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책을 편찬한 주체가 귀족과 스님이라는 점에 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로서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는 귀족이 썼기 때문에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많으며 유교 중심의 충, 효, 신 등을 중시한다. 이에 비해 ≪삼국유사≫는 스님 일연이 썼기 때문에 불교적 이념이 가미되어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신화가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혜성가> 등 신라 향가 14수가 실려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삼국시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사실성과 허구성, 다루고 있는 역사적 범위에서 차이가 있다.
둘째,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해 이야기의 소재 및 주제 선정이 훨씬 자유로웠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는 김부식 이하 10여 명의 사관들이 편찬한 반면,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인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삼국사기≫는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역사 자료를 주로 모아 수록했다. 한편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처럼 통치자 위주가 아닌, 귀족에서 민중까지 신분에 대한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이야기 자료들을 수집하여 수록하였다.
셋째, 두 역사서의 이야기 서술 방법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가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의 구분이 없는 반면, ≪삼국유사≫는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을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은 근거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기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전술했듯이 ≪삼국유사≫는 귀족에서 민중까지의 모든 계층의 이야기들을 널리 수집해서 편찬한 것이기에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기 위해서 많은 사료를 수집해야 했다. 따라서 여러 사료를 널리 수집하여 그들 사료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가리고 나아가서 자기의 고증을 첨가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태도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