을 적었습니다.
이렇게 작전 개시 약 10시간 만에 전두환과 하나회일당에 의한 12.12 군사쿠데타는 성공을 합니다.
41년 전 바로 오늘, 딱 이 시간 때 쯤 입니다.
바로 그 이전에 있었던 특전사 9여단, 장경완 수경사, 정병주 특전사령관,
노태우 9사단 등 긴박한 상황은 잘 알려져 있기에 생략합니다.
내 나이 스무살 때 일어난 사태로 기억은 납니다만
그 당시는 이 날이 역사적으로 그리 큰 사건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들이 잠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나라 역사는 큰 획을 긋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일반 국민들은 그저 13일 아침 뉴스에 12일 저녁,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가
김재규 박정희 시해사건과 관련되어 있어 체포 되었다고만 나왔고 그렇게 알았습니다.
12.12 그 날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한 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12.12쿠데타가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었지만
당시 우리들에게는 다른 날과 전혀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쿠데타였다는 생각조차도 못 했습니다.
역사적 큰 사건과 동시대에 살고 있었어도 일반 국민들은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 일 것입니다.
12.12 쿠데타 41주년을 맞이하여 전에 올린 글이지만 다시 한 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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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1, 2차 왕자의 난과 전두환 일당 12.12와 5.17 쿠데타!'
진행 과정이 거의 똑 같습니다.
전두환 신군부 일당은 이방원 쿠데타를 벤치마킹해서
10.26직후 부터 모든 것을 기획 해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중 광주항쟁을 그 들 권력찬탈을 위한 마지막 화룡점정으로 기획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이방원과 전두화 쿠데타 속으로 깊이 들어 가 봅니다.
600년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역사적 사건이 너무나 비슷하게 진행된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전두환 12.12, 5.17 쿠테타는 현 대한민국 법정에서 쿠데타와 내란 죄로 이미 판결 되었습니다.
600년 전, 이방원의 1, 2차 왕자 난도 지금 우리 시각으로 보면 분명한 쿠데타입니다.
12.12 당시 전두환 일당 중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600년 전 이방원의 1,2차 왕자의 난을 완벽하게 재현 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 는 너무 멋진(?) 말도
당시 이 쿠데타를 수사하던 검찰이 만들어 냈습니다.
당시 많은 국민들이 그 수사 결과 발표에 엄청 속이 상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과 비교하면서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저의 역사 글에도 현실정치와 비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사실 저의 역사 글이 개혁성이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쓰는 편이라
현실정치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 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만 이 글들을 보아 주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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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성공한 쿠데타는 꽤 된다.
그 성공한 쿠데타를 살펴보면 대부분 쿠데타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하다고 생각되는 쪽이
불시의 기습으로 성공하고 그리고 쿠데타 성공이후 전개 과정이 너무 비슷하다.
그 중 우리나라 역사상 전개 과정이 가장 닯은 두 쿠데타가 있다.
바로 조선건국 직후발생한 '제1.2차 왕자의 난'과
600년이 지난 후 대한민국 '전두환일당 신군부에 의한 12.12, 5.17쿠데타'이다.
이 두 쿠데타를 비교해보면서 이방원 제1,2차 왕자의 난과
전두환의 일당 12.12, 5.17 쿠데타 를 자세히 살펴 보자!
먼저 이 두 쿠데타의 주인공인 이방원, 전두환 둘 다
한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방원은 이성계와 정도전이 위화도회군 이후 역성혁명을 계획할 때 부터 직접 참여했기에
어렴풋이 왕을 꿈꾸었을지는 모르지만 방원 위로 4명의 형이 있었기에 엄두 내기는 힘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생각지도 않게 장형인 이방우가 고려신하로서 조선 세자가 싫다며 낙향하고
그 뒤 소주만을 마시며 한탄하다가 1년만에 죽는다. 이에 이방원은 왕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방원 위로는 3명의 형, 아래로는 배다른 두 동생과 그 친모인 계비 강씨,
그리고 무엇보다도 넘기 힘든 당시 거의 모든 군권과 실권을 가진 정도전이 버티고 있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총애를 받아 보안사령관에 올랐지만 그 당시까지도 최고권력자는 꿈도 꾸지 못했다.
당시는 박정희대통령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여권에는 차지철, 김재규, 김종필등
쟁쟁한 인물이 버티고 있었고 야권에는 김대중 김영삼이 있었다.
