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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뭍동물의 캔버스
---하록의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 시세계
김보나
『애지』 2024년 여름 호를 통해 이름을 알린 신예, 하록 시인의 시들을 펼쳤을 때 찾아든 감정을 뭐라 부를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서두에서 밝힐 수 있는 것은 한 시인이 세상에 처음으로 내보이는 시집에 대한 발문을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느낀 설렘입니다. ‘친구가 될 사람이 발문을 써 주면 좋겠다’라는 시인의 청을 넌지시 전해주신 반경환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인 뒤로, 저의 여름은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로부터 퍼져나온 ‘색의 뭇매’ 속에 가만히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한 권의 책을 꼼꼼히 읽고 나면 으레 찾아드는 동질감을 시작으로, 또래이자 시를 쓰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하록의 목소리를 애정 어린 눈길로 오롯이 따라간 기록이 될 것 같습니다.
물과 뭍을 오가는 양서류와 같이
하록 시인은 스스로의 시를 ‘캄캄한 바다에 젖은 나무처럼 떠다니다 적은 말’이라 밝혔지요. ‘뭍에 다다르거나 누군가에게 닿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는 시인의 말에서 제가 길어올린 것은 ‘물뭍동물’이란 단어였습니다. 어류와 파충류의 중간이며 물속에서 숨 쉴 수 있고 땅에서 살 수 있는 양서류, 즉 개구리 등의 동물을 일컫는 이 단어는 축축한 물을 닮은 마음을 건조하게 담아내는 하록 특유의 어법과 퍽 어울립니다.
연못에 뛰어든 청개구리를 떠올려봅시다. 경쾌한 헤엄 혹은 뜀박질을 선보이는 청개구리가 어디로 나아갈지 알 수 없는 움직임으로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하듯, 이 시집은 단어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읽는 사람의 마음에 작지만 분명한 동심원을 남기고 있습니다.
등단작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를 펼칩니다. ‘맑은 밤’이라니,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조어가 눈길을 끕니다. ‘흐르는 별을 머금은 빛나는 물결’이란 문장은 은하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하게 하지요. 혹은 강물에 비친 밤하늘을 바라보는 모습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것이 도시라면, 서울의 강물이라면, 하늘에 별이 많이 보이지 않으니 수면에 별빛이 비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강에 비치고 있는 건 인간의 불빛인 셈입니다. 네온사인이나 아파트의 불빛을 총망라한 인간의 불빛은 물에 비치는 순간에야 별처럼 보이지 않은가요. 이러한 아름다운 역전은 하록의 시집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한 줌 숨(한숨을 고유한 시선으로 표현한 말로 읽힙니다)’을 내쉬며 느닷없이 찾아든 어둠을 고백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침묵’을 택하는 건 무책임하고 ‘포옹’이 가져다줄 평화도 잠시뿐이기만 할 때, 시인은 한 사람의 곁에 그저 머물기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두 사람을 한데 묶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우리’라고 말입니다.
‘너’라는 한 글자에 손을 내밀어 ‘우리’라는 두 글자로 만들기. 저는 여기서 말문이 막히는 막막함 앞에 선 한 사람을 껴안아 ‘우리’로 만드는 젊은 시인의 씩씩함을 봅니다. ‘우리는 막다른 곳을 뚫고 넘어 왔다’라니, 이어지는 말은 더 용감하지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는 현실을 인식하기-이를 뚫고 넘어 왔다고 말하기. 어쩌면 막막한 현실에 언어로서 길을 내는 것이 하록 고유의 어법 아닐까요. 동시에 이는 하록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와도 닮아 있을 거라 확장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한 길은 벼랑이고 한 길은 절벽’ 같은 청춘에게 시인은 “나 벼랑의 바닥이 궁금해”라고 말합니다. 우리 좀 더 알아보자는 것, 떨어지고 부딪히는 일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궁금해’ 하자는 것이 신예 시인 하록의 태도입니다.
