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씨의 시조 7
가리이씨(加里李氏) 가리는 성주의 속현이다. 가리이씨 시조는 고려 충렬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승휴(李承休)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66가구 1,95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가평이씨(加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신라(新羅)때 완산 호장(完山戶長)을 지낸 이인보(李仁輔)를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8세손 기문(起文)이 조종(朝宗 : 가평의 옛 지명)에 이거(移居)하여 본관을 조종(朝宗)으로 삼았다. 그후 29세손인 춘계(椿桂)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그의 증손 형손(亨孫)이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한 공(功)으로 가평군(嘉平郡)에 봉해 졌으며 지명의 변천으로 조종(朝宗)이 가평(加平)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本貫)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형손(亨孫)의 8대조(八代祖)로 호장(戶長)을 지낸 진수(珍守)를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춘계(椿桂)의 손자 다림(多林)과 증손인 윤손(允孫)․형손(亨孫) 형제가 유명했다. 다림(多林)은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부총관(副摠管)에 이르렀으며, 윤손(允孫)은 정종(定宗) 때 등과하여 문종조(文宗朝)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형손(亨孫)은 1447년(세종 2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전라도 부절제사(全羅道副節制使) 겸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고 1492년(성종 23) 우림위장(羽林衛將)에 이어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했다. 그외 병조 참판(兵曹參判) 장생(長生)과 현감(縣監)을 지낸 장경(長卿), 임진왜란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명백(命百)과 경종(景宗) 때 학자(學者)로 이름난 제태(齊台)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066가구, 18,6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릉이씨(江陵李氏) 강릉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335가구 4,16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양이씨(江陽李氏) 강양은 합천의 별칭이다. 강양이씨 시조는 사재감영(司宰監令) 이초(李超)이다. 합천이씨 시조 이개의 후손으로서 합천이씨와 같은 근원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82가구 1,90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진이씨(康津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강진 이씨(康津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남해왕(南海王) 때의 사람인 이 완(李 完)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며,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검교첨의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에 오른 진(珍)을 일세조(一世祖), 강진(康津)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진(珍)의 아들 석(碩)이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산원 동정(散員同正)을 지냈고, 손자 영기(英奇)는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은거(隱居)하여 조선조(朝鮮朝)에서 수차 벼슬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공(功)을 세운 터(攄)는 진(珍)의 증손(曾孫)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목사(牧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인문(人文)은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부제학(副提學) 만균(萬鈞)은 중종(中宗) 대 문과에 올라 경연관 참찬관(經筵官參贊官)을 거쳐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지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그외 학자(學者)로 이름난 사경(思敬)과 효자(孝子) 상기(象璣)가 있었고, 근대에 와서는 봉수(鳳洙)가 독립운동가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진 이씨(康津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488가구, 69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화이씨(康華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강화 이씨(江華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중랑장(中郞將)․태자태보(太子太保)를 역임한 이대평(李大平)이다. 그가 삼한벽상공신(三韓璧上功臣)으로 하음(河陰 : 강화의 고호)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화(江華)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대평의 아들 개(玠)가 군기소감(軍器少監)을 거쳐 호부시랑(戶部侍郞)을 역임했으며, 손자 백원(白元)이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또한 백원의 아들 돈인(敦仁)이 소감(少監)을 지냈으며, 돈인의 손자 당문(唐文)이 첨사(詹事)를 지내 가문을 중흥심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화 이씨(江華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74가구, 3,7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령이씨(開寧李氏) 개령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88가구 1,92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개성이씨(開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개성 이씨(開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차감(李次瑊)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녹사(綠事)․영동정(令同正) 등을 역임하고, 개성부윤(開城府尹)을 지냈으며 누대(累代)에 걸쳐 개서(開城)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왔다. 그후 덕시(德時)가 고려에서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고, 조선(朝鮮) 개구에 공(功)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덕시(德時)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청주 이씨(淸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덕시(德時)의 아들 등(登)이 계천위(啓川尉)에 봉해졌고 1422년(세종 4) 개성군(開城郡)에 개봉(改封)되었다. 또한 세종(世宗) 때 과거에 오른 선(宣)은 덕시의 손자로 판서(判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광세(匡世)는 세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외 화가로 이름난 명기(命基)는 사과(司果)를 역임한 종수(宗秀)의 아들로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1796년(정조 20) 왕의 초상화를 그려 더욱 유명해졌으며, 환후(瓛垕)는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이씨(開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530가구, 7,2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성이씨(開城李氏) 개성이씨 시조는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 이개(李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인물로 아들 이등(李簦)은 태조의 부마로 계천위(啓川尉)에 봉해졌다. 시호는 호안공(胡安公)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683가구 5,47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는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거창이씨(居昌李氏) 거창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78가구 1,90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기이씨(京畿李氏) 경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782가구 5,32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남이씨(慶南李氏) 경남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1가구 1,20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북이씨(慶北李氏) 경북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77가구 2,06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산이씨(京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경산 이씨(京山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정종(定宗) 때 악거 부정(樂居副正)을 지낸 이덕부(李德富)이다. 