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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동구 운림동 56번지.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증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松廣寺)에 속한 사찰이다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해발 1,187m)과 이성계와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성계가 어느날 무너지는 집에 깔리는 악몽을 꾸었을 때 "대들보와 서까래에 묻히는 것은 임금 '왕(王)'자에 파묻히는 일로서 좋은 징조다"라는 해몽을 해준 무학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함께 팔도를 돌아다니던 중에 광주의 무등산에도 들리게 되었다. '피로 물들인 죄업을 사(赦)해주시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해 주소서'라는 3일간의 기도를 마치고 하산하던 중 돌 뿌리에 넘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놀란 시종들이 상처를 살펴보니 공교롭게도 무릎과 팔꿈치 그리고 이마 세 군데가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이에 무학대사는 "기도가 부족하니 3일간 더 기도 하라는 하늘의 뜻입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고, 이성계는 일정에 없던 3일간 기도를 더 드리고 하산했다. 곤룡포를 입은 임금이 찾아와 기도하는 것을 어여삐 봐주지 않아 결국에는 괘씸죄에 걸려 무악산(武岳山), 서석산(瑞石山)이란 이름을 빼앗기고 무등산(無等山)으로 강등하게 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그런데 노산(鷺山) 이은상 (李殷相) 시인은 무등(無等)이란 유래를 불교의 ‘무유등등(無有等等)’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다’는 뜻인데,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無等山)을 이러한 불교적 의미로 해석 한다. 무등산에 솟아 있는 봉우리들의 이름을 보면 삼존석, 규봉의 법화대(法華臺), 설법대(說法臺), 능엄대(楞嚴臺), 의상봉(義湘峰), 비로봉(毘盧峰), 반야봉(般若峰) 등 불교적인 이름들이다.
또한 유서 깊은 증심사 도량 전체는 광주문화재 자료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시대인 860년(헌안왕 4)에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이 창건하고, 고려시대인 1094년(선종 11)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하였다.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이나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지은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에는 ‘증심사(證心寺)’라 기록되어 있으나, 1856년의 『중수약사전기(重修藥師殿記)』와 1925년의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징심사(澄心寺)’라 적고 있어 언제 어떤 이유로 ‘징심사’라 일컫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1443년(세종 25) 김방(金倣)이 중창하였는데, 이 때 500나한과 16제자상을 조성하여 오백전에 봉안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된 뒤 1609년(광해군 1)에 네 번째 중창을 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오백전과 노전을 제외한 모든 건축물 소실되었다. 1971년 대웅전을 복원한 뒤에 여러 전각들을 건립하게 되었으며, 현재 광주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산명과 사찰명을 밝힌 '無等山證心寺(무등산증심사)'라는 편액은 용곡(龍谷) 조기동(曺基銅)이 쓴 것이다. 證心寺(증심사)는 '마음을 증득하는 절'이란 뜻이다. '마음을 맑히는 절'이라는 澄心寺(징심사)라고도 불렀다. 1856년의 『중수약사전기(重修藥師殿記)』와 1925년의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징심사(澄心寺)’라 적고 있어 언제 어떤 이유로 ‘징심사’라 일컫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화마를 피하기 위해 증심사를 징심사로 개명했다는 설도 있다. 순천 선암사는 불이 빈번해 건물 벽에 '바다 해(海)'자를 써놓고 화마를 피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유로 이곳 증심사도 '증(證)'의 '말씀 언(言)' 부수를 '물 수(水)'로 바꿨다는 설명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1980년대 초에 건립하였다.
증심사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비석들이 있다. 1912년부터 1975년까지 증심사 중수에 공덕이 많은 신도와 스님의 부도 3기를 비롯해 증심사 대웅전 중건기적비 (證心寺大雄殿重建紀績碑) 등 17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취백루(翠栢樓)는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樓閣)이다. 하층에는 종무소와 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상층은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6.25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취백루라는 누각의 명칭은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전하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위치해 있는 행원당(行願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건물로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범종각은 1980년대 지은 건물로 건물양식은 겹처마에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정면에 용곡(龍谷) 조기동(曺基銅)이 쓴 ‘범종각(梵鍾閣)’ 편액을 달았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적묵당(寂默堂)은 정면 7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며, 현재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공포는 외삼출목, 내오출목의 다포식 건물로 1971년에 중건하였다. 어칸은 솟을빗살창이 달린 4분합문이다. 협칸과 퇴칸은 2분합문에 나뭇잎 모양의 빗살문이다. 불단 위에는 삼존상을 봉안하였는데,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다. 일반적으로 석가삼존상이면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인데, 증심사 대웅전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삼존불 뒤에는 불모(佛母)인 석정(石鼎) 스님이 그린 석가모니후불탱을 봉안하였고, 본존불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칠성탱을, 오른쪽 벽에는 신중탱을 모셨다.
지장전은 대웅전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양식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의 중앙에는 ‘지장전(地藏殿)’ 편액을, 왼쪽 협칸의 문위에는 ‘회심당(繪心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 불단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ㆍ무독귀왕ㆍ판관ㆍ녹사ㆍ동자 등을 봉안하였다.
삼층석탑 오백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것으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탑신의 체감비율이 뚜렷하여 매우 안정감 있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층기단의 네 모서리에 우주(바깥기둥)을 표시하고, 면마다 2개의 탱주(버팀기둥)를 새겼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는 가늘고 긴 안상(眼象)을 얕게 조각하여 각 면마다 3개씩 배치하였다.
