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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역사의 그늘
제 5 장 한반도 분단과 그 갈등의 서곡
제 1 절 개요
우리 대한민국을 괴롭힌 나라는 이제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누가 더 나쁜 놈인지 감정보다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분노를 바래본다. 물론 우리 36년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우리가 바보같은 짓을 했다 할지라도 우리끼리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내버려 둬야 한다며 6.25 전쟁시에 미군이 한반도에 진입한 것을 비꼬는 인원도 있다. 중국이 들어온 것은 자위적 진입이라 보는 참 요상한 판단이다.
그런 가정이 성립하려면 우리 인간의 본성이 하나가 되어야 만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에덴의 동산에서 무화과 열매를 따 먹게한 신의 장난(?)은 그걸 우리에게 주지 않았다. 철저히 그 감흥의 결과로 원죄적 처벌을 받아야 했고 받고 있다.
인류 역사에 어디 한번도 내버려둔 역사는 없다. 나의 행복은 남의 불행이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처럼 항상 그 선상에서 선과 악이 교차하며 적대시하고, 욕망의 화살은 타올라 결국 어떤 이유로든 상대방, 나아가 상대국을 무너뜨리는 다큐멘타리가 되었다.
조선 상고사를 저술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설파 하였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문명의 도전과 응전의 연속과정으로 탄생"했으며 '역사는 수레바퀴와 같다"라고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밝히고 있다.
제 2 절. 우리 5000년 역사의 비밀?
우리는 한번 해답을 여기서 찾아 봐야 한다. 과연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독립 국가로서의 체면을 살리고 군림했느지 물어보면 쉽게 어느 시대라고 딱히 말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보면 누구는 편중이다라고 하고, 편미라고 하고, 심지어는 반일만 하면 민족주의자라고 추켜 세우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 왕조는 철저히 반민족주의자들을 처단 했으니 잘했다며 그 알량한 주체사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들이 비일 비재하다.
물론 모두가 과격한 표현이라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감정이나 맹목적인 정치 술 수에 묻어 나는 경향이 일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민족이라는 개념적 이해도 우린 냉철하게 돌아봐야 할 싯점도 도래했다. 한쪽에서는 형제가 아니라고 그리 몸부림치며 호시탐탐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는데, 과연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언제까지 참으며 그 어릿 꽝을 받아주고 그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공산주의 원 본질은 적어도 구호 면에서는 인민이 잘 사는 나라다. 그런데 지금 북한 주민이 잘 살고 있으며 북한 공산당이 형님처럼 받들고 있는 소련이나 중국이 잘 살고 있는지 말이다. 분명 지금도 이들은 북한의 지하 자원을 탐내고 동해나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아니면 역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이나 미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중간지대로 활용하고 있는게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결국 내부에서 본인들의 정치 세력화를 위해 타국을 불러 들여 반대 세력을 짓밟고,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줄 것 다 주고 뺨 맞는 물에 빠진 쥐가 되어버렸던 역사가 많다.
민족이란 피를 나눴다고 민족이 아니다. 역사가 같아야 하고, 언어가 같아야 하고, 문화가 동질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머무는 땅이 같아야 한다.
그런데 엄밀히 남북은 광의의 같은 민족이지 내부를 들여다 보면 곰곰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우리 역사에 북쪽의 많은 종족을 말갈.여진 등으로 분류하여 왔다. 그 세력이 지금의 만주 일원과 백두산과 그 주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음은 다 알고 있다. 혹시나 정말 DNA가 다르다면 지금 호전적이며 백성을 굶기면서 전쟁을 준비하는 세력은 우리 백의 민족이 아니라고 하면 내 얼굴에 침을 뱉을지 모르겠다. 알량한 지식이 빚어내는 해프닝이었으면 한다.
더구나 요즘시대는 민족이란 구별이 그렇게 크게 각광받는 시대가 아니다. 여러나라 민족들이 이리저리 요리조리 등등의 이유로 세계는 하나처럼 동족이란 개념은 포괄적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다. 이제 좀 민족을 팔아 득을 보려는 세력은 되어서는 뒤떨어진 세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사태에서 보는바와 같이 같은 민족이 문제가 아니라 이념의 문제, 경제적인 갈등, 자국 생존권의 문제 등, 수많은 이유로 전쟁은 게속되고 있다. 여기에 민족문제는 다분히 미국이나 서방 선진국들의 문제라기 보다는 중국과같은 공산주의 나라 등에서 훨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 강제성을 가지고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티벳과 같은 곳은 역사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아니 종교도 다른데 붙잡아 놓고 철통같이 통제하고 있다. 그것이 자유인가?
정말 많은 사람이 아니 시대적 착오와 무감각이 우리 역사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상호 간 비방과 죽임의 길로 안내한 순간들이 많다. 누구를 위한 충절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절인지 권력자를 위한 충절인지 그 시대적 판단이 다르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라를 도탄의 도가니에 몰아넣는 위정자를 섬김도 옳다고 한다면 우린 역사를 공부할 이유가 없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 했다.
잘못을 알아야 제대로 된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우린 많은 사람이 일본이나 미국만 비판하면 민족주의자요, 그 반대는 반 민족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즐기는 풍토가 있다고 한다면 이건 나의 쓸데없는 망상인지.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내 것을 내 것이라 말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경제적 이익 논리에 그렇다고 한다면 분열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여 경제 대국이 되어야 하고 힘이 없으면 힘을 길러야지 언제까지 눈치 보며 비위를 맞추려 할 것인가.
정말 비위만 맞추려 한다면 좀 거시기 하지만 그래도 이해라도 할 수 있다고 본다. 속은 하얗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빨간 물, 구시대적인 맑스-레닌주의자들의 함정에 빠져 혹시나 눈감고 있으면 송두리 채 나라를 갔다 받치는 것은 아닐까?
제 3 절. 핑계를 대지마라
어제의 일이다. 중국이 '22년 동계 올림픽을 북경에서 개막했다. 그런 중국이 소주 민족의 옷을 입고 여럿이 중국의 오성기인지 올림픽기인지 들고 나오는 연출을 하는데 우리 한복을 입고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동북 공정"이란 말은 들었는데 "한복 공정"이란 말은 못 들어 봤다. 저들은 만주 일원에 조선족이 살고, 그 조선족이 자기 중화민국의 한 부족이고 그 조선족이 한복을 입고 있다며 뭐가 문제냐고 대들었다. 솔직하게 대국이라면 대국 답게 사려 깊지 못했다고 만 천하에 밝혀라. 우리 고조선이,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이 언제 중국을, 일본을 넘 보았던가. 우리는 정말 착하게, 적어도 대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적어도 그렇게 살아온 5천 년 역사다.
하지만 중국은 한나라가 침범하여 우리 한수이북을 지배했다. 수나라는 침범하다 벌받고 망했다. 당나라도 침범하다 혼나서 그 왕이 애꾸 눈이 되고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다.
1231년,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 역사에서 우리 100여 년을 속국으로, 조선시대는 원. 명에 이어 청나라 말기까지 우리는 우리라고 말 한번 제대로 못했다.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그 넓은 강토가 짓밟히고 오합지졸이 되어 헤매일 때에 우리도 같은 어려움을 격다가 일본에 강요 된 식민지가 되었던 역사 있다. 이것도 엄밀히 보면 청나라가 일본에 전투에서 패하여 우릴 팔아넘긴 꼴이다. 우리가 무슨 시장에서 사고 파는 경매물도 아닌데 그렇게 했고 믿었던 우리는 망했다.
그러다 우린 이유야 어찌 되었던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지만, 중국은 둘로 갈라져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도 소련의 흉계에 미국이 현혹되어 38도 선이 그어지고 북쪽에는 그 어린 34세 김일성이 스탈린을 등에 업고 나타나 통치자가 되어갔다.
이런 찰라에 지금의 중국 공산당 아버지인 모택동이 이끄는 군대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군대에 밀려 북으로 도망칠 때에 바로 김일성이 그들을 위한 통로를 제공하였고, 많은 조선족 출신들이 팔로군에 편입되어 목숨을 받쳤다. 그런 원죄로 모택동은 유엔군이 압록강. 두만강으로 진출할 때에 스탈린과 밀계하여 "항미원조"를 자원했다.
그러다 일찍이 북한 김일성이 남침 위한 군대를 편성 할 때에 거의 10만에 가까운 조선족 출신 정병(전투 경험을 했으므로)을 북한에 보내어 최정예 군대를 만들도록 하였다.(상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열거했다)
따라서 좋게 말하여 의리가 있는 모택동이었다. "죽음에서 구해준 친구를 위해 배풀은 보답이다"라 하면 무슨 조폭들의 우정일까
스탠리 호프만은 "상호 파멸의 위협을 통해 어제 효과를 높혀 주었던 핵무기들은 마치 전통의 전쟁 행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대응 무기로서 원자핵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수단으로 탈바꿈해 가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해결된 일이 없으며 분쟁 사건은 끊임없이 재발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냉전 시대로서 불안의 시대라 했다.
누구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했다. 지금 북한은 '22년 2월 현 싯점에서 무려 근간에 7번의 미사일 발사 실험을 세계 모든 나라에 보란듯이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그런 북한을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강력한 규탄 멧세지 한번 내지 못하고 현 정부는 속앓이를 하고 있다.
따라서 근현대사에 가장 뼈아픈 상처를 남긴 6.25 전쟁 전야와 그 관련된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방귀가 잦으면 결국 바지에 이물질이 묻는다. 그럼 옷을 벗어야 하고 결국 한 겨울에 벌어지면 동사하게 되고, 한 여름에 벌어지면 그 혹독한 더위에 지쳐서 졸도 내지는 일사병이나 열병으로 죽게 된다.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비극을 맞이해서는 안되며 우리도 한번 대륙으로 진출해서 호연지기를 길러봄은 안되는지 묻고 싶다. 일본만이 갖는 꿈이 아니다. 나아가 백제시대 우리가 일본을 통치한 시절도 있다 하니 그런 비젼을 제시하고 갖추는 원대한 포부를 심는 과업이 우리 역사에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제 4 절. 구한말 소용돌이
지나온 역사를 객관적으로 파해쳐 본다는 것은 어렵다. 기록이란 승리한 자, 가진 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는 그 당시의 실제 기록이 아니라 대다수가 구전적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신라 경순왕의 순위라는 형식으로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게 되는 정당성을 미화(?)하려 신라관련 내용은 포장하여 일부 기록되고 고조선이나 고구려 백제 등은 조금 우화적인 내용으로 편집되어, 기전체로 기록한 것이기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을 수 있다. 신라는 승리 국이고, 고려는 그 계승자라는 의미가 깔려있다.
꼭 우리 역사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나라와 나라 관련 내용은 더욱이 모국에 유리하게 작성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19세기부터 중요 사건의 역사적 기록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한다고 봐야 한다. 많은 나라 뿐만 아니라 역사가들이 좀더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기록해도 될만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 속에서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를 당하게 되었는지 시간표를 되돌아 보고, 광복이 되면서 38도선으로 분리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과거 역사 속으로의 여행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해설보다는 시간표 위주로 관련 사실을 옮겨보고 몇가지 기록에는 주석을 달아 이해하는 식으로 역사 속의 오늘을 진단해 보고자 한다.
1. 열강의 한반도 침투 노력
먼저 1832년 영국 상선 로스암허스트호가 황해도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1835년에는 미국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다 1864~1865년까지 네 차례나 러시아가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요구하였다.
1866년도는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 땅을 두드리는데 우리가 가끔 장학퀴즈나 국사 시험문제에 나오기도 하는 숨막히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동시에 벌어지는데 병인양요. 제너널 셔먼호 사건.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이 벌어진다.
하지만 여기서도 슬픈 사연은 열강들이 우리나라, 조선을 독립국으로 본 것이 아니라 청국의 속국으로 보았고, 조선을 들어옴에 청나라에 양해(?)를 구하였다는 것이다. 청나라가 이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독립국이라 하여도 믿으려 하지 않했다. 프랑스가 그랬고 미국이 그랬다. 가장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일본과 러시아만 거저 넘보려 했을 뿐이다.
2. 병인박해(병인사옥)
병인박해는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한 사건으로 1866년 2월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이보다 먼저 1831년 9월 9일, 교황청은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독립교구로 설정한다. 그리고 신부들 몇 명이 조선 땅에 들어왔다. 그러다 1839년에 3명의 프랑스 사제들이 죽는 기해박해가 먼저 발생하였다. 프랑스는 1787년에도 제주도를 측량하고 울릉도에 접근한 사실이 있으며, 1846년도에도 군함이 출현한 적이 있다.
