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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출산의 기쁨, 구원의 기쁨
1. 들어가는 말
성탄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은 기쁨으로 들뜨게 된다. 그러나 왜 성탄이 기쁜 것인가? 누가 복음 2장에서 밤을 세워가며 양떼를 지키는 양치기에게 전해진 기쁨의 소식이 바로 성탄의 기쁨인 것이다. 성서를 인용한다.
그 근방 들에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면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다. 목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보고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 밤 너희에게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누가 2:8-12)
다시 말하면 성탄의 기쁨은 구원자의 오심 그 자체에 있다. 구원자...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는 고백은 아마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심된 신앙고백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기 시문인 창 49: 18, 출 15:2, 신 32:15에 공통되게 그 고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구약이 고백하는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구원은 또 어떤 의미로 이해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의 구원이해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신학을 하면서 늘 구원이란 주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저는 막연히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해“는 내세적 측면보다는 현세적인 억압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의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80년대 만난 민중신학의 출애굽기와 예수운동을 기초로한 해방모델은 스폰지가 물을 빨아드리 듯 나를 매료시켰다. 민중신학은 나의 신학을 개인적, 초월적, 영적 구원이해로부터 공동체적, 내재적, 정치-경제적 구원이해로 전이시켜 땅에 뿌리박게 한 중요한 기점을 제공한 셈이다.
그럼에도 출애굽 구원모델이 전쟁 은유를 통해 인간을 ”적“과 ”내 편“을 이분법적 구도로 나누며
폭력을 통한 구원을 지향하는 듯한 점이 나에게는 뭔가 불편한, 수선이 필요한 옷을 입은 듯했었다.
용사로서의 구원자 하나님의 모습은 강력하고 분출하는, 역동적인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긍정적인 면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이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핵전쟁을 뜻하는 20세기 후반과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용사로서의 구원자 하나님 이미지는 그리 적절한 신학적 언어는 아니라고 본다. 그 이미지에서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 특히 그 폭력성은 간과할 수 없는 특성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용사로서의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고백이 구약성서 안에 중요한 신학적 전통의 하나였을지라도 구약이 전쟁이 아닌 평화와 생명살림을 통한 구원의 모습을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비폭력적이고 생명 옹호적인, 그리고 구원이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성서의 구원모델을 찾고 싶었습니다. 이 여정에서 만난 예언자가 이사야 (40-66)였다. 오늘은 이사야가 제시한 비폭력적이고 생명옹호적인 구원이해 중에서 출산과 돌봄의 인간 경험을 통해 묘사한 이사야 66장 7-14절을 함께 읽어보고 이를 구원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소개하고자 한다.
2. 출산, 돌봄, 그리고 구원의 기쁨 (이사야 66:7-14)
이사야 66장 7-14절은 출산의 기쁨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묘사한 본문입니다. 이사야 66장 7-14절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천천히 읽어가며 여러분과 함께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산고 없는 출산 (7-9절)
첫 연인 7-9절은 출생에 관한 은유와 언어로 넘쳐흐른다. 용어 선택에 있어서도 예언자는 산고에 관한 두 개의 다른 히브리어 동사 (힐, ליח)와 명사(헤벨, לבח)가 사용하고 출생에 관해서도 다른 두 개의 히브리어 (얄라드, דלי와 말라트, טלמ )를 사용함으로써 문학적 풍요를 보여주고 있다. 7절은 이상의 네 히브리어를 모두 소개하고 있다.
몸을 비틀 사이도 없이 해산하여
진통이 오기도 전에 사내아이를 낳는구나.
