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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03
8월30일 [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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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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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On8Z4ZtxNg
**서울 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5417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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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걸림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은 것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은총의 선물로 받은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족들이나 친지들, 고향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마음껏 대놓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을텐데, 입을 다물고 있느라고 고생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놀랄 정도로 날이 잔뜩 서 있습니다. 거의 독설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간 공들여 쌓아올린 높은 탑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 복음 16장 23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인재 양성의 대가였습니다. 제대로 된 제자 하나, 그것도 수제자를 키우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특별 교육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화롭게 섞어가며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때로 큰 격려와 칭찬도 아끼지 않으시지만, 절대 우쭐해지거나 기고만장하지 마라고 강력한 철퇴와 자극도 동시에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수제자가 스승님으로부터 사탄이요 걸림돌이라는 강력한 질책을 듣게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달콤함만 추구했던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 희생과 헌신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세속적인 성공만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들의 후계자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분신이요, 그분의 기쁨이고 영광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기보다는, 그분의 걸림돌로서 사탄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는 사람들, 생명수와도 같은 복음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민폐요 진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께서 그토록 혐오하시는 이 시대 사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대대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엄중하게 베드로 사도를 질책하셨고, 삶의 근본적인 태도나 노선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요 오른팔이 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걸림돌이요 사탄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가? 아닌가? 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 어깨 위에 얹혀진 십자가, 때로 포기하고 싶고, 즉시 내려놓고 싶은 생각 간절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을 통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 참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매일의 십자가를 짊어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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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 되지 않으려면>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2IBR1iBvo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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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재확산에 관련하여 YTN 뉴스에서는 ‘5월 이후 집단 감염 사례’를 말하며, “교회 관련 1,681명, 사찰 관련 92명, 이슬람 종교행사 관련 6명, 성당 관련 0명(7월 원당 성당 사례는 ‘방문 판매 관련’으로 분류)’로 나왔습니다. 가톨릭과 관련하여 집단 감염이 나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고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만났습니다. 만남 전날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가 모두 발언에서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회 등 종교시설을 사업장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시민이 교회를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식한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면 일면 일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반 이상이 개척교회와 같은 어려운 현실이기에 대면 예배를 금지하면 현실적으로 유지가 힘든 교회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대면 예배를 강행하려고 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라고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주일에 집에서 조용히 예배드리는 것이 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것도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걱정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 걱정으로 본분을 잊고 자칫 사회와 하느님께 폐를 끼치는 일까지 벌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나라도, 한 종교도 몇몇에 의해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망하게 만드는 그 몇몇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다 보면 종교도 자기를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백설 공주』의 이야기를 봅시다.
옛날 어느 왕국에 예쁜 공주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공주를 낳은 어머니가 곧 죽게 되어 질투심이 강한 왕비가 들어옵니다.
왕비는 요술 거울에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라고 물었습니다.
거울은 “백설 공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질투심에 가득 찬 왕비는 노파를 시켜 백설 공주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거울은 백설 공주라고 대답합니다. 왕비는 울부짖습니다.
“백설 공주는 내가 죽였어.”
거울은 백설 공주는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백설 공주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왕비님의 질투심입니다. 왕비님 자신이 나이 들고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백설 공주님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백설 공주를 죽이려고 왕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나, 세상 걱정을 없애려고 본래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교황이 되지도 않는 싸움을 위해 십자군을 징집하여 수많은 이교인들을 죽이는 것을 묵인하였습니다.
천문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수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로마 한복판에서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조건으로 풀려나기는 했으나 많이 고생해야 했습니다.
프랑스 국왕은 자신들을 영국으로부터 지켜낸 영웅 잔 다르크를 영국인들에게 잡혀 죽게 했습니다. 죄목은 하느님 계시를 사제를 통해 받아야만 하는데 직접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세상 걱정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력으로 자신의 걱정을 해결하려다 보니 역사에 길이 남을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항을 깊이 우려하셨습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가 당신을 위하는 교회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자신을 죽이는 길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짐짓 예수님을 위하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죽기 싫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를 꾸중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기서 ‘사람의 일’이란 ‘자기 자신의 안위’와 같은 말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결국 세상과 교회에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실 때, 이미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방법까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돈 생각, 먹고 마실 생각, 남을 판단하는 생각 등을 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주님께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세속, 육신, 마귀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 생각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관한 관심’입니다. 주님 뜻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다 망치게 됩니다.
