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 양사면 송덕남(宋德南) 선생 묘비 (이면백 선생 글 짓고 이시원 선생 글씨 씀)
2022년 3월 18일
아래 비문은 여산 송씨 송덕남(宋德南, 1728-1773, 향년 45살) 선생의 묘갈명입니다. 이면백(李勉伯, 1767-1830) 선생이 그의 아들 송경관(?-1828)과 가깝게 지냈기에 글을 짓고 이시원(李是遠, 1790-1866) 선생이 1829년에 글씨를 썼고 손자 송원주가 비석을 세웠습니다.
현재 강화도 양사면 교산리 언덕에 있습니다. 묘지에는 송덕남 선생과 부인 송씨 이외에도 봉분 하나가 더 있고 아래에는 작은 봉분 하나가 더 있습니다. 20m 아래에도 묘지가 있습니다. 비석이 200년 가까이 지났으나 지금도 비석을 비롯하여 상돌과 문인석 및 석등에 이끼가 끼지 않고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면백 선생이 찾아서 적은 강화도 송씨 집안의 가계는 아래와 같습니다.
송송례……송민—송계명—송만영—송덕남—송경관—송원주—宋尙虎、尙麟、尙龜—宋在洛、希洛、禹洛
송덕남이라는 분께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사시면서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남들에게 따듯하게 자애롭고(慈溫) 항상 남의 처지를 공감하고 용서하여(恕) 동네 사람들도 부처님이라고 칭찬하셨답니다. 아들 송경관이라는 분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가난하였으나 부지런하셔서 재산을 모으고 열심히 공부하여 무과에 합격하여 높은 관원이 되셨다고 합니다. 이 분도 동네 사람들에게 잘하셨다고 합니다. 손자 송원주라는 분도 무과에 합격하여 관원이 되고 돌아가신 아버지 뜻에 따라 할아버지 묘비를 세우려고 이면백 선생을 찾아와서 비문을 요청하셨습니다. 손자 송원주라는 분도 효성스럽습니다. 증손자 여럿을 두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송씨 문중 사람들이 효순(孝順)하다는 것입니다. 이면백 선생은 송씨 집안 사람들이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정성껏 모시며 효성스럽고(孝) 부모님 뜻을 이해하고 따르거나 설득하는(順) 효순을 칭찬하셨습니다. 더구나 송씨 집안 사람들은 재산이 있던 없던 언제나 동네 사람들에게도 잘하였다는 것(恕)을 칭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효성스럽고(孝) 뜻을 이해하는(順) 성격과 가풍 덕분에 후손이 높은 관원이 되고 조상님들도 관직을 추증받았다고, 조상이 효자(孝慈)하였기에 자손들도 효순하고 입신양명하여 조상들까지 복을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이면백 선생은 송씨 문중 사람들이 효순하고 용서하였다는 것을 『중용』에서 말하는 효제자애(孝悌慈愛)의 효자(孝慈)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이면백 선생도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면서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에서 어린 시절 처지가 비슷하였던 송경관을 잘 이해하고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송씨 집안의 가르침은 효자(孝慈)입니다. 이면백 선생이 칭찬하신 효순(孝順) 또는 효자(孝慈)는 하곡 정제두 선생 이래로 강화도에 뿌리내린 심학(心學)의 사회문화적 도덕 전통입니다. 이면백 선생이 송덕남 선생의 좋은 사례를 들어 현창하였습니다. 지금도 잘 살건 못 살건 부모님께 효성스럽고 동네 사람들에게 잘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비문을 보면서 송씨 집안 송덕남 어른의 자온(慈溫)과 서(恕)가 후손들에게 이어져서 후손들이 효순(孝順)하였답니다. 송씨 집안의 효자(孝慈)가 참으로 부럽습니다.
-----------------------------------
신효섭 선생께서 강화도 양도면에 살고 계시면서 양사면 교산리에 있는 '콩세알' 국산콩 두부공장 뒷산에 묘비가 있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2022년 3월 8일에 하곡학연구원 카페에 사진을 올려주셨습니다.
이튿날 제가 이면백 선생과 이시원 선생 두 분의 문집을 찾아보니 위의 묘갈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효섭 선생께 메일을 드리고 14일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희 몇 명에게 안내해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18일(금) 오후 1시 반에 두부 공장 근처에서 뵙기로 약속해주셨습니다.
오늘(18일, 금) 강화도 날씨는 흐리고 바람 불어서 조금 쌀쌀하였습니다.
현재 회장 한재호 선생을 비롯하여 전임 회장 하정숙 선생, 류현익 선생과 친구분 김영우 선생님이 오셨고 신민애 선생도 참여하였습니다. '콩세알' 두부공장 대표께서 따듯한 차와 두부를 주시고 환대해주셨습니다.