그가 계림(鷄林)에서 경산(京山)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경산(京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덕부(德富)의 5세손 호(祜)가 고려에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祜)의 손자(孫子) 합(珨)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성유(成裕)의 아들 감(瑊)과 미(瑂)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는데 장남 감(瑊)은 부윤(府尹)을 지냈다. 흥문(興門)은 조선조(朝鮮朝)에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으며, 엽(曄)은 중랑장(中郞將)을, 형천(亨天)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이 외에도 이조 좌랑(吏曹佐郞) 병흠(秉欽)을 비롯하여 학자(學者)로 이름난 현창(鉉昌)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산 이씨(京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875가구, 7,9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성이씨(鏡城李氏) 경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2가구 1,0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의 6부(六部)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다스렸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신라 말에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우리 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 이씨는 대체로 고려 초기(高麗初期)에서부터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여 벌족(閥族)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수많은 명현(名賢)과 학자(學者)를 배출시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혔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소판공 거명의 9세손 총섬(寵暹)이 고려 성종(成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오인유(吳仁裕)․남궁 원청(南宮元淸)․이윤관(李允貫) 등과 더불어 오묘(五廟 : 제후의 묘)와 사직(社稷)을 건립하였으며, 국자감(國子監)에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설립함으로써 면학의 기풍을 고취 시켰다. 한편 총섬의 7세손인 핵(翮 : 문하평리를 지내고 상서좌복야에 추증)의 아들 인정(仁挺)․진(瑱)․세기(世基) 3형제와 손자(孫子) 5형제가 모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壯元及第)하고 서사(書史)와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쳐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으며, 특히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으로 임해군 (臨海君)에 봉해진 진(瑱)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문(詩文)에 뛰어나 아들 3형제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당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후의 석학(碩學)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익재(益齋) 제현(薺賢)은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議贊化功臣)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일곱 왕조(王朝)에 네 번이나 상부(相府)에 올라 정사(政事)를 돌보며 당대의 명 문장가(名文章가)로 외교문서에 통달했었다. 특히 익재는 우리나라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元)나라 조맹부(趙孟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이를 널리 유행시켰고, 그의 저서(著書) 「익재난고(益齋亂藁)」의 소악부(小樂部)에 칠언절구 한시(漢詩)로 번역하여 실은 17수(首)의 민간가요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다정한 문우(文友)였던 지대(之帶 : 한성판윤을 지냄)와 세조(世祖) 때 좌리3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철견(鐵堅),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 급제하여 경산(慶山)과 초계 현령(草溪縣令)을 지냈으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던 을규(乙奎)가 뛰어났고,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임해군(臨海君)에 추봉되었던 달존(達尊 : 익재 제현의 아들)의 6세손 공린(公麟 : 평안 감사 윤인의 아들)은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의 사위가 되었는데, 슬하에 아들 8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했다. 공린의 장가 들던 날 집안이 청빈(淸貧)하여 폐백을 대 광주리(竹筐)에 담아 가지고 갔는데, 장모 이씨(李氏)가 예절을 모른다고 나무라자 박팽년은 “내가 이 사람을 고른 것이 이 까닭이오”라고 하였다. 장가 든 첫날 밤 꿈에 늙은 첨지 8명이 절하면서 “우리들은 장차 솥에 삶겨져 죽게 되었는데, 만약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읍니다.”하며 애원하였다. 공린은 잠에서 깨어나 신부에게 물으니 자라 여덟 마리를 사다 부엌에 두었다고 말했다. 당시 첫날 밤을 지낸 신랑에게 저역을 보강하는 뜻에서 자라를 고아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에 놀란 공린이 자라를 즉시 강물에 놓아 보내게 하였으나 자라 한 마리가 빠져 달아나니, 종이 삽을 가지고 잡으려다가 잘못하여 그 목을 끊어 죽였다. 그날 밤에 또 꿈을 꾸니 7명의 첨지가 와서 감사하다고 절을 하였다. 그 후에 공린은 아들 8형제를 낳아 이름을 오(鼇)․구(龜)․원(黿)․타(鼉)․별(鼈)․벽(鼊)․경(鯨)․곤(鯤)으로 지었는데, 모두가 재주와 명성이 뛰어났고 문장과 행의(行義)로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셋째 원(黿)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니 세상 사람들은 앞서 삽 끝에 목이 잘려 죽은 한 마리 자라의 옛일과 맞아 떨어졌다고 했다. 특히 원은 문행(文行)이 뛰어나 순숙(筍淑)의 아들 8형제를 비유한 <순씨팔룡(筍氏八龍)>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명(慈明)과 같다는 칭찬을 받았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시호(諡號)를 주는 관청의 태상(太常)에 있으면서 김종직(金宗直)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하자고 의논하였다는 죄목으로 나주(羅州)에 유배되었다. 갑자사화 때 죄가 가증되자 종이 원을 업고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는 “임금의 명(命)은 피할 수 없다.”하며 끝내 형벌에 다달아 굽히지 않으니 연산군(燕山君)이 더욱 노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별(鼈)은 형인 원과 함께 울면서 작별하고 과거의 뜻을 단념한 채 평산(平山)으로 내려가 그가 사는 집을 <장육당(藏六堂)>이라 하며 호(號)를 삼았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그는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 다니면서 고을의 노인들과 더불어 낚시질과 사냥을 하였으며, 또한 시(詩)를 읊고 술을 따르면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고 술에 취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한편 검교정승(檢校政丞) 세기(世基 : 문희공)의 후손(後孫)에서는 그의 손자(孫子) 경중(敬中)․달충(達衷)․성중(誠中) 3형제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고려조에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경중(敬中)의 손자 정보(廷俌)가 고려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정보의 후손에서는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정암(廷馣)과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한 정형(廷馨)․정혐(廷嫌) 3형제가 현달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적병이 해서(海西)에 몰려들었을 때, 정암은 원근(遠近)에 격문을 띄워 의병(義兵)을 모아 김덕함(金德諴)․조정견(趙廷堅) 등 의병장의 호응을 받아 연안성(延安城)을 사수하기로 하고, 대장기(大將旗)와 <분충토적(奮忠討賊)>이라고 쓴 기를 세우과 왜적과 대치한 후 사기가 침체되어 응전할 용기를 상실한 의병들에게 유명한 <독전연설(督戰演說)>을 하고 더 저항 할 수 없는 사람은 떠나가라고 하면서 성문(城門)을 열어주었다. 천 여명이 넘던 의병 중에 생명을 정암에게 맡기겠다는 나머지 2백 여명과 5일 동안에 주야로 접전한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그의 아우 정형은 좌승지(左承旨)로서 선조의 피난을 수행하다가 개성(開城)의 성거산(聖居山)에서 적의 북진을 저지함으로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남도와 행재소(行在所)간의 연락 및 교통을 보장했다. 특히 정형은 사문(史文) 학자로서도 재질이 뛰어나「동각잡기(東閣雜記)․「황토기사(黃兎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겨 명망이 높았다. 