1866년에 고종을 섭정하고 있는 대원군이 척화를 주장하고 외세를 배척하자며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이때 조선에 천주교 신도가 늘어나게 되어 이들을 서학도라 하여 박해하게 된 것이 병인박해다. 병인박해 당시에 죽은 천주교인이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 조선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생겼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되어 있는 대원군은 천주교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다. 그의 아내인 민씨도 신자였으며 집안 여인들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공식으로 인정이 되진 않았다.
마침 이 시기에 러시아의 불법적인 국경선 침범에 대원군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베이징 조약(제2차 아편 전쟁으로 청나라가 영국,프랑스, 러시아 등과 개별적으로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청은 외교사절의 베이징 주재권을 확인하엿고, 배상금 지급, 텐진 개항 등을 인정하였다)을 통해 연해주를 빼앗고, 두만강을 경계로조선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1864년 함경북도 경흥부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고, 1865년 음력 9월에는 또 러시아인 수십명이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게 되자, 대원군은 러시아의 접근을 부담스럽게 판단하고 그 대항마로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견제하려 했다.
조선 땅의 천주교인들은 이참에 프랑스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 대원군과 협의 하려 했으며, 당시 청나라가 아편전쟁이니 하며 홍콩을 내주는 등,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자, 조선은 한.영.프 3국 동맹으로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보려 했다.
이에 프랑스 주교를 서울로 불러 오게 하였으나 프랑스 베르뇌 주교가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소극적 반응을 보여 대원군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대원군은 분노를 갖게 되고, 1866년 초부터 천주교 금압력이 내려지며 정치에 관여하려는 불순세력으로 몰려 천주교인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는 병인박해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많이 죽게 되고 결국 살아서 도망친 선교사들이 청국에 와있던 프랑스 공사에 일러 받쳐, 1866년 11월에 우리를 침략하러 오게 된다. 이것이 병인양요다. 이후에 프랑스와 조선은 수교를 맺는다.
뒤이어 미국 상선이 대동강 유역까지 올라왔다가 불타고 선원 전원이 죽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이 제너널 셔먼호 사건이다.
3. 미 상선 제너널 셔먼호 사건
1866년 7월 25일, 미 상선이 강화도를 거쳐 내륙으로 온다는 것이 길을 잘못 들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은 우리에게 통상을 요구하며 거절하자 대포를 쏘고 조선인이 일부 죽게 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식량이 떨어졌다고 하여 조선에서 식량을 제공도 하였다. 그런데 비로 인해 물이 불어나자 다시 위로 올라와 만경대 한사정까지 진출하더니 이제는 약탈도 하게 되었다. 조선군이 출동하자 배에서 대포를 쏘아 구경하던 백성 몇 이 죽게 되었다. 이 배에 승선한 24명 중 5명만 서양인이고, 19명은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이었다.
1866년 9월 5일, 파렴치한 미국 상선에, 평안 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목선에 기름을 가득 뿌려서 내려보내 상선과 접촉하게 하였다. 결국 배는 불타고, 뭍으로 내려온 선원들은 뿔난 백성들에 맞아서 모두 죽고 말았다.
미 : 여기가 한양 맞습니까?
조 : 너 노랑머리 어디서 온 놈이냐?
미 : 우리 미국이라 한다, 장사좀 하러왔다
조 : 너희들 또 뭐 훔쳐가려 왔지?
미 : 우리 도둑놈 아닙니다.
조 : 야, 이것들 웃기네. 우리가 두 번 속을지 아니? 애라 이놈들 맛좀 봐라...!
이렇게 비화하게 되니 청나라도 찜찜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데, 일단은 미국이 이 사건을 알지 못하여 그때는 지나갔다. 이 사건은 셔먼호가 공식 미 정부의 통상요구 목적을 가진 배가 아니고 상선이었기에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알다시피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지(1865년) 얼마 안되고, 더구나 링컨 대통령이 암살되어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따라서 5년이 지난 1871년에야 알게 되었다. 그 책임을 묻겠다고 강화도에 올라 선 것이 1871년 신미양요다.
제너널 셔먼호 사건 당시에 대원군의 지시로, 불타서 침몰된 배를 수색하여 대포를 회수하고, 그 배의 증기기관을 분해하여 우리가 복제하려 하였다는 일화도 있고 화포 시범사격도 했었다는 야담도 있었다 한다.
4. 병인양요, [직지심경의 약탈, 프랑스의 만행]
1866년 11월 7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처들어와 만행을 저지르고 우리 문화재 직지심경 등을 약탈해 간 사건이다.
당시에 청나라에는 서양 열강들, 독일. 영국. 프랑스.미국 등 제국주의를 꿈꾸는 나라들이 청나라의 문호개방이란 명목으로 들어와 상해 일대는 이런 나라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서로 청을 상대로 유리한 장사를 하기 위해서 힘으로 밀어 붙혀, 사실 청은 힘없는 종이호랑이였다. 이홍장 등 군벌이 활개치고 전국 각지에 민란이 발생하고 중앙 통제가 어려운 시국이었다. 프랑스는 그때 이미 군함과 병력이 여기에 와 있었다.
여기서 웃기는 일화가 있다. 프랑스 공사가 청국 왕자에게 조선에서 당한 피해(병인박해) 보상과 조선의 문호개방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프 공사 : "당신네 속국인 조선이 우리 사람 많이 죽였다. 당신들이 지금 조선에 영향력 행사가 어렵다고 했다. 맞는가?"
청 왕자 : "우리는 지금 우리 살기도 힘들다. 우리 조선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프 공사 : "좋다, 그러면 우리가 처들어가 조선 왕을 만나 직접 담판하겠다"
청 왕자 : "알아서 해라, 조선은 거시기 작아도 맵다"
하지만 이런 말을 당시 청국에 조선 사신이 와 있다가 전해 듣고 귀국하여 조정에 고하면서, 청나라도 프랑스 군대가 들어와 궁궐에 불지르고 위협하여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한번 붙어보겠다고 장담하며 5,000명의 수비대를 강화에 배치하여 프랑스군에 맞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들어와 정족산성과 문수산성(모두 강화도에 있음)을 공격하지만 우리가 이기게 되어 기세를 올리고 더욱 문을 걸어 잠그게 된다.이것이 "병인양요"다.(전사 5명, 부상 25명)
1866년 9월 18일, 청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군함 3척이 조선인 신도 3명의 안내를 받으며 한성근교 서강에까지 정탐을 하고 돌아가자 조선은 수비를 강화한다.
1866년 9월 25일, 다시 프랑스 군대는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로 강화도로 와 10월 14일 이 중 4척의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도 갑곶진으로 진출하여 무기와 서적, 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그러면서 대원군의 퇴거 요구를 묵살하고 병인 박해 책임자 엄벌과 조약 체결을 요구한다. 하지만 조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866년 10월 26일, 120명의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정찰하는 도중에 조선 수비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하여 2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프랑스군은 무차별 포격으로 민가와 군영을 파괴하였다.
1866년 11월 7일, 다시 프랑스군 160명이 이번에는 강화도 남단 정족산성(강화 온수리 소재로 여기에 전등사가 있다)을 공격하는 도중에 잠복하고 있던 조선 수비대 500명의 기습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11월 11일 강화도를 철수하면서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재물과 대량의 서적,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바로 이 시기에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 )에서 훔쳐간 것 중에 직지심경이 있었다.
얼마 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 : 여기 우리 문화재가 있다던데 보여줄 수 없소?
프 : 조금 거시기한데 눈으로 보기만 하고 만지지는 맙시다
이 : 참 거시기 하네, 알겠소. 바라만 보고 있겠소
프 : 여기 이것이요. 저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뭔지는 모르겠는데 무지하게 많소
이 : 아차 우리 고속열차을 운행하려 하는데 당신들 뭐 있다던데
프 : 우리 테제베 있지, 시속이 무려 300km. 한번 시승해 보세요
이 ; 괜찮소, 우리 이 기술 좋은데 일본이 자꾸 촐삭거려서 가깝게 있다는 이유로 말이요
프 : 뭘 꾸물거려요. 우리 100% 기술이전 약속하지요.
이 : 그럼 이 직지심경은 어떻게 되는거요, 내가 이대로 가면 난 매국노가 될텐데.
프 : 참 난감하네요. 우리 문화재 모두 나폴레옹이 뺏어온 것들인데 그럼 다들 달라고 하면 이 루불르 박물관은 텅비게 됩니다.
이 :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게 역사의 귀결인데, 그러니 히틀러에게 호되게 당하지 않았소
프 : 방법이 있소. 다른 나라는 모르게 주긴 주되 "장기 대여"형식으로 가져가고 시기가 도래하면 약조를 갱신하면 어떻겠소?
이렇게 해서 돌아온 직지심경은 소유권은 프랑스에 지금 있다. 다만 장기 임대형식이라 시기가 도래하면 갱신하게 되는 형식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테제베 기술이 지금 우리의 KTX 원천 기술이 되었다.
여기서 기억되어야 할 것이 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를 안내하고 들어온 사람이 프랑스나 청국인이 아니라 우리 조선인이 안내역을 맡고 있었다.
당시 피해를 본 서학인, 천주교인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천주교인을 직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 당시는 내버려둬도 대세가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군함을 가지고 대포와 신무기로 무장한 그들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871년에 이제는 미국이 평양에서 당한 제너널 셔먼호의 사건 진상을 해결하겠다고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전함을 가지고 나타났다. 우리는 광성보와 초지진과 덕진진 일대에서 한판 붙게 되었다. "신미양요다".
5. 오페르트 도굴 사건
미국 군함이 오기 전 1868년 4월에 독일인 오페르트는 대원군의 선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발각되어 도주한 사건이다.
남원군, 대원군 아버지의 묘는 충남 예산 덕산에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을 1846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풍수지리가인 정만인에게 부탁하여 원래 "가야사"란 절이 있었으나 대원군이 폐사 시키고 아버지 남원군을 이곳으로 이장했다.
오페르트는 먼저 도굴사건을 저지르기 전에, 교역 개방 및 친선관계를 맺기위한 예비 접촉을 갖고자 상해를 출발하여 흑산도를 지나 아산만에 들어왔다 돌아갔다. 그 후에 다시 아산만을 경유하여 덕적도를 지나 강화도로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반대로 다시 돌아갔다.
드디어 1868년 4월, 오페르트는 남연군 묘 도굴사건을 벌이게 된다. 그는 2차 조선 방문 대에 만났던 신부로부터 조선 사람들은 유품을 보전함으로서 가문이 번창한다고 생각한다고 믿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면 유품을 갖고 있으면 대원군과 거래를 할 수 있으리라 보고 도굴을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당시에 동원된 인원이, 프랑스 선교사 훼론이 통역을 했으며 백인 8명, 말레이지아인 20명 등 약 100명의 중국인 청년을 무장시켜 상륙하게 되며 러시아인이라 속였다.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나오고, 탑을 파괴할 때에 백자 2개, 사리도 3개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 오페르트는 영종도에 정박하며 대원군에 장문의 위협적인 편지를 영종첨사를 통해 보내려 했다.
오페르트 :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이지만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팠습니다. 조선의 운명이 대원군의 판단에 달렸으니 통상 교역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미혹에 빠져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4일이 지나면 우린 떠나 갈 것입니다. 그리고 몇 달이 되어 반드시 나라에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영종 첨사 명의 답변 : 우리나라 대원군 각하는 지극히 공경스럽고, 존엄한 위치에 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국국과 우리나라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다. 그런데 이번 덕산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상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대원군의 입장을 강화시켜 더욱더 배외정책을 공고히 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조선인들은 서양인들을 야만족이며, 그들 대부분도 도둑이라고 바라보게 되었으며 전국에 척회비를 세우게 된다.
6. 신미양요
미국함대가 1871년 6월 1일부터 6월 11일까지 강화도 일원에 처들어온 사건이다.
조선과 미국은 1855년(철종6). 1865년(고종2)에도 동해안의 통천, 영일 연해,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다.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상선 제너널 셔먼호가 대동강변에 들어왔을 때는 이를 불사르고 승선인을 불태워 죽여버렸다.
