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17: 1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 요 17: 2 아들에게 주신 사람
제 17 장 : 예수님의 기도
1.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 ( 17: 1 - 5 )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17장은 기도의 장으로 공관복음서의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겟세마네 기도(마 26: 36-46. 막 14: 32-42, 눅 22: 40-46)은 기록하지 않았고 대신 본 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이미 알려진 공관복음의 내용을 재차 기록하는 것을 피하고, 공관복음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가 고통과 고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승리를 확신하며 자신과 제자들과 온 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요 17: 1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13-16장의 예수님의 고별 설교를 말하고 가깝게는 요 16: 33의 고별 설교의 마지막 부분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선언하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도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의 몸동작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함으로 겟세마네 기도와 같이 이 기도도 역사적으로도 실제 존재했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 모습은 눈을 감고 땅으로 얼굴을 숙인 것과는 반대로 눈을 뜨신 상태에서 하늘을 주시하시면서 기도하셨다.
이러한 기도의 모습은 마 14: 19. 막 6: 41. 눅 9: 16의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실 때의 기도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요 11: 41에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 식사 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과 성령의 약속 등의 말씀으로 교훈하신 후,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전 3: 1).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택한 백성들의 죄를 속(贖)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함이다. 이제 그때가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화롭게 될 것을 내다보셨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또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다 이루시고 세상의 모든 택자를 구원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고별(告別) 설교는 끝이 났다. 이제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말머리를 돌리신다.
'이 말씀'(*, 타우타)은 13-16장 사이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를 의미하는 것보다 가깝게는 16: 33에 나타난 세상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선언을 가리킨다.
혹자는 본 장 기도가 13: 30-31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R. Bultmann), 고별 설교 뒤에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사실을 구태여 부인할 필요는 없다.
이별을 눈앞에 두고 그의 친구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에서 볼 때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C.K. Barrett).
2]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요한은 예수의 몸동작 하나까지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체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께 제사나 예물을 드릴 때 취했던 전형적인 자세였으며 또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였다(L. Morris).
* 시 121: 1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 겔 33: 25 -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 단 4: 34 -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예수는11: 41에서도 이런 자세로 기도하셨는데 이는 공간적인 개념에서의 '위쪽'이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는 의미에서의 위쪽을 가리키며 결국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상징한다.
3]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테르'(*)는 막 14: 36에서와 같이 아람어 '아바'(*)를 전제로 한 말이다(G. Dalman).
* 막 14: 36 –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본 장에서만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 20번 나타난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제일 많이 "아버지"가 기록된 장이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pathvr 파르테)는 아람어로 히브리어에서 온 ba;'(아바)을 부르심으로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사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신 것이다.
* 마 6: 9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아람어는 자녀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우리말 '아빠'와 비슷한 어감을 준다. 본 장에서 예수는 이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다. (5, 11, 21, 24, 25절) 이는 예수와 하나님의 지극히 친밀하고도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되심을 시사하는 말이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때'란 대속을 위한 십자가 수난의 때를 가리킨다.
* 막 14: 41 -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대적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를 제거하려 했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한' 까닭에 예수께 손을 대지 못했다.
* 요 7: 30 -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요 8: 20 -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4]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예수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 요 8: 50 -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께서 스스로 구하는 영광조차도 아버지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절은 예수 자신을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L. Morris).
고난 속에서 능히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과 희생을 받아주실 것을 의탁하신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의 목적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알려지는 것이다.
* 롬 11: 36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롬 16: 27 -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 고전 10: 31 -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엡 1: 6, 12, 14 –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5]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영광'(*, 돝사조)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절정을 나타낼 때 반복 사용되었다.
* 요 7: 39 -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요 12: 16, 23 –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요 13: 31-32 –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이라 표현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함으로써 맡겨진 대 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셨다는 점에서 십자가는 곧 영광이었다. 이처럼 성자의 관심은 늘 성부의 영광에 고정(固定)되어 있다.
* 요 12: 28 -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 17: 2 아들에게 주신 사람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는 요 6: 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와 동일한 말씀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 1)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 8: 28)들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이다. 그것은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버릴 자를 버릴 수 있는 권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롬 9: 18).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목적은 그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데도카스 완료시제)자들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를 증언하며 선택된 자들의 수가 확정적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영생으로 예정하셨다.
* 엡 1: 4-6 –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영생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이다. 아담의 죄는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 긍휼로 택한 자들을 영생에 이르게 구원하신다.
1]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영생을 제공한다.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은 6절과 9절에도 나오는 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킨다(C.K. Barrett).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 관계가 이 고별 설교에서 다시 설명된다는 것이다.
* 요 15: 1-10 –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따라서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이 하나의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를 의미한다(Barnard).
'판'(*)은 제자들 간의 소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롬 8: 28)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집단이라고 본다.
예수님은 6: 39에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라 말씀하신다. 이들은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 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과 대립적 관계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만민'(*, 파세스 사르코스)과도 구분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이다(6: 35, 37, 44, 45, 65). 만일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2]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우리를 죄에서 건져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내시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요 이 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영생"을 보장하신 내용은
* 눅 18: 29-30 –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3]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pavsh" sarko 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 모든 인류"를 말씀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유대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아들에게는 이미 마지막 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요 5: 27)가 있으며 이제 자신을 드림으로(요 10: 18)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권세를 가지게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 2편에 땅에 대한 아들의 지배를 명령하셨고 예수님의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5번이나 말씀하셨다(17: 2, 6(2번), 9, 24).
(1) 만민
만민은 '모든 육체'(*, 파세스 사르코스) 즉 모든 인류,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을 의미한다(Lenski).
이들을 다스리는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는 세상 임금의 주권 행사와 구분되는 것으로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부여받은 권세이다(L. Morris).
즉 이 권세의 목적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반면에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도록 한다.
* 요 3: 35-36 –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지니고 계신다.
* 요 5: 27 -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또 그의 권세는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 마 28: 18-20 –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 수난을 앞둔 시점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선포하신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