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과 낭만이 공존하던 납량특집의 기억
개암 김동출
에어컨을 켜 두어도 무더위가 쉽게 가시지 않는 여름날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지구 온난화 탓인지 해가 갈수록 더위는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오늘 문득, 이 더위를 잊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청소년 시절 즐겨 보던 납량특집 방송이 떠올랐다.
당시 농촌 마을에서는 모기떼가 기승을 부렸고, TV가 있는 집에는 납량특집 방송을 함께 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주인장은 해 질 무렵부터 모기를 쫓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마당 한가운데 생쑥 더미에 딩겨를 섞어 모깃불을 피우고, 안방의 TV가 잘 보이는 축담 아래에 멍석을 내어놓아 이웃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맘때쯤이면 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특별한 방송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곧장 짐작하시겠지만, 바로 납량특집 방송이다. ‘납량(納涼)’은 더위를 식힌다는 뜻으로, 공포·스릴러·괴담 같은 소재를 활용해 시청자에게 오싹한 재미를 주며 더위를 잊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 중 “전설의 고향”은 으뜸이었다. 한국의 민속 설화를 기반으로 전래동화, 민간신앙, 전설을 각색해 드라마화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단순히 무섭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욕망과 도덕적 교훈을 담아내며, 삼복더위 시기에 맞춰 여름철 납량특집으로 편성되어 시청자들에게 오싹한 재미를 제공했다. 또한 당시 신인 배우들이 많이 출연해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로는 가장 유명한 〈구미호〉가 있는데, 여우가 인간으로 변해 사랑과 욕망을 다루는 이야기였다. ‘도깨비’는 한국적 괴물 캐릭터를 활용한 공포극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저승사자’는 죽음과 운명을 소재로 한 이야기로 철학적 메시지를 담았다. 또 ‘귀신의 집’은 전형적인 폐가와 귀신 이야기를 다루며 납량특집의 정석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 시절의 납량특집 방송을 되짚어 보면
# 1. 한(恨)을 품은 총각, 몽달귀신 이야기: 장가를 가지 못하고 총각으로 죽은 귀신을 일컫는 몽달귀신은 늘 우리 설화 속에서 단골로 등장하던 손님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삼베옷을 입고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골탕 먹이곤 했지요. 혼기를 놓치고 세상을 떠난 자식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남몰래 사혼식(死婚式)을 올려주던 애달픈 풍속과도 맞닿아 있는, 슬프고도 섬뜩한 이야기였다.
# 2. 흰 소복에 붉은 피, 처녀 귀신(손각시) 이야기: 역시 시집을 가지 못하고 죽어 한이 맺힌 처녀 귀신은 납량특집의 영원한 주인공이었다. 어두운 밤, 소쩍새 울음소리와 함께 스산한 안개 속에서 소복을 입고 나타나던 모습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특히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과 극명하게 대비되던, 입술 끝으로 흘러내리던 붉은 피는 어린 시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게 했던 가장 강렬한 시각적 공포였다.
# 3. 바람 부는 전설의 고개, 귀곡산장(鬼哭山莊): "귀신이 곡(哭)하는 산장"이라는 이름 그대로,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가 하룻밤 묵어가게 되는 외딴집 이야기. 폭우가 쏟아지거나 번개가 치는 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인자해 보이던 주인이 밤이 깊어지자, 본색을 드러내거나, 알고 보니 이미 오래전에 폐가가 된 곳이었다는 식의 반전이 늘 짜릿한 전율을 해주었다.
납량특집 시간이면 혼기를 앞둔 처자를 둔 감시망이 무뎌진다. 이틈을 타서 농촌의 젊은 연인들은 부모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설 같이 전해지는 큰골 댁 사랑 이야기도 있었다. 여름밤, 등등한 귀신 소리에 온 동네가 숨을 죽이던 그 시절 '납량특집' 시간! 바로 그 타이밍이 시골 청춘들에게는 거사를 도모할 디데이(D-day)'가 되었다. 혼기 찬 딸내미가 밤마실이라도 갈까, 봐 매의 눈으로 감시하던 부모님들이었지만, TV 속 구미호가 꼬리를 흔들고 내 다리 내놓으라며 귀신이 울부짖는 순간만큼은 정신을 쏙 빼앗기기 마련이었다.
바로 이때를 노려, 농촌의 젊은 연인들은 까치발을 들고 부모님의 눈을 피해 마당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는 TV 속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데, 심장은 두근두근, 손은 땀으로 흥건해진 채 나누던 아슬아슬하고도 달콤한 밀회! 그 시절, 동네 사람들 모두가 쉬쉬하면서도 부러워했다는 ‘큰골 댁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도 바로 이 소름 돋는(?) 납량특집의 은혜를 입어 피어난 로맨스였다. 귀신 덕분에 사랑을 이룬, 참으로 기묘하고도 낭만적인 여름밤의 전설이었던 셈이다.
요즘 서양식 공포 영화들은 잔인하고 자극적인 괴물이 주로 등장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접했던 몽달귀신이나 처녀 귀신 이야기는 언제나 ‘인간적인 정과 한(恨)’을 담고 있었다. 또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묵직한 메시지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단순히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끝에 가서는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여운을 남겼다. 그 시절의 TV는 청소년들에게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중요한 매체였다.
1980년 12월 1일 KBS가 시작한 컬러방송 이후 납량특집방송은 더욱 실감이 났다. 모기향 타들어 가는 냄새와 인심 좋은 어느 집 안주인의 얼음물 수박이나 얼음 미숫가루 한 그릇. 그리고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던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던 그 시절의 여름밤. 어쩌다 밤눈이 어두운 어머니 따라 뒷자리를 지키는 아들네들은 흑백 TV로 ‘존 웨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토요 명화까지 보고 발걸음을 돌리기도 하였다. 1977년 교직에 첫발을 디딘 화자는 첫 봉급을 받아 어머님께 흑백 TV 한 대를 선물해 드렸다. 대견해하시던 어머님 모습이 마치 어제 일 같이 선연하게 뇌리를 스친다.
첫댓글 면소재지에서 4명이 자취를 하며 중학교를 다녔는데,
신민당 당수를 지낸 유진산 생가에만 tv가 있어서
자주 찾아가 보곤했는데, 그때의 추억을 소환해 주셨네요.
유진산 선생의 생가가 대전시 인근에 있군요. ㅎㅎ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에 있습니다.
중학교를 진산면에 소재한 진산중학교를 다녔지요.
더불당의 정청래 전 당대표가 후배가 되지요.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