세계적인 외줄 타기 곡예사 칼 왈렌다는 평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줄을 타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인생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기다림일 뿐입니다.” 그는 외줄 타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위험한 곡예를 성공시켜 사람들의 환호성을 자아냈습니다. 그러나 왈렌다는 1978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외줄 타기를 선보이다가 75m 상공에서 추락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에 그의 부인은 한 인터뷰에서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곡예에서 남편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석 달 전부터 그이가 ‘이번에는 어쩌면 떨어질지도 몰라.’라는 말을 많이 했거든요. 또 ‘만약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질문을 자주 했고요.”
어쩌면 그가 목숨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는 왕비와 같아집니다. 제 역할을 못 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과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전광훈 목사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일보다는 자기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던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생각을 끊고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청하는 7가지 외에 최대한 생각을 끊읍시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시작은 생각을 못 박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묵상하며 자주 바치면 나 자신을 위한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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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지난 주일과 오늘 독서들의 내용은 아주 대조적이다. 지난 주일에 ‘메시아’로 고백된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마태 16,21) 존재로 당신을 제시하시고, 베드로는 자신의 고백으로 교회의 주춧돌이 된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걸림돌’로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 같다. 이러한 대립적인 서술은 그리스도 신비 자체 안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대립적 실체가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처럼 펄쩍 뛸 수도 있는 것이다.
제1독서: 예레 20,7-9: 주님의 말씀에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십자가 위의 죽음’이란 체험은 모든 신앙인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오늘 전례에 나타나는 예레미아는 그리스도의 예형처럼 나타나고 있다. 그는 비탄에 잠긴 고백을 통하여 하느님께 표현하고 있다. 그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소명을 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무나 강하신 분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불’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복음: 마태 16,21-27: 자기 자신을 끊어버려라
오늘 복음은 곧 다가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와 그에 대한 베드로의 민감한 반응(마태 16,21-23)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당신을 따라야 할’ 제자들의 의무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24-27절). 예수님의 수난예고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고 애쓴다. 이러한 인간적인 베드로의 행동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이 넘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행위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지만, 십자가와는 무관한 영광과 권세로 가득 찬 현세적 ‘메시아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세의 인간적 체계에 꿰맞추어 나름대로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신앙을 상실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그 신앙은 더 이상 하느님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고 하신 것은 공생활 시작할 때, 예수를 현세적 메시아로 변질시키려 한 유혹사화(마태 4,1-10)의 사탄을 떠오르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당하실 모든 것을 운명이나 숙명적 상황에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뜻임을 인식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은 메시아의 수난과 미래의 영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당할 어려움도 예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떼어놓으려 했던 베드로가 이제 스승을 따라 그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면 베드로에게는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미구에 베드로는 자신의 신앙으로만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스승을 따름으로써 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지만, 이제는 또한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수난당하는 종’으로서도 고백해야하며, 또한 이 고백은 자신 역시 스승의 고통스러운 운명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죽음의 운명이 지워진 메시아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더구나 아직은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베드로에게는 참으로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권고의 내용은 ‘관심’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이웃에게 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 밖에 관심을 두셨고, 당신을 잃으셨으며, 또한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셨고(필립 2,7-8) 당신을 내던져 이웃들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셨지만, 부활의 영광의 생명으로 당신 자신을 되찾으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다.그럴 필요도 없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치고 우리를 잃어버림으로써 그리스도와 ‘이웃의 선익을 구함’(필립 2,21)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제2독서: 로마 12,1-2: 여러분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사도 바오로도 ‘십자가 위의 죽음’의 체험에 덧붙여 말하고 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1절). 자신을 이기면서 바치는 정신적 예배가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버리고 포기하는 아픔을 요구한다.형제들에 대한 충실한 사랑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가 진정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형태로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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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꿀벌의 천적인 말벌이 벌집을 습격하면, 일벌들은 도망을 가지만, 파수병 역할을 하는 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덤벼듭니다. 그래서 이런 파수병 꿀벌에게는 ‘각오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수많은 각오를 해야 할 때가 옵니다. 파수병 꿀벌처럼 정말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의 일은 없다고 하여도 크고 작은 희생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파수병 꿀벌들의 각오 유전자를 빌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질문에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가 오늘 복음에서는 오히려 이 각오 유전자가 꼭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성에 함구령을 내리신 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반석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다 보면 믿는 이들의 버팀돌도 오히려 믿는 이들을 비틀거리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생각하다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시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쉽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자세를 밝혀 줍니다. 누군가의 발이 걸리게 만들어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바오로의 권고를 각오 유전자로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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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쉽고 편한 구간도 나오고, 어렵고 힘든 구간도 나옵니다. 어렵고 힘든 구간을 만나면, “정말 이 길이 맞나?” 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나?” 