계림군(鷄林君) 달충(達衷)의 후손에서는 세조(世祖) 때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판서(判書)에 오른 승상(升商)과 흥상(興商)이 유명했으며, 후손 개립(介立)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훈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육전의 충무공>으로 명성을 떨쳤던 수일(守一 : 성중의 7세손)은 장군이면서도 사병과 함께 먹고 자서 사병들에게 정신적인 숭앙을 받았고, 전투를 하기 전에 정보와 첩보를 선행시켜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렸다. 1624년(인조 2) 이 괄(李适)의 난 때는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겸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안현(鞍峴 : 길마재) 결전에서 이 괄의 군대를 격파하여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낸 후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40여 년 간 무신으로 대공(大功)을 세웠으면서도 그가 입은 옷 가운데서 깁지 않은 옷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효종(孝宗) 때의 명장 매죽허(梅竹軒) 완(浣)인데, 1602년(선조 35)에 출생하여 1624년(인조 2) 23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지방의 수령을 역임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승진, 병자호란 때 김자점(金自點)의 휘하에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에서 전공을 세우고, 포도대장(捕盜大將)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기로 이름났던 완(浣)이 수어사(守禦使)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의 휘하에 있던 관리 하나가 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는데, 그 죄인의 누이가 인선대비전(仁宣大妃殿)의 시녀(侍女)였으므로 대비가 불쌍히 여겨 숙경공주(淑敬公主 : 효종의 여섯째 딸)를 시켜 죄를 가볍게 다스려 달라는 사청(私請)을 하자 “관리가 죄가 중해서 가히 용서할 수 없으니, 대비의 명령을 받아도 그 뜻에 맞추어 법을 굽힐 수 없는데, 하물며 샛길로 전해온 말임으로 더욱 받아 들일 수 없으니 공주는 다시 이같은 청을 하지 마시오”하니 대비가 듣고 부끄러워하고, 헌종은 더욱 공경하고 두려워했다. 그의 집이 동소문 옆 낙봉(駱峰) 아래에 있어서 인평대군(麟坪大君 : 인조의 셋째아들)의 집과 같은 마을이었는데,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임명되자 급히 안국방(安國坊)으로 옮기면서 말하기를 “군사를 맡은 신하로서 하루라도 왕자(王子)와 서로 이웃에서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진천(鎭川)의 수령으로 나갔던 몽량(夢亮)은 아전과 결탁하여 상전을 모략했던 종의 횡포를 엄하게 다스려 당시 잦은 사화(士禍)로 몰락한 선비들의 억울함을 씻어 주었고, 그의 아들 백사(白沙) 항복(恒福)이 경주 이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1556년(명종 11) 참찬(參贊) 몽량(夢亮)의 아들로 태어난 항복(恒福)으 처음 출생해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았고 사흘 동안 울지 않아 집안 사람이 걱정하여 장님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니 “근심 할 것 없습니다. 마땅히 극귀(極貴)할 것입니다.”라고 축하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총명하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칼과 거문고로 글귀를 지으라고 하니 즉시 <칼은 장부의 기상을 가졌고(劍有丈夫氣), 거문고는 천고의 음성을 간직했다.(琴藏千古音)>고 응대하여 사람들이 그가 장래에 큰 그릇을 이룰 것으로 알았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선 항복은 임진왜란 때 다서 차례나 병조 판서(兵曹判書)로서 병권(兵權)을 장악 하여 국난을 수습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곧고 맑은 성품과 풍부한 기지로 <오성과 한음>의 일화(逸話)를 남겼으며, 이덕형(李德馨)․이정립(李庭立)과 더불어 과거의 동방으로 <삼리(三李)>로 일컬어졌고, 또한 이덕형․이원익(李元翼)과 함께 <혼조삼리(昏朝三李)>로 불리워졌다. 전후(戰後)에 정승에 올라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黨爭)을 조정하는데 진력했던 항복은 조선조(朝鮮朝)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우러름을 받았으나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63세로 생을 마쳤다. 광해군 때 일이다. 탄핵을 당하고 동대문 밖 노원(蘆原) 마을에 살다가 한 번은 평민 옷을 입고 지팡이 하나로 청평산(淸平山)에 유람갈 때에 소양강(昭陽江)에 이르니, 한베에 탄 젊은이들이 정승인 줄 모르고 버릇없이 굴면서 거기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항복이 말하기를 “이곳이 산수(山水)가 좋다는 말을 듣고 살아볼까 하고 왔소”하니 젊은이들은 더욱 방자하여 등 너머로 한 산을 가리키며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말이 저 산이 떠서 들어왔기 때문에 이사 와서 사는 사람들이 치부(致富)한다고 하는데 당신도 와서 살면 좋을 것이오”하고는 귀에다 대고 서로 말하기를 “이 사람의 관자놀이에 옥관자가 둥그니 필시 납속당상(納粟堂上 : 벼슬할 자격도 없는 자가 조정에 곡식을 바치고 당상관의 벼슬을 얻은 사람)인 모양이다”하고는 가 버렸다. 항복은 모욕을 당한 젊은 그들을 생각하고는 아래와 같응 시(詩)를 지었다. 만년에 소양강 아래서(晩計昭陽下) 그대들과 함께 낚시대로 늙으리(同君老一竽) 생계가 박할까 근심하지 말게나(莫憂生事薄) 부래산이 저기 있잖은가(自有浮來山) 소양강 건너 부래산(浮來山)은 옛날에 둥둥 떠서 들어온 산이라, 이 지방에는 외래의 사람이 들어오면 잘 산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항복의 증손(曾孫) 세필(世弼)은 이조 참판 시술(時術)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송시열(宋時烈)과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배워 특히 예학(禮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홍주 목사(洪州牧使) 세구(世龜)의 아들 광좌(光佐)는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대에 걸쳐 명상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영의정에 오른 광자는 실록청 총재관으로 숙종(肅宗)과 경종실록(景宗實錄)의 보유편(補遺篇) 편찬을 담당했고, 영조(英祖)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론의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여 노․소론의 연립 정권을 수립, 당쟁 완화에 노력했다. 좌의정을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던 태좌(台佐)의 아들 종성(宗城)은 영조(英祖) 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이조 판서 계조(啓朝)의 아들 유원(裕元)은 고종(高宗) 때 영상(領相)으로 유명했다. 저동(苧洞)에 살았던 그는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를 반대하다가 파직되기도 했으나 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여 대원군과의 반목으로 맞섰다. 유원이 남산 동쪽 기슭에 정각(亭閣)을 하나 새로 짓고 많은 조신(朝臣)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던 날 은퇴 중인 대원군도 초대되어 한자리에 있었다. 유원은 대원군에게 이 정각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자 대원군은 마침 이 정각의 정원에 두 그루의 회(檜)나무가 있었기로 쌍회정(雙檜亭)이라 하고 손수 붓을 들어 현판을 써주었다. 그러나 후일에 대원군이 말하길 송(宋)나라의 진회(秦檜)는 한 그루의 회(檜)로서 나라를 망쳤는데 두 그루 회나무의 쌍회정은 보다 심할 것이라고 한 말이 유원의 귀에 들어왔다. 유원은 즉시 현판을 두들겨 부수고 회나무 두 그루를 베어 버린 후 대원군을 배척하는데 선봉이 되었다고 한다. 경주 이씨의 또 다른 인맥(人脈)으로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12세손 신우(申佑 :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내고 원주백에 봉해짐)의 10세손인 규(揆)는 고려 때 찬성(贊成)을 역임한 후 충혜왕(忠惠王)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규의 현손(玄孫)으로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한 종준(宗準)은 호당(湖堂)에 뽑혔고, 문장(文章)과 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다. 그가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역관(驛官)에 있는 병풍의 그림이 좋지 못함을 보고 붓으로 칠해 버렸다. 역관이 통역을 불러 힐문(詰問)하자, 통역은 “서장관이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므로 반드시 그 뜻에 만족하지 못하여 그렇게 한 듯합니다”하자 역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준이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곳에 이르니 새 병풍을 두 벌 펼쳐 놓았으므로 종준이 한편에서는 글시를 쓰고 한편에서는 그림을 그리니 모두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러 보는 사람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종준의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으나 연산군(燕山君) 때 북계(北界 : 함경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고산역(高山驛)을 찌나가다가 옛적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을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할 때 지었던 글을 비율하여 <외로운 충성을 다른 이는 따르지 못하리라 자신하다(孤忠自計衆不興)>는 율시(律詩) 한 수를 벽 위에 써 놓고 갔다. 