7절에 나오는 출생과 관련된 다양한 단어들은 출산의 두 가지 측면-- 산고의 과정과 실제적인 해산--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출산과 관련된 두 동사 중 첫 동사 힐 (ליח)은 “해산의 고통으로 몸을 뒤트는 동작” Andrew Bowling, “לוח,” TWOT, 623.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동사인 얄라드 (דלי)는 좁은 의미로 “아이를 낳은 산모의 행동” Paul R. Gilchrist, “דלי," TWOT, 378.을 나타내기도 하며 출생의 전 과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동사 힐이 여성에게 한정되어 쓰이는 반면 얄라드는 성에 구애를 받지 않고 남성이나 여성을 주어로 받을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beget)”란 표현을 할 때 동사는 힐이 아니라 얄라드가 쓰이는 것이다. 얄라드는 또한 자동사, 타동사로 모두 쓰인다. 얄라드가 타동사를 쓰일 때는 아이/자손의 이름을 목적어로 취함으로써 “후손을 얻음”을 뜻하고 여기서의 초점은 부모됨 (parenthood)에 맞춰진다. 반면 자동사로 쓰여질 때는 부모됨 보다는 여성의 출산 자체를 묘사하는데 초점이 있다. 이 경우는 힐과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 단어인 헤벨 (לבח)은 “고통, 특별히 출산시의 고통” Gerard van Groningen, “לבח,” TWOT, 259.을 묘사한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서 9번만 나온다. 참조 BDB, 286-7. (사 13:8, 26:17, 66:7; 렘 13:21, 22:23, 49:24; 호 13:13; 욥 21:17, 39:3)
마지막 동사인 말라트 (טלמ)는 “낳다”와 “구출(원)하다”의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이사야 66장 7절에서 말라트는 히필로 그 뜻은 “낳다”로 쓰였다. 반면에 구약에서 이 동사가 히필로 쓰인 유일한 다른 본문은 이사야 31장 5절이다. 이사야 31장 5절은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טלמ)” [개역개정판]는 야훼 자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말라트 동사는 구원하다의 뜻으로 분명히 쓰이고 있다. 또한 말라트 동사는 이사야 46장 3-4절에서 피엘형으로 쓰이면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묘사하는데 쓰이는데 이 본문은 뒤에 다시 세밀히 살펴볼 것이다.
이상의 출산에 관계된 네 동사는 단순히 아이를 낳는 생물학적 행위를 묘사하는 데 쓰이지 않고 다른 본문들에서 하나님의 창조 혹은 구원 행위를 묘사하는데 자주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래에서는 다른 본문에서 이들 단어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쓰인 예들을 제시할 것이다. 먼저 얄라드와 힐의 예는 세 본문 (사 42:13-14, 45:9-10, 신 32:18)을 통해 말라트의 예는 이사야 46장 3-4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사야 42장 13-14절에서 예언자는 승승장구한 용사와 산고하는 (얄라드, דלי) 여인의 두 직유의 병렬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이사야 42장 13-14절은 이르기를:
a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b 내가 오래 동안 고요히 하며
(내가) 잠잠하여 참았으나
a'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הדלויכ) 부르짖으리니
내가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개역개정판]
직유를 통한 두 이미지는 “소리”를 매개로 평행되고 있다(aba').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부르는 큰 소리 (13)와 해산하는 여인의 부르짖음 사이 (14bc)를 고요한 침묵 (14a)이 잠시 가로막으면서 두 외침 사이에 간격을 만든다. 테렌스 후렛하임 (Terence E. Fretheim)은 “하나님의 침묵은 죽음과 새로운 탄생 사이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임신 (pregnancy) 기간”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침묵은 하나님이 직접 백성들의 죽음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Terence E. Fretheim, The Suffering of God: An Old Testament Perspective (OB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147. 두 외침에 둘러싸여 있는 그 침묵은 곧 깨지고 만다.
14절에서 “부르짖다” “숨이차다” “헐떡거리다”는 세 단어의 나열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무런 수고 없이 마술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의 고통 상황에 직접 참여하시면서 그들을 구원에로 이끄심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고통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 고통인 산고에 비유 됨으로써 그 강도가 어느 정도 깊은가를 예언자는 나타내려고 한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산고를 겪으면서 부르짖는 그 외침은 죽음이 판치는 전장에서의 외침과는 달리 이제 곧 탄생할 새 생명을 기대하며 외치는 부르짖음이란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여호수아 기타이 (Yehoshua Gitay) 역시 해산하는 여인의 직유가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임박함에 대한 흥분과 기대감 사이의 긴장“을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Yehoshua Gitay, Prophecy and Persuasion: A Study of Isaiah 40-48 (Linguistica Biblica Bonn, 1981), 145.
