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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월달 만물이 소생하는 3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만물들이 이제 기지개를 펴게 될 텐데 우리의 영적인 기지개를 펼 수 있는 귀한 이 3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옆에 분들 보시면서 기지개를 활짝 핍시다. 기지개를 활짝 핍시다.
지난주하고 확 다르게 날씨가 변화되는 걸 느끼고 계시죠? 아마 이제 한 주 한 주 지나면 이제 입이 나고 또 꽃이 피는 그런 변화들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만물이 소생함을 보게 될 텐데, 정말 이런 절기에 우리가 정말 소생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나누기 전에 제가 지난 수요일 저녁에 있었던 그냥 제 안에 작은 마음의 변화를 나누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예배를 나오신 분들은 들으신 말씀이지만 악한 종의 비유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악한 종이 그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에 빚진 아주 작은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책망받는, 그리고 오히려 이제 다시 그 짐을 지게 되는 그 이야기가 지난 수요일 저녁 예배였어요.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고 또 너무나도 그냥 우리가 평상시에 익숙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었는데 지난 수요일 저녁에 저에게는 좀 특별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바로 그 악한 종이구나 하나님이 너무나도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 은혜를 요즘 상실하고 살고 있지 않았는가라고 하는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환경 탓을 하고 또 남 탓을 하고 그러면서 뭔가 불평 불만의 요소들이 내 안에서 계속 이렇게 일어 나는 나의 모습들을 보았어요.
근데 그날 저녁 그 말씀을 저도 나누고 같이 기도하고 그다음 날부터 마음에 하나님이 이렇게 변화를 주시는데 나는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라고 하는 그 인식만 가지고도 매일매일이 너무 기쁜 거예요.
똑같은 일상입니다. 그 전날과 그다음 날이 전혀 다르지 않은 일상이지만 하나님 말씀에 마음의 감동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적용되기 시작하니까 너무 기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다음 날부터 얼굴 표정이 조금 이렇게 달라졌어요. 혹시 모를 새벽 예배를 드린 분들이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제 아내한테도 그런 이제 고백을 하면서 집에서도 제가 조금 표정을 웃는 표정을 좀 더 지어봤거든요. 의식적으로 그러니까 좀 평상시에 보통 표정으로 있었다면 조금 더 웃는 표정으로 그랬더니 아내가 표정이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하고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만 기독교는 말씀에 반응하고 말씀으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종교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 안에 변화가 있길 원해요. AD와 BC가 있잖아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변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예수님을 만날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과정 속에서 내 안에 새롭게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된다는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십자가를 통과하면 우리의 인생에 변화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이미 그 변화를 경험하신 분들이에요. 작든 크든 그 변화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한 번으로 끝나면 안 돼요. 계속적으로 더 아름답고 복되게 이루어주실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처럼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이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직후의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 유월절에 그 놀라운 역사를 통하여 출애굽 했죠. 그리고 그들이 이제 광야를 통과해 홍해 바다에 이르게 되었을 때 큰 군대가 그들을 추격합니다. 바로 왕이 마음이 바뀐 거예요. 그래서 그들을 죽이든 잡아오든 바로 왕이 지금 쫓아오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이제 이스라엘은 앞으로는 홍해 바다가 뒤로는 애굽 군대가 있기 때문에 도무지 이 상황 속에서 자신들은 진퇴양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를 들게 하시고 그 지팡이로 홍해 바다를 내밀자 홍해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과 같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고,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던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나가자마자 그대로 물이 닫혀서 수장되는 역사를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이 여러 과정들과 이 홍해 바다의 사건을 통해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바다가 갈라지고 그 바다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고 대적을 한꺼번에 수장시켜버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감격으로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막 얼마나 찬양했을까요?
상상해 봐도 정말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이들이 함께 기쁨으로 찬양했을 겁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 이제 그들은 다시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서 걸음을 걷기 시작합니다.
근데 그 길은 광야길이에요. 3일을 수루 광야라고 하는 길을 걷는데 3일을 걷는데 물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들이 지금 나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3일 길을 걷기는 걸었지만, 지금 어른 장정만 60만이니 약 2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3일 길을 걷는데 먹을 물을 얻지 못하면 이거는 굉장히 어려움이죠.
여러분 하루만 물을 안 먹어도 얼마나 목 타고 힘듭니까?
근데 그것도 광야길을 걷고 있는데 3일 길이나 먹을 물이 없습니다.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요? 그런데 드디어 3일째가 되는 날 물이 발견된 겁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막 뛰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허겁지겁 물을 발견하자마자 물을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떠 먹었겠죠.