신효섭 선생께서 두부 공장에 오셔서 우리 몇 명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가서 묘지와 묘비를 보여주셨습니다. 묘비를 함께 읽어보신 뒤에 바쁘셔서 먼저 집으로 가셨습니다. 저희 몇 명은 먼저 묘지 앞의 잡목을 조금 베어낸 뒤에 막걸리를 올리고 삼배를 올렸습니다. 다시 1시간 넘게 묘지에 있는 나무를 톱으로 베어내다가 너무 많아서 그만두고 다음에 다시 오자고 약속하였습니다. 두부 공장에 내려와서 인사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몇 글자는 사진이 흐려 분간하지 못하여 의역하였습니다.
신효섭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
신효섭 선생님께서 10월 18일에 문자를 보내주시면서 강화군 옛날 지도를 보시고 행정지역 명칭 연혁까지 찾아 번역의 오류를 지적해주셨습니다.
조선 태종 연간부터 서사면(西寺面)과 북사면(北寺面)이 따로 있다가 순종 연간에 합하여 양사면(兩寺面)이 되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지적해주신대로 본문 구두점과 번역문을 고쳤습니다.
감사합니다^ ^
------------------------------------
증 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 부총관、송공덕남의 묘
증 정부인、회덕 송씨 왼쪽에 묻다.
조선국 증 공조 참판 송공 묘갈명(서문 포함)
나(이면백, 1767-1830)와 동지(의금부 동지) 송경관(宋敬寬)은 같은 고향 사람이며 서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묻힌 뒤에 아들 송원주(宋元周)가 찾아와서 나에게 울면서 말하길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선영에 묘비(송덕남 묘비)를 세우고 싶으셨는데 항상 말씀하시길 ‘묘갈명 글은 반드시 사곡(沙谷, 현재는 화도면 沙器里, 이면백 선생의 집터)에게 써달라고 부탁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저(송원주)는 아버지 돌아가신지 해를 넘기지 않고 아버지 말씀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어찌 늦출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곡에 찾아왔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벗의 우정은 살아도 죽어도 같습니다. 차마 글을 지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주(全州) 송씨는 고려시기에 훌륭한 집안이었는데 좌명공신으로서 문하시중을 지내셨고 돌아가신 뒤에는 시호 정렬(貞烈)을 받으신 송송례(宋松禮, 1207-1289, 본관 礪山, 여산은 전라북도 익산의 지명)가 조상입니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도 후손들의 음서(蔭敍)가 오래 지속되었으나 나중에는 쇠퇴하였습니다. 송민(宋敏)이 증 장악원 악정 송계명(宋繼明)을 낳으시고, 송계명이 증 호조 참의 송만영(宋萬英)을 낳으시고, 송만영은 증 공조 참판 송덕남(宋德南)을 낳으셨습니다. 송덕남은 송경관의 아버지입니다.
송덕남의 자(字)는 백도(伯道)이며 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나중에는 모시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이들을 뵐 때마다 부러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격이 따듯하고 자애로웠고 항상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가 날 때는 술을 마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부처님 성격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조 49년(1773) 45살에 돌아가셔서 강화도 서쪽 산기슭에 장례를 지냈습니다. 정조 23년(1779)에 서사면 계철동(西寺面 契鐵洞) 북북서쪽(亥坐) 언덕으로 이장하였습니다. 부인 회덕 송씨는 중추부 동지사(또는 첨지사) 송부상(宋富祥)의 따님이며 송덕남 묘소 왼쪽에 묻혔습니다.
아들 송경관을 두었으며 송경관이 무과에 합격하여 중추부 관원이 되어 조상 3대에 관직을 추증받았습니다. 송원주도 무과에 합격하였습니다. 송원주는 아들 송상호, 송상린, 송상구를 두었습니다. 송상호는 아들 송재락, 송희락을 두었고 송상린은 아들 송우락을 두었습니다. 이밖에 어린이들 이름은 모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송경관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였으나 부지런하고 고생하면서 재산을 모아 넉넉하게 살았는데 동네 사람들도 그를 아끼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송원주와 여러 아들 모두 효순(孝順)하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나(이면백)는 송경관의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물려준 재산이 없어 가난하였다고 들었는데 현재 집안일 몇 가지를 살펴보니 정말로 그랬습니다. 아! 효성스럽고 자애로운 사람만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사를 올리며 정성껏 봉분 앞에 제물을 차려드립니다. 영광스러운 관직을 추증받으신 것이 마땅하십니다!
명문을 지으니,
착함은 반드시 보답을 받는데 마치 밤이 되었다고 낮으로 바뀌는 것과 같으며 살아서 받지 못하면 죽은 뒤에라도 받습니다.
묻히신 계철산을 생각하니 산이 푸르고 물도 맑게 반짝이니 좋은 사람이 묻힐 만한 곳입니다.
