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도헌과 홍등가와 동성애
헤도헌(gedogen)이란 말은 불법이지만 “비공식적으로 허용된다.”는 뜻이며, 말하자면 “모른 척 눈감아 주기”다. 이 말로 네덜란드에서는 마리화나와 해시시는 카페가 아닌 커피숍에서 구입할 수가 있고 공창인 홍등가가 허용된다. 이런 자유주의는 이 나라에서 태동했다고 할 수 있으며, 같은 공기를 마시는 모든 인간의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1970년대부터 입에 오르기 시작한 다문화 사회라는 개념의 발생도 그 출발지가 네덜란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차로 잠이 깨어 새벽 3시에 호텔 밖으로 나갔더니, 삐끼가 “홍등가엘 가지 않겠느냐?”며 당당히 물어온다. 구질구질한 새벽 비에 이친구가 착각을 했나? 아니면 시력이 0.2인가? 방으로 돌아와 눈을 붙였다가 식전에 운하 가를 산책하면서 홍등가를 지나간다. 1.5층의 창가에는 유리창 너머로 의자가 에서 불쌍한 여인들이 앉아서 자신을 상품으로 전시하면서 호객행위를 연출하나보다.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이 예의라 야후에서 따옴
아래로 보이는 2평 정도의 방에는 화장실이 있고 침대가 놓여있으나 이른 아침이라 여인은 보이지 않는데, 주워들으니 유럽인들만 이 업에 종사할 수가 있다하며, 세금도 낸단다. 거리의 이름이 red light street인데 동양에서도 홍등가(紅燈街)라 부르니 누가 누구의 일반명사를 차용했는지 모르겠다. 법적으로는 불법인데도 오래된 이런 행위는 그냥 묵인하여 단속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차이나타운에서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오다가 정말 희한한 광경을 목도하였다.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레스토랑 앞에서 친구들과 뒤풀이를 하는데, 왠지 이상하여 보니 흰 신부드레스에 머리에 화환을 두른 신부가 턱수염이 긴 남자였다. 아무리 동성애는 물론, 동성 간의 결혼도 용인되는 나라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멀리서라도 렌즈를 들이대고 싶지만 예의가 아니라 참았다. 바라건대, 이 끔찍한(?) 장면이 젊은이들이 장난으로 하는 해프닝을 내가 착각한 것이기를.
고흐 미술관과 요르단 거리
고흐미술관은 줄을 서서 들어갔으나 건물만 훌륭할 뿐, 외화내빈(外華內貧)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 1973년에 개관을 했으니 이미 고흐의 작품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을 때이고 정부로서도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란 짐작은 되지만, 그래도 당시에 네덜란드 정부가 각국의 콜렉터와 고흐의 그림을 소장한 미술관과 국가에 호소하여 임대형식이라도 최소한의 작품을 고흐미술관이라 이름붙인 미술관에 걸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미술관 이름을 바꾸던가?
세계 각국 미술관의 고흐의 작품에 익숙한 내게는 농촌작가를 꿈꾸던 시절인 20대 초, 중반의 그림들은 성에 차지 않고 범작(?)들의 전시를 봐야하는 내 마음과 이런 소장품을 전시하면서 고흐 미술관이라는 명칭을 건 네덜란드 정부의 심정이 너무 안타깝다. 웬만하며 ‘복사본 하나라도 구입할까?’ 했던 마음은 유화의 질감조차 살리지 못한 인쇄술에도 실망한다. 어찌 17세기에 세계출판물의 30%을 출판했다는 이 나라의 인쇄술이 이럴까? 기가 막힌 실망감에 더 할 말이 없다.
오후에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다가 요르단 거리로 가기 위해 차에서 내려 반대방향의 시내를 구경한다. 운하가 있다는 것만 빼면 유럽의 다른 도시 변두리와 다를 것이 없는 거리에서 가게도 기웃거리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아무 목적도 없이 다니는 것이 자유여행의 장점이다. 가게들은 모두가 세일을 한다지만 눈높이가 맞지 않으면 그냥 줘도 짐만 될 뿐. 이 동네 별 볼일 없으니 길을 건너 요르단 거리로 가려면 랜드 마크인 Westertoren 교회를 지나야 한다.
17세기 초에 걸립된 이 교회는 상류층이 다녔던 교회로, 직후에 당국은 서민들의 교회인 Noorderkerk 교회를 지어, 지금은 Noorderkerk이 주 교회가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알려진 요르단 거리(Jordaan District)는 정원을 뜻하는 Jardin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와 이민 온 유대인들이 살았던 요르단 강에서 따왔다는 양설이 있다.
