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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1편 4절-5절: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4절: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이 지붕 위로 올라갔으면 지붕에 있는 기도실에 들어가서 기도나 할 것이지 기도는 안 하고 왕으로서 백성을 위한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인데 이 책임을 다하지는 않고 왜 지붕 위를 돌아다니며 남의 여자가 목욕하는 것을 쳐다보느냐?
그리고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후에 밧세바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고 무릎을 굻고 머리를 숙이고 빌어도 용서가 안 될 터인데 왜 두 사람에게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것처럼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라는 말을 했을까?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느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인간 자기가 가서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 안 드느냐? 다윗이 저지른 계획적인 범죄를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다윗에게 축복이 가느냐, ‘다윗 이 놈은 죽일 놈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라고 하면서 법이 있건 없건 마음이 다윗의 뒤를 쫒아가서 죽이고 싶지 않느냐?
‘주께만 범죄 하여’ 라는 말을 우리가 들을 때도 상당히 뻔뻔스럽게 들리는데 만일 우리야와 밧세바가 이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분통이 터질까? 이런 기도를 듣는다면 가만 내버려 두겠느냐? 우리야가 죽은 후에 밧세바가 이 사실을 알았는데 만일 다윗이 밧세바를 붙잡고 ‘자자. 자자’ 한다면 밧세바의 마음 속에 칼을 안 품겠느냐? 아무리 왕이라도 자기 남편을 악독하게 죽인 왕인데 이런 생각이 안 들겠느냐? 하나님께 물어보기 전에 감정이 앞서지 않겠느냐?
다윗의 범죄가 보통 범죄가 아닌데 어째서 인간 앞에서는 죄가 아닌 것처럼 들려지게 말을 했을까?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이기 때문이다. 우리야가 살아있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심판받을 존재다. 밧세바도 마찬가지다. 다윗 역시도 밧세바에게 죄를 짓 건 안 짓 건 마찬가지다. 최종적인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지금 최종을 놓고 말을 하는 거다.
인간이 사는 세상을 보면 법 위에 또 법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방법원 위에 고등법원이 있고, 또 그 위에 대법원이 있다. 그래서 개인과 개인 간에 해결이 안 되면 지방법원에 가고, 지방법원에서 해결이 안 되면 고등법원으로 올라가고, 고등법원에서도 해결이 안 되면 대법원으로 올라간다. 누가 나에게 어떤 손해를 입혔다면 내 손으로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법에 호소를 하게 된다.
상대가 나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 나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을 내가 죽었다고 하자. 그러면 법이 나를 가만 두겠느냐? 어떤 사람이 내 집 식구를 죽였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을 죽인다면 법이 가만 있느냐? 둘 다 죽었으니 그걸로 끝나야 할 텐데 왜 나를 잡아가는 거냐? 무엇이 있어서 그런 거냐? 법 위에 법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명령보다 아버지의 명령이 더 크고, 아버지의 명령보다 그 사회 그 국가의 명령이 더 크고, 국가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이 더 크다.
군대에서는 어떠냐? 신병은 상관의 명령을 듣는다. 훈련병이라면 자기의 직속상관의 명령을 듣는 건데, 만일 사단장이 와서 이 훈련병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다면 이 훈련병의 직속상관이 훈련병에게 ‘너 왜 사단장의 말을 듣느냐? 네 상관은 나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군대 있을 때 나의 직속상관인 상병이 나에게 심부름을 시켜서 가는 도중에 병장을 만났다. 그런데 이 병장이 나에게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이럴 때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거냐? 명령계통으로는 상병의 말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병장에게 ‘아무개 상병이 물 좀 떠오라고 합니다. 얼른 떠다드리고 병장님 심부름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 ‘무슨 잔소리가 많으냐?’ 라고 하며 나를 때렸다. 그래서 상병의 심부름을 나중에 하고 먼저 병장의 심부름을 하면 상병이 뭐라고 하겠느냐? ‘왜 빨리 안 갖다 왔느냐?’ 라고 하면서 때릴 거다. 이거 정말 힘든 거다. 정말 무식한 거다.
상병이던 병장이던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아, 그러냐? 얼른 하고서 내 심부름을 해라’ 이게 부하사랑인데 서로 주장을 내세워서 자기 심부름을 먼저 하라고 하는 데서 내 마음이 상당히 아팠다. 이럴 때 부하이기 때문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건데, 나는 그런 일을 당했지만 내가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어도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고, 또 실지로 그렇게 했다.