또 다른 이사야 본문인 45장 9-10절에 동사 얄라드 (דלי)가 동사 힐(ליח)과 병행되어 하나님의 새창조/구원행위를 묘사하는데 쓰이고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부모에 비유되고 있다. 특별히 앞서 설명한 것처럼 출산과정을 나타내는 두 동사 중 남녀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얄라드 동사는 아버지의 자식을 낳음,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힐 동사는 어머니의 자식 낳음을 묘사하는데 쓰이고 있다. 결국 이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토기장이가 도자기를 빚는 행위와 아이 낳기의 은유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한편 신명기 32장 18절은 첫 이스라엘의 탄생을 출산의 이미지를 통해 그리고 있다. 신명기 32장 18절은 기록되기를:너를 낳은 (옐라드카, ךדלי)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메홀레카, ךללחמ)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문맥상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기 때문에 본문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낳은 분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을 잊었다는 경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두 번째 동사가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여성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내신/낳은 하나님의 출산은 여성으로서의 출산을 의미한다. 아마도 성서에서 하나님이 여성형 동사의 주어로 쓰여진 유일한 본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이사야 46장 3-4절은 동사 말라트를 통해 야훼의 구원활동을 묘사한다. 기록되기를: 들어라,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배 (베텐, ןטב)에서부터 내게 안겼고
자궁 (레헴, םחר)에서부터 내게 업혔던 (한네쑤임, םיאשׂנה) (3)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러하겠고
너희가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에쓰볼, לבסא)
내가 지었고 내가 업을 것이며 (나싸, אשׂנ)
내가 품을 것이고 (에쓰볼, לבסא) 구하여 내리라 (아말레트, טלמא). (4) [사역]
위의 본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보호하심을 전통적으로 어머니에게 주어진 모성 역할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물론 아이를 안고 업는 것은 아버지 역시 행할 수 있는 부모의 역할이긴 하지만 본문에서 “안고” “업는” 행위가 여성의 신체구조를 나타내는 “배”와 “자궁”과 함께 쓰임으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보육행위를 지칭하고 있다. 과거, 아이 (이스라엘)를 자기 뱃속에서 낳을 때부터 품에 안고 업어서 안전하게 키운 하나님은 그 아이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안고 품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마지막 두 줄 (4cd)은 다음의 도표가 보여주듯이 앞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함으로써 약속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3cd-4ab 4cd
배/자궁에서부터 (탄생) // 내가 지었고 (창조, 탄생)
내게 업혔던 (과거의 보호) // 내가 업을 것이며 (현재와 미래에의 보호)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보호) // 내가 품을 것이고 (보호)
(내가) 구하여 내리라. (구원)
뿐만 아니라 4d는 마지막에 동사 말라트를 부가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와 보호는 미래의 구원에로 확대될 것이란 약속으로 말을 맺는다.
주어진 본문인 이사야 66장 7절로 돌아오면 앞에서 세밀히 살펴본 다른 본문 연구를 바탕으로 7절에서 출산에 관한 다양한 히브리어의 사용과 출산 이미지 자체는 한 여인의 출산을 보도하려는 의도가 아닌 그 출생을 통해 구원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려는 예언자의 신학적 의도가 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하게 지적할 것은 이사야 66장 7절에서는 출산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시온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았던 창조/구원의 행위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낳은 것으로 묘사되었다면 포로민들이 돌아오는 새 구원은 하나님이 아니라 시온이 한 남아 (새 이스라엘)를 낳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구원의 궁극적 주체는 하나님임을 9절에서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9절은 이르기를:
내가 어찌 (자궁을) 열고는 (싸발, רבשׂ) 해산하게 (얄라드, דלי) 하지 않겠느냐?
야훼가 말한다.내가 어찌 해산하게 (얄라드, דלי) 하고는 (태를) 닫겠느냐 (아찰, רצע)?