운하 양쪽의 노천카페는 이른 시간인데도 손님들이 쉬고 있고 덮개를 덮고 쉬고 있는 소형 보트들은 운하 가에 주차해 있는 차량 수만큼 많다. 카페, 기념품점 등의 가게가 운하 양쪽의 거리를 메우고 있는데 원래 조용한 사람들이고 시끄럽기로 유명한 중국인 관광객도 보이지 않아 거리는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가끔 운하를 오가는 보트도 전기로 운행을 하는지 엔진 소리도 없다.
안네 프랑크의 집과 박물관도 이 거리의 경계선에 있는데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당일치기로 구경을 하려는 사람들이고, 예약을 하면 바로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알아보니 7월말까지는 예약이 끝났다 하고, 나치의 학살은 기억하기도 싫어 폴란드의 크라쿠프에 있으면서도 아우츠비츠 수용소는 일부러 방문하지 않았는데, 가족을 데리고 구태여 기다려가며 안네의 집을 구경하고 싶지가 않다. 어쩌면 나이 들면서 직접이든, 간접이든 간에 슬프고 아픈 기억은 만드는 일은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인지 모르겠다.
이 거리가 조성되기 시작된 것은 17세기로 처음에는 이민자와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20세기 초에 이 지역의 주거환경의 인프라를 개선하기 시작한 당국은 1970년대에는 개조보다 신축이 저렴했기에 구옥을 부수고 대대적인 정비와 신축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하며, 원주민들 일부는 타 지역으로 이주를 하여 지금은 원주민과 새로 둥지를 튼 예술가와 전문직 종사자들이 반반이라 하며, 빈민가 시절의 인구였던 8만이 지금은 2만으로 줄었다. 힘든 시절, 한 방에서 어께 부딪치며 지내야했던 이민자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는지가 짐작이 간다.
운하가의 튤립 전문점에 들렸다. 꽃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튤립은 한 종류에 색깔만 다른 것이라 생각하는데 가게의 수많은 변종튤립을 보니 놀랍고 신기하다. 터키가 원산지인 튤립은 16세기말부터 수입되기 시작했는데, 이 품종을 개량한 네덜란드인들의 손을 거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지금 이 나라의 화훼산업은 전 세계 꽃 시장의 60%를 생산한다고 하며, 년 간 수출액은 40억 달러라 한다.
처음에는 귀부인들의 고상한 취미로 가꾸기 시작한 튤립은 수요가 증가하자 투기의 대상으로 변하여, 은행은 피어나지도 않은 꽃 뿌리를 담보로 대출까지 해 주면서 가격은 청정부지로 뛰었고, 투기자들은 약속어음까지 발행하여 선물투자를 한 결과, 희귀한 교배 품종 구근 하나의 투기가격이 노동자 봉급의 25년 치까지 치솟았다가 대폭락을 맞았다하니, 일확천금을 겨냥한 투기로 한 몫 잡겠다는 허황된 꿈에 빠지는 인간들은 동서양에 다 있나 보다.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화훼업자들은 꾸준히 품질 개량에 힘쓰고 한 품목의 꽃을 지배하는 등의 전문화로 지금은 10.000개가 넘는 화훼농원의 노력으로, 지금은 튤립뿐만 아니라 국화와 수선화 등으로 다양화 하여 우리는 비행기로 공수된 네덜란드의 꽃을 싱싱한 상태로 시장에서 구입할 수가 있다. 가게의 여러 가지 변종된 모양과 색깔의 꽃을 보면서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의 광풍을 상상하니 쓴 웃음만 난다. 주식투지도 해 본 일이 없는 나 자신은 투기를 해 본 적이 없지만, 만약 내 앞에 이런 투기라는 허상이 보였다면 과연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가 있었을까?
크륄러-밀러 미술관
중앙역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 만에 아르헨 역에 내리면 바로 앞의 말끔한 건물이 버스정류장으로 인포메이션에 물으면 105번 버스를 타라고 한다. 작은 전광판에는 각 버스의 도착시간을 알려주며 한 시간에 한번 있는 버스를 타고 20분가면 미술관 초입인 Ottero다. 통상은 여기서 106번 버스로 공원입구에 내려, 미술관까지 걸어가든가 아니면 무료자전거를 타고 가야한다.
미술관 입구의 빨간 K자 조각과 크륄러 씨
미술관으로 가는 차림(?)세를 용케 알아보는 눈치 빠른 미니버스기사가 정류장에 서있는 내게 “미술관으로 가느냐?”고 물어와 운 좋게도 미술관 초입까지 바로 들어가는 미니버스를 타고서 공원입장료 포함하여 9유로를 내고 미술관 입구에 내렸다. 이런 번거로움 쯤은 독일의 기업가 딸로 네덜란드인 크륄러와 결혼하여 미술관을 만든 뮐러여사의 노고와 열린 마음을 상상하면 즐거운 일이다.