라는 생각에 다른 길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은, 그 어렵고 힘든 일은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고, 그것을 참고 견디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희망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고, 믿음은 그 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는 힘이고, 사랑은 그 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예수님의 수난 당시에, 제자들과 신자들은 메시아이신 분께서 사람들 손에 붙잡혀서 고난을 받고 살해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말은, 당시의 제자들과 신자들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19-21)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힘’을 생각하면,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께 굴복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게 되기는커녕 반대로 그들 손에 의해서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말린 것도 같은 심정에서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24,26)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믿으면 수난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가는 한 과정일 뿐이고,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허망하게 끝나버린 일은 아닙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네 마음대로 판단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제물로 삼으신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고, 그 일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는데,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의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의 행동이 걸림돌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아’ 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모두 사탄과 같다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나에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나의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뒤를 제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해한 다음에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 길 끝에서 영광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이라도......)^처음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내 의지로 내가 하는 일이지만, 일단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 다음에는 나의 뜻과 의지를 버리고, 나의 판단도 버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는 ‘자신을 버리는 일’의 모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십자가의 길을 말리는 베드로 사도를 단호하게 물리치신 일도 ‘자신을 버리는 일’의 모범이 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은, 일부러 사서 고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편하고 쉬운 길을 찾고 싶은 소망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 소망 자체는 악한 일이 아니지만, 사탄의 유혹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사탄은 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쉬운 길을 놓아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는가? 편한 길이 있는데도 왜 힘든 길로 가는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말린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 그가 한 말에는 “꼭 그 길로만 가야 합니까?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은 없습니까?”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은 사심 없이 예수님을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사탄이 유혹하면서 하는 말과 같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베드로 사도 자신에게도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편안해지고 싶은 소망’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도 ‘자신을 버리는 일’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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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의견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하기도 하고,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의견을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서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에 만족하셨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나는 너를 베드로(반석)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답변을 하였기에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답변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사탄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천국의 열쇠를 가졌다고 해도 하느님께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도 무너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에는 한인 공동체가 4곳 있습니다. 퀸즈, 베이사이드, 우드사이드,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입니다. 4곳에서 판공성사를 도와주기도 했고, 미사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퀸즈 성당은 오랜 역사가 있고, 한인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큰 형님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베이사이드 성당은 성전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의방도 넓고, 제대도 화려합니다. 우드사이드 성당은 미국 성당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러기에 더욱 가족 같은 공동체입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도 미국 성당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으로 휴가를 가셨고, 요즘은 제가 주일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고, 따뜻한 신앙공동체입니다. 본당 재정의 규모와 신자의 숫자로 비교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큰 의미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바로 그곳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한 성전이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고, 순교하였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고, 가진 것을 빼앗겼고,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굳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고, 그분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교회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모두 다락방에 숨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세상의 뜻을 따른 이야기도 숨김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교를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밀고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에 공동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고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타협하여 다른 종교와 문화를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할 일이 생깁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은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늘 마음에 담고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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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디딤돌과 걸림돌>
마태오 16,21-27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언하시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디딤돌과 걸림돌>
나와 함께 나처럼
살리기 위해 죽을 때
그대는 나에게 디딤돌입니다
나에게 기대어
그대 살길만을 찾을 때
그대는 나에게 걸림돌입니다
나와 함께 나처럼
모든 벗들을 섬길 때
그대는 나에게 디딤돌입니다
나를 들먹이며
그대 섬김을 받고자 할 때
그대는 나에게 걸림돌입니다
나와 함께 나처럼
자신을 버릴 때
그대는 나에게 디딤돌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의 배를 채울 때
그대는 나에게 걸림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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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우리의 목적은 영광에 있지만>
+찬미예수님
제가 막 유학을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국에서 유학을 앞두고 이태리어 학원을 다니긴 했지만 긴 시간 배우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저에게 외국에서의 하루하루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워낙 언어 체계가 다른 탓에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도 한참을 생각해야 했고 그나마 알고 있는 외국어인 영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학을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났을 무렵, 저는 스트레스나 풀자고 혼자 처음으로 영화관을 찾아갔습니다. 보고자했던 영화의 제목은 한창 어린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겨울왕국”이라는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일단 어린아이들을 타깃으로 한 작품이기에 언어가 부족해도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뮤지컬 영화였으므로 음악이나 즐기자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괜히 영화관에 왔다는 후회가 들기 시작했고 스트레스와 충격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커졌습니다.