그런데 먹자마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물은 먹을 수 없는 쓴물이었다는 거예요. 마라에 이르렀더니 이것 좀 제가 넘길 수 있게 해 주세요. 넘겨주세요. 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마라라고 하는 말이 쓰다 괴롭다는 의미가 있어요. 상상을 해보십시오. 이제 성경을 읽을 때 이 분위기와 이 상황들을 내가 직접 느껴야 돼요. 드라마를 보듯이 3일 길을 그 목마르게 막 걷다가 그래도 버틸 만했겠죠.
전날 봤던 그 놀라운 역사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여러분 솔직히 엄청 막 기쁘고 감동적일 때는 안 먹어도 배부르잖아요. 그러니까 한 하루 이틀 정도는 그래도 목 말라도 하나님 인도하시겠지 인도하시겠지 하면서 걸었는데 3일째가 될 때는 정말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기진맥진해 가는데 드디어 물을 발견했는데 딱 가서 먹는데 막 갑자기 쓴 물이고 못 먹는 물 확 막 토해내고 막 퉤퉤하면서 뱉어내는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시선이 모세를 향하기 시작합니다. 인도자 모세 그리고 모세에게 막 원망해요. 너무 안타까운 상황이죠. 여러분 지금 모세가 뭘 잘못한 거예요? 모세가 그 물을 쓰게 만든 사람입니까? 모세가 지금 광야 길을 인도하고 있는 인도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지만 모세가 그 광야를 만든 사람도 아니잖아요.
근데 왜 모세한테 원망합니까? 그 원망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던 거예요. 3일 전만 해도 홍해 바다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너게 하셨던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 3일이 지났는데 그 고난 그 목마름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에요. 뭔가 좋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막 이러지만 조금만 내가 아프고 힘든 일이 생기면 원망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광야라고 하는 곳은요. 그런 곳입니다. 원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이 광야고요. 길도 없고요. 그리고 그곳에는 양식도 물도 없는 것이 광야입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 밤에는 추운 그 바람 기운으로 맹수가 나타나기도 하고 또 강도가 출연하기도 하는 곳이 바로 광야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정말 가끔 물을 어떻게 운 좋게 발견을 해도 이 마라와 같은 쓴물 같은 물들이 있는 곳이 광야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가나안 땅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가기 위해서는 이 광야라고 하는 곳은 당연히 지나가야 하는 장소입니다. 광야를 지나지 않고는 가나안 땅에 갈 수가 없어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참 여러 굴곡들이 있죠. 마치 광야길처럼 정말 길도 보이지 않고 또 이것저것 결핍이 일어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몸의 연약함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질병과 상처와 실패 사건 사고 재난 이런 수많은 일들이 또 마라의 쓴물과 같은 그런 일들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는 늘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광야 같은 삶을 살아가는데 저마다 그래도 내가 먹을 수 있는 물을 찾겠다고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 광야라고 하는 곳에서 내 나름대로 내가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중간중간 잘 발견해서 성공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 성공도 별게 아니에요 왜 거기서 계속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또 떠나야 되는 거예요. 성공한 후에도 오히려 나중에는 그걸 깨닫게 되면 허무함이 막 밀려오는 겁니다.
성경에 솔로몬이 그 대표적인 예잖아요. 부귀영화 권세를 다 누린 성공적인 인생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인생이었지만 말년에는 그가 인생을 회고하면서 허무하다 허무하다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여기서 헛되다는 이 말에 원어가 헤벨이라는 말을 쓰는데 숨결, 수증기 안개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든 걸 다 누려봤는데 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그 잠깐 나오는 여러분들 추울 때 나오는 수증기 있잖아요. 그것과 같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열심히 뭔가를 모아봤고 열심히 누려봤는데 다 그런 것과 같은 헛것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고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전도서에도 보면 내가 생각해 본 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 수가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고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해 아래서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라 내 나름대로 내가 수고하고 내가 찾았고 내가 뭔가를 하려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바람을 잡는 것 같았다. 바람은 잡을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깨어진 세상 가운데 우리는 늘 마라와 같은 쓴물을 경험할 수 있고요. 또 우리는 또 이 솔로몬처럼 정말 허무함을 느끼다가 내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정말 우리가 그렇게 늘 쓴 물만 맛보고 늘 헛되다 헛되다 하다 이런 말만 하다가 살아가면 얼마나 그 인생이 안타깝습니까?
이제 이 이야기가 그다음으로 전개됩니다. 모세를 향해서 막 원망하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이제 모세는 어떤 행동을 합니까?