너의 하나님이 말한다. (9) [사역]
출산의 담당자는 여성 시온이지만 실제로 자궁을 열고 닫으며 출산을 관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구원을 가능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름 아닌 산파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도 특징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반적인 인간 여인의 출산과는 달리 여성 시온은 해산의 고통이 닥치기 전에 아이를 낳는다는 묘사이다. 7절에서 두 번씩이나 전치사 베테렘 (םרטב; ~전에)이 문두에 등장하고 있음은 이런 기적적인 출산에 대한 놀라움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사야 66장 7-9절의 출산이미지는 구원에 대한 예언자의 새로운 이해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즉 궁극적으로 구원을 가능케하시며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그 구원의 과정에서 고통 당하며 구원을 이루도록 애쓰는 이는 산모로 대표되는 인간이란 새로운 신학적 해석이다.
출산을 통한 구원묘사는 하나님 혼자 이루는 구원사건이 아니라 구원과정에 인간도 역사의 주체로 참여한다는 새로운 신학적 해석의 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구원이해에서 구원은 하나의 새로움을 창출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창조와 구원의 신학이 상통하는 고리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즉 구원자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요 창조주 하나님이 구원자 하나님으로 고백되며 구원은 단순한 억압상황이나 억압자로부터의 해방이란 소극적 의미를 넘어 끊임없는 재창조의 작업이란 적극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2) 함께 기뻐하리라 (10-11절)
두 번째 연은 예언자가 사람들에게 기뻐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다. 기쁨에의 소환은 이사야 곳곳에 (61:10; 65:18; 62:15b)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10절은 기쁨을 나타내는 다양한 동사들이 반복되면서 두 번째 소절의 주제가 “기쁨”임을 분명하게 해준다. 10절은 말하기를:
기뻐하라 (싸마흐, המשׂ) 예루살렘과-함께
즐거워하라 (길, ליג) 그와-함께 그녀를-사랑하는 모든-이들이여
기뻐하라 (쒸쓰, שׂישׂ) 그와-함께 기쁨을 (마쏘쓰, שׂישׂמ) 그녀를-애도하는 모든-이들이여 [사역]
기쁨을 나타내는 세 개의 히브리어 동사 (싸마흐, 길, 쒸쓰)가 삼중 명령문에 동원되었다. 기쁨을 나타내는 동사가 “예루살렘과 함께”란 표현과 함께 각 줄마다 언급되는 것은 기뻐하는 주체로서의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은 기뻐하는 무리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11절은 앞의 산모의 이미지를 유모의 이미지로 전환하고 있다. 11절은 기록하기를:a b c그리하여 너희가-젖을-빨며 (קני), 만족하리라 품에서 그-위로의
a' b' c'그리하여 너희가-(젖을)-넉넉히-빨며, 즐거워하리라 풍성함으로 그-영광의 [사역]
7-9절에서 여성이 산모로서 구원의 과정에 참여했다면 그 역할이 출산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아이를 계속 수유, 양육하고 돌보는 역할로 이어진다. 즉 하나님의 구원과정에 참여한 인간은 계속해서 그 구원의 결과들을 지키고 돌보아야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가 이인칭 남성 단수가 아닌 복수인 것은 어머니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그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는 이들이 태어난 아기 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기뻐하고 그를 위해 애도하는 모든 이들도 위안과 영광의 풍성함에 참여하게 됨을 나타내고 있다. 구원의 기쁨이 확산되었듯이 구원의 열매 역시 함께 나누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3) 자식을 위로함 같이 (12-14절)
세 번째 연은 예언자의 사자형식 (messenger formula)으로 시작된다: “야웨께서 말씀하신다.”왜냐하면,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그에게 평화를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야나크, קני)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야훼는 말을 힌네니 (יננה)로 시작하면서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강조한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야훼는 그 나라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뭇 나라에 그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이사야는 강이나 시내 같이 “흐르는” 이미지를 표현법에 자주 사용한다. 가령, 이사야 2장 2절은 만방의 나라들이 야훼의 산인 시온으로 물밀듯 올라와 (stream)그곳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배울 것이라고 표현하고, 이사야 48장 18절은 평화를 강에 비유하며 공의를 바다 물결에 비유하고 있다. (참조 60:5-14).