영화의 대사는 너무나도 빨랐고 뮤지컬 음악에 맞춰 이태리어가 나오니 더욱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영화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영화 캐릭터의 사소한 한 마디 한 마디에 어찌나 배꼽을 잡고 웃던지 ‘아, 나는 내 옆에 앉아있는 꼬마 아이만도 못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며, ‘이런 언어 실력으로 나중에 과연 대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을까?’, ‘어느 세월에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참으로 무거웠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어학을 하면 할수록 커져만 갔습니다. 하다못해 이태리 사람들이 뭐라 뭐라 빠르게 이야기하면 강아지들도 꼬리를 치며 알아듣는 것 같은데 나는 저 강아지만도 못한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은사 신부님이 이태리를 방문하셨습니다. 신부님과 산책을 하며 저는, 영화관의 체험과 함께 “어린아이만도 못한 언어 실력으로 과연 공부를 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라는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웃으시며 “너, 이태리에 온지 얼마나 됐니?”라고 물으셨습니다. “5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자, 교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너는 당연히 아직 언어가 부족할 수밖에 없지. 이탈리아에 태어난 지 5개월 밖에 되지 않은 건데. 하지만 태어난 지 5개월 된 현지의 갓난아기 보다는 네가 더 낫지 않겠니? 걱정하지 말으렴. 내가 경험했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너의 그 힘든 시간은 분명 도움이 되는 시간들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지나갈 거야.”
교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제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아,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었구나. 그리고 이 힘든 시간이 도움이 된다니 그 말을 믿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모든 과정을 끝낸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제가 참으로 어렸고 미성숙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아무래도 저는 아무런 고생 없이, 아무런 갈등 없이 이태리어를 잘하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모든 시간 시간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를 원했고, 힘든 일을 경험하게 되면 더 이상의 고통 없이 그저 그 순간이 빨리 끝나기를 원했습니다.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를 바랬고 운동은 하지 않으면서 살이 빠지기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고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좋은 결과만을 빠르게 얻길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그런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통 후 부활의 영광까지 예견하시지만 베드로는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부활의 영광은 잊어버리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 장면의 제자들의 모습 속에는, 우리 신앙인들의 흔한 두 가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삶의 괴로움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과 희망을 기반으로 영광스러운 예수님,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만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고통과 죄를 이기신 결과”입니다. 무언가를 “이겼다”라는 것은 일종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전제합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금메달을 획득하는 운동 선수는 없습니다. 별다른 투자와 노력 없이 1등을 하는 학생도 없습니다. 이들이 인정받는 이유는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에도 그만한 고통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는, 혹시라도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이를 외면하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길 기대합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이러한 기대에만 너무 의지하다보면 실제로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원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께서 함께 짊어져 주시길, 그리고 이를 우리가 잘 견디어 내길 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 십자가를 없애주실 주님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답을 올바로 쓴다고 해서 그것을 정말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천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다행인 것은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통을 겪으셨기에 우리의 고통 역시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어려움을 함께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힘을 모은다면 현세의 어려움은 극복되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 환호송은 우리가 바쳐야할 기도의 모범을 다음과 같이 보여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목적은 영광에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십자가가 당연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를 굳세게 만들어줄 것이며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함께 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꺼이 짊어지고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묵묵히 견디어 낼 때 우리는 비로소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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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손대혁 루치오 신부님]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찬미 예수님~!!!
우리가 신앙생활을 정말 열심히 하고, 제대로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주님의 은총 안에서 어떠한 고통도 없는 행복과 평화만이 우리 삶에 펼쳐질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 길을 뒤따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고 밝히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고 하시며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베드로와 같은 모습과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예고에 반박하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고통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막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뒤에 따르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 가셔야 했던 수난과 고통의 길은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막아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또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뜻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서 따르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몸소 걸어가심으로써 보여주신 부활의 영광을 우리 또한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현세에만 동화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을 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참 생명과 구원을 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세에서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각자 삶 속에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끊임없이 찾으며 참 생명과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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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손경락 사도 요한 신부님]
<십자가와 분별>
오늘 복음은 마침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신 뒤의 장면입니다.
위대한 이름들과 심지어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까지 나온 뒤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앞일에 대해 주욱 말씀해주십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지만 예수님은 그에 아랑곳 않으시고 오히려 그 십자가의 길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누구든지’라는 그 표현에서 무게감마저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들과 보폭을 맞춰 매일 살아내기도 바쁠 판국에 어떻게 십자가를 지면 좋을까요? 한 때는 신앙생활의 이름으로 성당 활동을 하는 데에 십자가가 있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작금의 코로나 사태에서는 성당 활동이 중지되었으니 십자가를 질 수 없게 된 셈이겠지요.
어떤 이들은 매일의 삶 자체를 십자가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매일의 삶은 신자 여부와 무관하게 누구든 살아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외적으로 행한 내용보다 더욱 십자가에 있어 관건이 되는 것은 제2독서에 나오는 ‘분별’입니다.