후에 감사(監司)가 이것을 임금에게 올리니 연산군을 원망하는 뜻이 담겼다고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고 죽였다고 한다. 구한 말에 와서는 고종(高宗) 때 총융사(摠戎使)를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낸 현직(顯稷)과 평안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지내고 교정청(校正廳) 당상(堂上)에 올랐던 유승(裕承)이 유명했으며, 희수(喜秀)는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군수(郡守) 유헌(裕憲)의 아들 주영(冑榮)이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과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지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으며, 하영(夏榮)은 중추원고문(中樞院顧問)을 역임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승(裕承)의 아들 시영(始榮)은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단선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부통령을 사퇴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의 폐기를 상소하고 자결을 시도했던 상설(相卨)은 1910년 류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전국에 발송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었으나 이듬해 석방, 이동녕(李東寧)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권업보(勸業報)」를 발행하여 교포의 계몽과 산업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순국한 시영(始榮)과 해방 후에 상해(上海)에서 교포의 보호에 진력했던 상정(相定)이 용맹을 떨쳤으며, 신한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역임한 규채(圭彩)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회영(會榮)․상용(相龍)과 함께 명문의 전통 가문인 경주 이씨를 더욱 빛냈다. 근대에 와서는 삼성 기업군의 총수 호암(湖岩) 병철(秉喆)이 한국경제발전의 기수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3남 건희(健熙)가 유업을 계승하여 한국경제(韓國經濟)의 지반(地盤)을 다지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며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91,120가구, 1,217,2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준이씨 경준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81가구 3,2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령이씨(高靈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고령 이씨(高靈李氏)의 시조(始祖) 이 헌(李 憲)은 고려조(高麗朝)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헌(憲)의 아들 언(彦)이 고려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야)를 지냈으며, 효자(孝子)로 이름난 천을(天乙)과 학자(學者) 계문(啓文)이 유명했다. 그외 덕명(德明)과 운태(運泰)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재윤(載胤)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동양(東陽)은 참의(參議)를, 봉조(鳳朝)는 군수(郡守)를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령 이씨(高靈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8가구, 5,0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부이씨(古阜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고부 이씨(古阜李氏)의 시조(始祖) 이경조(李敬祖)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최 충(崔 沖)이 설립한 사학(私學)의 효시인 구재학당(九齋學堂) 출신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랐다. 그는 1071년(문종 25) 김 제(金 悌)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송(宋)나라에 다녀왔으며, 문종(文宗)에서 숙종조(肅宗朝)에 이르기까지 5대(代)를 섬긴 공(功)으로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고부(古阜)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경조(敬祖)의 손자(孫子) 양빈(陽賓)이 서북 병마사(西北兵馬使)로서 예종(睿宗) 때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족(女眞族)을 토벌(討伐)했으며, 그의 동생 양승(陽升)은 고려 명종(明宗) 때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연주(延州)에 침입(侵入)한 거란병(거丹兵)을 격파하고 위주성(渭州城)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대장군(大將軍) 의(儀)는 경조(敬祖)의 5세손이며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시경(時卿)의 아들로 고려 강종(康宗) 때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지냈으며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그밖에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감찰대부(監察大夫)를 겸한 연종(衍宗)은 공민왕(恭愍王) 때 직간(直諫)으로 왕의 위신(威信)을 바로 잡았으며 학자(學者) 원곤(源坤)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병구원을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부 이씨(古阜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474가구, 18,623명이 살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성이씨(固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사람인 이 반(李 槃)의 24세손 이 황(李 璜)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려 덕종(德宗 : 제9대 왕, 재위기간 : 1031~1034) 초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1033년(덕종 2) 거란(거丹)이 침입했을 때 공(功)을 세워 문종(文宗) 때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올라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고성(固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시조의 7세손으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존비(尊庇)와 그의 아들 우(瑀)가 유명했다. 충숙왕(忠肅王) 때 전주(全州)와 진주(晋州)의 목사(牧使)를 지냈고,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아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었던 그는 뒤에 벼슬이 상서병부(尙書兵部)의 판사(判事)와 경령전(景靈殿)의 서장관사(書掌觀事)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우(瑀)의 아들 암(嵒)과 교(嶠)가 뛰어났다. 1313년(충선왕 5) 문과(文科)에 급제한 암(嵒)은 충정왕(忠定王) 때 우정승(右政承)을 지냈고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리웠으며 <대갑편(大甲篇)>을 옮겨써서 왕에게 바쳤다. 그의 동생 교(嶠)는 공민왕 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전선(銓選 : 재능, 기량 따위를 전형하여 인재를 뽑음)을 관장했다. 고려시대에 명문(名門)으로 세력(勢力)을 떨친 고성 이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도 대(代)를 이어 유명한 문신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성세(盛勢)를 보였다. 행촌(杏村) 암(嵒)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인(寅)은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졌으며, 차남 숭(崇)은 공민왕(恭愍王) 때 궁술(弓術)로 무명(武名)을 떨치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태조(太祖) 때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후, 서예(書藝)로 필명을 떨쳤던 아우 강(岡 : 암의 막내아들)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강(岡)의 아들 원(原)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 문(學問)을 연마하고 고려 말에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낸 후 태종(太宗)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이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외교적으로도 수완이 뛰어나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 : 제3대 왕, 재위기간 : 1403~1424)에게는 <누른 수염의 재상>으로 충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자가 많아 태종조(太宗朝) 후에는 항상 적을 안고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태종은 적으로부터 그를 보호에 주었으나 세종(世宗)은 기강을 위해 그를 유배시키고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철성군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라고 자주 아쉬워했다고 한다. 