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데, 요즘 심취하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유나의 거리다. 유나의 거리를 보게된 이유는 단 하나이다. 20년전 서울의 달이란 드라마를 너무 재미있게 본 경험이 있는데, 바로 그 작가의 작품이라는 광고를 보고서였다.
20년전 서울의 달은 서울 달동네 하층민들의 삶의 애환을 실감있게 그렸었다. 그 당시 출현했던 배우들은 현재 대부분 대성공을 하여 한국의 영화계와 연예계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이 되었다. 서울의 달에서의 각각의 인물묘사는 너무나 실감나고 사실적이었다. 게다가, 각각의 캐릭터를 바로보는 작가의 시선은 시청자로 하여금 그들 인물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요즘 방영되는 기업 불륜 폭력배 도박 호텔들을 주제로한 현대판 신파 드라마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신파는 드라마의 앞날을 누구나 뻔히 예측을 할 수 있고 억지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는 것인데, 서울의 달과 유나의 거리에서는 전혀 예측을 할 수 없는 사건전개가 매력적이다.
게다가,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은 도저히 드라마에서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유나의 거리에서나 서울에 달에서의 인물들은 진실하고 착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의 개성있는 캐릭터가 특징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 춤꾼 도박꾼 재비족 꽃뱀 깡패 또는 가난한 노인네 등이고, 그 속에서 그나마 부를 축적한 인간도 고작 잘나가는 중소기업 사장이나 장삿꾼이다.
요즘 대개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호텔 카지노 룸싸롱 대기업 기획실 등의 장면은 눈을 씻고 봐도 볼 수 가 없다.
고작, 동네 슈퍼 앞의 파라솔 밑에서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이거나 콜라텍이거나 허름한 여관방이다. 같은 깡패라도 겉으로 폼이나 잡는 허술한 동네 건달이 고작이다. 또는 과거의 전력을 들먹이며 남들 앞에서 자랑이나 하는 한심한 삼류 양아치거나.
그렇다. 하여간 내가 보는 이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을 빼놓고 제대로 된 인간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어찌보면, 캐픽터 상으로도 악역이기가 대다수 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흠이 많은 캐릭터에 대해 무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한심하고 엉터리 역할들에 대해 오히려 경악심 보다 웃음이 번져나오게 한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뒤딸아 오는 것은 아련한 슬픔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눈물 짓게 만든다. 현대판 막장 신파 드라마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악역은 악역인데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악역들이 내 가슴으로 스며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그것은 작가의 세밀한 시선과 세상을 향한 따스한 감정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의 달에서나 유나의 거리에서 살짝 등장하는 귀농에 대한 여운은 작가가 진정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박정히 개발 독재시대, 농촌의 빈농들이 마치 잡초 뽑히듯 뽑혀서 서울로 올라와 달동네에 그들의 무허가 터전을 삼았다. 서울의 달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과거 농촌의 따스한 인심은 그들의 끈끈한 공동체에서 출발하였고, 서울의 달에서의 달동네는 바로 그것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작가의 세심한 사건 전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울의 달과 유나의 거리의 캐릭터는 약간의 역할만 바꾸어놓았을 뿐이지 거의 비슷하다. 무대도 비슷하다. 그러나, 작가의 냉철한 시선은 서울의 달과 유나의 거리에서의 차이를 실감나게 그려놓았다.
무엇일까? 1994년의 서울의 달과 2014년의 유나의 거리.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작은 사건 하나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서울의 달에서의 주인공 최민식은 도저히 서울의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결국은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유나의 거리 초반에 등장했던 깡패 한명이 있는데, 그는 강북의 자영업자를 등쳐서 먹고 사는 인간이었다. 그 인간을 문간방의 흘러간 건달 도끼 할아버지가 제압을 하게 되고, 그 깡패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자존심으로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을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울의 달과 유나의 거리의 차이는 귀농의 조건이었다. 서울의 달에서의 최민식은 서울에 빈털털이가 되어 맨몸으로 내려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유나의 거리에서의 깡패는 자신의 지역구(?)를 포기 하는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1억이라는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흥정을 하여 몇 천으로 깍아서 시골로 보내버리게 되고 사람들은 역시 나쁜 인간은 끝까지 거머리 같은 인간이었다고 욕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점은 그게 아니다. 20년전의 농촌의 조건과 지금의 농촌의 조건에 대한 것이다. 과거의 농촌은 맨 몸뚱이 하나면 먹고 살 수 잇엇지만 지금의 농촌은 그게 아니다. 땅 값은 고사하더라도 땅을 빌리는 돈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일반적인 작물을 길러서는 입에 풀칠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7천평 논밭으로 도시에서의 일년치 알바비를 벌 수 있으면 다행인 것이다. 도시 노동자의 임금 정도를 건질려면 시설농이라도 해야 되는 것이다.
유나의 거리에서의 깡패는 바로 그 점을 생각했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자영업자에게 마지막 발악을 해서 돈을 챙겨간 것이다.
20년 동안 농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농촌은 이제 과거의 인심 좋은 고향이 아니다. 도시보다 더 흉흉한 곳이 되어 버렸다. 그 원인은 오로지 국가에게 있다. 농산물 수입 자유화로 농촌에서의 농업방식은 자급에서 이윤으로 변질 되었다. 오로지 돈이 되는 환금 작물에만 혈안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 국토의 난개발로 농민들은 빨리 농촌이 개발되어 자신의 땅이 팔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고 좌파 정권이라고 믿었던 노무현 정부시절 농촌의 인구가 제일 많이 감소하였다. 노무현은 농촌의 마지막 숨통 마저 끊어 버린 것이다.
두 드라마의 차이점이 또 하나 있다. 그 무대가 달동네에서 강북의 어느 서민촌으로 바뀌엇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의 달에서의 각 인물들의 삶의 방식과 유나의 거리에서의 삶의 방식이다. 유나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삶의 방식은 오로지 돈이다. 농촌의 옮겨놓았던 달동네의 공동체 의식이 재개발로 완전히 와해되고, 그들은 드디어 산 아래로 내려 온 것이다. 그 산아래의 세상은 달동네의 그것이 아니었다. 살아 남기 위하여 유나의 거리에서의 인물들은 치열한 것이다.
2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재개발과 IMF가 아니던가. 달동네 재개발은 가난한 사람들의 도시의 초라한 빈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나마 버틸 수 잇었던 힘 마저 IMF가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돈에 대해 지독하고 집요하고 집착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작가의 세심한 시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진보당이 되던 보수당이 되던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까짓 노인들에 주는 연금 몇 만원 때문에 우리네 삶은 변하지 않는다. 아이 낳으라고 양육비 몇 만원 준다고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수십명이 떼거지로 나와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지방선거를 대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우리의 삶을 완전히 파괴해놓고 일자리 주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은 사기다.
이런 삶의 방식에서는 민주주의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그래도 유나의 거리에서 작가는 희망을 갖는다. 그래서 살짝 미소 지을 수 있고, 눈과 가슴이 촉촉해지는 것이다. 유나의 거리에를 보고나면 한 동안 가슴이 행복하다. 희망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진정한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삶은 결코 돈이 아니다. 가슴이다. 작가는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잇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