이에 미국은 청나라에 공동 조사를 요구했으나 청이 그럴 입장이 못 되엇었다. 이에 미국은 병인양요를 일으켰던 프랑스에 공동으로 조선을 징벌하자고 제의했으나 프랑스의 내부사정(프로이센과의 전쟁 중)으로 거절되자 단독으로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1867~8년 어간에 군함을 보내어 조선에 피해보상과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되고 청을 통한 압박도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1871년 드디어 미국은 상해에 머물고 있는, 로저스 아시아 함대 사령관에게 조선 원정을 지시하게 되고 로저스는 일본 나가사키로 들어와 휘하의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데리고 원정에 나섰다.
1871년 4월 8일 물류도 앞바다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초계함이 광성진에 이르러 조선 대포가 먼저 불을 뿜었다. 그리고 덕진진과 초지진에서도 공격에 합세하여 미군은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결국 대원군은 그들의 협상에 응하지 않게 되고 주가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미군은 4월 23일 해병대 450명이 초지진에 상륙하게 되고 덕진진도 광성보도 모두 패하였다.
[여기에 어재순 장군 형제의 일화가 있다.]
원래 어재순은 장군이 아니였다. 어재순의 형 어재연은 장군이었다. 그 당시 장군은 지금처럼 만여 명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고 몇 백만 거느려도 장군이라 불렀다. 어재순은 그 동생이었다.
형, 저기 노랑머리들이 또 나타났어?
아니 저놈들이 평양에서 혼나고도 정신 못차렸나?
야 가만히 기다려, 눈앞까지 오면 박살내자고...
조선놈들 안보인다
어디 숨었는지 망원경으로 살펴라
이놈들에게 우리 대포 맛을 보여 주자, 코 큰 놈들 이런 맛 처음일거야
드디어 미군이 우리 눈앞에 다다르고 함포가 작렬하여 쌓았던 돌성이 무너진다.
뭣들 하느냐, 불화살을 쏴라~!
형님 저기가 무너집니다
난 여기서 막겠습니다
그러자 형인 장군 어재연이 동생을 꾸짖는다
"너는 궁벽한 고을의 일개 포의에 불과한 몸이다. 너는 왕사로 죽는 나와는 다르다. 어찌 빨리 돌아가지 못하겠는가?"
동생 어재순의 답변이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일에는 신민(신하와 백성)이 하나다."라고 말하며 칼을 빼어 들고, 선두에서 성곾에 다다른 미군과 육박전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 하였다.
그러자 형 어재연은 "야, 이것들 웃기네! 애라 맛좀 봐라"고 외쳤다.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적이 두려워서 어찌 나라를 구하는 일을 못하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광성보로 달려갔다.
빗발치는 미군의 총사례를 무려 10발이나 맞으면서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다.(전사 53명, 부상 24명이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복구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포 500문, 총이 2만정이 나포되거나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를 복구하는데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지만 당시 조선은 경복궁 재건 등에 혈세를 퍼붓고 있었다.
이윽고 전쟁은 미군이 이겼다. 장군 어재연 장군기는 미군이 훔쳐갔다가 136년이 지난 2007년 한국에 돌아왔다
나는 어느날 강화도에 갔다. 초지진에서 흐르는 임진강 물, 아니 서해를 바라본다
나 : 소나무님 그때를 기억하시는지요?
소 : 그럼, 참 조선군 수비대 불상했지. 초가지붕 밑에 숙영하고 있었어.
나 : 아 여기 몸통에 있는 엉치는 그때 그 상처인가요?
소 : 그걸 어떻게 알아보네. 미군 총알도 있고 일본 총알도 있고 폭탄 파편도 박혀서 앓았지. 그리고 엉치가 되었어!
나 : 전쟁은 잘 싸웠나요?
소: 무슨 소리, 칼 들고 싸웠지. 대포도 있었는데 뭘 나가지도 못했어
나 : 아니 대포가 있었다면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 배를 묵사발 냈는데 잘 안되었나요?
소 : 그 낡은 딱총은 무용지물이야. 이미 열강은 신식 대포로 저기 강 멀리서 뻥하면 여긴 요동치며 혼비백산이야
나 : 그럼 백병전으로 싸웠나요?
소 : 무슨 백병전, 말이 백병전이지 그냥 어쩔수 없으니 자결했다는 표현이 옳다고 봐요!
나 : 억울하게 병졸들하고 여기 간부들이 죽어갔네요
소 : 알기로는 한양에서는 서로 내편 네편 하며 연일 질투하고, 외척들은 감투 장사하고, 정치꾼들은 일본에 붙었다 청국에 붙었다 러시아에 붙었다 하며 자기들 생색만 내고 아무런 국방력 강화는 안중에도 엄ㅄ었다고 하지.
나 : 그래도 이미 저 오랑캐들이 들락달락 하는데 쌈질만 했을까요?
소 : 그러니 돌아가는 꼴 잘 보아요. 핵무기를 만들고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그 비위를 거슬릴 필요없다며 쉬쉬 하잖아. 뭐 다른 비책이 숨어 있는지 모르지만 말요
나 : 죄송 합니다. 소나무님 몸통을 안아드리겠습니다. 허락하시겠죠?
지금 초지진에 가면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소나무 2그루가 지금도 살아 있다. 그 성벽의 상처 난 바윗돌에 이끼만이 내려 앉아서 세월을 탓하고 있다.
7. 일본 운요호사건(1875년 9월 20일)
대원군이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다, 명성황후(민비)와 함께하는 유학자들, 안동김씨 세도가,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밀려 실각(1차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먼저 일본은 부산에 입항하여 무력시위를 하고, 이어서 강화도 초지진으로 침입했다.
이에 조선 수비병이 포격을 가하면서 영종진으로 상륙한 일본군에 조선군대는 패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배상 책임을 물은 것이 운요호사건이며, 이로 인해 조선은 일본에 강화부근의 개항,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등을 조건으로 1876. 2월 27일에 조 . 일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 식민지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1882년, 조 .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며 서양의 열강인 영국, 독일이 이어서 체결된다.
8. 1882. 6. 9 : 임오군란 발생, 대원군의 등장
이 당시에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생(훈련병들에게 지급되는 군료 대신에 쌀을 지급하는데 그 속에 모래가 들어가 있는 등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차별화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반란이 일어남)하여, 고종은 군병이 대궐에 난입하게 되자 대원군에세 사태수습을 맡기게 되어 대원군이 다시 등장한다.(2번째 등장) 물론 여기에 그 군병들을 뒤에서 조종한 세력이 대원군 세력이었다는 설도 있다.
고종을 중심으로 민씨 추종세력(매관매직,관료층의 부패,국고의 낭비,일본의 경제 침략 등)과 대원군을 중심으로한 수구세력의 갈등이 극에 달하였으며, 이미 철종 14년 1863년과 1877년 8월에도 훈련병의 소요가 발생하였다.
난이 발생하자 그 당시에 별기군 운용에 깊게 개입하고 있던 일본의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인천항에서 영국 측량선을 타고 줄행랑을 놓아 본국에 사실을 알렸다.
[1882. 7. 13 : 대원군 청나라 유패]
청은 바로 조선의 병력 파병을 결정하고 7월 10일 남양만으로 병력이 들어오고 대원군의 입경 촉구 서신(뭘 모르는 대원군이 청의 연막 전술에 놀아남, 이미 민비측에서 파병요청)을 받고 있기에 바로 12일 모든 청군이 입경하였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같은 1882년 7월 3일, 이미 1,500명의 병력이 제물포에 상륙해 있으면서 1개 중대병력을 인솔해 하나부사가 입경하여 7일 고종을 만나서 무례한 요구를 하자 대원군이 바로 청에 연락을 하여 조속한 입경을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자 청나라 군대가 기습하여 난을 제압하고, 믿었던 청군이 대원군을 포박하여 버림으로서 대원군 정권은 33일만에 끝나고 말았다. 청나라 군대는 당일 13일 정오에 대원군을 예방하여 안심시키고, 대원군을 그들 병원으로 초청하게 된다. 오후 4시경 순진한 대원군이 무 경호하에 답례차 찾아가자 대원군을 납치하여 남양만 마산포를 거쳐 청으로 압송하였다. 여기에는 대원군과 대척점에 있는 민비(명성황후)가 임오군란시 죽지않고 도망쳐 있으면서 주도 면밀한 계략으로 만들어낸 사건이란 것이 정설이다.
일본은 1,500명의 정병을 1882. 6 . 29일 제물포에 상륙시키고 7월 3일, 1개 중대를 데리고 하나부사 공사가 한양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주도권은 청군에게 넘어갔다.
당시의 대원군을 납치한 지점이 지금의 미 제8군 영내에 있는 영빈관이 있고 그 언덕에 영관장교 숙소가 자리잡고 있은데 바로 이곳이다. 당시 청군이 대원군을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하면서 초청을 하게 되고 여기에 속은 대원군이 가마를 타고 청군 파견대장 숙소로 갔다가 올가미가 씌워져 버렸다.
[제물포조약(1883년)]
이렇게 되어 더욱더 조선 내정은 청군과 일본군의 요구 조건이 늘어나게 되었다. 군란시 발생한 피해 보상과 이에 대한 방지책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청군이 반란자 170명을 체포하고 그 중 11명을 참수하였다. 일본측의 요구로 계속적인 체포가 이루어지고 많은 인원이 처형되거나 유배 되었다. 그러면서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어 1883년 제물포항이 개항을 하게 되고 일본군이 공사관 경비를 목적으로 조선 땅에 주둔하게 된다.
9. 1884년 갑신정변, 김옥균의 3일천하
개혁 인물인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개항 후에 세력을 증대시키면서 자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
임오군란의 여파로 청군 3,000명이 주둔하여 있으면서 조선 속방화 정책을 추구하게 되자, 위안스카이 등이 병권을 장악하고 민씨 외척 정권에 압력을 가하여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전문에 조선을 청국의 속방이라 써넣었다.
청 : 우리 살람 민씨 좋아해, 너희들 구했으니 뭘 해줄래?
조 : 조선은 자주 독립국입니다. 이걸로 됐으니 그만 가 주심이 도와 주는 겁니다
청 : 무슨 뚱단지같은 말을 하므니까, 우리 많은 피해 있었고 장사도 해야 하므니다
조 : 그럼 어떻게 해 드려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청 : 우리 남대문에도 조선은 청국에 속방이라는 플랜카드 걸어야 합니다
조 : 너무하신거 아닙니까, 그러면 개화당 애들이 들고 일어날텐데 괜찮을까요?
청 : 그거 걱정말아요, 다 잡아들일 테니, 그리고 앞으로 다른 나라와 조약은 우리의 통제를 받아야 하므니다.
이렇게 되자 급진 개혁파인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이 1,000여 명의 정변세력을 비밀리에 양성하였다. 바로 이시기에 청국은 청불전쟁에서 프랑스 함대에 패배하게 되어 조선에 대규모 군사를 파병할 여건이 아니였다. 반면 조선에 돌아온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종전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호의를 보이며 병력 150명을 빌려주고 일화 3백만엔을 빌려주기로 한다.
그리고 드디어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의켜 수구파 일당을 처단하고, 뒤이어 민씨 외척의 거물들도 처단하였다. 왕과 왕비는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자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청군측이 12월 5일 밀사를 경우당으로 들여보내 청군의 의지를 국왕에게 전하게 된다
청 : 고종 황제님, 우리 조선을 돕고 싶습니다
고종 : 어떻게 도울거요, 구체적 방법이 있나요?
청 : 지금 이곳은 너무 좁아서 병력이 활동하기가 어려습니다. 그러니 넓은 곳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고종 : 그러면 저 극악스런 김옥균 일당을 작살낼 수 있다는 겁니가?
청 : 우리는 만반의 준비가 되었으니 저 쪽바리 애들이 눈치채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합니다.
고종 : 알았소, 기다리쇼
옥균 : 황제 폐하 불렀습니까?
고종 : 나 여기 너무 좁아서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갑시다.
옥균 : 아니 됩니다.
고종 : 이제 다 끝나지 않았소? 죽일 놈들 다 죽였고 뭐가 무서워 우릴 여기에 가둬 놓는단 말이요
결국 김옥균은 바로 옆의 계동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너무 수비 하기에 문제점이 많았다.그러자 다시 민씨는 고종을 조종하여 꼭 창덕궁으로 가고 싶다고 김옥균을 꼬시라고 한다. 이윽고 김옥균은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지만 설마하고 1884년 12월 오후 5시에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그리고 12월 6일 오후 3시, 청군 1,500명의 기습작전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감행 되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3지대 개념의 방어벽이 펼쳐져 있었다.