원은 슬하에 대(臺)․곡(谷)․질(垤)․비(埤)․장(場)․증(增)․지(墀)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크게 현달(顯達)하여 가문에 중추적인 인맥(人脈)을 형성했다. 1462년(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칙(則)은 이조 참판(吏曹參判)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문장에 능하고 덕망(德望)과 직간(直諫)으로 당대에 명망(名望)을 떨쳤다. 칙이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다가 외직인 충청감사(忠淸監司)로 나가게 되자 유생(儒生) 2백 여 명이 모여<이 칙은 유림(儒林)의 모범이요 도학(道學)의 종사(宗師)이니, 지금 외직으로 나가면 한 지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받지만 이 나라의 선비들은 어디 가서 덕(德)을 배우겠습니까>라는 유임소(留任疏)를 올렸다. 성종(成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육(陸)은「청파극담(靑坡劇談)」의 저자(著者)로도 유명했다. 그가 충청 감사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지(墀)가 괴산 군수(槐山郡守)로 있어서, 임금이 난처하게 생각하여 전지(傳旨)를 내려 그의 아버지를 내직(內職)으로 전임시켜 주었다. 육의 아우 백(陌)은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연산군(燕山君)의 총녀(寵女) 장숙용(張淑容)의 사제(私第)가 외람되게 화려하다고 간(諫)했다가 유배당했다. 좌의정(左議政) 원(原)의 증손(曾孫) 주(冑 : 현감 평의 아들)는 1488년(성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정언(正言)을 지내고 성당(盛唐 : 당시가 가장 성행하던 시기)의 품격을 갖춘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라 하여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피살되었고, 그의 아우 여(膂)는 임금이나 조정에서 크게 촉망받다가 안질로 29세에 요절했다. 그외 명종(明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명규(名珪)가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러, 필명을 떨쳤던 택(澤 : 참판 육의 손자)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기(沂)가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 : 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의 암살을 결행하다가 실패하고 진도(珍島)로 유배되었으며,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덕수(德秀)는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평북독판(平北督辦)에 임명되어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상의(象義)․상룡(相龍)과 함께 의절(義節)의 전통 가문인 고성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7,571가구, 71,9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흥이씨(高興李氏) 고흥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64가구 2,02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공산이씨(公山李氏) 공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98가구 3,24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공주이씨(公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공주 이씨(公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때 사람인 이천일(李天一)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3년(신라 박혁거세 5)에 문명(文名)이 뛰어나 중국(中國) 한(漢)나라에 들어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흉노적(凶奴賊) 정벌(征伐)에 공(功)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에 봉군되어 신라(新羅)로 돌아와 공산(公山 : 공주)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공주(公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천일(天一)의 36세손 우(堣 : 양호공)의 후손에서 크게 번창하여 우(堣)의 아들 저(苧)가 고려(高麗)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사손(思孫)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공주 이씨의 세계(世系)는 사손(思孫)의 두 아들 엽(曄)과 서(曙)의 대(代)에서 7파로 갈리어, 전공 판서(典工判書) 엽의 여섯 아들은 경력공파(經歷公派 : 명선)․어사공파(御史公派 : 명성)․공숙공파(恭肅公派 : 명덕)․지평공파(持平公派 : 명보)․참의공파(參議公派 : 명윤)․현감공파(縣監公派 : 명의)로, 참지의정부사 서(曙)의 아들은 강양공파(剛襄公派)로 분파(分派) 하였는데 그 중 경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후손도 가장 많다. 명선의 현손 겸(謙)이 연산군(燕山君) 때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그곳에서 정착하였으므로, 경성을 중심으로 한 관북지방에 후손들이 집중 세거(世居)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력공파(經歷公派) 명선(明善)의 10세손 기수(麒壽)․붕수(鵬壽) 형제가 임진왜 란 때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옥탑평(玉塔平) 싸움에서 순절하여 형은 부제학(副提學), 아우는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원배(元培)는 명선(明善)의 18세손인데, 경서(經書)와 학행(學行)으로 이름나 정조(正祖) 임금 앞에서 구경(九經)에 대한 질문 62조를 적절하게 답변하여 많은 포상을 받고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공숙공파(恭肅公派)의 파조(派祖)인 명덕(明德)은 태조(太祖) 때 등과하여 세종(世宗)때 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나이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했으나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또한 그의 8세손 정견(廷堅)․정헌(庭憲) 형제가 선조(宣祖) 때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무공을 세워 명성을 날렸다. 강양공파 부(敷)는 조선개국 삼등공신(朝鮮開國三等功臣)으로 흥원군(興原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11세손 도(棹)가 숙종(肅宗)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그외 3․1 운동 민족대표인 필주(弼柱)와 지평공파 명보(明保)의 후손으로 정조 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응거(應擧)가 이름났고, 현감공파 명의(明義)의 후손인 병덕(秉德)은 순조(純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809가구, 28,6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산이씨(光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신라(新羅)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의 후예로, 송악(松嶽)에서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궁예(弓裔)의 6세손 이종금(李宗金)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종금(宗金)은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契丹)의 40만 대군이 내침하여 송도(松都)와 주읍(州邑)이 허물어지고 왕(王)이 남천(南遷)하는 혼란속에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대소전투(大小戰鬪)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1018년(현종 9)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정예군(精銳軍)을 맞아 휘하의 주군을 이끌고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財貨)를 보전(保全)시킨 공적으로 1032년(덕종 2)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姓名)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광산군(光山君) 일원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시조 종금의 8세손 각(慤)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슬하에 아들 순백(珣白)․숙백(叔白)․승백(升白)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광산 이씨(光山李氏)의 3대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맏아들 순백(珣白)은 1320년(충숙왕 7) 원(元)나라 환관(宦官) 빠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가는 