앞서 10-11절이 7-9절에서 태어난 아이 탄생의 기쁨을 예루살렘과 그를 위해 기뻐하거나 애도하는 자들이 함께 누렸다면 12절은 그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평화와 영광의 수혜자로 함께 부모의 사랑을 받을 받게 될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11절에서 등장한 유모의 이미지가 12절 하반부에 다시 등장한다. 동사 야나크 (קני)가 양 본문에 쓰여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유모의 이미지는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자상한 부모의 이미지와 결합된다. 젖을 먹이는 유모의 역할은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이를 무릎에 놓고 노는 것은 부모 누구나 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어머니에 한정된 역할은 아니다. 이 본문과 유사한 장면을 묘사하는 이사야 42장 23절을 보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12절 중반부에서 “뭇 나라의 영광”이 언급된 점은 이사야 49장 22-23a절이나 60장 4절의 문맥이 상응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사야 66장 12절의 하나님의 선포는 일찍이 이사야 49장 22-23 상반절에서,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는 예언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관할 것이다.
13절은 갑자기 아이를 수유하고 돌보는 인간의 부모의 모습에서 갑자기 하나님 어머니 모습으로 이미지를 전환한다. 앞서 49장 15절에서 야훼는 자신을 인간 어머니와 비교하면서 인간 어머니는 젖먹이를 잃을 지라도 야훼는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한 적이 있다. 어머니로서의 하나님의 긍휼이 구체화되어 여기 등장하고 있다. 13절은 기록하기를,
자식 (이쉬, שׁיא)을 그의-어머니가 위로함(나함, םחנ)-같이
내가 너희를-위로(나함, םחנ)-할-것인즉
예루살렘에서 너희가-위로(나함, םחנ)를-받으리니 (13)
히브리어 나함 (םחנ)이 반복되어 세 줄에 공통되게 등장하면서 그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포로민들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울려퍼졌던,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나하무, 나하무, 나하무 아니),” (40:1)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 어머니의 위로와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첫줄에서 목적어를 문두에 놓음으로써 인간 어머니가 위로하는 대상인 자식 (이쉬, שׁיא)을 부각하고 있다. 이쉬란 어린 아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란 성인 남자를 나타내며 비록 여기서 이쉬가 정관사를 동반하지 않지만 이 남자가 앞서 태어난 남아가 성장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어머니의 역할이 아이를 출산하고 수유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성장하고 성인으로 되는 과정에서 돌보고 위로하는 역할도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존 스미트 (John Schmitt)는 말하기를, “이런 인간 어머니의 역할이 예언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성적 측면을 부각하는데 영감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John Schmitt, "The Motherhood of God and Zion as Mother," Revue Biblique 92 (1985): 557-69.
위로의 말에 이어 예언자는 다시 한번 기쁨을 노래한다. 14절 상반절은 기록하기를,
너희가-보고 기뻐할-것이다 너의-마음이
너희-뼈가 연한-풀-처럼 무성하리라. (14a)
예언자는 신체의 일부가 마치 사람처럼 행동하는 환유법을 사용하여 위로 받는 구원된 백성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소절의 마지막 절 (11절)이 세 번째 소절의 중심 주제인 “위로”를 언급하였다면 여기서는 10절에 쓰인 동사 쒸쓰 (שׂישׂ)가 다시 반복되면서 두 번째 소절의 중심 주제인 “기쁨”을 재인식시켜주고 있다.
3. 출산은유를 통한 구원묘사
일찍이 이사야 40-55장은 포로상황을 의인화된 어머니 시온이 자식을 잃고 헤매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묘사했었다. 그가 자식을 잃었음은 포로민들의 귀향을 아이를 낳지 못함은 새로운 백성으로서의 새 출발 할 능력이 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에 이사야 60장은 포로로 잡혀갔던 자신의 자식들이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면 기뻐하는 모습으로 백성을 잃은 슬픔을 위로 받았으며 66장은 출산 은유를 빌어 이스라엘이 새로운 백성으로 재 탄생/ 재건 될 것을 그리고 있다. 아이를 잃고, 아이를 낳지 못했던 그 어머니의 한이 풀리는 장면이다.
