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에서 / 조영안
요즘 화제가 되는 영화가 있다. 방송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서울의 봄'이다. 남편이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시험공부 하느라 고생한 딸과 함께 영화를 구경하러 갔다. 가게 문을 일찍 닫고 가까이 있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제법 큰 아울렛 쇼핑몰이 같은 곳에 있다. 영화 보는 것이 주목적인데 남편이 갑자기 옷을 사준단다. 딸도 ‘와, 아빠 최고!’라며 동조한다. 관람 시간을 8시 20분으로 잡았다. 여유가 있다. 즐비한 매장을 둘러보는데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 이유는 분명하다. 예쁜 옷은 많은데 내 몸매가 문제였다.
한참을 돌다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그렇다. 매번 옷 살 때마다 반복되는 후회다. 이제부터 살을 빼야지. 저렇게 예쁜 옷을 입고 싶은데. 드디어 딱 맞는 매장을 찾았다. 50% 할인까지 한다니 적당했다. 그래도 가격이 보통이 아니다. 연말에 행사, 모임도 많다. 또 조카 결혼식도 잡혀 있다. 이것저것 입어 봤다. 결국 두 벌을 샀다. 남편은 제법 많은 돈을 계산했다. 이렇게 가끔 챙겨 주는 남편이 고맙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남편에게 인색하다. 고작 사주는 건 속옷밖에 없다. 나머지 옷은 본인이 직접 산다. 주위에서 옷을 잘 입는다고들 한다. 그런데 칭찬은 내가 듣는다. 어쩌면 저렇게 내조를 잘하느냐고. 그럴 때는 빙그레 웃음으로 넘겨 버린다.
시간이 남아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 알뜰한 딸 덕에 1인당 만오천 원 하는 영화표 석 장은 공짜로 예매했다. 팝콘은 필수라며 너스레를 떤다. 영화관에 앉으니 얼마 만에 보는 영화인가 싶어 설렌다. 광고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친다. 바쁜 일상에 쫓겨 사느라 여유를 누릴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런 시간이 자주 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쫓기듯 사는 내가 한심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하나둘 풀려 나갔다. 주인공의 이름은 가명으로 나왔다. 12·12 군사 쿠데타가 있었던 아홉 시간을 각색하여 재조명한 내용이었다. 역시 전씨, 노씨가 문제였다. 반란군과 끝까지 사투를 벌인 장태완 수도 경비 사령관이 인상적이었다. 그와 반대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사태의 해결 대신 도망을 헐레벌떡 갔다. 마치 쥐구멍이라도 찾는 듯한 비열한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군부에 동참했던 자와 반대로 끝까지 버텼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여고 졸업하던 해다. 어렴풋이 들은 기억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여운이 남았다.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영화보다 더 상세하게 나왔다. 훗날 장태완 수도 경비 사령관이 했던 텔레비전 인터뷰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철저하게 파괴, 유린, 날조 되었던 그날이었다.’고 했다. 아홉 시간의 긴박했던 그때를 떠올려 본다. 갑자기 애국심이 생겨난 걸까. 총성이 들리는 듯 자꾸만 장면이 스친다. 역사의 진실 일부분을 알게 되었다. 뿌듯해지는 마음은 뭘까.
한해의 끝자락이다. 어느 해보다 부지런히 달려왔다. 그중에서 글쓰기를 하게 된 건 내게 찾아온 행운이다. 양선례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직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냥 안일하게 마음 가는 대로 써 왔던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은 겨우 걸음마 수준이다. 차근차근 공부하면 쓰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쓰고 싶은데 어쩌랴?
1학기 첫 수업이 생각난다. 예전에 이 수업에 참여했던 분께 조언을 구했다. 어떠냐고 물으니 대뜸 눈물, 콧물 흘릴 정도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단다. 사정없이 지적하는 교수님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다. 알고 보니 모두 쟁쟁한 분들이다.
글감이 주어졌다. 그럭저럭 글을 올렸는데 빨간줄이 수두룩했다. 띄어쓰기나,
앞뒤 글의 조화가 맞지 않아서 이다. 그리고 거의 반은 누워 있었다. 내용에 맞지 않아 지워야 하는 부분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제목이 ‘늦둥이들의 도전’이었는데 아들과 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3분의 2는 아들을 위주로 썼고, 3분의1은 딸 이야기를 썼다. 딸이 알면 서운해 할지도 모른다고 교수님께 혼났다. 머리가 띵했다. 그때부터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빠지는 주가 늘어 갔다. 그렇다. 마음과 머리는 늘상 글쓰기로 가득한데 막상 쓰려니 잘되지 않았다.
2학기에는 등록을 서둘렀다. 수강생이 많으면 탈락이란다. 등록하면서 모질게 마음먹었다. 사실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 게 쉽지가 않다. 수업 시간만 되면 손님이 더 많다. 시계만 쳐다본다. 나가라고 하거나, 거절할 수도 없다. 급할 때는 연결해 놓고, 들으면서 정리한다. 가게에서 집까지는 자전거로 3분이다. 가끔은 교수님의 목소리와 함께 달린다. 이번 학기는 잘해야지 하면서.
나와의 약속은 지켰다. 수업 시간과 글쓰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이쯤이면 자세는 갖춰졌다고 스스로 칭찬한다. 처음부터 잘 여문 곡식이 없다 하지 않았는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다음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