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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소개글에는 桓九 가 주인이 아니다. 위 글의 주인은 桓九의 아내이다. 아닌가?
글을 써보지 않은 사람은 그 차이점이 뭔지 모른다. ...그리고 글을 써 본 사람은 위의 글을 읽고 누가 주인이지? 라는 물음표를 붙인다. .....
(3) 靈寶局定靜篇
"靈寶局定靜篇" 은 보통 글은 아니다. 그러니,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성사와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인터넷에 공지되어 있고, 그 글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다. ...
어쨌든 "靈寶局定靜篇" 을 공부한 덕택에 그 글귀의 덕택으로 辛元一 이 성사와 함께 했다는 점은 인정하자. 이것으로 옥포라는 사람도 만족했으리라 믿는다.
桓九 가 元一 을 성사께 소개했다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별거 아니다.
여기서 질문은 하나 하고 가야한다.
질문: 桓九 는 元一 을 성사께 어떤 이유가 있어 소개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사와 元一 사이의 일을 살펴보면 된다. 너무 쉽다.
(4) 성사와 元一
35. 상제께서 정미(丁未)년에 원일에게 “내가 四월 五일에 태인으로 갈 터이니 네가 먼저 가서 사관을 정하고 기다리라”고 이르시고 원일을 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이튿날 고부 객망리의 주막에 이르러 형렬에게 “나는 이곳에서 자고 갈 터이니 네가 먼저 태인에 가서 원일이 정한 사관에 자고 내일 이른 아침에 태인 하마가(下馬街)에서 나를 기다리라” 하셨도다. 형렬이 원일을 만나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곳에 이르니 마침 장날이므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였도다.
36. 상제께서 이곳에서 형렬을 만나 그를 데리고 한산(韓山) 객주집에 좌정하시고 원일을 부르셨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술을 가져오라. 내가 오늘 벽력을 쓰리라” 하시니 그는 말씀에 좇아 술을 올렸더니 상제께서 잔을 받으시고 한참 동안 계시다가 술을 드시니 여태까지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음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며 벽력이 크게 일어나니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태인에 유숙하는 사람이 많았도다. 상제께서 이 일에 대하여 형렬과 원일에게 설명하시기를 “내가 이제 아침에 객망리 주막 앞을 지날 때에 한 소부가 길가의 풀에 내린 이슬을 떨며 지나가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그 소부가 친정의 부음을 듣고 가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그 뒤를 한 노구가 지팡이를 짚고 가며 소부의 자취를 묻는도다. 내가 그 연유를 따져 물었더니 그 노구가 ‘앞에 간 소부는 나의 며느리이나 가운이 불행하여 어제 밤에 자식을 잃었는데 며느리가 장사를 치르기 전에 오늘 새벽에 도망갔나이다. 며느리는 저희끼리 좋아서 정한 작배이니다’고 대답하더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들에게 “대저 부모가 정하여 준 배필은 인연이오. 저희끼리 작배한 것은 천연이라. 천연을 무시하여 인도를 패하려 하니 어찌 천노를 받지 아니하랴. 그러므로 오늘 내가 벽력으로써 응징하였노라”고 하셨도다. 그 며느리는 벽력에 죽었노라고 전하는도다.
57. 이 일이 나기 전날 상제께서 광찬을 정읍에 있는 경석에게 보내고 원일을 태인에 있는 경원에게 가게 하고 공우를 또 다른 곳으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피하게 하신 것은 광찬과 원일의 성질을 알고 계시는 터이고 공우는 여러 번 관재를 당하였던 까닭이었도다.
47. 이후에 백암리에서 상제를 박공우와 신원일이 모시고 있었도다. 이 때 종도 김경학의 천거로 김영학(金永學)이 상제를 배알하였을 뿐 상제께서 이렛 동안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도다. 영학이 매우 불만을 품기에 공우와 원일이 그에게 “그대가 상제께 삼가 사사하기를 청하면 빨리 가르쳐 주시리라”고 일러주니 그 때야 그는 사사하기를 청하니 상제로부터 승낙을 얻었느니라. 그런데 상제께서 갑자기 그를 꾸중하시는도다. 영학은 두렵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문밖으로 나가니라. 상제께서 영학을 불러들여 “너를 꾸짖는 것은 네 몸에 있는 두 척신을 물리쳐 내려 하는 것이니 과히 불만을 사지 말라”고 타이르셨도다. 영학이 “무슨 척이니까. 깨닫지 못하겠나이다”고 되물은 즉 “너는 열 여덟살 때 살인하고 금년에 또 살인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고 회상을 촉구하시니 그는 옛 일을 더듬었도다. “그 나이 때에 제가 남원(南原)에서 전주 아전과 말다툼하다가 그의 무례한 말에 분격하여 그에게 화로를 던져 머리에 상처를 입혔는데 이것으로써 신음하다가 그 이듬해 삼월에 죽었나이다. 또 금년 봄에 장성(長城) 다동(多洞)에서 사는 외숙인 김 요선(金堯善)이 의병으로부터 약탈을 당하여 의병대장 김영백(金永白)을 장성 백양사(長城白羊寺)로 찾아가서 그 비행을 꾸짖으니 대장은 외숙에게 사과하고 그 의병을 찾아 총살하였나이다”고 영학이 이 두 일을 아뢰었도다.