분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초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닥치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충동이 이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외관상 신자 비신자가 구분 없이 이 일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나그네인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이 갈 길을 구분해 내고, 결국에는 그 길을 걷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내면에서부터 다른 마음 가짐으로 하고, 어떨 때는 바보 같아 보이고 져주는 선택, 배려와 사랑과 너그러움의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마음에 들겠기에, 선하고 더 완전하겠기에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내게 무엇이 더 유익한가 하는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무엇이 더 좋은가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합니다.
결국 주님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그 마음 안에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으니까요. 부지런히 분별해내고 그 판단에 따르기 싫어하는 나 자신과 싸우는 무장한 삶이 곧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하신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입니다.
그 분별의 출발은 계명이나 의무에 연관된 것이기보다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연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지금도 나를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자, 그분 마음에 들도록 살기 위해 마음을 쓰는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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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종필 가브리엘 신부님]
<베드로야 내 뒤에 있어라!>
낯선 나라에로 여행을 가려고 하면 긴장되고 설렌다. 설렘과 서투른 것이 나중에 추억으로 자리한다. 일상을 벗어나서 새로운 풍광과 다양한 종류의 미식들은 우리의 마음과 눈과 입을 즐겁게 한다.
무슨 다양한 경험을 할지 모른다.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이기는 하지만 처음이라는 것에는 두려움도 동반한다. 여행길뿐만 아니라 인생길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군가 먼저 간 사람이 있으면 여행의 가이드가 된다. 또한 내가 실수할 수 있는 것을 미리 알려주거나 사전에 예방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여행길도, 인생길도 비슷한 법이다.
누군가 먼저 그 길을 체험했던, 걸었던 자국이 있다면 우리는 흔적을 보다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이스라엘)이 같이 걸었던 길을 보여준다. 복음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걸었던 길을 보여준다. 먼저 걸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신다.하늘나라로 가는 여행자이자 예수님의 일을 연장해야 할 후계자들이다. 그때 “내 뒤에 따라 오너라” 하고 부르신다.
제자는 예수님의 발자국을 밟고 가는 사람들이다.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앞서 가려한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제자 됨이 무엇인지 강력한 명령으로 상기시켜 주신다. 여기에 예수님은 ‘내 뒤로(마태 4,19)’ 가라 하고 명령하신다.
제자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뒤에서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제자가 되는 최초의 부르심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명령은 부활하신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 선문답 사건 후에도 계속된다.
“나에게 따라 오너라.”(요한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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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졸업 후에 곧바로 신학교에 들어간 뒤에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습니다. 바로 등산입니다. 선배들을 쫓아서 다닌 등산을 하다 보니 그 재미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내려올 것을 왜 정상까지 힘드냐고 오르니?”라고 말하지만, 산 정상에서 느끼는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산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휴일이나 방학 때에는 계속해서 등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과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이 기간에 가장 싫어했던 것이 ‘산악 구보’였습니다. 산에 가는 것에 큰 기쁨을 얻었던 저였지만,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산에 가는 것은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일이라 생각하면 고된 노동이 되겠지만, 즐긴다고 생각하면 일도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 선수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습니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어떤 상황이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하루에 책을 350페이지 정도를 읽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를 보고서 힘들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책 읽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고 오히려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다면 우선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를 떠올려 봐야 합니다. 분명히 즐길 수 있는 길이 있으며, 그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말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탄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목숨을 잃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단순히 고통 속에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이 세상 삶을 마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얻기 위해서 고통이나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나의 십자가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는 순간으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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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똥>
새똥이 내 눈에 들어갔다
평생 처음
내 눈을 새똥으로 맑게 씻었다
이제야 보고 싶었으나
보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풍경을 보지 않게 되었다
고맙다.
정호승 시인의 ‘새똥’이라는 시입니다.
새똥이 눈에 들어가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정호승 시인의 표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보기 싫은 인간의 풍경들이 많습니까? ‘지긋지긋하다’라고 할 정도로 보기 싫은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내 눈을 감고 살 수 는 없는 법, 우연인지 필연인지 갑작스럽게 날아온 새똥의 공격으로라도 보지 않게 되어서 고맙다고 합니다.그러나 보기 싫은 모습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보기 좋은 모습으로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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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삽시다>
-사랑하라, 새로워져라, 겸손하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으로 살 수 있나? 요즈음 누구나 묻게 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해 구구절절 처방도 많습니다만 딱 부러진 처방은 없습니다. 참으로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입니다. ‘탐욕-기후위기-팬데믹19-홍수’라는 일련의 관계를 봅니다. 버려지는 무수한 쓰레기들을 볼 때 마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싶습니다. 뿌리에는 무지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어제 읽은 ‘사제생활 십요司祭生活 十要’(산위의 마을; 박기호 신부)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사제만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할 내용도 있습니다. 아주 잊고 지내기 쉬운 일상적이자 본질적인 요소들입니다.