외곽 수비대(제1지대) : "짱골라는 안된다, 집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중과 부족으로 다 죽어가고 문을 열렸다.
중문 수비대(제2지대, 일본군이다) : "우리노무니 괜히 피를 흘리기 싫습네다" 이놈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마지막 창덕궁 궁내(제3지대)에는 개화당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되었다. 뭘로 총칼을 들고 온 1,500명을 대항하겠는가?
3일 만에 개화파는 무너졌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박영교,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준 후 피살되었다. 나머지 개화파는 철저히 민씨 일가의 수색에 의해 수십 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너무 갑작스런 정변으로 사회적 기반이 없었고 일본군을 섭외한 것이 패착이었다. 청군의 불법적인 침범은 당연한 것이고 일본군의 배신도 한몫 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역사에 최초로 표방한 자주국임을 선포한 거창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오히려 이로인해 청국과 일본국, 나아가 서양 열강들이 청나라에 이어 조선으로 눈독을 들이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 한성조약] : 일본군이 조선땅에 군림하다
이로 인해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 대위가 죽기도 했다. 일본으로 도망친 김옥균을 보내라는 조선의 요구에 그들은 대들었다
"일본에 가있는 역적들을 보내시요"
"무슨 말씀이요, 피해는 우리가 보았소, 배상하시요?"
잠깐만요, 김옥균의 최후는?
일본에 들어간 김옥균은 10여 년을 버티고 살았다. 그러나 이때 조정에서 암살자 홍종우를 일본에 보냈다. 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만약 일본이 문제를 제기하면 국제적 망신이 될 수도 있었기에 암살을 못했다.
이에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청나라로 갈 것을 권유한다. 청나라가 도와줄 것으로 꼬셨다. 결국 1894년 중국 상하이로 이동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절대로 둘이 있질 안했다. 김옥균은 의심을 하면서도 많은 시간속에서 경계심을 누그려 뜨렸다.
홍 : 형 너무 따분하잖아, 우리 상해로 갈까?
균 : 무슨 소릴, 지금도 날 죽이려 조정에서 혈안인데 않돼!
홍 ; 내가 알기로는 지금 청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던네, 서태후인지 민태후인지가 들어서 마구 정권을 휘들르고 있다던데.
균 : 그래, 그럼 거기도 개혁의 몸부림이 치겠는데.
홍 : 그럼 지방에는 군벌들이 생겨나 조정의 통제가 되지도 않고, 여기저기에 주먹질 잘하는 패거리들이 힘을 만들어 관군을 친다고 해.
균 : 잘 되어가는군. 그놈들이 아니였으면 우리 조선은 벌써 새로운 자주 독립 국가 되어 있을 거야.
홍 : 혹시 알아. 서방 세력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도움을 줄 수도 있잖아. 청나라는 걱정하지 말아. 이제 힘도 없다고.
균 : 너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공격하면서, 은나라 주왕을 비난한 내용을 아니?
홍 : 난 잘 모르지. '빈계지신"은 들어봤지. 뭐 남자가 할 일을 못하고 여성이 나서면 안된다나~.
균 : 하기야 일본도 보니 여성을 좋아하네. 그래도 나서지는 않는데 청국은 서태후가 지맘대로 정사를 좌지우지 하는데 어떨까?
홍 : 우리 같이 가서 한 번 보자구. 알아 혹시 서양 힘센 녀석들 만나 도움을 받을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서 상해에 와서 머물게 되었다. 상해는 무법 천지 같았다. 외국인이나 군인들이 맘대로 활개치고 다니는데 청군은 숨어서 망이나 보고 있었다. 김옥균은 어느 정도 홍종우의 말이 일리가 있다보고 혹시나 모르기에 경계심을 갔고 있던 마음을 누그려 뜨렸다. 그리고 절대 둘이 있는 시간을 회피했었는데 홍종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드디어 홍종우는 이때를 기회로, 그를 믿고 있는 김옥균를 살해했다. 청나라는 이런 홍종우를 조선에 김옥균 시신과 함께 보내주었다. 조선은 김옥균을 능지처참으로 다시 죽였다.
영웅으로 대접받은 홍종우
고종은 홍종우를 신임했고,황국협회 간부도 맡았다.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보수단체 대표인 황국협회에서 간부가 되고 독립협회에 폭력을 휘둘렀고 결국 독립협회가 해산하게 된다.
세계 각국이 이를 예의 주시하는 가운데 조선은 암살자를 비호하고 극진한 대접을 해주는 역활을 수행함으로서 도덕성을 의심받게 된다. 암살자가 얼굴을 들고 큰소리치며 살아간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육군 2개 대대, 군함 7척을 이끌고 인천에 나타났다. 그들은 1885년 1월 2일 병력을 이끌고 한성에 들어와 조약을 맺게 되었다. 조선은 거꾸로 정변에 따른 일본의 물적 인적 피해 보상을 해야 했고, 그 무마책으로 일본군 1개 대대가 공사관 경비를 위해 주둔하게 허락 되었다.
1885년, 영국 극동 함대가 거문도 점령, 청에 잡혀간 대원군이 돌아왔다.
제 4 절. 여기서 잠깐?, 일본의 개항과 제국주의로의 변화하는 모습
사실 일본도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것은 멀지않은 싯점이고 조선시대 말기 모습과 비슷했다. 그 동안 임진왜란 이후 실권을 잡은 최대 군벌인 "에도(도쿄의 옛이름) 막부"시대는 서양과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네덜란드 정도와 나가사키항에서 제한적인 무역만 하였다.
그러다 19세기 중엽에 청이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일본도 큰 충격을 받았다.
1. 18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군함 출현
이런 상황에 미군 군함이 대포를 탑재하고 나타나 뻥뻥 대포를 쏘아 대다 보니 결국 에도 막부는 굴복하여 미.일 화친 조약을 맺고 2개 항을 개항하며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였다.(1854년) 이러다 보니 다른 서방국가도 너도나도 일본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으로 막부의 권위는 추락하고, 외국상품이 들어오면서 국내 물가가 상승하고,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일부 하급 무사들은 개항에 반대하여 외세 배격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2. 1868년, 메이지 유신(명치유신)
결국 그동안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하급 무사 세력들이 힘을 합쳐 존왕양이 운동을 통해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이 중심이 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왕정복고에 성공하였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 집권제를 수립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민평등 정책을 실시하여 봉건적인 신분 구조를 개혁하였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무사의 역할을 부정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시행하고, 산업 육성,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개혁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급진적 개혁으로 농민들의 조세 부담이 오히려 늘어나 농민의 반란이 터지고, 특권을 상실한 무사들이 각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도 하여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임진왜란시와 같은 정한론이 제기된다
3. 1871년, 이와카라 사절단 유럽시찰, 근대화의 견문을 넓히다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통상 조약 수정을 위해 이와카라 사절단을 미국 등 유럽 나라에 보내어 협상을 벌이지만 쉽게 서구열강이 그들의 기득권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변화하는 모습을 실감하고 근대화의 정책에 불을 당기기 시작하여 열강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 조선 사회와의 시차는 없거나 갑신정변인 1884년과 비교하면, 불과 16년 전인 1868년에 그들은 근대화의 길로 걸었고 우린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제 5 절. 조선의 근대화 몸부림
1. 1894년, 갑오 농민 혁명(동학혁명)
1894년 음력 1월 10일, 전라도 고부, 동학 접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들이 나쁜 정치를 견디다 못해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했다. 하지만 사태 수습을 위해 내려온 관리가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여 고부 봉기는 농민 혁명으로 번졌다.
농민군은 세력이 8,000명이 넘어갔다. 관군이 대포와 기관총까지 들고 왔지만 전라도 감영군이나 중앙군이 패하며 4월 27일에는 전주성이 함락되었다.
결국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5월 초에 청나라군이 들어오고, 이어서 일본군도 들어왔다. 5월 7일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지 않도록 함이였다.
그러던 농민군이 가을 들어 다시 봉기했다. 사회개혁을 두려워하던 양반층 일부가 민보군을 조직하여 각지에서 농민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결국 전봉준도 삼례에서 일어났다. 2차 봉기에는 전국에서 20만이 넘었다. 그해 9월의 일이다.
이렇게 되어 결국 동학교주 최시형도 동참 선언하고 관군에게 일본군과 맞서 싸우자고 제안 하지만 공주 우금치에서 전봉준 부대가 패하고,12월 2일 전봉준이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동학 혁명은 아래(하급 농민, 노동자)로부터 혁명의 불꽃이 일어난 개혁의 몸부림이었다. 이전까지의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은 위(관료나 제도권 실세들)로부터의 변혁을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변화의 조짐은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이 땅에서, 청일 전쟁으로 비화되며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의 기득권을 청으로부터 물려받고 조선을 침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2. 청.일전쟁
조선 조정에서 동학군을 제압하기 위해 청군의 지원을 요청하여 청군이 6월 6일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응하여 일본 공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틀 후에 제물포에 상륙했다
.
이와같이 일본이 재빨리 대응하게 된 배경에는 1885년에 체결된 "텐진 조약(갑신정변 3일 천하를 평정한 후에 조선과 일본은 한성조약을, 일본과 청나라는 청나라 텐진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한나라 병력이 출동시 상호 통보하고 공동 보조를 마추기로 약조한 조약임)"에 따라 양국은 군 병력이 파병시 사전 통보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왔다.
하지만 실은 이미 내정에 심어 놓은 밀꾼이 우리 정부가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사전 준비하고 있었으며 병력의 규모가 무려 4배에 달했다.
3.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 : 1894. 7~1896. 2
일본군은 7월 13일 마침내 경복궁을 점령하고 일본의 지지를 받는 개화파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어 갑오개혁이 시작되어 신분제 타파, 청과의 사대관계 혁파 등이 일본의 압박에 의해 실행되게 된다.
이 시기에 1.2.3차의 개혁이 시행되고, 단발령과 건양 연호를 사용하고 군재 개편 등이 시행 되었으나 고종의 아관파천 등이 이어지면서 개혁은 좌절되었다.
4.시노모세키 조약(청 : 일) : 1895년 4월 17일
그리고 1894년 7월 25일, 일본군이 아산만의 청함대를 기습공격(풍도해전)하여 청일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승리하여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청의 속방이 아닌 자주독립국임을 인정받았지만 이건 일본의 차후 침략을 위한 계략이었다.
또한 일본은 랴오뚱반도(러시아,프랑스,독일 삼국의 요구로 바로 러시아에 할양됨)와 대만을 할양받게 되고 개항과, 서강 열강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바로 이때에 일본은 민비,즉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여 들였다고 보고 민비 시해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5. 1895. 10월 8일 : 을미사변(민비시해 사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의 침략 여건을 마련하고, 나아가 청을 침략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대만과 랴오뚱반도를 할양 받았다가 러시아 등 서방 3국의 방해로 랴오뚱반도는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는데 여기에 조선 민비가 러시아를 끌여 들였다고 일본측이 구실을 만들어서 조선의 황후를 제거하게 됨)했다.
일본의 주한공사 미우라는 수십명의 일본인 낭인과 일본 수비대를 하수인으로 고용하여 1895년 8월 20일(음력)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된다. 그리고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민비의 승하를 발표했다. 이 후에도 단발령이니 건양 연호 사용,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 개혁정치를 친일 내각에 의해 추진 되었지만 전국적인 반일 의병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6.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민비세력에게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결국 일본이 민비를 시해하는 악행을 저질러 반일 감정을 일으켰다. 이에 친미. 친러세력이 고종에게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이에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제 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고종은 민비의 죽음을 보며 생명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지는 않을까 불안하고 먹는 음식도 혹시나 독이 들어있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한다.(옆 방에 권총을 차고 경호원이 있었다)
고 : 나를 보호해 주시오, 비밀리에 갈테니 문을 열어주시오
러 : 알겠습니다. 우리 공사관으로 모시겠습니다.(나무 베다 팔고 광산 개발하고 고래잡이 하고 등등 이익이 많았다)
엄상궁이 앞장서서 궁궐을 나가기로 했다. 머리가 좋고 센스가 있는 엄상궁이 대궐문을 자주 드나들어 경계병들의 의구심을 누구려 놓았다. 가마가 나가는데 앞에 앉아 있는 엄상궁을 보고 그냥 내보냈다.