하층기단 갑석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둥근 2단의 상층기단 받침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 1개씩의 돌로 되어 있고 층마다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위로 오를수록 몸돌이 알맞게 줄어들어 안정감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으로 네 귀퉁이의 전각이 살짝 치켜 올라가 경쾌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 위에 앙화(仰花)만 올려져 있다. 이 탑은 기단부 면기둥의 변화, 초층 탑신받침, 옥개석 모서리의 치켜올림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증심사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71년에 해체ㆍ복원하였으며, 현재 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 있다.
이중기단에 5층으로 이루어진 고려시대 석탑으로 1층 탑신에 퇴화된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전체적으로 삼층석탑을 따르고 있지만 기법등이 떨어지는 편이고, 각 층의 옥개석 받침은 3단이고, 맨 위의 5층 옥개석의 받침만 2단이다. 초층 탑신에는 네 면의 중앙에 사각형의 돌출된 구획을 만들어 그 안에 꽃무늬를 양각으로 새겨놓았고, 2층 이상의 탑신에는 일반적 석탑과 마찬가지로 모서리에 귀기둥을 새겼다. 이 석탑은 대웅전의 북쪽 공터에 있던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1933년 탑을 해체복원할때 금동불2구, 5층철탑(19cm), 소형철불2구, 수정1점, 청옥세주(靑玉細珠)23점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6.25동란중 국보211호 금동석가여래상(15.9cm), 국보212호 금동보살입상(18.2cm)을 잃어버렸다.
칠층석탑 오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탑신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어 범자7층석탑(梵字七層石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돌로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탑신을 올려놓아 기단부가 생략되었다. 탑신에는 귀기둥을 표현하고 초층 탑신의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으며, 2층부터 7층까지는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통상적으로 조각하는 옥개받침을 생략하고 윗면의 물매가 완만하여 매우 납작하다. 각 층의 네 면마다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동일한 범자를 7층에서 아래로 한 자씩 새겼다. 일반적인 석탑양식에서 벗어나는 어색한 점이 있으나, 탑신 각 면에 범자를 새겨 희귀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조선중기로 추정된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시대를 달리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과 고려시대의 오층석탑과 조선시대의 칠층석탑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막돌허튼 쌓기의 기단(基壇)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의 건물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에서 6.25 당시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당우일 뿐만 아니라 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기도 하다.
오백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입상으로 협시하고 있고, 그 좌우로 나한들이 여러 표정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1443년(세종 25)에 광주의 생명 젖줄 경양방죽을 축조한 전라감사 김방(金倣)이 관세음보살 현몽을 쫒아 증심사 중창과 오백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의 성상(聖像)을 봉안하였는데, 이 고장의 민안(民安)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날로 쇠약해지는 김방의 몸은 '날마다 닭똥집 20개를 먹어야 낮는다는 처방을 받았다. 민초들이 바친 닭으로 김방은 건강을 되찾았지만, 반면 살생의 업은 두터웠다. 어느날 세종대왕의 꿈에 수백 마리의 닭들이 찾아와 김방의 사형을 청했고, 세종대왕은 이 일을 금부도사에게 맡겼는데, 얼마 뒤 세종대왕의 꿈에 수백명의 사미승들이 나타나 "김방이 비록 살생을 했으나 경양방죽과 증심사 오백전을 지어 민초들의 생활을 편안케 했으니 벌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꿈에서 깨어난 세종대왕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서 다시 명을 거뒀다고 한다. 그 후 오백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돼 1609년 다시 지었다. 현재의 존상들이 그 시기에 봉안되었던 상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오백나한님 모두 흙으로 빚었으며 자리가 비좁아 대들보에도 오백나한님들이 앉았다. 조성기법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은 확실하다.
비로전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에 주심포식 건물이다. 건물의 정면에는 권창윤(權昌倫)이 쓴 ‘비로전(毘盧殿)’ 편액을 걸었다. 내부 불단 위에는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주존으로 봉안하였으며, 그 뒤에 비로자나후불탱을 봉안하였다.철조 비로자나불좌상은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배(光背)와 좌대(座臺)는 잃어버리고 없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상호는 원만한 타원형이며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가늘게 뜬 눈과 우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등은 다소 근엄한 표정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두 귀는 짧은 편이다.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 굴곡이 드러나지 않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으며, 양 팔에 걸친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손모양은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로 된 점이 특이하다. 통일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고 있으며,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증심사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1934년 광주 시내의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 전한다. 원래의 위치는 전남 도청 부근으로서, 그곳은 당시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의 대황사(大皇寺)라는 절터였다고도 하고 지산동 부근이라고도 하는 등, 옮겨올 당시의 자료가 전하지 않아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산신각 정면과 측면 각 1칸이고 맛배지붕을 한 이 건물은 근래에 새로 지은 이다.
석조보살입상을 보존하기 위해 새로 지은 전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 정자형 건물로, 범자칠층석탑과 함께 서 있던
범자7층석탑(梵字七層石塔)과 나란히 서 있었으나 2003년 11월에 원통전을 건립하면서 옮겨 봉안하고 있다. 이 석조보살입상은 서봉사지(瑞峰寺址)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1966년 간행한 『광주시사(光州市史)』에도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 터에 있던 것을 현준호가 사재(私財)를 들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 석조보살입상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현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화대좌는 원형이며, 상ㆍ중ㆍ하대석과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상대석의 앙련좌는 11엽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과 2엽의 큼직한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이 혼합 조각되어 있으며, 하대석의 앙련좌는 두툼한 16엽의 복판연화문(復瓣蓮花文)을 돌렸다. 보살입상은 머리에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타원형으로 갸름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목걸이를 장식했으며,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다. 수인(手印)은 왼손을 굽혀서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고 오른손은 편 채로 내려뜨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