21. 二十일에 모든 종도들이 속속 동곡에 모이니 김형렬. 김갑칠. 김자현. 김덕유. 류찬명. 박공우. 신원일. 이치화. 이공삼. 최덕겸 등이오. 채사윤(蔡士允)은 처음으로 동곡에서 시좌하니라. 상제께서 류찬명에게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天文地理風雲造化 八門遁甲六丁六甲智慧勇力)과 회문산 오선위기혈 무안 승달산 호승례불혈 장성 손룡 선녀직금혈 태인 배례전 군신봉조혈(回文山五仙圍碁穴 務安僧達山胡僧禮佛穴 長城巽龍仙女職錦穴 泰仁 拜禮田群臣奉詔穴)을 쓰게 하고 불사르셨도다.
23. 또 상제께서 “내가 어느 곳에 숨으면 좋을까”고 물으시니 신원일이 “부안에 궁벽한 곳이 많이 있사오니 그 곳으로 가사이다”고 원하니라. 이에 상제께서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도다.
26. 二十一일에 신원일이 이치화와 채사윤과 그의 처남으로부터 얼마의 돈을 가져왔느니라. 상제께서 신원일에게 돈을 가지고 온 사람의 이름을 써서 불사르게 하고 형렬에게 있는 돈 중에서 일부를 궤 속에 넣으라 하고 남은 것으로는 여러 사람의 양식을 충당케 하셨도다.
33. 경석으로 하여금 양지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일순 호남 서신 사명(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姜一淳湖南西神司命)이라 쓰게 하고 그것을 불사르게 하시니라. 이 때에 신원일이 상제께 “천하를 속히 평정하시기 바라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 하셨도다.
17. 김광찬, 신원일, 정성백, 김선경, 김보경, 김갑칠, 김봉규등 여러 종도들이 이월 그믐에 동곡에 모였느니라. 다음 달 이튿날 상제께서 공사를 보시기 위하여 서울로 떠나시면서 전함은 순창(淳昌)으로 회항하리니 형렬은 지방을 잘 지키라고 이르시고 각기 자기의 소원을 종이에 기록하라고 모여 있는 종도들에게 명하시니 그들이 소원을 종이에 적어 상제께 바치니 상제께서 그 종이에 안경을 싸시고 남기, 갑칠, 성백, 병선, 광찬을 데리고 군항(群港)으로 가서 기선을 타기로 하시고 남은 사람은 대전(大田)에서 기차를 타라고 이르신 후에 이것을 수륙병진이라고 이르셨도다. 그리고 상제께서 원일에게 “너는 입경하는 날로 먼저 종이에 천자부해상(天子浮海上)이라고 정서하여 남대문에 붙이라”고 명하셨도다. 원일은 곧 여러 사람과 함께 대전으로 떠났도다.
19. 이튿날 배가 인천에 닿으니 일행은 배에서 내려 기차로 바꿔 타고 서울에 이르니 광찬이 마중 나와 상제를 황교(黃橋)에 사는 그의 종제 김영선(金永善)의 집으로 안내하였는데 원일은 남대문에 글을 써 붙이고 먼저 와 있었도다.
2. 또 백지로 고깔을 만들어 마장군(馬將軍)이라 써서 문위에 걸고 한아름쯤 되게 묶어 인경을 만들어 방 가운데에 달아 매고 백지를 바른 다음에 二十四방위 자를 둘러 쓰고 그 글자 사이에 다른 글자를 써 넣고 또 그 위에 백지를 오려서 비늘을 달아 붙이시니 그 모형이 마치 철갑옷과 같아지니라. 그 자리에 형렬, 공신, 광찬, 장근, 응종, 원일, 도삼, 갑칠, 그 외 몇 사람이 있었도다.