이 중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이사야 66장 7-14절에서 예언자가 출산 은유와 어머니의 성 역할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정을 묘사한 것은 세 가지 면에서 특징적이다. 첫째, 출산과 이에 관련된 성 역할을 부정적으로 인식, 혹은 침묵했던 당대 가부장 사회에서 구원을 출산과 수유, 어머니의 양육 행위와 관련시켜 묘사한 점이다. 고도의 추상적 신앙/신학을 묘사하는 도구인 종교 은유는 가장 보편적이고 공감이 가는 인간의 경험을 소재로 묘사하기 나름인데 제 3 이사야가 다른 은유가 아닌 출산의 은유를 선택한 이유는 놀랍다. 동시에 예언자는 과연 출산의 고통과 기쁨을 어느 정도 알고, 어느 정도 친숙했을까? 하는 질문도 갖게 한다. 비록 출산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양육을 통해 출산 과정과 그 기쁨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출산은 아이를 낳지 못한/못해본 여인이나 남자들에게도 친숙한 은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양육에 관심이 없고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출산이란 산고의 고통이 강조되어 기쁨의 경험이기보다는 무서움이 대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출산의 산고가 미가나 예레미야에게 전쟁이나 재해 속의 공포와 두려움을 묘사하는 문학적 소재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는 출산을 고통과 죽음에 강조를 둔 부정적 시각에서가 아니라 생명탄생의 기쁨을 강조하는 긍정적 묘사를 하고 있음은 놀랍다.
출산의 기쁨을 은유로 빌어쓰는 것이 생물학적 여성의 전유물일 수 없음은 예수 자신이 부활의 기쁨을 출산의 기쁨에 비유해서 묘사한 대목에 잘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수난설화 (18:1-19:42)에 앞서 요한 저자는 예수가 그의 수난과 죽음을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16:4-33)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16장 20-22절에서 예수는 출산은유를 통해 제자들이 지금은 근심하나 곧 기뻐할 것이라고 위로한다. 예수의 죽음 선포에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0-22절, 개역개정판 역)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근심 (이탤릭체)-기쁨(굵은체)의 대조가 계속 반복되면서 나타난다. 그러나 기쁨이 근심을 압도하리라는 암시는 근심의 정도는 줄어드는 반면 (곡하고 애통하리니 -> 근심하나) 기쁨의 강도는 점점 강해지는 점이다. (기쁨이 되리라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또 다른 대조는 죽음 (20절)과 탄생 (21절)이다. 이처럼 예수의 말씀은 다각도의 대조를 통해 곧 맞게될 수난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을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이를 위한 중심 문학적 소재는 출산은유이다.
끝으로 이사야가 산모가 산고없이 아이를 출산하는 것으로 묘사한 점은 출산과 관련된 산모와 영아의 죽음 비율이 높았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놀랍고 반가운 소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토대로 고대 사회에서 출산과 관련된 죽음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음을 지적한다. 더욱이 산고의 고통은 창세기 3장 16절에서 심판의 결과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고 수고하며 아이를 낳게 되었기 때문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산고없는 출산은 신학적으로 타락 이전의 창조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구원의 궁극적 상태는 창조에로의 복귀란 말이다.
4. 맺으며
민중신학이 민중을 역사적 주체로 선언했던 점은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신학을 놀라게 했던 선언이었다. 그런데 2500년전 유다땅에서 활동했던 한 예언자가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은 놀랍다. 그것도 출산의 경험을 통해서...
왕으로서, 멋진 용사로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올 수도 있을 그리스도가 아기의 모습으로 이땅에 왔다고 복음서가 그 보도를 시작하는 것에는 이런 창조와 구원의 맥을 이어가려는 시도라고 해석한다면 무리일까?
아기로 오신 예수, 그 예수는 가장 약한 자인 듯 보이지만 함께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면서 함께 성장하고 고통도 감수하며, 필요할 경우 죽기까지 해야 할 우리 모두의 표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길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 구원의 큰 기쁨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의 오심에
“하늘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화”
라고 외치며 기쁨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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