이 지역은 원래 남편의 개인 사냥터였다는데, 자연 속에서 미술품으로 둘러싸인 집을 꿈꾸었던 여사는 11500여점의 컬렉션을 정부에 기증했고, 정부는 1938년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국립공원 안에 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숲속에 단층으로 꾸며진 아담한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는 굵직한 허리의 크륄러씨가 미소를 머금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동상을 지나면 철골(h-beam)로 만든 대형 K자는 붉은 칠을 하여 바닥의 녹색 잔디밭과 좋은 배색을 이룬다.
격조 있는 미술관으로 들어서니 관리인들도 예의 바르고 친절한 것이, 먼 곳을 찾아온데 대한 감사함의 표시인지 몸에 밴 습관인지, 잘 교육받은 탓인지 모르겠으나, 너무 기분이 좋다. 초입의 낯선 작품을 몇 개 스쳐보다가 대형 창 너머로 정원을 마주보는 카페를 지나면 눈에 익은 작품들이 반갑고 이런 작품을 콜렉션한 여사가 고맙다. 고흐를 특히 애호했다는 여사는 그의 후기 작품 10여점을 포함한 87점의 작품을 모아 암스테르담의 고흐박물관에서 실망하여 이곳을 찾은 나를 행복감 에 젖게 만든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밀레와 같은 농촌작가를 꿈꾸었던 고흐의 초기 작품은 보면서, ‘어떻게 저런 자연주의 작품에서 인상주의 화풍으로 변화했을 가?’를 의아해한다. 반 고흐에 대해서만 쓴 책을 4권 보았으며, 작년에 읽은 반 호프라는 평전은 페이지 수가 무려 800페이지에 달하며 글씨마저 작고 한 페이지를 반으로 나누어서 읽기가 지루한 것이었으나 상세하게 나름대로 고증을 하고 참고한 책도 많아, 마지막장을 덮으면 고흐의 인간적인 약점과 열정의 생애와 예술에 대한 집착이 오래 남는다.
그러나 왜 그의 화풍과 소재가 농민들의 삶을 그린 농촌의 풍경에서 인물과 집안의 일상적인 가구와 당시의 도시 풍경을 그리면서 두꺼운 휘저어 놓은 풍부한 질감의 화사한 작품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변화의 과정은 생략되어 아쉽다. 어쩌면 ‘그의 생전에 대중의 인정을 받고 그림을 팔려고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답답했던 현실과 약간의 정신분열증이 아닌가?’하는 유추도 해보며, 마네처럼 평생 유복한 환경이었다면 이런 변화는 없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평전이라는 것이 그의 생애를 위주로 다루면서 작품의 예술성을 분석하는 예술평전이 아니니 할 말은 없고, 아마추어 애호가는 한 작가의 작품 자체만으로 한 작가에 대한 사랑을 지속해도 되지 않을까? 이 책을 꼭 일독 하기를 권한다. 세잔, 모네, 르노아르와 몬드리안도 반갑고, 덤으로 있는 피카소의 그림은 워낙 눈에 익어 멀리서도 그의 작품임을 확신할 수 있고, 사진촬영도 자유롭고 관람객도 붐비지 않아 이 방 저 방 작품을 감상하며 오가다보니,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미술관에서부터 105번 버스를 타러가는 데는 미니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공 원매표소까지는 프리 자전거(free bicycle) 타고 숲 사이의 비포장도로를 3km 달려와 자전거를 반납하고, 길가의 목장에서 나는 가축의 냄새도 역겹지 않은 시골길을 25분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 역에 내리니 밤 9시. 백야 때문에 아직도 환한 밤이다.
첫댓글 카페에 많이 지각했네. 베네룩스
"창환 여행기" 고맙네. 단지
초청해주신 Prigogine교수님을 별세전 벨기에로 가뵙지 못하고,
자네 발자취로 보네. 그리고 반 고흐 뮤지엄에 실망이 안타깝네.
파리 오르세에서 못본 건 거기 있다는 게 아니구먼. Starry night는 있겠지? , Potato eater는 몰겠네만. 고흐의 타살설은 들었어?
바람 ㅎㅎ 권오대이네
권박사. starry night는 뉴욕에 있고,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오르세에, 감자 먹는 사람들은 암스테르담에 있습니다. 바쁜 사람은 그냥 사진으로나마 즐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