초병 : 또 어딜 가시나?
엄 : 알면서, 저 남대문 밖 저잣거리에 멸치사러 가지
초병 : 자주 얼굴 보여줘~
이렇게 해서 궐밖으로 나가자마자 러시아 군이 호위하여 러시아 공사관(지금도 덕수궁 돌담길 북쪽에 있다)으로 고종은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민비가 없는 고종의 옆구리에 앉아서 함께 잠들어 낳은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마지막 왕인 순종이다.
백성들 : 임금이 거기 있으면 웃음거리니 빨리 환궁해야 합니다.
독립협회 : 다른 나라들도 지금 난리인데 체면을 살려야 합니다. 궁궐로 와야 합니다
그래서 1년만에 다시 경운궁 , 지금의 덕수궁으로 나왔다.
7.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식
신하들의 요구에 고종은 황제가 되고, 만국에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권한이 너무 높고, 서방 열강들이 무법자처럼 달려들어 이권 경쟁을 벌이게 되며, 공장도 생기고, 전기도 일부 들어오고, 학교도 생기고 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러시아는 기득권을 가지고 자금줄을 잡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머무는 땅도 내놓으라 하였다. 이런 속에서 기회만을 보고 있는 일본이 더이상 물러섰다가는 조선이 러시아로 넘어간다고 판단하고 드디어 러시아에 한판 싸움을 벌이게 되니 이것이 러.일전쟁이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연호는 광무)
1899년, 서대문-청량리간 전차 개통, 인천-노량진 철도
1900년, 한강철교 준공
1902년, 최초로 하와이에 집단이민 121명 출발
8. 1904년 2월 8일, 러 . 일 전쟁
앞에서 알아 보았듯이 이미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시대를 끝내고 미국 등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하에 산업화로 나아가 현대적인 변화를 추구하여 유럽 열강과 같은 제국주의 기틀을 마련해 갔다.
그러다 우리 조선의 1894년 동학혁명 당시에 동학군을 제압할 목적으로 청군과 함게 들어왔다가 청군을 제압하고 "시모노세끼 조약"으로 조선에서 기득권을 챙기고 만주에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반면 러시아는 계속 눈치를 보며, 봇물 떠지듯 밀려드는 서양 열강의 이권 다툼에 끼여, 때로는 민비의 적극적 지지자 역활도 하기도 하고 있다가 결정적으로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으면서 고종의 호위무사로 거듭나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과 닭쫒던 개 지붕처다 보는 격이 된 일본은 이런 러시아를 가만히 바라보지 않았다. 조선의 자주국임을 이유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빼내고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 용쓰는 시기가 되었다. 상호 견제와 야합이 판치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1897년 중국에서 철도건설을 시작하였다. 이에 일본은 경각심을 숨기지 않았다. 청과 러는 비밀 협상으로 동청철도부설권을 러시아에 주었다. 우리 조선도 친러 정책을 펴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위해 일본과 관계를 우선시 하였다.
1900년, 중국 북부에 '의화단 사건"이 만주까지 영향을 미치자 철도보호를 이유로 병력을 만주에 진입시켰다. 하지만 의하단이 진압 되었음에도 철수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을 경계하고 있는 영국과 1902년 1월 동맹을 맺어 대륙진출을 위한 세력을 차츰 키워나가고 있었다.
[의화단 사건과 신축조약], 우리의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의 그림을 그려 봄이 어떨까~!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하단이 일으킨 외세 배척운동이다. 경자년에 일어났다 하여 경자교난이라고도 한다. 의화단들이 주먹을 쓰는 비적들이란 의미에서 권비의 난.단비의 난이라고도 한다.
의화단은, 1897년 산둥지방을 독일이 점령하자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되어 외세에 맞서게 되는데, 당시 청나라에 들어와 있는 열강 8개국(영.독.러.미.오스트리아.이탈리아.일본.프랑스) 50,255명에 청나라는 의화단 30만에 관군 7만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1899년 11월 2일~1901년 9월 7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결국 의화단과 관군이 패하게 되고, 청나라 서태후의 명으로 이홍장(군벌)이 대표가 되어 화친(이것을 신축년에 이루어졌다 하여 신축조약이라 한다)을 맺고 피해 보상과 관련자 처벌을 통하여 결국 서구 제국의 베이징 주둔과 러시아. 일본군의 침략을 가속화 시키면서, 서로 이권을 챙기기 위한 막후 비밀 협상이 벌어지고 이합집산 하면서 청국이 망하게 된다.
이런 양국은,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보호령으로 두고 러시아에게 중국 만주에서 우월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고, 반면 러시아는 만주에대한 독점권 뿐만 아니라 조선을 중립지대로 설정하자며 맞서게 되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여순~봉천전투, 대마도 해전 : 1904년 2월~1905년
이에 일본이 1904년 2월 8일 밤, 기습적으로 여순(랴오뚱반도)에 대한 기습 공격과 9일 조선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 2척을 침몰시키고 10일 선전포고를 하였다. 드디어 1905년 1월에 여순을 함락하고 이어서 3월에 봉천 전투에서 승리하여 결정적 승기를 잡았지만 너무 전쟁이 오래 지속되고 피해가 엄청나 러.일 양국은 극도의 피로감에 쌓이게 된다.
당시 일본군은 68만 명의 사상자에 전사자가 13만 5000명이었고, 러시아는 40여 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방이 서로 부족했던 양국은 대마도 해전(대한해협 해전)에서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지원하러 오던 발틱 함대가 완전 괴멸되면서 극적으로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고 미국의 중재로 맺어진 것이 "포츠머스 강화조약"이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확실히 하고, 만주로 진출하여 요동반도와 사할린 남부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자.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을 거치지 않고 국제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며, 일본은 통감 한 명을 두어 외교 사항을 관리한다는 내용이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개돼지만도 못한 정부대신들아~~"을사늑약을 비분강개한 내용이다. 평소 3,000부를 찍었는데 이 때는 1만부를 찍었다. 장지연 등 10여 명이 체포되고 신문은 무기 정간 조치를 받았다.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우리 정부 대신들이~, 그저 편안히 살아남아서 세상에 나서고 있다.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당시 언론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대한매일신보(영국인 1904년 조선 특파원으로 와서 창간), 그대로 실었다
대한일보, 경거망동이라 평했다
제국신문, 한때의 분함을 참으렴 백 년 화근을 면하리라,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언론이란 얄궂은 얼굴은 말머리였다.
9. 1907년 7월 : 헤이그 밀사 사건, 그리고 폐위된 고종
이렇게 하여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은 미국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으나 모른체 하였다. 또한 서울에 있는 각국 공사들에게 부당성을 알렸으나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고종은 1907년 2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국제법회의)'에 40여 국, 250여 명의 대표들이 참석한다는 것을 이용해 부당성을 알리려 했다.
이에 따라전 의정부 참판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등 3명을 밀사로 보내게 된다. 19078년 4월,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호소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다. 러시아가 당시 의장국이었다.
하지만 결국 전달하지 못하고 다시 6월 19일 독일 베를린에 도착하여 프랑스어로 다시 번역하고,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여 28일 소문을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국 대표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러시아 대표를 방문하여 조선 대표단의 참석을 요청했지만 자기 권한 밖이라며 거절하게 된다.
사절단은 다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표들에게 지원을 호소했지만 거절 당하게 된다. 이 당시에 각국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져 호응을 얻었고 세계 만 방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위종은 영국 기자가 회장인 국제 협회에 초청되어 유창한 프랑스어로 호소문을 낭독하여 큰 박수 갈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연일 각국에서 조선의 사정에 화답하는 '억일부한'의 여론이 일어났지만 본 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준은 분통한 나머지 식음을 끊고 유숙한 호텔에서 순국하였다. 이위종과 이상설은 조선땅에서 일본인들의 각본에 의거 사형과 종신형이 내려져 귀국하지 못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1907년 7월 3일, 고종을 찾아가 협박하고 감금했으며, 이완용, 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의 퇴위를 협박하여 마침내 1907년 7월 20일 고종은 그의 아들 순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으며 그나마 몇 안되는 군대도 해산 당했다.
10. 1907년 8월 1일 : 대한제국 군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 독립군의 시작
이렇게 하여 조선의 외교권, 군사권까지 일본이 장악하여 국민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에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대규모 의병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 해산 군인들이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계기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8월 2일에는 원주 진위대 군인들이 무기고를 점령하여 그곳 민병과 합세하여 원주시를 장악했다.
1907년 8월 10일에는 강화 분견대의 군인들이 봉기하여 한때 강화성을 장악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데, 이강년과 신돌석은 경상도 북부에서, 기삼연과 김태원은 장성과 함평에서, 이석용과 문태수는 임실과 무주에서, 김동신과 박정빈은 공주와 해주에서, 홍범도와 차도선은 삼수.갑산 일대에서, 최재형과 안중근은 경원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 의병장들은 유생뿐만 아니라 해산 군인, 평민, 천민들도 참여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했지만 내부 의견 불일치와 연락 부재 등으로 결국 일본에 패하고 점차 소멸되어가며 일본의 초토화 작전에 밀려 일부 의병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으로 발전했다.
11.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사살됨. 아~! 안중근 의사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 해주에서 태어났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히로부미를 잘 모르는 의사는 당시 일본인 환영객이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돌아보고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알았다. 그러나 혹시 몰라서 이토에게 3발을 쏴서 절명케 하고 나머지 총알은 주변 인물에 쏘았다.
원래는 러시아측에서 재판을 받아야함에도 부담을 느낀 러시아가 일본에 넘겼고, 일본의 하얼빈 영사관을 거쳐 뤄순(현재는 다렌)에 있는 일 본 고등법원으로 송치되었다.
그리고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교수형으로 짧지만 강한 32세를 마감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당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2. 한일병합 조약 : 1910. 8월 22일 조약체결, 8월 29일 발효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조선통감인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약을 통과 시키고 8월 29일 발효시켰다. 대한제국이란 국호는 사라지고 일본제국 천황이 다시 "조선" 칭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를 "경술국치"라고도 한다.
13. 제1차 세계대전, 1919년 3월 1일, 그리고 독립운동의 몸부림,
3.1 운동은, 일제가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9년 간 식민 무단 통치와 우리 민족 말살 정책을 추구하였으며 이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렸다. 이는 우리 민족 내부의 독립 역량을 높이고 독립운동의 확고한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정책으로 1917~18년을 전후하여 독립 운동이 멸절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다시 불씨가 살아나 독립운동의 대도약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이 3.1운동도 당시에 벌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미친 영향이 지대했다고 본다. 여기서 잠깐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가.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7월 28일부터 4년간 지속된 세계대전이다. 유럽은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징기즈칸의 몽고나, 투르크 제국 등에 짓밟힌 곳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로 반전이 되어 지금까지 세계사를 지배하고 있다.
그 당시에 영국은 기계와 기술은 있는데 노동력이 부족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눈을 돌려, 특히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부려먹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식민지를 얻으려 혈안이 되자 프랑스, 스페인, 독일, 폴투칼 네덜란드 등이 식민지 쟁취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발칸반도에서 헝가리. 보헤미아. 폴란드에 이르는 동구 일대의 지역은 게르만과 슬라브 및 아시아계 민족의 접촉점으로서 무척 복잡한 민족 구성을 보이고 있엇다. 또한 19세기 이래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영국 등 열강의 진출 목표가 되어왔었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발전되면서 국가관계의 불안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투르크 제국의 쇠약으로 발단된 발칸 문제는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거슬러올라가면 1878년의 베를린 회의 이래로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범 슬라브주의 세력과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주의 세력은 발칸에서서 격렬하게 충돌하여,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투르크에서는 청년 투르크 당이 영국과 프랑스의 후원 아래 1908년에 혁명을 일으켜, 입헌정치를 수립하여 지도권을 쥐고 민족주의와 근대화를 주장했다. 이 혁명은 발칸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투르크의 외교정책은 지금까지의 친독일정책이 포기되고 3국협상으로 접근할 조짐을 보였다. 또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관리 아래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2주의 주민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독일에서는 발칸에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909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의 병합을 선언하게 했다. 이것은 범 슬라브주의에게 큰 타격이었다. 원래 2주의 주민은 슬리브 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세르비아는 일찍부터 대슬라브를 주창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이 2개 주 및 알바니아 주를 합병하여 아드리아 해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인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세력과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연합세력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해에 자치령 불가라아도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11861년 통일 이후 자본주의 발전과 인구의 격증에 떠밀려 아프리카에 대규모의 식민지를 계획하고 있었다. 때마침 투르크 제국의 혁명이 발발하게 되자 제2차 모로코 사건으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국제관계가 긴장된 기회를 이용하여, 1911년 갑자기 아프리카 북부의 해안 투르크 영토인 트리폴리를 점령하게 되자 이탈리아.투르크 간에 1911~1912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이탈리아가 승리했다.