그런데 경천동지할 10.26이 터져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차지철이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10.26사태는 당시 3대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와 청왕대 경호실,
국군보안사령부 중 보안사령부만 남기고 두 곳은 와해 되어 버리다 시피 했다.
당시 대통령시해범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수사권을 가진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모든 정보 힘이 실리면서 느닷없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방원은 방석이 세자가 되고도 6년 동안은 숨 죽이고 살아야 했다.
방원도 어느 정도 사병을 가지고 있었고 현존 왕의 친아들이자 개국공신이라는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도전 일파가 마음만 먹으면
이방원을 역모로 몰아 쉽게 죽일 수도 있었다. 당시 정도전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방원을 너무 경시했다. 이방원의 야망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방원을 살려두어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또 자신을 친 삼촌처럼 따랐던 현존 왕 친아들인
이방원 목숨까지 빼앗는 일은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10.26직후 군권은 명목적으로 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과 계엄사령관 정승화에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최규화와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럴만한 힘도 있었다.
전두환이 당시 정보는 장악하고 있었지만 실질적 군권 장악은 정승화에 있었다.
특히 정승화는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보다
훨씬 더 큰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정승화가 전두환처럼 정권에 욕심을 냈다면 정승화 시대가 열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600년전 정도전이 이방원을 경시 했듯이 정승화도 전두환을 아주 경시했다.
또한 군인정신에 충실했던 정승화의 낙관적 시국관도 작용했다.
쿠데타 같은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
참모총장인 자신의 위상에 대한 믿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정승화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의 순수성과 애국심을 믿고 있었다.
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도전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터였다.
내가 부하들에 의해서 체포·구금된다는 것은 더구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군인의 순수성, 군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신임 등으로 스스로 판단컨대
내가 원하지 않는 한(은) 군이 정권에 도전하는 쿠데타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승화 눈에는 '법리에도 둔하고 탐욕스럽고 주제넘은' 전두환 같은 '소인배'가 들어올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 소인배는 도덕적으로 바로잡거나 인사 조치로 내쫓을 수 있다는 게 정승화 생각이었다.
군권을 장악한 정도전은 명나라의 심한 간섭과
자신을 압송하라는 명의 요구에 화가 나 요동정벌을 주장한다.
태조 이성계로 부터 요동정벌을 허락받은 정도전은
그 명목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을 장악해 나가려 한다.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여러 의미가 있었지만 왕자들의 사병,
특히 이방원의 사병을 혁파하여 그들의 손발을 잘라 놓으려는 의미가 컸다.
이에 이방원은 배수진을 치고 죽기 살기로 정도전일파를 불시에 기습하여 반격을 가한다.
이방원을 경시하여 별 대비를 하지 않았던 정도전은
이방원 기습 한방에 살해되고 정도전의 꿈도 멀리 날아가 버린다.
전두환도 당시 병력으로 보면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게임이 안 되었다.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으로서 즉시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권에 주둔하고 있는 장태완 수경사사령관과 정병주 공수특전단사령관이 정승화 편이었다.
10.26 수사를 하면서 힘이 생긴 전두환 월권이 심해지자
정승화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동해안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 내릴 준비를 끝마치고 발표만 남겨 놓았다.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전두환과 신군부측이
발표 전날 기습적으로 선수를 쳤다. 바로 12.12 쿠데타이다.
정승화가 전두환을 소홀히 대한 데는 또 다른 요인도 작용했다.
정승화가 군인정신에 충실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시대상황을 읽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승화도 군인으로서만 있지는 않았다. 현실정치에 개입하려 했다.
그런데 정승화 큰 실수는 자기 경쟁자를 군 내부에서 보지 않고 외부에서 찾았다.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정승화는 지나친 자만감으로
전두환 같은 소장파 장군들은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외부세력인 정치권의 3김씨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정승화는 유신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따르면, 그는 1979년 11월 24일 육군 지휘관 회의 때도
'박 대통령 서거로 유신의 존립 근거는 없어졌으니 이제는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유신체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가진 또 다른 소신은 '3김씨 역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김영삼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고,
양김에다가 김종필까지 더해 3김이 향후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는 군부가 앞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도 있다는 쿠데타적인 생각이었다. 정승화도 나름 정권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승화는 이처럼 당시 시국을 정확하게 보지도 못했고 군부의 흐름에도 밝지 못했다.