아들이 입신양명하여 관직을 추증받으셨고 그래서 좋은 묘갈 비석을 세우니 올바른 이치가 조금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진사 출신으로서 완산(전주) 이면백이 글을 짓고,
통훈대부 홍문관 교리 지제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이시원(1790-1866)이 글씨를 썼습니다.
현재 임금 순조 29년(己丑, 1829) 몇 월 며칠.
-----------------------------------------------
余與同知宋君敬寬,同鄕相善,歿既葬其所。後子元周來爲余泣,曰︰“亡父欲表刻先墓,常言︰‘文必求諸沙谷。’今元周惟未年志是,就其可緩乎?敢以謁沙谷余所居也。情在存亡,不忍以不理文辭。
全州之宋,顯於麗代,佐命功臣、門下侍中、謚貞烈公,諱松禮,其先也。入我朝,亦蔭階相承久,乃寢微。有諱敏,生贈掌樂院正繼明,樂正生贈戶曹參議萬英,參議生贈工曹參判德南,同知考也。
字伯道,五歲失怙恃,自傷不及養。每見白首持衰者,輒歎羨流涕。天性慈溫,對人常恕,生氣抵觴,鄕鄰稱之爲佛。元陵癸巳年,得年四十五,初葬沁府西麓。正廟己未,改葬于西寺面契鐵洞,亥坐之原。配懷德宋氏,僉樞富祥女,祔其左。
一男即敬寬,以武科(同?)中樞,榮贈三世。元周亦武科。三男尙虎、尙麟、尙龜。尙虎,男在洛、希洛。尙麟,男禹洛。幼者不盡錄。同知早孤而貧,能勤苦致饒,而一鄕愛且無怨。元周及其諸子,俱以孝順稱。余嘗意其先之有不食遺厥後者,今徵諸家傳數事而信。嗟乎!孝且慈者,知爲善人無疑。
其祀享,致牲醴之潔,阡隧賁封,贈之榮者不亦宜乎!
銘曰︰
善之必售,猶夜與晝,或身或陵。
維契鐵岡,山輝水光,吉人攸藏。
以子而爵,是有顯刻,理乃不忒。
進士、完山李勉伯撰。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李是遠書。
上之二十九年已丑□月□日。
---------------------------------
비문 :
(* 아래 글에서 □ 표시는 비문에서 한 칸을 띄운 것을 나타내며 글자가 빠진 것이 아닙니다.)
묘비 앞면 :
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宋公德南之墓
贈貞夫人、懷德宋氏祔左
묘비 뒷면 :
朝鮮國,贈工曹參判宋公墓碣銘(并序)
余與同知宋君敬寬,同鄕相善,歿既葬其所。後子元周來爲余泣,曰︰“亡父欲表刻先墓,常言︰‘文必求諸沙谷。’今元周惟未年志是,就其可緩乎?敢以謁沙谷余所居也。情在存亡,不忍以不理文辭。全州之宋,顯於麗代,佐命功臣、門下侍中、謚貞烈公,諱松禮,其先也。入我□朝,亦蔭階相承久,乃寢微。有諱敏,生□贈掌樂院正繼明,樂正生□贈戶曹參議萬英,參議生□贈工曹參判德南,同知考也。
字伯道,五歲失怙恃,自傷不及養,每見白首持衰者,輒歎羨流涕。天性慈溫,對人常恕,生氣抵觴,鄕鄰稱之爲佛。□元陵癸巳年,得年四十五,初葬沁府西麓。□正廟己未,改葬于西寺,面契鐵洞,亥坐之原。配懷德宋氏,僉樞富祥女,祔其左。
一男即敬寬,以武科(同?)中樞,□榮贈三世。元周亦武科。三男尙虎、尙麟、尙龜。尙虎,男在洛、希洛。尙麟,男禹洛。幼者不盡錄。同知早孤而貧,能勤苦致饒,而一鄕愛且無怨。元周及其諸子,俱以孝順稱。余嘗意其先之有不食,遺厥後者,今徵諸家傳數事而信。嗟乎!孝且慈者,知爲善人無疑。
其祀享,致牲醴之潔,阡隧賁封,贈之榮者不亦宜乎!銘曰︰
善之必售,猶夜與晝,或身或陵。
維契鐵岡,山輝水光,吉人攸藏。
以子而爵,是有顯刻,理乃不忒。
進士、完山李勉伯撰。通訓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李是遠書。
上之二十九年已丑□月□日。
---------------------------------
첫댓글 신효섭 선생님께서 10월 18일에 문자를 보내주시면서
강화군 옛날 지도를 보시고 행정지역 명칭 연혁까지 찾아 번역의 오류를 지적해주셨습니다.
조선 태종 연간부터 서사면(西寺面)과 북사면(北寺面)이 따로 있다가
순종 연간에 합하여 양사면(兩寺面)이 되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지적해주신대로 본문 구두점과 번역문을 고쳤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