이 사건으로 투르크가 힘이 없음이 증명되어 발칸의 여러나라들이 동맹하여 투르크의 영토의 분할을 획책함에 따라 제1차. 제2차 발칸전쟁이 발발했다. 이전쟁으로 투르크는 수도 콘스탄티노풀 부근을 제외하고는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새로이 알바니아 국가가 탄생하고 세르비아 대 오스트리아의 감정이 악화되었다.
투르크와 불가리아에 대한 다른 발칸 여러나라들이 감정적으로 대립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투르크와 불가리아는 동맹국 편에, 세르비아와 기타 나라들은 연합국 편에 가담하여 싸우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발칸반도는 "화약고"로 불려지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봉에서 개쵣된 육군 대훈련을 열병했다. 그 행사를 끝내고 폭탄테러로 부상한 수행원들을 방문키로 하고 가던 중에 운전수가 길을 잘못 들어 차가 멈추는 순간, 세르비아인의 해방을 원하는 세르비아계의 청년 19세 청년이 권총으로 황태자 부부를 저격하여 대공비가 쓰러지고 황태자는 목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들의 열네번째 결혼기념식 날이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러시아와 프랑스 및 영국은 세르비아를 지원했고 독일은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했다.
1917년 4월에 미국이 세르비아 편에 서게 되면서 독일은 결국 1918년 11월 11일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나. 러시아 혁명
이렇게 전쟁이 오래가면서 러시아는 물자결핍에 빠지면서 총도 군화도 제때에 공급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식량조차 부족하여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러시아 항제 니콜라이 2세는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려 전쟁터에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무려 1천 5백만명이 전선에 나가면ㅅ서 급격히 노동력이 저하되면서 국내의 불안이 고조되었다.
3월혁명
1917년 3월,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9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빵을 달라"외치면서 시위는 확산되고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군대까지 군중 편에 가담하게 되었다.
결국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물러나게 되면서 1917년 3월 15일 303년간 지속된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고 자본가를 중심으로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중산계급을 토대로 세워진 임시정부는 노동자와 대립하게 되고, 그들은 독일에 대해 승리를 차지하여 이권을 찾을 때가지 게속하여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면서 국민의불안은 계속되었다.
10월혁명(또는 11월 혁명)
이때 사회주의 신봉자로 전쟁에 반대하여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1870~1924)이 독일에서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귀국했다. 그는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기관 소비에트(평의회)가 실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설파하며, 4월에 귀국한 레닌은 볼셰비키(사회민주노동당의 다수파)를 지도했다.
마침 케렌스키 내각을 타도하려는 제정파 장군 코르닐로프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는데 볼세비키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반란을 진압하는데 기여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확장해 나갔다.
1917년 11월 7일, 볼세비키가 일어나 무장봉기로 케렌스키를 축출하고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다. 이것이 러시아 달력으로는 10월 혁명. 세계 달력으로는 11월혁명이고 이 3월혁명과 11월혁명을 합쳐서 "러시아 혁명"이라 한다.
레닌은 혁명에 성공한 후인민위원회에 의한 정부를 구성했다. 이어서 교전국을 상대로 무병합. 무배상 강화를 주장하는 "평화에 관한 포고"를 주장했지만 거부 당했다.
이에 소비에트 정부는 트로츠키를 파견하여 독일과 단독 강화를 체결했다. 이 강화에서 소비에트 정부늕 폴란ㄷㅡ.핀란드.리트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우크라이나.베사라비아를 포기했다.
러시아의 차르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과 함께 소비에트 병사에 의해 살해당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다음해에 1918년 독일도 혁명이 일어나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 이로써 제1차 대전은 끝나게 되었다.
레닌은 1918년 7월에 소비에트 공화국 헌법을 공포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가 확립되고 공산당 이외의 정당은 무조건 금지되었다. 수도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이어 우크라이나.백러시아.트란스코카시아.극동 등 기타 소비에트 공화국이 합류하여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이를 통상 소련(소비에트 연방)이라 부른다.
다. 3.1운동으로 인해 청나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수립되어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를 포용해서 1919년 9월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의 헌병 무단 통치에 만주, 노령 등 국외에서 둑립군 무장 투쟁이본격화 되어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며 세계 만방에 약소 국가의 독립 열망을 알리게 되었다.
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 1920년 6월 7일,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등이 이끄는 연합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가 일본군을 유인하여 격파한 작전으로 일본군 400여 명이 죽고, 독립군은 6명의 피해만 발생하는 큰 승리를 거뒀다.
청산리 전투 : 1920. 10월 21일~26일 어간에 김좌진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일본군을 10여 차례 물리치게 되며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군이 대승을 거둬었다.
[우등불]이란 자서전을 남긴 철기 이범석 장군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며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기록에서 1920년 8월 현재 알타이산 동북지역의 한국 독립군무장부대는 그 수가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의 기록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애국청년들의 훈춘 일본영사관 습격으로 일본 경찰 30여 명이 살해되어 일본측은 청측에 엄중 항의를 하고, 동시에 만주지배를 위해 조선독립군 공격을 시도하게 되었다.
당시에 일본군은 5개 사단 5만 명 규모의 병력으로 훈춘지역을 향해 공격해 왔다. 일본군의 목적은 청산리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독립군의 주력인 북로군정서를 포착,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만주의 독립군 주력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로 나뉘어져 있었고, 서로군정서는 지청천 장군(1888~1957)의 지휘아래 요녕성에서 활동하였고, 북로군정서는 김좌진 장군의 지휘아래 길림성에서 싸우고 있^었으며 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였다.
길림성의 독립군 근거지는 길림성 왕칭센 시따퍼의 큰 살림 한복판에 있었다. 울창한 대산림이 수천리 이어지는 곳으로 이 원시림을 이용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무기를 은밀, 대량으로 운반해 무장을 하게 되었다
[체코와의 은밀한 무기 거래] "유해발굴 현장에 체코제 무기들이 자주 나오는 원인의 해답이 되다"
체코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하게 된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헝가리에서 분리된 슬로바키아와 더불어 단일 국가를 형성하여 체코슬로바키아란 국명이 채택되었다. 바로 이때가 청산리 대첩이 이루어지던 시기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2개 군단이 러시아 내전 중에 시베리아 전역에 개입하고 있던 동구전선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서부에 이르러 연합군과 손을 잡고 싸워서 개선 귀국하려 했고, 따라서 이들은 러시아를 가로질러 우랄산맥을 넘어 불라디보스톡에 집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서쪽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한국 독립군 이야기를 듣고 블라디보스톡 무기고에 저장된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팔게 되었고, 작은 대포, 중기관총, 일제 및 러시아제 소총, 수류탄 등과 무려 80만 발의 탄환까지 얻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획득한 무기를 이용하여 북로군정서는 내륙으로 진출하여 일본군을 강력히 기습 타격하여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두만강을 건너려 남하하는 과정에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부딪치게 되었으며 이틀 낮 밤에 걸쳐 벌어진 격전에서 2,800명의 독립군이 5개사단 5만 여명의 일본군을 상대하여 3,300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케하는 대승을 거뒀다고 한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60여 명, 부상 90여 명이었다.
[이때도 4당 4색이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혹평이 있는 것이 홍범도 장군이다. 최초 1920년 10월 8일, 일본군의 만주 진입에 따라 4개 독립 단체가 대표를 북로군정서에 파견하여 연합 작전을 논의 하였다. 이 작전회의에서 김좌진 장군이 총지휘, 홍범도 장군. 최명록이 부사령관. 이범석 장군이 전투사령관으로 부서를 정했는데, 다음날인 9일 새벽이 되니 3개 단체가 부서의 임무 배당에 불만을 품고 모두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때 참가한 병력은 홍범도의 국민회에서 400명, 의군부에서 200명, 한민단은 약 1개 중대, 의민단은 일부 모험대원만 참가하게 되는데, 결국 한민단 1개 중대 병력만이 북로군정서의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최초 넓은 송림평에서 격전을 하려다 소수의 병력으로 싸우기에 적합한 청산리 골(백두산 동북쪽, 함경도 무산 북쪽 중국땅에 있다. 북위 50도로 겨울은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린다) 안쪽의 백운평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 홍범도 장군은 왜~?"독립군임은 맞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 이후의 행적은 ?"
홍범도 장군은 1868년 10월에 평양(또는 함경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1895년 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도 무산, 갑산일대에서 활동한다.
1907년,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자주일자 만주로 건너갔다. 1910년 만주로 망명,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독립군 사령관이 되었다. 김좌진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봉오동전투를 지휘했다. 이후에 일본의 독립군 말살을 위한 추격이 강화되어가는 와중에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다.
간도참변이란, 1920년 일본군이 만주로 출병하여 무고한 조선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으로 훈춘 사건이라고도 한다. 당시 일본군이 봉오동에서 당한 보복으로, 만주의 일부 중국 군벌들(마적단?)과 협조하여 우리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약 4개월 동안 수만명의 조선인을 무차별로 살해(약 3만 명)한 사건이다.
중국 마적단은 당시에 400여 명으로 혼춘성을 오전 9시부터 무려 4시간 동안 공격하여 온갖 약탈을 자행하면서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수명의 일본인을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 마적단은 중국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당시는 조선인들도 일부는 마적단을 이끌었다 한다. 내 어머니께서 생전에 만주에 사셨던 이야기를 하시는 내용 중에 조선족 마적단 이야기를 자주했다. 뻔히 어느 집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고 지내기에, 워낙 살기에 궁핍한 시기라 일본 관영이나 중국인 집을 습격하여 약탈을 했지만 일부 조선인 집에도 들이닥쳐 홀딱 다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인지 예를 들어 옥수수같은 경우에 양식용과 씨앗이 구분되어 있는데 그래도 씨앗은 던져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도 그 당시에 마적단의 일원이었고, 마적단이 약탈만 한 것이 아니라 일본 관영에 침투하는 과정에 자연스레 일본군이나 경찰들과 전투를 벌였다 한다.
그러니 독립군과 마적단의 명확한 구분도 사실은 어렵다면 어떨까, 문제는 나라없는 설움이 빚어낸 아픔이다
사. 자유시 참변이란?
만주 참변에 이어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이다. 당시 훈춘사건으로 세력이 약화된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연해주로 이동하게 된다. 연해주 자유시에 도착한 독립군은 조직을 정비하고 소련 정부와 협정을 맺어 무기를 제공 받는 등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이미 러. 일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었기에 비록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했지만 새로 들어선 레닌 정부는 아직 혼란기에 있었기에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당시 러시아는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가 혁명을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했으나 기존의 제국주의 세력들과 내전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것을 적백내전이라 한다. 이때 일본은 같은 제국주의였던 로마노프 왕조의 편에서 백군의 편을 들어 내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약 7만의 병력이 시베리아에 들어와 그들의 땅을 넓히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리의 독립군을 끌어 들여 백군 편에 있는 일본군을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독립군이 자유시로 이동해 오면서 현지인들과 마찰을 빚게 되어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간도의 독립군을 자유시로 모이도록 앞장선 인물이 상해임시정부 초대 총리를 지냈던 이동휘였다. 이들이 이끌고 있던 군대는 "대한 의용군"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처음 "대한 의용군"을 지지하다가, 당시 러시아 땅에 있던 "고려 혁명군"에 러시아의 힘이 실리자 "고려혁명군"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동휘는 대한의용군으로 통합하려 하였고 러시아는 고려혁명군으로 통합하려 하였다. 이때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은 러시아가 마음에 안들어 다시 북간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결국 끝까지 대한 의용군은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러시아의 무장 해제를 거부했다. 이에 러시아 볼세비키 군이 대한의용군을 공격하게 되었고 이때 고려 혁명군이 여기에 가담하여 대한 의용군을 공격하여 참변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따라서 일본은 외교적 압박을 통해 조선인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가 동의하게 되고 1921년 6월 21일, 자유시에 주둔 중인 독립군에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하였다.독립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격으며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의용군 2,000여 명 중에 100여 명이 전사하고 8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물론 홍범도 세력이 얼마나 이 볼세비키 군의 무차별 공격에 가담했는지는 모르고, 기록도 부재하다. 그러나 홍범도 일행은 대부분 볼세비키 당에 가입하고 무장을 해제하고 연해주 일원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독립군 활동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홍범도가 도착한 연해주 자유시(일본과 러시아의 완충지대)에는 당시에 극동 공화국 측의 사할린부대와 레린을 따르는 자유대대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게 되는데 홍범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자유대대를 선택했고 자유대대가 사할린 부대를 공격하여 승리를 했다.