타락된 인간세상의 법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를 속속들이 보지 못하고 겉만 보고 판단을 하고, 또한 증거물이 없으면 정죄를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적나라하게 다 드러난다. 인간세계에서 ‘악인이다. 죄인이다’ 하며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는 거지만 선악과 따먹은 세상은 사람을 죽이던 거짓말을 하던 남을 도와주던 다 죄인으로 똑같이 취급을 받는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세상은 모두가 죄인으로 찍혀있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행동 죄를 짓던 양심 죄를 짓던 이게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차원에서 선과 악을 따져서 상과 벌을 준다고 해도, 말하자면 죄를 짓고 이에 대한 형을 다 마치고 풀려났다고 해도 그 죄가 하나님 앞에 용서가 되느냐 하면 안 된다. 여전히 죄인이다. 인간들끼리 죄인을 가두고 풀어주고 하는 거지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생명 길 진리의 신앙노선으로 가면서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 성화구원이 있듯이 우리야와 밧세바에게도 성화구원이 있는 거고, 물론 다윗에게도 성화구원이 있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서로의 성화구원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누구든, 무엇으로든 알면서 건 몰라서 건 이 성화구원을 방해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도전을 하는 거다.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라고 한 것은 모든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절대정확한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해 정죄가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죄는 그 이름을 안 지어놔도 있는 거다. 이름이 없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를 낳고서 아직 아기의 이름을 안 지었으면 이 아기가 없는 거냐?
이혼문제에 있어서 성경에 보면 이혼을 한 후에 남편이나 아내 중에 어느 한 쪽이 먼저 죽으면 남아있는 사람은 재혼을 해도 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부부가 살면서 날마다 싸운다면 이혼을 한 후에 서로 떨어져서 예수를 잘 믿으며 산다면 이건 어떠냐? 서로 붙어서 늘 싸우는 것보다는 좀 더 낫다. 둘이 붙어서 늘 싸우는 것보다는 떨어져서 사는 것은 안 좋은 중에 좀 더 나은 거다. 우리는 좋지 않을 때 좀 더 좋은 쪽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때는 양쪽이 살아 있으니까 둘 다 다른 사람과 재혼을 못하는 거다. 이런 경우에 어느 한 쪽이든 재혼을 하면 간음이다.
이혼을 한 후에 어느 한 쪽이 죽지 않는다면 예수 믿고 그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다가 어느 한 쪽이 죽어서 살아있는 사람이 재혼을 한다면 이건 큰 문제가 없는 거지만 신앙의 유익 면을 보면 재혼을 하는 것보다 안 하고 혼자 살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게 제일 좋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 믿는 부부가 이혼을 한 후에 어느 한 쪽이던, 아니면 양쪽 다이던 다른 사람에게 재혼을 한다면 이건 문자적으로 간음이다. 그럼에도 예수를 믿고 있으니까 이럴 때는 성화구원 이룰구원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고, 이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역사를 하시더라도 그걸 그대로 받아야 할 입장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성경 문자적으로 간음죄를 범하면서까지 재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을 주시던, 어떤 바람을 몰아붙이더라도, 다른 말로 하면 그 어떤 최악의 일을 겪더라도 그걸 받을 자신이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말씀을 어기면서도 행복한 미래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건 큰 잘못이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이혼을 안 하고 둘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인데, 그럼에도 헤어졌다면 재결합을 하기 전에는 따로 따로 예수 믿으면서 전폭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며 사는 거다. 이게 제일 좋다. 그러다가 어느 한 쪽이 먼저 죽게 되면 그 때는 자유다. 시집을 가던 장가를 가던 자유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의 모든 범죄가 주님의 눈앞이라는 것을 늘 인식해야 한다. 불꽃같은 주님의 눈앞이요, 대낮같은 주님의 눈앞이다. 즉 주님 앞에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거다.
다윗이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감쪽같이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자기의 명령을 받은 부하는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즉 내가 알고 너도 알면 세상이 다 알게 되는 거다. 그러니 다윗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한 거다. 그래도 주님은 다윗을 사랑하셔서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토록 했다.
만일 여기서 다윗이 회개가 없었더라면 다윗이 또 다른 죄를 지을 가능성을 앉고 있는 거다. 무슨 말인가 하니 다윗은 왕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바른 말을 한 선지자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옳은 말을 들을 때 옳은 말을 해 준 사람을 미워하거나 해치려고 하는 마음도 있을 수 있고, 옳은 그 말을 자기 마음 속에서 죽이는 때도 있다. 옳은 소리를 들을 때 자기 속에서 양심이 찔리는데 이걸 회개하지 않고 살려둔 채 자기에게 온 옳은 말을 죽이게 되면 여기는 또 다른 범죄의 가능성이 있는 거다. 다윗의 경우 선지자를 죽이게 된다.