15장 25절 상반절을 보니까 여호와께 부르짖어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한 나무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까 그 쓴물이 단물로 바뀌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나무는 도대체 무슨 나무일까?
어떤 사람들은 아마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도대체 쓴물을 단물로 바꿀 수 있는 마치 요즘 정수기처럼 뭔가 이렇게 좀 걸러주고 좀 이렇게 변화시키는 그런 물질이 있는 건 아닐까?
근데 여러분 상상력을 이렇게 펼쳐봐도 이 나무 자체의 능력이 없다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뭐냐면, 여러분 나무 한 그루가 200만 명의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물을 정화시킬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그게 좋은 뭐가 영향력이 있다 할지라도 한마디로 이 일은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나무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하셨을 뿐이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나무는요. 성경을 전체적인 맥락으로 이렇게 해석을 할 때 십자가하고도 연결을 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나무를 십자가의 상징으로도 해석합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가 자체가 능력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 십자가를 우리가 달아놓고 이 십자가를 가지고 영화 같은 거 보면 막 이걸로 하면 막 귀신들이 막 무서워하기도 하고, 요즘 귀신들은 또 안 무서워하는 귀신들도 있던데 십자가 자체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가 깨어진 세상 가운데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를 회복케 하시고 치유해 주신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상징물이잖아요.
이사야는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이사야 53장 5절입니다. 시작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여러분 예수님께서요. 우리를 대신해서 찔리셨습니다. 그 찔리심이 우리의 허물 또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과 치유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거예요.
예수 십자가를 믿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은혜의 변화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망이 생명으로 고통이 평안으로, 질병이 치유로 변화되는 은혜의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상처가 위로받고 실패가 승리로 변화되는 그러한 은혜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거기에 이제 오늘 말씀 마지막에 우리가 읽었던 부분을 보면 이 마라를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림에 도착합니다. 근데 그 엘림에는 아주 풍성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어요.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여주시듯 그들에게 풍성한 물과 쉴 자리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십자가로 나아오라 그럴 때 쓴 물이 단물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구원과 은혜, 치유와 승리를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면 우리는 광야를 그대로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쓴물을 쓴 물로만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이렇게 외치죠.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오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돌아간다라는 말을 지금 예배에 그냥 참여하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지 않기를 바래요. 제가 오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서두에 제 짧은 고백을 드렸지만 예배를 인도하는 저도 그 예배에 반응이 막 일어날 때가 있고 그냥 예배가 그냥 이렇게 흘러갈 때가 있는 거예요.
근데 그 흘러가는 거를 그냥 놔둬버리면 제가 죽고 여러분들이 죽잖아요. 여러분 교회에 나와 앉아 있다고 해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요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아주 정리들을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 그리고 수요일 저녁 시간에 여러 가지 지금 말씀으로 정리하고 있어요. 혹시 오늘 청소년 청년들 시간이 정말 가능한 분들 계시면 오늘 오후 예배는 좀 참여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오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명확한 정리를 좀 하려고 합니다. 내일 새벽 예배도 온 가족 새벽 예배로 지금 선포를 해놨는데 제가 간거 드리겠지만 오늘 저녁과 내일 새벽에 나오는 청소년 청년들에게는 생각지 않은 선물이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여러분 정말 이 말씀대로 성경에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에게 어떤 은혜가 있는가를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역사의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도 수많은 하나님의 그 사건들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 돌아갔을 때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변화되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경에 나온 한 이야기, 루키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십시오. 나오미는 딱 인생이 이 광야의 길을 걷는 사람, 쓴물을 만난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흉년이 들었을 때 이 흉년을 피해서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가버렸잖아요. 이건 그냥 지리적인 가정의 이동으로만 아니라 영적인 이동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멀어진 거죠. 그런 상황 속에서 그곳에 사는 동안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제 돌아오는 그 상황 속에서 며느리 룸만 그 여인과 동행하여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나오미는 이렇게 고백하죠. 나를 이제는 나우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라. 나오미이라고 하는 그 이름이 기쁨이고 즐거움, 희락이었는데, 나는 그런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없다. 나는 너무 내 인생이 슬프고 내 인생이 너무나도 쓴물과 같다. 고통스럽다. 그러니 나를 마라라고 불러라 이렇게 표현하죠.
근데 여러분 이 나오미가 나를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던 이 나오미가 나중에 어떻게 바뀝니까?
돌아온 이후에 다시 돌아왔더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며느리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문도 자기의 인생도 회복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었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케이스 중에 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는데 지금 내가 내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는 너무나도 많은 결혼의 실패 쓴물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았습니까?