이후 재판과정에 홍범도는 과거 러시아 빨치산과의 연계 작전을 한 경력을 인정받아 재판 위원으로 참석하고, 소련 공산당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레닌과 단독 면담도 했으며 권총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1923년에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사할린 부대 출신인 한인 2명의 폭행으로 앞니 2개가 부러지기도 하였다. 이에 홍범도는 레닌이 선물한 권총으로 이들을 저격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쉽게 풀려났고 1927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하여 정식 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한 집단농장에서 한인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에 카자흐스탄으로 갔고, 그곳에서1 943년 76세로 삶을 마감했으며 그곳의 공동묘지에 잠들다 이번에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게 되었다.
14 : 제2차 세계대전과 8.15 광복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은 동양의 일본과 유럽의 독일이 세계정복을 꿈꾸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넘보고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의 유구교에서 철도폭파 사건을 일으켜 그것이 중국측의 소행이라고 억지를 부비리며 군사침략을 하게 된 것이 만주사변이다. 일본은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하여 만주제국을 세웠다.
그후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에서 노구교 사건(일본 병사가 없어졌다는 핑계, 사실은 용변을 보러갔다가 복귀)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어서 30만 이상이 죽어간 남경대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독일은 동양에서 일본의 침략행위가 진행될 때에, 히틀러는 1936년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이탈리아와 함께 스페인의 프랑코를 지원하여 내전에 개입했다. 이것을 빌미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추축관계를 맺었다.
추축국 동맹은 독일과 이탈리아 간의 일련의 협정을 통해 시작되었다. 1936년 10월 25일에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추축이 선언되었다. 이어 1936년 11월 25일 독일과 일본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반코민테론 협정을 체결했다. 이러한 결속은 독일과 이탈리아 간의 군사적. 정치적 동맹을 목적으로 한 강철조약(1939.5.22)에 의해 강화되어 마침내 1940년 9월 27일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조약이 조인되었다.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1938.3),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했으며(1939.3) 이어 총부리를 폴란드로 돌려, 마침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세게대전의 막이 올랐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에 질세라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독일의 패전은 1942년 9월에 소련의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한 독일이 소련의 강력한 저항에 이듬해 1월 25만의 독일군이 추위에 굶주림으로 소련군의 포위에 2월 2일 소련군에 항복했다.
독일은,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히틀러가 4월 30일 권총자살을 하게 되면서 5월 7일 무조건 항복하게 된다.
일본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그로부터 3일 후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8.15 광복을 맞이 했다.
제 6절 6.25전쟁이 남긴 전사자 유해발굴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이제 70년이 넘어 휴전 70년이 된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전사한 국군은 아직도 13만 여 명이 한 조각의 유해마저도 찾지 못하고 저기 국립 현충원 지하 위패실에 이름 석자만 덜렁 새겨져 그 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00년부터 그나마 반세기만에 "유해발굴"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주요 전쟁터에서 유해를 찾는 노력을 현재까지 해오고 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 들어서 갑작스런 대북 관계의 개선 노력을 통해 남북한 공동 유해 발굴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 군대와 미군, 그리고 한국군 제2사단이 치열하게 전투했던 중서부 전선의 화살머리고지(281m)에서 분단 이 후 처음으로 '18년 후반기부터 유해 발굴을 위한 DMZ내의 상호 지뢰 제거 작업과 진 출입로 공사를 하였으며 북한은 묵시적 동의를 하고 지켜만 보고 있는 상태다.
'19년 상반기부터 비무장지대 유해 발굴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유엔에서도 대북 제재와 관련하여 유해 발굴은 그 대상에서 예외로 인정하기로 했으며, 지금은('21년부터) 백마고지에서 유해 발굴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발굴된 유해는 2021년 말 현재 20,000여 구로, 전쟁 당시 전사하여 찾지 못한 유해 13만 4천여 명에 비하면 불과 15% 수준이다. 그러니 '00년부터 무려 22년이 걸린 발굴기간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일 수도 있고, 너무 미약한 숫자일 수도 있다.
1. 년도별, 지역별 유해발굴 현황('19년까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한 발굴사업은,처음 시작한 2000년도는 346구를 발굴하였으며 '01년도에 211구, '02년도에 226구, '03년도에 170구를 발굴했다.
이후에 전문 발굴팀을 2개 팀에서 4개팀으로 늘리어 반 영구사업으로 '04년부터 '06년까지 발굴하여 '04년에 173구, '05년에 203구, '06년에 175구를 발굴 했다.
'07년부터는 기존 육군본부 편성에서 국방부 산하로 편성하고 국회에서 법률로 제정되면서 영구 사업이 되고 지금의 발굴단이 편성되었다. 따라서 전문 발굴팀과 감식반이 편제되면서 숫적인 10배 이사의 규모로 확대되어 '07년도 534구, '08년도 837구, '09년도 1,284구, '10년도 1,440구, '11년도 1,387구, '12년도 1,041구, '13년도 736구, '14년도 913구, '15년도 622구, '16년도 427구, '17년도 481구, '18년도 405구, '19년도 369구를 발굴하여 총 11,980구를 발굴했으며 이중에 아군이 10,626구 공산군이 1,354구(북한 734, 중공 620)이었다.
발굴지역은 전국의 주요 전투지역은 대부분 발굴을 하였으며, 다부동지역이나 안강. 기계지역, 홍천 북방 가리산지역, 현리지역, 인제 민통선 북방 개고개 전방이나 대통령 고지일원, 연천 서북방 진명산 일원,가평지역 등 주요 전투지역은 한번이 아닌 거의 매년 발굴작전이 진행되었다.
주요 지역의 발굴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경기도지역 : 가평 353구, 고양 62구, 광주 364구, 남양주 114구, 연천 408구, 의왕 35구, 파주 414구, 양주 75구
나. 강원도지역 : 강릉 46구, 고성 212구, 양구 1,537구, 양양 6구, 인제 1,405구, 철원 346구, 춘천 352구, 평창 65구, 화천 483구, 홍천 490, 횡성 48구
다. 충청도지역 : 세종 21구, 영동 22구,
라. 경상북도지역 : 경주 386구, 군위 141구, 문경 274구, 영천 127, 칠곡 1,191구,
마. 경남지역 : 창녕 197구, 하동 화개장터 14구
바. 전남북지역 : 광양 4구, 영광 43구, 순천 20구
최초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하여, '00~'03년까지 한시 사업으로 법적인 근거없이 국무총리령으로 2000년 4월 3일 다부동 328고지에서 첫 삽을 들어 올렸다. 그 당시는 전문적인 발굴단이 있던 것이 아니고 각 부대에 있는 고고학을 전공하다 군대에 들어온 인원 중에 선별하여 10여 명으로 발굴 팀을 만들고, 야전에서 해당지역 부대 인원들이 동원되어 발굴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이 일어나고, 비록 50년이 지났어도 산야에 남아 있는 유해가 발굴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발굴 유해를 DNA 감식으로 유족이 찾아지고 전사한 인원의 신원이 밝혀진다는 과학적인 현실에, 결국 2003년까지 발굴 하려던 계획은 영구사업이 되었고 지금 발굴팀은 최초 2개 분대 수준에서 250명에 이르는 대규모 발굴단으로 규모가 20배 이상 커졌다.
지금 발굴단은 단순 발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최초에는 발굴하여 대학기관에 용역으로 분석과 감식을 의뢰했었지만 지금은 전문 감식팀이 구성되어 석.박사급 인원 30여 명의 고고학. 법인류학자 및 DNA 감식인원과 장비가 구비되어 세계에서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전문성을 가진 인원이 편성되어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야전에 방치(조금 격의가 없는 단어이지만 그만큼 한이 서린 뜻임)되어 있다 보니 뼈의 부패정도가 심하여 DNA감식조차를 할 수가 없는 유해가 발굴된 유해 20,000여 구 중에 30%를 상회하는 기막힌 현실이다. 또한 발굴지역의 선정에 결정적인 증언이나 제보를 해 주시는 지역의 연로하신, 오래 거주하신 어른이나 참전용사님들이 대부분 연로하여 현장 동행이나 제보조차도 못하는 실태다.
2. "무엇이 문제인가?"
짧은 지식과 양식으로는 해결하기 곤란하고 답변하기도 어려운 점들이 솔직히 넘쳐난다. 지난 20여 년을 현장에서 발굴지역을결정하고, 관련 제보나 증언을 받기위해 지역주민을 대상으로한 간담회를 200여 곳에서 진행해 보면서 유배발굴은 실증적 문제이니 그래도 어느정도 실타래를 풀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도 동.서로 갈라지고, 때로는 이념적 대립의 각이 골깊은 마당에 당시에 전쟁을 마치 미군이 유도한 것처럼 질문하는 모습에서 옳바른 역사 인식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그 아픔의 유해 발굴현장에 몸소 20여 년을 몸담았던 나로서는 그 체험적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책무다.
[유해발굴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방향]
지금까지 유해 발굴은 얼마나 했느냐의 질문이 나오고 그 세부적인 내용에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지난 '00년부터 '21년까지의 공식 기록은 유해 20,000여구를 발굴하였으며 이중 2,000여구가 공산군으로 중공군이 1,500여 구, 북한군이 500여 구이며 국군은 18,000여구로 분류 되고 있다.
이중에 중공군은 본국으로 모든 유해가 '13년부터 시작하여 모두 송환 되어 그들의 심양에 있는 항미원조 열사 묘역에 별도의 시설물을 갖추어 화장하지 않고 봉안하여 놓았다.
따라서 과연 이렇게 발굴된 유해의 국적 여부가 가장 큰 질문의 요지가 될 것이다. 그 몇 가지 의문점을 적어보면 크게 아래와 같이 4가지 의문점이 될 것이다.
가. 중국으로 보내진 유해는 완벽하게 중공군이냐?
나. 현재 관리되고 있는 북한군은 정말 북한군인가?
다. 국군으로 봉안된 유해는 정말 국군이며 왜 이렇게 적은 숫자가 발굴 되는가?
라. 발굴된 유해와 유가족의 DNA감식을 통한 신원 확인이 200여 명에 제한된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는 요점은 발굴 지역의 선정이 옳바르게 되었느냐가 핵심이 되고 그걸 밑받침하는 전사의 연관성이 가장 중요하며 나아가 지역 주민의 제보 내용과 참전 용사님들의 증언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역 탐문을 다니며 간담회를 하면서 우리가 근현대사에 대해 오해가 많다는 것도 알았다. 잘못된 정보의 홍수속에 누구는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미군이 오지않았다면 통일 국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지난 과거의 유해 발굴, 그리고 남북한 공동 유해 발굴에 예상되는 문제점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지난 20여 년 간을 직접 야전에서 900여 곳의 격전지를 탐사하고 해당 지역마다 마을 회관 또는 노인정에 들러 400여 회의 간담회를 통한 제보를 받았으며 미국 하와이 유해 발굴 센타를 4회 방문하고 워싱톤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갔다 왔다.
총 이동거리만도 120만 km가 되는 대 장정을 동계와 혹서기를 제외한 매주 밖에서 생활하며 유해 발굴을 위해 몸부림쳐 왔다. 이 사업을 위해 '99년 9월부터 최초 계획자이며 현장 탐사관이었고 2000년 4월 3일 경북 칠곡의 328고지에서의 첫 삽을 들어 올린 장본인다.
그러다 '11년부터는 군무원 신분의 조사과장으로 다시 '18년 2월까지 근무하고 아웃되었으니 정말 먼 기간을 이 유해발굴에 몸담아 왔다. 뒤돌아 보면 바로 앞에 던져진 질문 사항에 뼈저린 노력과 또한 그 반대의 아픔이 상존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말로 나를 위로하며 앞으로 남북한 공동 유해 발굴을 공동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점은 무엇 인지를 알아보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실무자 뿐 만이 아니라 윗 선에서 지각하고 반복되는 오류가 나오지 않게 상호 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며 전부다.