다른 시에서 더 알아보겠지만,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이들은 일종의 ‘굴 파기’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끊임없이 막다른 곳을 마주하고, 이를 뚫고 전진하려 애쓰며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러한 나아감에 힘입어, 시의 말미에서는 ‘수호성’의 가호라도 받은 듯 마법이 펼쳐집니다. ‘너 서 있노라/ 서 있으라 우리’. 너에서 우리가 되는 것, 한 사람이 두 명 모여 우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너절한 운명을 피할 수 없어서 혹은 오히려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발현 가능한 신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첩되는 아이러니의 세계
희망적인 느낌을 전하는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에 이어, 화자의 부정적인 현실 인식을 담은 작품을 통해 하록의 ‘아이러니’ 어법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시집을 여는 시 「열심」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지요. “열과 성을 다하여/ 심장을 부수는 일” 일반적으로 열과 성을 다한다는 말은 낡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아마 어른들로부터 전해진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해라’와 같은 말이 우리에게 익숙해서 그렇겠지요. 한데 이처럼 무언가 생산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담지한 말에 “심장을 부수는 일”이란 표현을 가져다 대자 이상한 일이 펼쳐집니다. 우리의 몸을 ‘유용한’ 방식으로만 사용하려는 누군가의 의도와 예시를 보란 듯 가볍게 비트는 전환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어 「그리기」라는 작품에 눈길을 줍니다.
떠나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라
떠나간 모든 것들을 감사하라
상실을 쌓을 수 있다는 건
한때는 기쁨을 모았다는 것
소망하세요
절망하세요
소망하세요
책임질 수 없어도
그저 달콤한 말이라도
「그리기」의 화자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고 좌절 속에 중얼거립니다. ‘떠나간 것에 감사하라’라는 말이 주문처럼 반복되는 가운데, 저는 시의 4연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소망하세요/ 절망하세요/ 소망하세요’. 하록은 이러한 반복을 통해 절망의 다른 뜻이 ‘소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미를 펼쳐나갑니다. 무언가 바라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것을 갖게 되면 그것을 소망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소망은 절망의 다른 말이라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주행부적합개체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말소되고 싶어” 그러나 이는 생이 지속되는 한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며, 그런 점에서 절망의 다른 말처럼 작동합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그만 ~ 했어요’ 형태의 어구가 반복되며 독특한 리듬을 형성하는 시 「빵과 장미」에서도 두드러집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니 더는 죽지 않겠어요
사는 것이 막막하니 이젠 살지 않겠어요
먹을 것이 절망뿐이라 그만 먹어치웠어요
입을 것이 경멸뿐이라 그만 차려입었어요
‘그만 차려입었다’라는 말은 차려입기를 멈추었다는 걸까요, 그만 차려입고 말았다는 것일까요? 이러한 중의적 문장은 화자가 택할 수 있었을 두 가지 선택지 모두를 보여주면서도, 화자가 어느 쪽을 골라도 차이가 거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
어쩜
상냥하게도
「초대」에서 ‘나’는 쓸쓸한 나머지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까지 놀러오라고 합니다. 급기야 영혼을 거래해 소원을 성취하도록 돕는다는 ‘악마’를 호명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상냥하게도” 이러한 역전은 어떻게 발생할까요? 쓸쓸하다는 감정은 더는 오갈 곳이 없는 채 막다른 곳을 마주하고 있는 스스로를 바라볼 때 주로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통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악마와의 거래도 이 시에선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시의 화자에게 ‘변화’를 가져다 줄 유일한 존재이자 행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록 시의 화자는 대개 멈추어 있고, 이러한 자가당착 상태에서 화자는 변화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극야」를 보겠습니다.
난 결국 무엇도 되지 못하겠지
곁의 먼 곳을 부러워만 하다 끝나겠지
뭘 잘못했을까
‘난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겠지. 먼 곳을 부러워만 하다 끝나겠지.’ 이러한 조소와 자학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저 역시 취업도 어렵고, 인간관계도 어려운 청춘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 하록 시의 화자는 이처럼 한 자리에 머무는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미묘한 운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시 「판도라」를 살펴봅니다.
상자 속엔 희망은 없던데
욕심만 눌어붙어 닦이지도 않던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상자 속에 희망이 없다는 이 말은 상자 자체가 희망이라는 뜻이라고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희망의 내용이란 텅 비어 있으며, 희망의 대상은 희망 자체를 희구하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희망이 아니라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여도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0으로 나누기」를 바라봅니다. “생기 비슷한 흉내를 내는 죽은 마음”을 그러모으는 화자로부터 저는 좌절했음에도 사람들 속에 섞여 웃고 살아가려 애쓰는 청년의 울적한 초상을 보게 됩니다. 저는 시의 말미에 등장하는 “나의 이 삶투성이 저주”라는 어구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자신의 깊은 바닥으로부터 사금 캐듯 골라내었을 말들이 빛났기 때문입니다. 하록의 시는 이처럼 얼핏 모순되는 듯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골라내고 조합하여 독특한 효과를 자아냅니다.
색색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잔혹동화
시각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현재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이력이 말해주듯, 하록의 시에선 다채로운 색채와 이미지가 펼쳐집니다.
