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위치한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과 방향을 제시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하라(9절) 가르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며, 기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기도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든 혹은 인정하지 않든 더 이상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삶의 청원, 삶의 문제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탐욕이 절정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를 회복하셨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 14:6)
하나님을 아버지(Πάτερ)라 부르는 것은 언약의 그림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용한 아버지라는 단어는 아람어의 아바(אבא)입니다. 이는 아버지보다는 친밀한 ‘아빠(아바)’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매우 드물었는데,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계시하는 의미있는 호칭입니다. 아빠(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상속자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고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갈 상속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하나님입니다(요 1:14). 아빠이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동행하시는 친밀하지만 동시에 초월의 하나님입니다. 친근함과 동시에 우리의 존경과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초월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친밀함과 동시에 초월함의 이중성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 땅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안식처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의 ‘시민권(빌 3:20)’이 우리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는 그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이 땅을 디디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그 나라의 말씀과 법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ἡμῶν 일인칭복수)’의 하나님입니다. 기도는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골방으로 들어가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개인적인 소통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안에는 어느 것도 개입해서도, 개입할 수도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공동체)’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공동체의 하나님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3번)’의 간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하나님은 부르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의 유대와 사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교회로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엡 2:19-22)
예수님의 기도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의 기도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은 주기도문의 모든 청원을 드릴 수 있는 근거(김세윤)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롬 10:13).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동시에 초월하신 전능의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