충선왕(忠宣王)을 박인간(朴仁幹) 등과 함께 호종(扈從)하였다가 3년만에 돌아와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충장(忠莊)으로 추시(追諡)되었으며, 그의 아우 숙백(叔白)은 1328년(충숙왕 1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 직제학(翰林院直提學)에 올랐고, 막내 승백(升白)도 등과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이들 3형제를 중시조(中始祖)로 봉안(奉安)하고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광산 이씨의 3대 인맥을 계통별도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순백의 아들 기(奇)가 고려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증손 일영(일영: 병조 참판을 역임)의 둘째 아들 선제(先齊)가 조선조(朝鮮祖)에 와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어려서 양촌(陽村) 권 근(權 近)과 매헌(梅軒) 권 우(權 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선제는, 1419년(세종 1) 20세의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이 되어「태종실록(太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형․호․예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고려사(考慮史)」개찬(改撰)을 관장했다. 특히 선제는 당시에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어나 조선 초기의 찬란한 문화발전의 개화기(開化期)를 연 주역(主役)의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광주현(光州縣)을 목(牧)으로 승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슬하에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했다. 선제의 장자(長子) 시원(始元)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차자(次子) 조원(調元)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물러나 후학(後學)을 길러 많은 동량지재(棟梁之才)를 배출시켰으며, 3자(三子) 한원(翰元)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4자 찬원(贊元)은 홍문관의 수찬(修撰)을 역임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일본 통신사가 되었던 막내 형원(亨元)과 함께 이름을 떨쳐, 이들 5형제가〈광산이씨5원화족(光山李氏五元華族)〉으로 일컬어졌다. 그후 양심당(瀁心堂) 시원(始元)의 아들 복선(復善)이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성심당(惺心堂) 형원(亨元)의 아들 달선(達善)은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해박한 경연(經筵)으로 왕(王)으로 부터 사유(師儒)라는 칭호를 받았다.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를 지낸 공인(公仁 : 달선의 맏아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는 애석(哀惜)함이 있었으나 그의 아들 백호(伯虎)․중호(仲虎 : 전라감사)․숙호(叔虎)의 후대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여 가문의 융성을 누렸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중호(仲虎)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급(汲)은 사마시(司馬試)에 이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校理)와 정읍 현감(井邑縣監) 등을 지냈으나,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謀叛) 사건에 연루되어 아우 발(潑)․길(洁)과 함께 화(禍)를 당했다. 일찍이 척암(惕菴)은 김근공(金謹恭)과 습정(習靜) 민 순(閔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발(潑)은, 1573년(선조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제창(提唱)하고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항상 왕도(王道)를 진달(陳達)했으며,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고 사정(邪正)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여겨 조금도 구차하게 야합하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우계(牛溪) 성 혼(成 渾)․송강(松江) 정 철(鄭 徹) 등 서인(西人)들의 미움을 사게 되자 시사(時事)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을 알고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갓다. 발의 아우 길(洁)도 선조 때 등과(登科)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한 후 응교(應敎)로 있다가 낙향했는데 불행히도 역변이 일어나 형과 함께 국문(鞠問) 도중에 절명했다.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의하면 발(潑)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평소에 병이 많았으며 그는 옷과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을 달이는 것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인맥을 소급하여 한림공(翰林公) 숙백(淑白)의 계통에서는 그의 아들 순(順)이 1374년(공민 왕23) 문과에 그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풍해 안렴사(豊海按廉使)를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초(椒)는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대사성(大司成)을, 차남 매(枚)는 영광 교도(靈光敎導)를 거쳐 참판(參判)으르 역임했다. 회령 판관(會寧判官)을 지낸 림(林)의 아들 형제 중 차남 근생(根生)은 단종(端宗)이 폐위되고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등극하자 이를 개탄하여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곡동(慶北高靈郡星山面高谷洞)으로 은거(隱居)하여 학문에 진력하다가 생(生)을 마치니 그후로 영남파조(嶺南派祖)가 되었다. 근생의 손자 수(樹)의 아들 홍기(弘器)․홍량(弘量)․홍우(弘宇)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영남삼객(嶺南三客)〉으로 불리웠으며, 뒤에 영남 유리(嶺南儒林)의 총의(總意)로 3형제의 고결한 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향현사(鄕賢祠)에 향배(享配)하였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 구(鄭 逑)는〈부귀한 집에 사위되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이씨(李氏) 문중에 장가들기를 원한다(不願富貴壻願入李氏門〉고 하여 광산 이씨 집안에 장가들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김 면(金沔)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우고 진천 현감(鎭川縣監)을 지낸 후 형 홍량(弘量)과 함께〈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의 숭앙(崇仰)을 받았던 홍우(弘宇)의 아들 서(서)는,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특출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스승의 명을 받아「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편찬하였고, 1605년(선조 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스승을 따라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후 거처(居處)를 승호(承湖 : 현 경북 달성군 논공면)에 옮기고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열어 스스로 호(號)를 야로(野老)라 칭하고 후학으르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며, 1650년(효종 원년)에 생(生)을 마치니 유림(儒林)의 발의(發議)로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사시(私諡)를 짓고, 선조(先祖)가 모셔진 회연서원 향현사에 배향하였다. 그외 숙종(肅宗) 때 부령 부사(副寧府使)와 증산 현령(甑山縣令)을 거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한 두망(斗望)과 서산 현감(瑞山縣監) 태창(泰昌), 영해 부사(寧海府使) 징하(徵夏), 예조 좌랑(禮曹佐郞) 중빈(重彬) 등이 유명했고, 규일(奎一)은 철종(哲宗) 때 무과에 급제하고 이원 현감(利原縣監) 겸 북청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역임하여, 고종(高宗)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된 필현(弼鉉)과 함께 명문(名門) 광산 이씨의 전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7,113가구, 31,1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양이씨(光陽李氏) 광양이씨 시조는 이무방(李茂芳)이다. 광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간공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54가구 1,45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광주 이씨(廣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유래(始祖本貫由來)