-1.오늘 미사를 나의 첫 미사처럼, 마지막 미사처럼, 오직 한 번뿐인 미사처럼 봉헌하자.
2.미사 30분전 반드시 제대 앞에 앉아 기도하자.
3.모든 사목에서 주님과 동업하고 동료들과 협력하자.
4.복음과 인문학 서적을 늘 가까이 하며 시대의 징표를 주시하자.
5.매일 한 시간 이상 육신 노동으로 건강과 창조성을 일깨우자.
6.매사에 옳음을 따르되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믿지 말자.
7.화났을 때 결정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자.
8.경어와 친절과 예의를 습관되게 하고, 선물은 감사히 받되 즉시 나누자.
9.‘부러워할 것’과 ‘부끄러워할 것’을 가려 알자.
10.게걸스럽게 먹지 말며, 명품과 유락을 밝히지 말자.-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늘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음도 죽음도 아닌 녹슨 삶입니다.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삶이 아니라 웅덩이에 썩은 물같은 고인 삶입니다. 삶이 녹슬면,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막 살아도 안되지만 흐릿하게 살아도 안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참으로 맑고 향기롭게, 늘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제 주보에서 읽은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이 생전에 주고 받았다는 모자의 대화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0일전 1월1일 새해 인사차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그때 평소 안 하던 말씀을 하셨다.
“널 내가 낳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신 어머니에게는 맞지 않는 질문을 무심코 해봤다.
“어머니는 이 세상 다시 태어나고 싶으세요?”
“너를 아들로 만난다면 또 태어나고 싶지.”-
유언과도 같은 이말보다 자식에게 큰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 아들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있을 참 잘 사셨던 어머니임이 분명합니다. ME모임에서 다시 태어나도 부부가 되고 싶은 분은 손들어 보라 했을 때 가만히 눈을 뜨고 보니 자기 부부뿐이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 역시 다시 살아도 수도사제로 이렇게 뿐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요즘 산책때 자주 즐겨 부르는 ‘늙은 군인의 노래’(김민기)가 있습니다. ‘이강산’ 대신에 ‘수도원’을, ‘군인’대신 ‘수도자’를, '어언 30년' 대신 '어언 40년'을, ‘푸른옷’ 대신 수도복 ‘검은옷’을 넣어 불러 보며 영원한 현역, 주님의 전사로서의 신원과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곤 합니다.
-“나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 되어/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0년
무엇을 하였느냐/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청춘”-
정말 하루하루 살아온 전혀 회한도 아쉬움도 없는 수도생활입니다. 그래도 저절로 후반부 “꽃다운 이 내 청춘”을 되뇌며 때로 거울을 보곤 합니다. 퇴영적이 아니라 오히려 저에겐 영적 전의를 새롭게 하는 노래입니다. 저절로 자문해 보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진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화답송 후렴처럼 늘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은, 예수님 사랑은 말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자 영입니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깨어 늘 말씀에 귀기울였던 말씀의 사람이자 말씀을 사랑하고 살았던 말씀의 선포자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다섯 번째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예언직의 비극에 대한 원초적 고백입니다. 평생 매일 강론을 써야 살아갈 수 있는 저에게도 공감이 가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말씀을 사랑했던 예레미야인지 깨닫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주님은 불입니다. 사랑의 불, 말씀의 불입니다. 무지의 쓰레기를 태워버리는,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불, 사랑의 불입니다. 사랑의 불이, 말씀의 불이 불붙어 정화되고 성화된 영혼은 말씀을,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새로워져라!”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깊어져야 합니다.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코 무감각, 무기력, 무의욕, 무의미, 무감정, 무의식이 되어선 안됩니다. 하여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에 앞서 나온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새로운 삶을 위한 마르지 않는 샘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의 권고를 통째로 인용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참으로 말씀을 사랑할 때,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에 충실할 때, 저절로 정화와 성화의 은총이요 분별력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늘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영혼으로, 늘 녹슬지 않고 반짝이는 영혼으로 늘 깨어 사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하라!”입니다.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삶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의 여정입니다. 삶의 깊이를 반영하는 겸손입니다. 그러니 삶의 모든 부정적 일들은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냥 두면 상처지만 겸손의 계기로 활용하며 치유와 더불어 영적성장에 성숙입니다.