그럼 먼저 지난 유해 발굴의 보이지 않는 문제점을 간략하게 먼저 알아 보고자 한다.
첫째 : 동일 지역에서의 반복 발굴에 의한 완전유해 발굴 비율 감소다.
2013년까지의 발굴 유해에 대한 세부 검토결과 완전 유해는 15.5%에 불과 하고 부분 유해가 75.5%이며 이 부분유해 중에서 잔존율이 10%미만이 26.9%에 이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유해 숫자에 관심을 갔고 있다 보니 과거에 발굴한 지역에 다시 가서 원점으로부터 멀어진 곳의 유해를 찾아내는 경우가 많아져 부분 유해가 많아 진 것이다. 실제 발굴 지역을 검토해 보면 거의 50%가 동일 지역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둘째 : 아군 전사 불명확 지역에서의 유해 발굴이다.
이 문제는 사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각인 되어야 한다. 법률에 명시되어 있기를 국군 전사자(학도병 ,경찰, 노무자. 태극단, 철도 경찰 등 포괄적 포함)를 발굴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려면 전쟁사에 국군이 전투한 곳을 찾아야 하고 그곳 위주로 발굴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 예를 들어 홍천의 벙커고지는 '51년도 중공군 5 월공세시 미 제2사단과 중공군이 전투를 벌였다. 그러면 발굴 되는 유해중 미군이 아닌 대다수가 중공군이고 일부가 우리 카츄사나 노무자일 수도 있을 건데 반대로 대다수를 국군으로 한다면 이건 문제가 아닌가?
셋째 : 피아 판단의 신뢰성 저하다.
전쟁은 주도권 싸움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주도권을 가지고 공격이나 방어를 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전투 부대 또는 전투 지원 부대들의 활동이 원활하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당시에 전사자 처리를 담당한 노무자들이 유해를 들것으로 나르는데 위협 정도가 그만큼 배제되어 유해 운구 차량에 다다르는 확률이 그만큼 높을 것이다.
반면에 주도권이 없으면 공격이라 할지라도 들고 나오는 순간에 계속적인 적의 기습이 중간 중간에 이어진다면 감히 목숨을 버리며 누가 온전하게 들고 나오겠는가!(이 문제는 실제 노무자 하신 분의 증언이다.) 따라서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 연천 북방 진명산 일대, 화천 전방 백암산 지역 등은 그동안 몇 번의 유해 발굴이 진행된 곳으로 모두 300여 구가 넘는 유해가 발굴된 곳이다.
그러나 진명산 일대는 우리가 미군이 주도권을 갖고 전투를 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발굴된 유해의 피아 판단은 사실 중공군에 무게감이 더 실린다고 봐야 한다.
또한 백암산 정면도 비록 중공군의 7월 최후 공세에 밀려 금성천을 남하하여 백암산 밑으로 철수한 후에 다시 재반격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819고지 일대는 우리가 방어 시에도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공격 시에도 주도권을 유지하여 많은 수의 유해 수습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면 중공군은 금성천을 도하하여 아군 깊숙이 들어오면서 보급거리가 신장되어 제대로 보급품을 받지 못해서 총알도 없이 빈 총으로 서성거리다 죽은 사람이 태반이다.(참전용사의 증언) 그러니 여기서 발굴 되는 유해는 대다수가 중공군으로 판명되어야 옳다고 본다.
넷째 : 전사한 인원의 묘비나 위패 카드를 분석하여, 국군이 많이 전사한 발굴 지역 선정과 피아 판단을 해야 한다.
이 분야도 정말 중요한 내용으로 간과해서는 않된다. 예를 들어 현재 발굴하고 있는 지역중 연천 서북방 진명산일대에서 많은 유해가 발굴 되었다.
하지만 이곳 전투는 우리 국군 전투 사단이 하나도 없을 뿐더러 위패 카드 어디에도 그 지역 명이 비슷한 것도 없다. 그런데 단지 미군이 중공군과 '51.6월부터 10월에 계속 되는 전투에서 카츄사나 노무자가 지원되었으니 아군이라고 판단한다면 문제인데도 그걸 간과 하고 있다.
다섯째 : 전쟁 전후에 피해를 입은 국민, 다시말해 제주 4.3사건 피해자 와 여순사건 피해자, 보도연맹사건 피해자, 국민방위군 사건 피해자, 그 외에 전쟁지역에서 피해를 입은 국민에 대한 국가적 통합과 발굴의 대책을 이행해야 한다.
이 문제는 현재도 진행형으로 우리는 피아를 구분하려는 이분법에 능숙하다. 하지만 해방이후 격동기의 우리는 솔직히 자유가 무엇인지 공산이 무엇인지 구별할 여유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5000년 역사가 말해주듯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역사의 주인의식이 자리잡아 남의 것을 돌봐주기보다는 내 배부터 채워야 했고, 내 자식부터 가르쳐야 했다.
못살고 대우받아 본 적이 별로없는 우리는 갑작스런 광복에 그저 모든 것이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또다시 가진자가 갔고, 없는 자는 없는 현실에 희망을 잃었다. 여깅에 공산당이 들어와 있는 자의 것을 빼앗아 나누어 준다고 하니 얼마나 달꼼했을까!
준비되지 않은 광복의 해맞이는 실로 벅찬 감동이지만 눈앞에는 배고픔과 매관매직의 뒤틀림이 그대로 존재하다보니 남로당이 뿌리를 내리고 일반백성이 물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의 책임을 오롯이 백성에게만 돌리는 것은 국가의 비겁한 행위다. 아니 나라를 빼앗겨 일본의 노무자로 태평양 전쟁터 징용으로 끌려가게 한 것이 어찌 백성들의 몫이란 말인가. 이제 전후 70년이 지났다. 좀 과감한 포용력으로 모두가 내 백성으로 받아들여 그 당시의 아픔을 치유해 주엉야 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여섯째 : 비무장지대에 평화묘역을 만들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피아 판단에 문제가 있다. 아니 북한군과 우리군이 무슨 유전자가 다르겠으며, 아닌 말로 중공군도 대다수가 조선족이 참여 했다고 하는데 종족의 유전자가 다를리 있겠는가.
이걸 굳이 피아판단으로 몇구를 발굴했다는 보고는 이제 20년이 지난 유해발굴의 한계다. 따라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비무장 지대에 평화공원을 조성하여 발굴 되는 유해는 이곳에 안장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건 비정치적 문제로 한.중.북의 공통분모가 녹아들어가는 만큼 더 늦기 전에 숫자적 유해발굴이 아닌 역사를 되찾고 지키는 차원으로 승화시켜 모두가 하나되는 광장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3. 문제점에 대한 대책
따라서 이제 유해 발굴 20년이 지났다.그리고 드디어 북한군과 공동 유해 발굴이라는 첫 삽을 올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유해 발굴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첫째는 먼저 법적인 문제부터 그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이라 국한하지 않고 "통일을 위해 기여한 자"로 확대하여 법을 위반하지 않는 장치를 먼저 해야지 군은 명에 따르니 무조건 하라는 것은 독재 시절의 이야기다.발굴 현장에서 실제 2,000여 구의 공산군측 유해(육안 감식 결과)가 발굴 되었다. 이거 발굴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 일부는 알면서 발굴도 할 수 잇다. 그러면 실정법 위반 아닌가!
두번째는 발굴지역을 명확하게 국군이 전투한 지역과 유엔군이 전투한 지역을 구분하여 발굴해야 한다.
아니 우리 위주로 하여 13만 유가족의 한을 먼저 달래드린다고 하자, 그러면 이억 만 리 조국을 떠나서 대한민국을 지키려 달려온 그 수많은 유엔군의 부모 형제들과 그 조국은 뭐라 하겠는가. 아니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상호 서운함이 없도록 적극적인 발굴을 했으면 한다.
세번째는 DMZ지역 뿐만 아니라 북한의 전투 지역과 포로 수용소가 있었던 지역을 포괄적으로 선정하여 발굴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당연히 그곳에는 국군 전사자가 잠들어 계신다. 더욱이 중공군이 처음 내려와 기습을 한 운산-이원지역과 금성천 북방의 북한 교암산과 지형능선-수도고지 등, 아군이 집단으로 전사한 지역('53. 6,7월 중공군 최후 공세시 1만 여 명 전사, 실종자만도 5,000명이 넘는다) 등은 빨리 발굴을 해야지 그 유해는 오랜 세월에 견디지 못하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북한과 상호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협조하여 현장 탐사를 실시하여 보존과 발굴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현재 전쟁을 체험한 인구의 구성은 전체 국민의 30%를 넘지 못한다. 현재 70%이상의 인구가 1954년도 이후에 태어난 인원으로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련의 여론 조사에서 해방 이후 최대의 사건으로 약 60%의 국민이 6.25 전쟁을 꼽았다. 그 만큼 전쟁은 너무 크고 엄청난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치른 최대의 전쟁이 바로 6.25 전쟁이다. 당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전쟁중 이미 "우리는 한국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다"하였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6.25 전쟁은 세번째의 세계 전쟁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대신 치른 셈이었다.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했을 정도로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갔고, 정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평화롭지만 잊을 만 하면 핵무기 실험이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 실험으로 도발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오는 그들의 실체를 이해해야 만이 이념이 우선이 아닌 국가가 존재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무게를 받게 될 것이다.
네번째 : 보도연맹 피해자나 국민방위군 피해자에 대한 정부차원에서의 유해발굴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그 일세대는 모두 돌아가셨다. 정말 몇년 있으면 그 한마저 잊혀지게 된다. 설마 그때를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시대에 피해를 본 징용자나 끌려가신 할머니들이 이제 몇 안남았는데 지금도 해결책이 없다. 이유는 정치적으로 자꾸 물고 늘어지는, 소위 신민족주의 자들이 있어 부추키는 인상이 없지않아 있다. 세게는 하나로 가는 마당에 자꾸 편가르기에 몰두 해서는 발전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피해 당사자들이 아무런 헤택이나 보상도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아픈 현실이다.
여기에 지금도 일부 지자체에서 예산을 반영하여 유해를 발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처리과정, 유족을 찾기위한 감식문제와 발굴후 유해처리ㅐ 문제 등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두번 죽이고 있는 꼴이다. 민족화합차원에서 범 사회적인 역활분담으로 하루빨리 유해발굴과 그 사후처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과거를 잊은 국가에게는 미래가 보장될 수 없다"
지난 역사의 아픈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다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유해 발굴 사업을 통하여 지금의 우리가 있음은 과거에 목숨을 바친 분들의 희생과 열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지금 세대들이 이해하고 역사적 교훈으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각인하자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 주소는 안타깝게도 일부는 전쟁의 시작이 마치 남한에서 먼저 친미주의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따라 북진을 해서 북한이 반격으로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믿는 인원이 있다.
반면에 요즘 젊은 세대들 중에는 굳이 통일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며 전쟁이 나면 과감하게 나가서 전투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한 세대가 지나간 현 싯점에서 극렬하게 우리 사회는 양비론으로 갈라져 있다. 이는 잘못된 정보에, 나아가 일부 신지식인 것처럼 가면을 쓴 극진 세력이 전쟁 전 남한에 일었던 반민족주의자 처단이나, 가진자들을 목살하는 것을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모양으로 현혹하여 국민을 선동하였다.
서울 4대문 안에도 인공기를 버젓이 달고 "민족통일이 무슨 만사형통이며 이를 위해서는 이념이나 체제는 별거 없다"는 식의 막무가내식으로 사회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미 깊숙히 침투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남로당이라는 북한 김일성의 꼭두가시로 거듭나서 그 세력이 엄청나게 국회. 학원가. 노동계. 심지어 군 내부까지 침투하여 그날(북한의 무력남침)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결국 무력남침으로 인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짊어져야 했고, 아직도 1천만 이산가족이 한맺힌 세월을 보내며 죽기 전에 단 한번 만이라도 그리운 부모 형제를 만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북한은 그러한 겨레의 염원은 못들은척하며 지금도 핵무기 개발과 군비 확충에만 몰두하여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독재국가이며 꽃제비가 떠도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실태다
그런대도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그들의 구호인 민족통일, 반민족주의자 처벌이란 떠벌림에 현혹되어 그 세력을 비호하는 실세들이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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