광주 이씨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失傳)되어 고려 말에 현달(顯達)했던 현조(懸祖)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수보(收譜)를 하게 되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빼어난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율정공파(栗亭公派)의 중시조(中始祖) 관의(寬義)는 청백리(淸白吏) 지공(知公)의 맏아들로 세종(世宗) 때 누차에 걸쳐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였으나 합격(合格)하지 못하여 자신의 불운함을 느끼고 황야에 은거(隱居)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다가 후에 다시 송정(松亭) 김 반(金 泮)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修學)하여 학문에 정통했고, 덕행이 뛰어나 정여창(鄭汝昌)․손순효(孫舜孝)․남효온(南孝溫) 등과 같은 훌륭한 석학(碩學)을 배출시켰다. 성종(成宗) 때 와서 찬성(贊成) 손순효의 천거로 경연(經筵)에 나가 성리(性理)의 근원(根源)과 성진(星辰)의 도수(度數)를 강론(講論)하자 성종이 감탄하여 율정(栗亭)이라고 친서(親書)로 사호(賜號)하고 율봉 찰방(栗峰察訪)을 제수(除授) 하였으나 노구를 핑계 삼아 사양함으로 왕이 가상히 여겨 지방 수령에게 명(命)하여 여생 (餘生)을 보살피도록 하고 쌀과 비단을 내렸다. 율정공 관의(寬義)의 맏아들 점(坫)은 성종(成宗) 초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77년(성종 8)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집의(執義)․사성(司成)을 역임한 후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올랐다. 1503년(연산군 9)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겼다가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전북부안(全北扶安)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복관되어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한성판윤(漢城判尹)․중추부사(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생원공(生員公) 당(唐)의 후손에서는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광주 이씨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 둔촌(遁村) 집(集)의 인맥(人脈)이 가장 화려하다. 초명(初名)이 원령(元齡)인 집(集)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해박(該博)한 학문과 고상(高尙)한 지절(志節)로 명망을 떨쳤으며, 여말(麗末) 삼은(三隱 : 포은 정몽주, 목은 이 색, 야은 길 재)과 같은 명현(名賢)들과 더불어 문교(文交)를 나누며 존경을 받았다. 1368년(공민왕 17) 당시 요승(妖僧) 신 돈 (辛 旽)이 득세(得勢)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웃에 살고 있는 채판서(蔡判書)란 자에게 신 돈의 전횡을 비판했다가 화(禍)를 자초(自招)하는 결과가 되어 신변에 위험을 느낀 둔촌(遁村)은 노구인 아버지 당(唐)을 등에 업고 개경(開京)을 빠져나와 과거 동기(科擧同期)인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가 살고 있는 경북 영천(慶北永川)으로 은거하였다. 둔촌 부자(父子)를 반갑게 맞이한 천곡 최원도는 다락방에 이들을 숨기고 4년 동안 피화생활(避禍生活)을 돌봐주며, 가족에게 까지 비밀로 하고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큰 그릇에 밥과 반찬을 가득 담게 하여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이 때 천곡(泉谷)의 집에는 열 아홉 살인 제비(燕娥)라는 여종이 있어, 한 끼에 밥을 세그릇씩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보는 상전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친 행세를 하는 상전의 소행을 수상쩍게 여긴 주인마님은 이 제비라는 여종으로 하여금 염탐을 시켰다. 제비는 밥 세 그릇을 상전이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벽장 속에 두 사람을 숨겨두고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을 발견하였다. 만약에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진 둔촌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양가(兩家) 모두가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질린 여종 제비는 마님의 걱정을 덜고 또 상전의 신의와 상전 친구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하여 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이듬해 둔촌의 아버지 당(唐)이 영천에서 세상을 떠나자 천곡은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놓은 영천군 나현(羅峴 : 광릉골) 모부인(母夫人) 묘 아래에사 예장을 치루었다. 1371년(공민왕 20) 신 돈(辛 旽)이 역모로 주살된 후에야 비로소 둔촌은 자유의 몸이 되어 송경(松京) 용수산(龍首山) 아래에 있는 현화리(玄化里) 옛 집으로 돌아와 초명인 원령(元齡)을 집(集)으로 고쳐 살면서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어 가문의 번성을 이루었다. 포은(圃隱) 정뭉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맏아들 지직(之直)은 1380년(우왕 6) 문과(文科)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교리(敎理)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정종(定宗) 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올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풍애(楓厓) 지직(之直)의 둘째 아들로 세조(世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인손(仁孫)의 다석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명문(名門)의 지반을 다졌는데, 장남 극배(克培)는 성종(成宗) 때 좌리 3등공신(左理三等功臣)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겨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평생에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특히 그는 항상 자기 가문의 세력이 너무 성함을 두려워하여 집안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허>를 설득하였고 가문이 너무 성해지면 망하는 이치를 강조하였으며, 두 손자의 이름을 겸(謙)과 공(恭)이라 지으면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도리는 이 두 글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경계하였다. 세조(世祖) 때 좌익 3등공신(左翼三等功臣)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올았던 극감(克堪)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국조보감(國朝寶鑑)」을 수찬했으며「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여 필명을 떨쳤다. 우정승 인손의 셋째 아들 극증(克增)은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익대 2등공신(翊戴二等功臣)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고, 성종(成宗) 때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라 국가경비(國家經費)의 식례(式例)를 찬정(撰定)하고, 동지설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올라서는 문묘(文廟)를 증수(增修)한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좌의정으로 연산군(燕山君)의 횡포를 바로 잡으려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지인 인동(仁同)에서 사사(賜死)당한 극균(克均)은 사약을 받고서 유실(幽室)에 들어갔다가 분통함을 참을 길 없어 다시 나와서 형관(刑官)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 백병(白病)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죽은 넋이 너를 따라다니며 평생 괴롭힐 것이다.”하고 들어가 약사발을 들이켰다. 형관이 돌아가 연산군에게 그 말을 전하하니 더욱 노하여 극균의 뼈를 부수도록 하명하였다.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맏아들 세좌(世佐)는 성종(成宗)이 연산군의 어머니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던 날 형방승지(刑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었고, 그의 아들 수형(守亨 : 사인)․수의(守義 : 한림)․수정(守貞 : 수찬) 3형제가 이조(吏曹)와 홍문관(弘文館)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류자광(柳子光)이 크게 시기하여 밤낮으로 연산군을 충동하여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어느날 임금과 신하들이 같이 즐기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재상들이 잇달아 술 두 잔을 올리면 연산군도 또한 끝의 술잔으로서 재상에게 돌려 주었다. 다른 재상들은 받아서 마셨는데, 세좌는 끝의 술잔을 받아서 마시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튿날 연산군은 신하가 임금이 주는 술을 받아서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하고, 또 남은 술방울을 임금의 옷자락에 흘린 것은 불경죄(不敬罪)이니 세좌를 옥에 가두라고 하명하였으며, 그의 아들, 손자들과 설날 그의 집에 세배갔던 이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세좌의 손자 연경(延慶 : 수원의 아들)은 세좌가 북방변지로 귀양갔을 때 모시고 다니며 모든 험난한 일을 다겪었다. 