섰다 하면 넘어집니다. 예수님의 인정과 축복에 잠시 방심했던 베드로 큰 유혹에 빠져 반석같은 존재가 걸림돌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순간 예수님의 충격적인 처방입니다. 말그대로 겸손의 수련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타고난 믿음도, 겸손도 없습니다. 겸손할 때 배웁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자기의 한계와 약함을 깊이 체험하면서 겸손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배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입니다. 겸손을 배워가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겸손의 여정에 결정적 처방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구체화됩니다. 답은 다음 말씀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대로 십자가의 길은 겸손의 여정, 비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참 내가 실현되는 예닮의 여정, 구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날이 갈수록 새로워짐),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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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하여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고상을 끌어안으며 그분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를 희망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십자가에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하시던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듯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따른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고통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로마8,29)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맞추고 합리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더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2,10) 묻고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가정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그것을 관철하려 하니까 불협화음이 납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도 서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느님 뜻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활동만 있고 사랑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음에 안타까워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 자녀, 배우자, 친구, 술, 도박이 십자가입니다.
성직자, 수도자가 걸림돌이 될 때도 있습니다.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그 속을 보면 다 십자가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고 순종하며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져줄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 의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 걸림돌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기도하게 만들며 침묵하고 희생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 옵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의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두꺼비와 뱀은 앙숙이랍니다. 그래서 둘은 만나기만 하면 독을 뿜어 낸답니다. 그런데 두꺼비가 새끼를 배면 일부러 뱀을 찾아가서 약을 올립니다. 그러면 뱀이 화가 나서 두꺼비를 통째로 삼켜 버립니다. 그러면 두꺼비는 뱀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독을 뿜어내고 마침내 뱀의 뱃속에서 숨이 막혀 죽고, 뱀은 두꺼비의 독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런데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꺼비와 뱀이 썩은 시체 안에서 살아나는 새 생명이 있는데 그것이 두꺼비 새끼들이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 줍니다. 두꺼비는 자기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뱀의 입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는 죽는 것인데 거기에서 새 생명이 살아납니다.
겉으로는 뱀이 이겼지만, 속으로는 두꺼비가 이겼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고달프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천상을 차지하는 복이 거기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새 생명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내 뜻, 내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나를 희생의 제물로 바쳐준다.’고 받아들이면 복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아니 주어지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 16,27)
따라서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비안네).
집회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사용이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을 갈라 놓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에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 15,14-17)라고 말합니다. 천상을 바라면 그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늘 자리가 많이 비었는데 어디를 가셨을까요? 금초를 하러 가신 분이 많으시리라 봅니다. 조상을 위하는 풍습은 좋습니다. 그러나 금초를 하는 것 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미사 안에서 기도해 드린다면 그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루가복음9장61-62를 보면 한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 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께로 가는 길은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세상일에 미련을 버리는 일입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나를 죽이고 포기하는 일이 곧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교과서’,‘ 삶의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언제라도 십자가를 쳐다보며 가야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할 길에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나도 십자가를 집니다. 주님께서 약속한 영광의 미래가 있기에 그 십자가는 가볍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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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이에게 요구되는 선택과 집중을 이야기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그분을 만류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호되게 그를 꾸짖으시지요. 수석 제자가 한 순간에 "사탄"으로, "걸림돌"로 전락합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같은 편에 있다면 참 좋겠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러긴 어려운가 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자아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안위와 만족을 지향하기에 보편적 사랑을 추구하는 십자가와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자아로 똘똘 뭉쳐 있을 때에 십자가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형벌이고 성가신 짐 덩어리일 뿐이지요.
모든 인간은 자신과 십자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 앞에 섭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인생길에서 만나는 고통과 나약함, 불합리성 등을 피할 수 없지요. 다만 십자가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주님의 길에 들어선 우리 신앙인 역시 자신과 십자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매일 매순간 마주하며 삽니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결국 그걸 버린다는 의미지요.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두루뭉술 다 움켜쥔 채 대충 가는 중이라면 아직 예수님의 부르심을 인격적으로 직면하지 못한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볼멘 항변이 들립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
예언자는 주님을 말씀을 전하면서 날마다 "놀림감, 조롱거리, 치욕, 비웃음거리"가 되는 처참하고 고달픈 신세를 토로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제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그를 무시하고 박해하기 일쑤이니 그는 늘 외롭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게 다 자기를 불러 힘든 짐을 떠맡기신 주님 때문입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예레 20,9)
그래서 예언자는 주님과 거리를 두고 그분 말씀도 전하지 않겠다고 힘껏 버텨 보지만, 주님 말씀의 열기를 속에만 담아두고는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선포될 때까지 그 속에서 출구를 찾아 활활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모두에게 버림 받고 등돌림을 당하고 죽음까지 당한다 해도 내 것 아닌 것처럼 외면하거나 자신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소명과 관련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세속의 원리나 인간적 욕망을 거스르지요. 베드로가 펄쩍 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피땀 흘리며 아버지께 기도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와 자아 앞에서 고뇌하는 우리를 위해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우리의 선택이 무엇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로마 12,2)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여전히 "사람의 일"이 우선하는 자아의 노예입니다. 반대로 시선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지요. 인간적으로는 택하고 싶지 않고, 여건이 된다면 피하고 싶은 것도 하느님 때문에 감내하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걸림돌이 아니라 동반자입니다.
