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시오는 파이크병과 머스킷 총병이 혼합된 약 3,000명 규모의 보병 대형으로 구성된 에스파냐 군대를 가리키는 명칭이며, 때때로 다른 나라에서는 에스파냐 방진(Spanish Sqaure)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테르시오는 대부분 강한 규율과 투지를 갖춘 전문적인 군인들로 구성되었으며 16~17세기 유럽 전장에서 그들은 전투에서 무적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적군은 전투에서 보여주는 테르시오 병사들의 전설적인 돌파력을 두려워했으며, 이들의 명성은 프랑스 국왕이 사로잡힌 파비아(Pavia)전투(1525년)를 통해 완전히 구축되었다, 에스파냐 테르시오를 상대로 전투를 해야하는 적병둘은 이길 가망이 없다는 판단하에 아군 부대가 있는 방향으로 탈주하는 사례조차 있었다.
로크루아 전투(Battle of Rocroi)
비록 테르시오의 주력은 에스파냐 군이지만,에스파냐 병사들의 무시무시한 명성만으로는 부대를 유지할 수 없었다. 테르시오는 모두 에스파냐 병사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왈룬 지방에서 소집한 수많은 용병들로 구성된 '다른 국가들의 부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핵심은 에스파냐인들이었으며, 외국인들은 이들의 강력한 규율과 프로 정신에 주목했다. 에스파냐 병사들의 강력한 규율은 로크루아 전투(Battle of Rocroi - 1643)에서 보여졌다, 독일과 왈룬의 테르시오 부대는 전장에서 달아났지만 에스파냐 테르시오는 결국 포병대의 공격으로 진형이 붕괴되기 전까지 프랑스 기병대의 세번에 걸친 돌격을 지휘관과 함께 버텨냈기 때문이다.
테르시오 내에서 파이크병들은 한데 뭉쳐 커다란 대형(carre)을 만든다. 머스킷 총병들은 일반적으로 여러개의 기동성 있는 소그룹 (mangas)로 나뉘어져 파이크 대형 주위에 배치되며, 귀퉁이마다 하나의 망가(mang)가 배치되는게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 제병 연합부대의 장점이라면 묵직하고 단단한 창병 대형과 머스킷 총병의 장거리 화력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공격과 방어에 이상적인 대열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
위에서 언급한 1643년의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가 에스파냐군을 격파함으로써 테르시오의 우위는 끝나게 된다. 17세기 후반의 에스파냐 군대는 시대에 뒤떨어진 테르시오 대형을 폐기하고 프랑스식 대열에 기초를 둔 대대와 연대로 구성된 보다 유연성있는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된다. 삼병전술(linear tactics) 로 알려진 이 새로운 대열은 유명한 구스타부스 아돌푸스(Gustsavus Adolphus)가 발명해냈으며 18세기까지 전장을 지배하게 된다. 삼병 대형은 다른 요소보다 기습 부대에 중점을 두며, 병사들은 동시에 머스킷을 발사함으로서 적군의 사기를 꺾었다. 테르시오는 대포 공격에 대하여 적은 사상자를 내는 보다 유기적이고 지속적인 이 새로운 대열에 대항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게 증명되었다. 그러나 테르시오는 영국 청교도 혁명 당시에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오늘날 에스파냐 부대와 해병대는 가장 큰 부대 단위를 부르는 명칭으로 테르시오(tercio)를 사용한다.
P.S -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경의 일본에서도 장창과 철포로 무장한 경무장 보병 아시가루(足?)들이 군사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얘네들하고 테르시오랑 붙었으면 결과가 어떠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첫댓글 음, 트라팔가 해전 이후로도 스페인의 육군 전력은 여전히 막강했군요.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트라팔가해전은 18세기에일어난 해전 즉 나폴레옹시대인데 이시대 스페인 육군은 전력은 약했습니다
아, 제가 말할려고 했던 것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한 전투인데 말을 잘못했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