그 후 조부와 숙부가 모두 화를 입었고, 연경도 연좌되어 귀양을 갔는데 단정하고 깨끗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죽을 때에 갈팡질팡하여 정당한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의 행장(行狀)에 의하면 그는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얼굴빛이 평화롭고 말씨가 따뜻하며 흉금(胸襟)이 쇄락(灑落)하였고, 학문은 세속의 누습을 벗어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엎지러지는 물결 같은 세상에서도 능히 우뚝 서서 시종 불변하였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3년이 지나도록 치르지 못한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모친을 모시고 충주 북촌(忠州北村)에 살다가 안 당(安 唐)이 설치한 현량과(賢良科)에 특채되어 유학(儒學)을 바탕으로 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혁신 그룹에 서서 중견 구실을 하였다. 1519년(중종 14) 홍경주(洪景舟)․남 곤(南 袞) 등의 반동이 임금의 마음을 움직여 혁신정치를 추구하는 신진파를 제거할 때 그 숙청자 명단의 우두머리에 연경의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중종(中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연경은 어필로 이름이 지워져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량과가 파과(罷科)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공주(公州)에 물러가 살았다. 수정(守貞 : 세좌의 넷째 아들)은 연산군 때 아버지 세좌와 함께 사화에 연좌되어 피살되었고, 당시 일곱 살인 맏아들 윤경(潤慶)과 여섯 살인 차남 준경(浚慶)의 형제는 귀양을 갔다. 어린 나이로 가난한 귀양살이에 옷이 해지고 이와 서캐가 많아서 아우인 준경이 긁으며 울자, 윤경은 웃으며 “새옷이 입고 싶지”라고 말하니, 준경은 “어디서 새옷을 얻겠나”하였다. 윤경은 준경을 시켜 불을 피우라고 시킨 다음 형제가 입었던 옷을 벗어 모두 불에 태우고 알몸으로 앉아있었다. 때마침 초하룻 날이라 귀양살이의 순찰 점고(點考)를 하는데, 지키는 사람이 발가벗은 어린 형제의 사정을 관에 보고하자 원은 놀라서 새 무명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고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온 준경(浚慶)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했고, 여러 관청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558년(명종 13)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윤경의 아들 중열(中悅)은 중종(中宗) 때 등과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학문이 뛰어나 장래를 촉망받았으나 명종(明宗) 때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친구 이 휘(李 輝)를 변호하다가 갑산(甲山)에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의하면 중열은 다정한 친구인 이 휘로부터 시국에 걸리는 중대한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열은 이 휘의 일당으로 몰려 처형되느냐 아니면 이 휘의 말을 고발하여 자신은 모면하느냐 하는 위태로운 경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아버지인 윤경에게 찾아가 상의했더니 윤경은 “자신이 죽는 것도 애석한 일이지만 친구를 어떻게 배반한단 말이나”하였다. 중열은 다시 숙부인 준경에게 물었더니 “우리 선대에서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피해를 당하여 언제나 원통하고 한스러운 터인데, 오늘날 또 일이 이렇게 됐으니 위에 계신 부형(父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하면서 가문을 보존할 생각으로 글월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라고 하였다. 이때 중열의 아버지인 윤경이 승정원에서 편지를 보내어 아들을 책망하기를 <내가 항상 이 휘는 일을 저지를 사람이니 사귀지 말라고 주의시켰는데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지금 화가 눈앞에 닥쳤다고 해서 어찌 친구를 팔아서 살기를 도모할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열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살았는데, 1547년(명종 2) 3월 11일 밤 부엉이가 동북쪽 모퉁이에 모여들어 울어대니 예로부터 불길의 전조라,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가 부엉이가 운지 9일만에 사약을 받게 외었다고 한다. 광주 이씨의 화려한 인맥(人脈)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목(巨木)인 한음(漢蔭) 덕형(德馨)은 좌의정 극균(克均)의 현손(玄孫)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른 민성(民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양사언(楊士彦)은 덕형이 14세 때 지은 시(詩)을 보고 <군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덕형은 조정에서 베풀어진 각종 정시(庭試)마다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으므로 다른 선비가 이 정시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겨나 일부러 병을 핑계로 시험을 치지 않았다. 31세 때 학자 관직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대제학(大提學)에 초탁(超擢)되었다. 조정에서 대제학을 회천(會薦)할 때 노사(老師)들이 모두 팔장만 끼고 양보하였다. 한데 한 점의 반대표가 있어 모두를 의아해하는데 김귀영(金貴榮)이 웃으며 <노부(老夫)의 소위>라고 자칭하고 서서히 말하기를, “나이는 젊은데 지위가 너무 이르니 좀 재주가 노성하고 덕이 성숙함을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덕형은 큰 절로 노대신의 충고를 흔연히 감사하니 선비들 공론이 양쪽을 모두 아름답게 일컬었다. 중국의 조사(詔使)로 조선에 건너온 왕경민(王敬民)이 덕형의 명성을 듣고 한 절귀의 시(詩)를 써 주기를 “군의 풍토와 기상이 멀리 범류에 뛰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가 만나보지 못하여 이것을 써 주어 신교(神交 : 얼굴은 보지 못하고 정신으로 교분이 깊다는 말)를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했다가 삭직되고 양근(陽根)으로 내려가 53세로 생을 마쳤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혼조삼리(昏朝三利)>라 하여 이항복․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짓밟힌 사직을 지탱한 명신이었다. 광주 이씨의 또 다른 인맥으로 지군사공(知郡事公) 희령(希齡)의 아들 지강(之剛)이 태종(太宗) 때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겸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지유(之柔)는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역임했다. 한편 고려 말에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를 역임아며 강직(剛直)한 충절(忠節)로 이름이 높았던 양중(養中)은 1392년(태조 1)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후에 남한산(南漢山) 밑으로 퇴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자 몸소 양중을 찾아와 농주(農酒)로서 옛정을 나누며 시(詩)를 짓기를 “그대가 어찌 옛날의 우정을 잊었는가? 광무홍제(光武皇帝)와 엄자룡의 우의를 보나 한(漢)나라 왕(王)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서 이루어 왔지 않았던가”하니, 양중이 답(答)하기를 “옛날의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對酌)이 있으리요”하니 왕도 그의 굳은 지조를 알고 밤을 새우며 우정을 나누었고, 양중의 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를 제수했다. 고려 말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형(兄)인 석탄공 양중과 함께 충절을 지켰던 암탄공(巖灘公) 양몽(養蒙)은 자손(子孫)들에게 조선조에 불사(不仕)하기를 유언했고, 지금의 서울시 고덕동(高德洞)은 양중과 양몽이 정의를 지켰던 고덕(高德)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효행(孝行)과 문장(文章)으로 이름 높았던 필성(必成 : 중열의 아들)과 조선조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휴징(休徵)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저통했던 극기(克基 : 예손의 아들)의 아들 은(誾)은 학자(學者)로 영광(靈光)의 보촌우에 배향되었다.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문인(文人)으로 임진왜란 후 조정의 해잉한 기강을 바로 잡는데 공헌했던 윤우(潤雨)는 성주(星州)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되었고, 청명고절(淸明高節)로 명망이 높았던 아들 도장(道長)을 비롯하여 숙종(肅宗) 때 영남(嶺南)의 대기근을 구제하여 전설에 오르기까지 한 담명(聃命)과 함께 명문(名門) 광주 이씨의 전통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3,816가구, 141,8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각성씨의 시조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