우물물을 길어다 마셔도 여전히 그 여인은 쓴물과 같은 인생을 도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단물을 약속하세요. 요한복음 4장 13절과 14절 말씀을 보면 14절만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14절 시작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는 환경적으로는 쓴물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게 되는 영혼 속의 깊은 기쁨이 솟아나게 된다는 겁니다. 단물로 변화시켜준다는 말씀이죠. 정말 이 여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인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사람들 다니지 않는 가장 더운 시간에 물을 길르러 왔던 이 여인이 그 물동이를 내 팽개 쳐놓고 동네 사람들에게 뛰어들어가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외적인 건 아무것도 변화된 게 없었어요. 그 여인은 여전히 그 가정적으로 실패한 가정이었고, 여전히 환경적으로는 변화된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쓴물에서 단물로 변화되니까 그의 인생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게도 피해 다녔던 사람들을 오히려 찾아다니면서 말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말하죠.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아라. 이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복음을 증거하는 거예요.
근데 놀라운 일은 그런 여인이 이렇게 전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 나오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가 뭐예요?
쓴물이 단물로 변화된 사람을 보니까 저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가서 들어봐야겠다고 하는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죠.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변화된 인물들에 의해서 확장되는 겁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역사적인 사람들도 지금 우리 주변의 수많은 신앙의 동기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실제로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걸 체험할 때에 우리는 효과적으로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지금은 이 시대에도 수많은 변화된 사람들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 주인공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쓴물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걸어도 걸어도 광야 같고 기쁨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쓴물과 같이 내가 마치 찾아서 겨우 먹을 물을 발견했는데 쓴물같이 여겨지는 그런 시기를 겪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눈물로 기도하며 그 십자가를 통과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치유와 회복을 승리를 경험케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간증의 체험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여러분들 지금 전도할 대상, 여러분들 가족들, 여러분들이 품고 있는 그 찾는 이들, 그들에게 먼저 변화된 여러분들의 그 삶의 모습으로 다가가 짧게 말해 보십시오.
와서 보라 니가 내가 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단물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마라가 쓴물이 단물로 바뀌었지만 그 장소가 계속 살 장소는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들은 또 광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 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엘림을 만나게 되죠. 엘림은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해 두신 오아시스입니다. 그곳에서 풍성한 단물을 맛보았습니다. 근데 그것도 그들이 영원히 살 장소가 아니었어요. 그곳에서 잠시 온전한 회복과 또 쉼을 누리고 그리고 또 광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언제까지 광야의 삶을 살아야 돼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주시는 경험들이 한 번만 일어나서는 우리의 인생이 끝날 수가 없습니다.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그런 역사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매일매일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단물을 잠깐 누리고 있다고 거기에서 주저하시면 안 됩니다. 또 광야로 나아가야 가나안 땅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엘림이라고 하는 장소가 우리의 인생 가운데 더욱더 많이 발견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그 엘림의 장소에서 좀 쉼을 얻기도 하고 우리 안에 재충전할 수도 있는 그런 시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지만 그곳은 완전히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지금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간다고 했는데 마치 마라라고 하는 곳과 엘림이라고 하는 곳은 그런 곳이에요. 잠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곳 하나님이 하시면 이런 게 돼 하나님이 예배하시면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요만한 엘림도 우리에게 이렇게 기쁨이 되고 이렇게 행복한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난한 땅에 들어가면 어떨까 기대감이 더 일어나는 거죠. 마치 그것처럼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더 기대할 수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이 또 특별히 이제 내일 모레부터 새 학기를 시작하는 우리 학생들, 여러분들의 학교가 또 여러분들의 직장이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날마다 누리면서 정말 영원히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더 기대하고 소망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갈 하나님의 완성될 나라에는 다시는 눈물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은 곳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곳에 가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면서 영원 무궁토록 쓴 물이 없고 단물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어떤 절기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어떤 절기일까요?
아주 힌트를 딱 붙여놨죠. 사순절이 이제 이번 주 수요일부터 재수요일이라고 해서 수요일부터 부활 주일 전까지 40일간 사순절이 시작이 되는데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우리가 이 마라와 엘림 그곳에 있었던 그 한 나무를 묵상하길 원합니다.
혹 쓴물을 만났다고 해도 그 백성들처럼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십자가를 잘 붙들고 통과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정말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남은 인생 가운데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잠깐잠깐씩 누리게 하시는 마라라고 하는 곳에서의 경험, 또 엘림이라고 하는 곳에서의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더욱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더 꿈꾸게 되는 귀한 사순절 기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