‘파란 피부의 나’가 등장하는 시 「소나기」를 읽습니다. 화자는 해 질 녘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예고 없이 쏟아진 비를 ‘서슬 퍼런 빛줄기’로 치환하자, ‘색의 뭇매’라는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고통에 민감한 이에겐 눈앞에 갑자기 쏟아지는 색채마저 피부를 스치는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지, 그리 상상해 볼 따름입니다.
「탄생설화」는 어디서 연유했는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더 명확한 이미지를 부여합니다. 3연에 등장하는 “혀를 채운 유리병/ 뼈를 재운 항아리”가 그렇습니다. 얼핏 섬뜩한 이미지로 읽는 이를 놀라게 하는 표현을 마주했을 때, 저는 작중 화자가 혀와 뼈를 모은 까닭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등장한 ‘어린 거북을 낳은 혈관’이란 말에서 보여지듯 이 시는 분명 탄생과 생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멸과 생성은 닿아 있으니, 우리에게 찾아든 그 어떤 고통이라도 모아둔다면 언젠가 무엇이 ‘뻐끔’하고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것이 하록이 보여주는 상상 아닐까요.
깊은 깊은 우물에 잠겨 있는 것 같은
아니야 우물을 본 적도 없으면서
나는 내가 사람인 줄 알았지
「마녀집회」의 배경은 ‘한밤’입니다. 작중 화자는 ‘내가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라 어떤 존재인 걸까요? 화자는 이어지는 발화에서 자신을 ‘묵은 뇌’로 규정합니다. 인간의 뇌는 기억의 저장소인 만큼, 곧 기억이 모여 한 명의 인간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유리병에 담아 오래 보존하려는 행위에 주목해 보자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언어라는 유리병에 담아내는 것이 하록 시인의 존재론이라 읽을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 아닌 마녀로서, 질료를 한데 모아 제3의 무언가를 만드는 존재로서, ‘삶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절실하게 묻는 존재로서 시 쓰기. 그것이 하록의 시작(詩作)이 지향하는 바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울음을 참았을 뿐인데’ 하루가 가고, ‘하지 못한 말들’을 헤아리다 울음이 나는(「유실물」) 이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일하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소한 존재들을 바라보며 하록은 부단히 시를 써 냈고, 그 기억과 텍스트가 모여 지금의 첫 시집이 되었습니다.
앞서 「눈부시게 맑은 밤 우리 거기에」를 읽으며 저는 ‘너에서 우리가 되는’ 마법을 보았다고 밝혔습니다. 하록의 시 세계에서 ‘우리’는 비단 인간만을 가리키는 단어는 아닙니다. 비인간 존재인 고양이 ‘금귤’이와 사랑을 주고받고, 귀신, 괴물, 도깨비까지 텍스트에 너끈히 초대해 내는 시편들을 통해 하록의 시 세계는 보다 넓은 지평을 담지하려 합니다.
이러한 상상력들이 넘실대는 가운데에서도 하록은 누군가와 함께하고자 하고, 곁으로 다가온 누군가를 외롭게 두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이 「항성의 아이들」에선 이러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춤을 추자
‘내 고양이, 프로포즈, 우리, 희망, 자투리 고백…….’ 편편이 모인 시들에서 사랑이 담긴 제목을 꺼내 액자에 걸어 봅니다. 앞서 은하수조차 제대로 보기 힘든 흐린 하늘 아래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 아무리 건조하고 차가운 도시라 해도 하록의 시집 속 등장인물은 끊임없이 살아가고 사랑하고 있으니,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이 시집에서 ‘굴 파기’의 미학을 배울 수 있겠습니다. 막다른 곳을 마주하면 끊임없이 바닥을 찾고, 파내어 또 다른 장소를 찾아내 생을 이어가는 생존방식 말입니다.
축축하고 서늘한 곳에서만 보이는 진실이 있다고, 그러므로 차가운 언어로 내뱉더라도 그것을 끝내 전하고 싶다고, 어둠 속에서 마녀처럼 뾰족한 모자를 쓰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써 내려가는 한 여자의 모습을 저는 상상합니다.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머물고 싶은 사소한 존재들을 도닥이고(「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보관하시오」), 그 악의와 실의조차 꺼내어 긍정하는 시. 결국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얽혀 있다”(「사소한 사람들」)고 말하는 시. 이것이 ‘물과 뭍’을 오가는 수륙양용의 존재로서 하록 시인이 써 내려가고 독자들에게 건네려 한 미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 이 작은 시집을 선뜻 들어 보세요. 이 시대의 청춘에게 시인이 건네고 싶은 마법의 물약이 온몸을 서늘하게 휘감아 돌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