괜히 십자가라는 말이 붙은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었고, 수치와 버림받음, 저주와 모욕의 상징입니다. 오죽하면 베드로가 그렇게 만류했겠습니까!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작아지고 움츠러드는 자신을 탓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청해서건, 억지로건 지고 가는 자신을 칭찬하고 위로해 주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주님께 항변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도 십자가는 키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버겁고 힘든 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저야 할 십자가가 너무 버겁고 힘드시나요?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저마다 힘껏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소박하고도 치열한 일상은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희망"(복음 환호송)이 아직 건재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알고 주님도 알아 주시는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며 오늘도 꿋꿋이 나아갑시다. 주님은, 세상은 우리의 희생과 사랑과 기도가 여전히, 너무도 간절히 필요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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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의 삶의 현실에는 갖가지 어려움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코로나 19 감염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 죽음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결코 그것들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어찌할 수 없는 불편함과 어려움,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무능과 약함과 한계를 깨우쳐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일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아는 기원전 6백년 전후, 유다왕조가 이집트와 연합하여 바빌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오히려 “유다는 망해야 한다. 바빌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이는 유다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사제, 거짓 예언자들과 관리들이 일어나 예레미아를 잡아 가두고 폭행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고통당하고, 폭행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 원망조로 이렇게 읊조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8)
그러나 모두에게 저버림을 받아도, 자신이 반역자로 취급될지라도, 결국 외쳐야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존재의 근거요 힘이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을 수락하는 삶, 그 안에 구원이 있음을 본 까닭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본 까닭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믿음이 구체적으로는 봉헌이란 형태로 드러납니다. 곧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곧 일상의 크고 작은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거룩한 산 제물”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의 메시아적 행위, 곧 구원의 행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곧 당신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말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21절)는 예고 말씀으로, 승리자와 통치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메시아가 수난을 받아 패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22-23절)는 베드로와의 대화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예고요,
<셋째>(24-28절)는 고난 동참 요구와 상급 약속으로, 메시아를 따르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의 동참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 하며,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양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하고 우리를 질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보다 피하려 합니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에는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아야 하고, 되고자 하는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고, 나아가서 하느님께 희망하는 것마저 기꺼이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마태 16,22) 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태 16,23)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하고 있을 때, 혹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노고를 피하고 있을 때, 또는 그가 나에게 잘해주는 지를 따지고 있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힘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게 하소서!
제 삶이 산 제물로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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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마태 16,21)
주님!
길을 인도하시는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따라 걷게 하소서.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어도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보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끌어안게 하시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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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기독교,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이는 어느 개신교 신학대학 교수가 던진 질문인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저 예배 자리를 지켜내는 일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면예배 금지조치에 발끈하는 교회가 되어선 안 된다. 인류 전체가 경험하는 혼돈 속에서 신체적, 경제적 그리고 심리적 아픔을 당한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상의 중심은 전광훈 목사도 아니고, 광화문도 아니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으로 향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우리의 삶 한 복판에는 늘 하느님의 뜻과 내 뜻과의 충돌이 존재하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따르려는 유혹이 존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나,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우리가 바쳐야 할 '거룩한 산 제물'은, 바로 이러한 충돌과 유혹에서 하느님의 뜻을 지켜내고 따르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멈춤이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에 그쳐서는 안 되고, 예수님을 따름이라는 본질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성찰이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인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님은 2020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에서, 지금의 코로나 상황은 우리의 맹목적인 이윤 추구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생태계 파괴에서 비롯되었고, 그래서 지금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물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향으로의 '근본적인 전환', '생태적 회심'이 필요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과 말로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근본대책이지 않을까?
오늘도 내일도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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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2E9so0sSk_M&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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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 27)
끝내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행실이 되고
행실이 십자가가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찾게되는
십자가가
생명이다.
십자가의
언어가
영혼의
언어이다.
십자가를 질 때
모순의 굴레어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이다.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자신을 버려야
십자가를
자연스레
질 수 있다.
목숨을 버려야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살아있기에
십자가가 있다.
흐르는 것이
십자가이다.
행실대로
갚아주는 것이
십자가이다.
끝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십자가이다.
사람을 키우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줄
나의 십자가에
감사드린다.
갚아야 할
십자가의
빚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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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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