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도량
-북한산 우이령, 오봉 석굴암
*월간시 127호(2024. 8)
차용국
산과 숲은 과학이며 상상의 본향本鄕이다. 산림山林은 과학과 상상의 이분법적 갈라치기 따위에 관심이 없다. 산림의 영토에서 과학과 상상은 본디 하나이기에 서로 싸우지 않고 헐뜯지 않아서, 산은 늘 고요하고 숲에는 늘 맑은 평화가 흐른다.
산림의 매력에 빠진 나는 구파발역 1번 출구 앞 버스 정류소에서 704번 버스를 타고 25분 정도 달려가 '우이령ㆍ오봉산석굴 입구' 정류소에서 내렸다. 이곳을 출발해서 우이령牛耳嶺을 넘어 서울로 갈 것이다. 우이령은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난 고개다. 사족을 붙이면, 서쪽의 상장봉 능선과 동쪽의 오봉 능선이 낮은 자세로 내려와 만나는 고개다.
도봉은 북한산에 속한 준봉峻峯이기도 하지만, 그 기세氣勢가 북한산 어느 준봉과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등등騰騰한 도봉의 산세에 부응이라도 하듯, 북한산과 구별하여 도봉산이라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그럴 때 우이령은 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다. 우이령 서쪽을 북한산이라 하고, 동쪽을 도봉산이라고 한다.
원래 우이령은 상장봉과 오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이 소의 귀를 닮아서 '쇠牛귀耳고개嶺'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고개 이름 하나 지으면서도 어쩜 이렇게 놀라운 비유와 상상력을 발휘했는지 거듭 놀랍다. 시력 약한 내 눈에는 소의 귀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지형을 맞추어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찾지 못하여 옛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그냥 따라 부를 뿐이다. 아마 우이령을 오가며 살던 사람들은 다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이거나 소설가였을 듯싶다.
사실 우이령길은 서울 우이동과 양주 장흥면을 오가는 최 단거리 코스다. 총길이라고 해봤자 5킬로미터 정도. 게다가 고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낮고, 더하여 길도 산길치고는 넓은 편이다. 지금은 통제하여 다닐 수 없지만, 우마차는 물론 차량도 다닐 수 있을 만하다. 옛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우마차에 짐을 싣고 서울을 왕래하며 교역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젊은 시절부터 북한산은 내 마음의 도량度量이었다. 나는 북한산 여러 능선에 의탁依託하여 던적스러운 사람 관계를 씻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면서 신세身世를 지곤 했다. 30년이 넘는 적지 않은 세월을 북한산은 한결같이 넉넉한 품으로 어줍은 필부匹夫의 산객山客을 쓰다듬어 주었고, 지금도 여전히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 초로初老의 사내를 내치지 않고 다독여 준다.
북한산 여러 산길 중에서 우이령길은 내가 가장 적게 걸었던 길이다. 대략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우이령길은 오랫동안 통제된 길이었다. 한국전쟁 때 승기勝氣를 잡은 미군은 우이령에 공병대를 투입하여 북진 군사작전 도로로 개수했다. 개설한 우이령길은 군사작전의 폭을 넓혀주는 중요한 선택지가 되었다. 병력과 군수물자를 북한산 서쪽의 무학재나 동쪽의 남양주 별내 쪽으로 우회하지 않고 북송하는 데 유용한 길이었다. 그러나 길은 그 길을 가는 자의 것이어서, 확장된 우이령은 적이 수월하게 쳐들어올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여전히 분단된 내 조국의 서울은 적과 너무 가까웠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절대의 가난과 빈약한 국방력의 한계로 북한산 여러 산길은 통제되었다. 게다가 1968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목을 따서 가겠다며, 북한산 진관사 쪽으로 침입한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인근까지 들이닥쳐 총질하는 사태(1·21 사태)까지 벌어지자, 북한산 여러 노선의 통제 명분은 더욱 굳어진 채 고착화되었다. 우이령길은 그 통제의 중심에 있었다. 지금은 별 효용가치가 없어 해체되었지만, 우이령 마루 옆에는 아직도 그때 설치한 탱크 저지용 콘크리트벽 덩어리 몇 개가 냉전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전시?).
다음으로 오랫동안 통제됐던 우이령길이 2009년 7월 10일 개방되었으나, 1일 1000명(서울 우이동 쪽에서 500명, 양주 장흥면 교현리 쪽에서 500명)으로 제한하는 사전예약제 시행의 여파도 한몫했던 듯싶다. 물론 국립공원 인터넷에 접속해서 사전에 신청하면 되니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번거로워서 자주 다니지는 않은 듯싶다. 지금은 사전예약제도가 약간 완화되어 주말이나 가을철에만 시행한다.
어쨌든 이런 통제 덕분인지, 우이령길은 북한산 어느 산길보다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고 한갓지다. 자연림인 소나무와 참나무, 인공림인 단풍나무, 물오리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며 길 위를 우산처럼 덮어준다. 그래서 우이령길은 여름에 걸어도 찡그리지 않아도 되고 그다지 덥지도 않다. 게다가 길옆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는 맑고 기운차서 지루함이 끼어들 틈이 없다. 우이령길에서는 산봉우리를 향해 돌진하는 무리가 없다. 우이령길은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는 길이다. 우이령길은 흙길이어서 맨발 걷기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우이령길을 걸으며 들려볼 만한 곳이 있다면 석굴암石窟庵이다. 석굴암은 다섯 개의 암봉이 솟아 있는 오봉산 또는 오봉五峰이라 부르는 산마루 아래의 관음봉觀音峰 중턱에 자리 잡은 절이다. 북한산에는 석굴암이 여러 곳 있지만 이곳 석굴이 제일 넓고 큰 것 같다. 지금 석굴암은 나한전을 모신 기도의 도량으로 쓰고 있다.