우리 인간에게는 타락된 성분이 들어있어서 한 번 죄를 지으면 또 다시 죄를 짓고자 하는 버릇이 있다. 거짓말을 한 번 하면 그것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을 또 하게 된다. 이러다 보면 이중삼중으로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앞뒤의 말이 하나도 안 맞는다.
지금 우리에게 나쁜 버릇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기는 옳은데 회개치 않고, 고칠 마음도 없고 옳은 진리이치를 자기 마음 속에서 죽여 버리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양심적으로는 부끄러운데 그 부끄러운 양심을 회개는커녕 기를 살릴 수 있는 어떤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그 말이 옳은 말이기는 한데 그것보다 내가 하려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크다’ 라고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안 고친다. 더 큰 것이란 하나님 말씀 쪽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한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를 실토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회개를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고 순전하다고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니까 의롭다는 판단은 어디로부터 오는 거냐?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다. 이걸 기본구원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행으로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영이 중생, 즉 거듭났으니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말씀으로 깨달아져서 회개를 하고, 방향을 바로 잡고 진리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으로 만들어져 나가는 거다. 이 성화구원 면의 의로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거다.
이 의로움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 받은 이방세상의 의와는 질적 근본적으로 다른 거다. 이 의로움은 세상지식이나 도덕성을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은 회개한 자이고, 회개한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신다. 참 인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되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돼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죄행을 했을지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잡아야 한다. 이룰구원 차원으로 바로 잡고, 그 다음에는 인인관계성이 바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되는 것은 모른 채 ‘내가 인간 앞에 어떤 죄를 지었다’ 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안 된다. 이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이 되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잡고, 그 다음에 형제에게 바로 나가야 한다.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성도가 순전하다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선언이 되고 판단이 되는 거다. 성도의 순전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순전이다. 이 순전은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으로 인정이 된 순전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세상에는 신령한 것이 없다. 순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전부는 타락된 이질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 ‘너는 의롭다. 너는 순전한 사람이다’ 라고 판단을 해 주시느냐? 첫째는 마귀가 성도를 정죄하고 헐뜯을 때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너는 순전하다’ 라는 판단이 오는 거다. 즉 성도가 죄를 지었을 때 마귀가 ‘너 죄 지었지?’ 라고 하며 간섭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는 회개 했다’ 라고 하신다.
예수 믿는 내가 과거적인 죄를 다 회개했느냐? 회개를 안 하고 있으면 마귀가 항상 옛날의 그 죄를 가지고 와서 ‘너 옛날에 이런 죄를 지었지?’ 라고 한다. 그래서 사건은 이미 지나서 내가 지은 죄도 이미 과거로 흘러갔지만 지금에 와서 ‘그 때 내가 참 잘못했구나’ 라고 깨달아지면 바로 회개를 하고 성화구원 면에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이미 다 회개를 했는데 나의 그 죄를 아는 다른 사람이 자꾸 그 죄를 가지고 나를 헐뜯는다면 어떻게 하느냐? ‘야 이놈아, 나는 다 회개 했다. 어쩔래?’ 그럴 거냐? 내가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상대가 어떻게 아느냐? 나는 이미 회개를 했지만 그러는 사람이 있으면 ‘그래, 그 때 내가 참 잘못했다. 지금도 두고 두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그 사람을 만나면 대접이라도 하려고 한다’ 이렇게 말을 해야지 ‘그래, 난 다 회개 했다’ 라고 하면서 잡고 싸워서 죄를 짓는다면 이건 자꾸 사람의 흠을 잡아서 넘어뜨리려고 하는 마귀의 수법에 넘어간 가고, 어떻게 보면 회개가 바로 안 된 거다.
자기가 회개를 했다면 누가 내 옆에서 아무리 헐뜯고 깎아내리더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바로 하고 있으니까 그 탓을 안 해야 한다. 자기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면 누가 자기의 과거의 잘못을 들고 말을 하면 과거의 죄 된 마음이 또 튀어나와서 죄를 짓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러면 이룰구원 면에서 수치다.
