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버지 기일이어서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연휴인 관계로 오후 기차표가 없어 오전 10시 출발하는 기차를 탔습니다.
청량리역에 도착하여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청량리 , 제기동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 졸업때까지 산 곳이니 50 - 60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청량리시장 초입에 자리했던 어머니의 지인이 운영하던 옷가게 자리에는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 옷가게에는 내가 죽어서 어머니를 만났을때 용서를 구해야할 사연이 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끼니거리도 간당간당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
길거리로 나앉아야 할때 돌아온 설날 , 나는 설빔을 사달라고 보챘고 어머니는 찢어지는 가슴을
눌러가며 그 지인에게 부탁하여 외상으로 내게 옷을 사주셨습니다.
지금 내가 그 상황을 생각해보면 철없는 어린 아이의 보챔은 조금만 이해가 되고 찢어지는 어머니의 가슴은 너무도 크게 가슴을 후벼 팝니다.
청량리시장 맞은편에는 내 딸이 태어난 성바오로병원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알수없는데 딸이 태어나는 순간 병원 복도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딸이 올해 나이 마흔이 되었습니다.
병원을 쳐다보면서 벌써 중년의 문턱에 들어선 딸이 많이 보고싶어졌습니다.
내가 자랄때 한적한 주택가였던 제기동은 지금 서울에서 유일한 약령시장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1.5 km 정도 떨어진 내가 다닌 홍파국민학교 까지는 한약재상들이 빼곡하게 들어섰습니다.
학교 가는길에 있었던 금붕어를 기르던 양어장은 그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통조림 깡통을 주워와 쥐불을 돌리고 연탄재 깨트려 패싸움하던 기억은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수 없고 대학시절 걸어서 학교 다니던 경춘선 철로 연변에 늘어서 있던 판잣집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단속을 피해 밀주를 담가 생계를 유지하던 내 국민학교 친구네 판잣집이 있던 언저리가 어디쯤
이었나를 가늠하는것 역시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면목동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던 집은 남아있었습니다.
지하철 제기동역 근처 골목의 막다른 집인데 주택이 아닌 창고 용도로 쓰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우리 가족사에 있어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식구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면서 철치부심하신 아버지는 재기하여 6년만에
살던 판잣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이층집을 지으셨습니다.
실패와 재기는 살아가면서 겪을수 있는 일이기는하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실패 후 재기할 수 있는
확율은 점점 낮아지는게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그 집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그 힘든 행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자식 사남매에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살던 일곱 식구 가장의 어깨에 걸린 그 무거운 삶의 무게에
내 아버지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
더구나 오늘이 그분의 기일이기에 또 다시 눈물이 주루룩 흘렀습니다.
그렇게 몇십년전의 기억을 접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첫댓글 김씨
가정의 달에 맞는(?)애잔한 추억의 글 잘 보았네.
나의 어릴 때 살던 곳도 많이 변했지.
일신국민학교는 없어지고 극동빌딩이 들어 섰고,
남산 기슭의 집도 도로 확장으로 흔적도 없어 졌지.
환절기에 건강유의 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