석굴암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며,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의상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절을 지은 모양이다. 웬만한 고찰에 가면 의상과 원효의 자취가 남아 있다. 북한산만 해도 북한산성 입구 쪽에 의상봉과 원효봉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우뚝 솟아 있다. 불법의 진리는 넓고 화엄華嚴의 오묘함은 끝이 없어서, 고승도 한 군데 앉아서 구도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오봉의 중턱 석굴 암자에서 바라보는 양주의 산야는 출렁이며 포개지는 파도와 같고, 비 갠 하늘로 오르는 운무의 몸짓처럼 은근하다. 아마 의상이 살던 그때도 양주의 산야는 그러했을 듯한데, 내 어찌 천 년 전 고승의 속마음을 알 수 있으랴……
석굴암을 둘러보고 내려와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조금 전 석굴암에서 보았던 두 청년이 다가와 길을 물었다. 몸매가 날렵한 20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손으로 오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저곳으로 가는 길 아십니까?”
“이곳에서 바로 올라가는 길은 없어요.”
나는 그들과 오봉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우이령길은 통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다른 등산로와 연결된 샛길이 없다. 그래서 오봉은 볼 수는 있어도 갈 수는 없다. 오봉으로 가는 길은 ‘오봉탐방지원센터’를 통해야 한다.
하얀 남방을 입은 청년이 핸드폰 화면을 내게 보여주면서 이 코스를 등산할 계획이라고 한다. 화면을 바라보니 여성봉과 오봉 코스가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마 등산용 앱이거나 포털 사이트에서 서비스하는 지도 같았다.
“어디서 왔어요?”라고 내가 묻자 둘이 동시에 “캄보디아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나는 그들의 출신 국가를 물어본 것이 아니었는데, 그들은 그렇게 알아들은 모양이다. 사실 그들은 한국어가 매우 능숙해서 나는 방금 전까지 그들이 캄보디아 청년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아, 내 말은 지금 여기까지 서울 쪽에서 왔나요, 양주 쪽에서 왔나요?”
나는 핸드폰 화면의 붉은 선 끝부분을 번갈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울 우이동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우이령탐방지원센터’를 나가서 ‘오봉탐방지원센터’로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나도 그 스마트한 글로벌 디지털 청춘들이 오봉능선을 가뿐하게 오르는 모습을 떠올리며 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이령길은 오봉과 함께 걷는 길이다. 사람은 오봉을 바라보며 걷고, 오봉은 제자리에서 사람을 지켜본다. 오봉은 보는 자의 위치에 따라 여러 변형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주 보는 그 적당한 거리의 공간에 채워지는 것은 관조觀照의 자유로움과 새로움이다. 호들갑스럽지 않지만 깊은 고요가 깃들어 있는 안정감 같은.
원래 오봉은 한 덩어리였던 화강암이 오랜 냉각과 팽창으로 몇 개의 조각으로 쪼개진 바위가 풍화하여 둥그런 모양이 되고, 주변의 흙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 꼭대기에 둥근 암석만 드러난 형태다. 이런 산꼭대기 둥근 암석을 지형학 용어로 '토르tor'라고 한다. 토르는 '똑바로 서 있는 석탑'이란 뜻으로 영국의 다트무어지방에 있는 화강암 덩어리를 지칭하던 말이 널리 퍼져서 세계 공통의 지형학 용어가 되었다.
분명 이런 과학적인 언술은 부정할 수 없고 가치 있고 흥미롭다. 그런데, 그 과학의 산물에 더하여 이야기를 그려내는 상상의 언술은 더욱 놀랍다. 오봉의 토르는 감투를 쓰고 있는 모습인데 넷째 오봉에만 감투가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 오봉 자락에 건강하고 부지런한 오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여성을 사모했다. 이를 안 여성의 아버지는 오형제의 힘을 시험하기 위하여 산꼭대기에 가장 큰 바위를 올려놓은 자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다. 사형제는 모두 산꼭대기에 큰 바위를 올려놓았으나 넷째는 힘이 부쳐 바위를 올려놓지 못했다. 그래서 넷째만 여태껏 감투를 쓰지 못하고 있다.
오형제의 힘을 확인한 여성의 아버지는 한 해 두 해 혼사를 미루면서 오형제의 힘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할 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기다림에 지친 여성이 병으로 죽어 여성봉이 되었고, 오형제는 오봉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여성봉과 오봉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여성봉과 오봉 사이의 계곡을 흐르는 물은 넘을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눈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가고, 세상의 파멸을 재촉하는 근원은 과욕이라고, 오봉은 전설을 들려주며 묻는다. 당신은 무엇이 중重하냐고.
우이령길 걷기를 마치고 우이동으로 나와 우이동 계곡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간다. 하루재로 가는 도로와 계곡 사이에 조그만 공원이 있다. 이곳은 손색遜色 없는 포토존이다. 북한산의 최고 3봉(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장소다. 이곳에서 북한산을 바라보면 왜 옛사람들이 북한산을 삼각산이라 불렀는지 저절로 안다. 나는 하루재를 넘어 삼각산 3봉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