이방원은 기습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도전과 방석, 방번 이복동생들까지 살해한다.
쿠데타 성공이후 이방원은 실권을 장악했으나 당장 왕이 되지는 않는다.
허수아비 둘째 형 이방과를 왕으로 내세우니 그가 정종이다.
이방원은 '세제'(왕의 동생이 후계자가 되는 것)가 되어 실권을 잡고 뒤에서 모든 일을 처리한다.
전두환도 12.12쿠데타에 성공했지만 당장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자 자리에 앉지는 않는다.
최규하를 명목상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고 실권을 쥐고 뒤에서 모든 것을 조정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거의 대부분 성공한 쿠데타는 이처럼 상대적으로 더 힘을 많이 가진
정적과 비교도 안되는 작은 병력으로 단숨에 기습하여 일거에 성공시킨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박정희의 5.16쿠데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쿠데타의 성공한 이방원과 전두환에게도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이방원은 자기와 성정이 비슷하며 왕에 대한 야망이 있고
사병도 엇 비슷하게 보유하고 있는 네째 형 이방간과 백성들의 여론이었다.
전두환에게는 당시 대통령 후보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과 국민의 여론이었다.
왕의 자리를 찾이하기 위해서 이방원은 어쩔 수 없이 친형 이방간과 전투를 치룬다.
그리고 승리한다. 제 2차 왕자의 난이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드디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 3대 왕 태종이다.
전두환은 5.17 쿠데타로 서울의 봄을 짓밟으며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을 제거하고 5.18광주항쟁을 야기 시킨다.
그리고 광주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르니 제 5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전두환은 무소불위의 대통령이 된다.
어떠한가?
이 두 쿠데타 전개과정이 너무 비슷하지 않는 가?
전두환이 600년 전 이방원의 쿠데타를 면밀히 연구하고 검토하여 벤치마킹 한 것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그만큼 이방원의 쿠데타와 왕위 쟁탈은 600년이 지난 후에도
벤치마킹 할만큼 철두철미한 계획아래 진행된 것이다.
제 1차 왕자의 난 당시 태조 이성계는 병석에 있었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쿠데타의 분노했지만 이미 병권을 빼앗겨 어쩔 수 없었다.
12.12 쿠데타 때 최규하는 전두환일당 신군부에 의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에 대해 결재를 안하고 버텨보지만 열 시간 가지 못했다.
이성계는 방석과 방번을 살려준다는 이방원의 약속을 믿고 쿠데타를 용인한다.
최규하는 뭐 때문이지 모르지만 12.12 쿠데타를 용인하고 대통령 자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방원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방원은 방석과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이 때 방석의 나이 17세였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세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32세의 나이에 처형되자 방석의 후사는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태조이성계는 이방원이 약속과 달리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그리고 사위 흥안군 이제의 죽음에 분노하고 충격을 받아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지내다
1차 왕자의 난 한 달 뒤에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정종이다.
태조이성계는 상왕으로 칭하게 된다.
이방원은 왕을 둘째 형 이방과(이방우 죽음으로 당시는 가장 큰형)에게
잠시 양보해서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어쩔 수없이 난을 일으켰다는 명분을 챙겼다.
그리고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려 했다.
이방원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은 야심이 없다는 것을 신료와 백성들에게 보여주기위한 쇼였다.
고려시대 17살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기도 한 이방원답게 머리를 잘 썼고 기다릴 줄도 알았다.
이방원은 왕에 대한 별 야망없이 착하기만 형 이방과에게 차기 제왕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왕에 대한 야망에서는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방원은 얼마든지 훗 날을 기약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전두환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실권을 장악했으나
최규하를 얼굴마담 대통령으로 꽤 오래동안 대통령직을 하도록 놔 두었다.
그리고 5.17 쿠데타로 광주항쟁을 야기 시키고
그 빌미로 최규하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방원은 정종이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세제가 된다.
그리고 2년 후 정종이 바늘방석에서 스스로 내려와 세제 이방원에게 왕위를 전위하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세종의 친아버지 조선 3대 왕 태종이 되었다.
600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1, 2 차 왕자의 난과 12.12 , 5.17 쿠데타 쌍둥이처럼 너무 닯지 않았는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법으로는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겠지만 역사의 법으로는 얼마든지 처벌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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