교회 안에서 성도가 실수를 해서 죄를 지으면 ‘너는 지옥에 간다’ 라고 하며 헐뜯고 협박하고 공갈을 치는 거짓 종들이 있다. 이럴 때 내가 회개하고 이룰구원으로 바로만 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의로운 자라고 대변을 하신다. 그러니까 당신의 구속의 피를 입힌 성도를 마귀가 지옥에 끌고 갈 수 없는 거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고 하면 주님이 나타나셔서 성도 편에 서서 ‘이 성도에게는 나의 피공로가 입혀졌으니 절대로 못 끌고 간다’ 라고 대변을 하신다. 즉 성도가 이룰구원을 잘 이루어 나가다가 실수를 하게 될 때 주님이 대변을 하신다. 두 번째는 성도의 변화 부활 때 기본구원을 얻고 성화구원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본질로 순전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전부 신령천국에 들어간다.
이런 성도를 누가 정죄를 하겠느냐? 마귀가 정죄를 하겠느냐? 거짓 종이 정죄를 하겠느냐? 세상이 정죄를 하겠느냐? 주님으로부터 기본구원을 얻고 성화구원으로 더 좋은 부활을 입고 가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의롭고 순전하다고 인정을 하시는데 누가 정죄를 하겠느냐? 율법이 와서 정죄를 하겠느냐? 의롭게 만들어지고 진리로 만들어진 주님의 성도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런 신분인 믿는 사람이 죄를 지었느냐? 어떤 죄이던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잡아야 한다. 사람이 알던 모르던 하나님 앞에 바로 잡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바로 잡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언행심사로써 인간에게 범죄성이 나가게 된다.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 1. 자기 어머니가 죄를 짓는 중에 다윗이 출생이 되었기 때문에 다윗이 죄를 짓게 된 거다? 2. 그러니 다윗이 죄를 안 지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나온 거다? 3. 성경구절 문자대로 본다면 다윗의 어머니가 유전 죄를 받았었고, 또 그 위의 할머니가 유전 죄를 받았고, 이렇게 계속 올라가면 최고 할머니가 나오는데, 이 할머니가 선악과 따먹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가 계속 흘러내려온 거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이 말은 자기 어머니가 죄를 짓는 중에 다윗을 출생했다는, 즉 다윗 자기가 죄 지은 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돌리려는 게 아니라, 첫째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죄의 근원과 유전 죄를 말하고자 함이다. 죄의 근원으로 올라가면 선악과를 따먹은 장면이 나온다.
인간은 죄 가운데 출생을 하고, 자라면서 세상 죄 가운데 살고 있고, 살면서 죄를 듣고 보면서 여러 가지 행동으로 죄를 개발해 내고 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을 떠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하나님을 더 모른 채 불타질 세상소원 목적으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모른 채 먹고 마시는 면이 풍부하면 죄를 안 짓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 수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 죄를 볼 줄 모르면 죄 때문에 자기가 죽는데도 죽는 줄을 모르고 자기는 의인이고 좋은 사람인 것으로 착각 속에 살다가 망하는 거다.
불타질 세상을 소원 목적한 사상이 바로 죄인데, 세상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죄는 알지 못한 채 죄가 없는 지상천국을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죄를 죄인 줄로 모르고 죄를 의라고 주장을 하는 거다. 선악과 따먹은 타락된 인간은 물질적으로 잘 살아도 죄를 짓고, 못 살아도 죄를 짓는 거다. 즉 인간 속에 든 것이 문제라는 거다. 잘 살아도 죄를 안 짓고, 못 살아도 죄를 안 짓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세상사람들이 자기가 죽는 게 누가 죽으라고 해서 죽는 거냐? 어느 누가 ‘너는 죽어야 된다’ 라고 해서 이 말이 씨가 돼서 죽는 거냐? 인간 편에서 보면 다 자기가 알아서 죽는 거다. 아파서 죽든지, 어떻게 죽든지 자기가 알아서 죽는 거다. 인간 자기가 알아서 자기 마음 속에 병을 만들고,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늙고,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죽는 거다. 이게 다 죄 때문이다. 죄인인 자기가 죄인이 아닌 것처럼 살다가 그렇게 죽는 거다.
누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했느냐? 마귀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왜 따먹었느냐고 하니까 뱀에게 핑계를 댔다. 그러나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뱀에게 핑계할 게 아니다. 왜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을 인간에게 했지 뱀에게 ‘뱀아, 아담과 하와에게 가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선동질 하지 말아라’ 라고 했느냐? 그리고 뱀이 아담과 하와의 대화의 대상이 되는 거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