13. 상제께서 농암에서 공사를 행하실 때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허미수(許眉叟)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의 일만 이천 고물은 녹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金剛山)일만 이천봉은 겁기가 붙어 있으니 이제 그 겁기를 제거하리라” 하시고 “네가 김광찬, 신원일과 함께 백지 일방촌씩 오려서 시(侍)자를 써서 네 벽에 붙이되 한 사람이 하루 사백자씩 열흘에 쓰라. 그리고 그 동안 조석으로 청수 한 동이씩 길어 스물네 그릇으로 나누어 놓고 밤에 칠성경(七星經) 삼칠편을 염송하라” 명하시니라. 형렬은 명을 좇았으되 신원일이 즐거이 행하지 아니하므로 상제께 아뢰이니 상제께서는 “정읍 이도삼을 불러서 행하라” 분부하시니라. 형렬은 그를 데려다가 열흘동안 분부대로 행한 후에 김갑칠을 보내어 일을 마쳤음을 상제께 아뢰게 하였더니 상제께서 갑칠에게 양(羊)한마리를 사 주며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라”고 이르셨도다.
19. 상제께서 十二월에 들어서 여러 공사를 마치시고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도다. 경석, 광찬, 내성은 대흥리로 가고 원일은 신경원의 집으로 형렬과 자현은 동곡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남아 있는 문공신, 황응종, 신경수 들에게 가라사대 “경석은 성(誠) 경(敬) 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고 일러주시고 또 “본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 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신명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 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 하시고 종이에 글을 쓰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훗날에 보라. 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보다 많아지리라. 풀어 두어야 후천에 아무 거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맺으셨도다.
24. 신원일이 개벽공사를 빨리 행하시기를 상제께 간청하니라. 상제께서 “인사는 기회가 있으며 천시는 때가 있으니 그 기회와 때를 기다릴 것이니 이제 기회와 천시를 억지로 쓰면 그것은 천하에 재화를 끼치게 될 뿐이며 억조의 생명을 억지로 앗아가는 일이 되리라. 어찌 차마 행할 바이냐”고 말씀하셨으되 원일이 “방금 천하가 무도하여 선악을 분별하기 어려우니 속히 이를 잔멸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주시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말하면서 간청하니 상제께서 심히 괴로워 하셨도다.
27. 무신년 七월에 이르러 상제께서 원일을 이끄시고 부안 변산 우금암(遇金岩)아래에 있는 개암사(開岩寺)에 가시니라. 그 때 상제께서 원일에게 삶은 쇠머리 한 개와 술 한 병과 청수 한 그릇을 방안에 차리고 쇠머리를 청수 앞에 진설하게 하신 후에 원일을 그 앞에 꿇어 앉히고 성냥 세 개비를 그 청수에 넣으시니라. 이 때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나고 홍수가 창일하는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이제 청수 한 동이에 성냥 한 갑을 넣으면 천지가 수국(水國)이 될지니라. 개벽이란 이렇게 쉬우니 그리 알지어다. 만일 이것을 때가 이르기 전에 쓰면 재해만 끼칠 뿐이니 그렇게 믿고 기다려라”고 일러주시고 진설케 하신 것을 모두 거두니 곧 풍우가 그쳤도다.
28. 상제께서 원일을 곧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도다. 원일이 집에 돌아와서 보니 자기 동생의 집이 폭우에 파괴되고 그 가족은 원일의 집에 피난하였도다. 원래 원일의 아우는 상제를 믿지 아니하였으며 언제나 불평을 품었도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당한 후부터 두려워서 무리한 언사를 함부로 쓰지 아니하였도다.
17. 경석이 상제의 명을 받들어 양지 이십장으로 책 두 권을 매니 상제께서 책장마다 먹물로 손도장을 찍고 모인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것이 대보책(大寶冊)이며 마패(馬牌)이니라.”또 상제께서 한 권의 책명을 “의약복서종수지문(醫藥卜筮種樹之文)이라 쓰고 “진시황(秦始皇)의 해원도수이니라” 하시고 한 권을 신 원일의 집 뒷산에 묻고 또 한 권을 황 응종의 집 뒤에 묻으셨도다.
18. 상제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 일을 결정하리라.” 이르시니 두 사람이 명하신 곳에서 성심성의를 다하여 생각하였도다. 이렛날에 원일이 불리워서 상제께 “청국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 반수기앙(天與不取 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상제의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 줄 아나이다”고 여쭈어도 상제께서 대답이 없었도다. 덕겸은 이렛동안 아무런 요령조차 얻지 못하였도다. 상제께서 “너는 어떠하뇨” 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여쭈는지라.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락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니라. 원일은 중국의 해원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 하여 불평을 품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하므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좇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일러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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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일과 성사가 함께 하는 구절은 너무 많다. 그래서 여기서 그친다.
하지만 신원일을 연구하면 지금 수도인들이 뭘 해야할지는 알 수 있으리라 보고, 다 찾아보시길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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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g8jTxi8qw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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