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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한얘슬
1)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는 당의 최정예 기병과 싸웠다.
당시 최강국이었던 당나라. 한반도에 원정온 당군은 어떤 군대였을까?
당의 주력은 당시 최정예 기병이었던 군단과 말갈·거란의 대규모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쟁에서 기병은 보병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기병과 보병의 전력을 비교해보면, 기병이 평지에서 전투를 할 경우 1기의 전력
은 보병 8인의 전력에 견줄 수 있다. 또한 험준한 지역이라 하더라도 1기는 보병
4인에 맞먹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매소성 전투에 동원된 당군은 모두 20만 대군.
이에 비해 신라의 병력은 약4만명..
일단 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당나라 군대의 규모는 거대했다.
신라는 최강의 당나라 최정예 기병 부대를 맞아 어떻게 싸웠을까?.
2) 매소성 전투 승리의 비밀1- 장창
나당 전쟁시 신라는 새로운 부대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장창당이다.
신라의 장창당은 장창을 무기로 기병을 막아내는 보병부대로 삼국사기에는,
장창당이 당나라 기병 3천명을 모조리 사로잡아 포로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기병에 대응하는 장창보병부대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가진다.
이러한 장창보병부대를 신라는 당의 대규모 기병부대를 물리치지 위해
새롭게 조직했던 것이다.
장창보병의 집단 대열은 마치 고슴도치가 털을 세우고 있는 모습처럼
장창을 들고 인간 벽을 만드는 것! 이렇게 장창부대는 기병의 속도를 저지시켜
기병의 대열을 흐트린다. 그리고 장창 보병의 대열뒤에 포진한 궁수들의
적중률을 높여 주는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당의 최정예 기병에 맞섰던 신라의 장창 보병부대, 그 위력을 알아본다.
장창의 길이는 4미터 50센티미터, 자그마치 어른키의 3배 가까이 된다. 길이가 이렇게 길다
보니 정교한 무술을 펼치기는 어렵다.
경당 책임자. "자루가 길고 긴 만큼 동작이 단순할 수 없다. 가장 크게 사용된 것은 기병대
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무예가 아니었나 추측한다."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창의 뒷부분을 땅에 박는다. 땅에 박은 장창은 한사
람이 발로 밟고 앉아 고정시켜 준다. 또 한사람은 앞에서 장창의 날이 위로 향하도록 각도를
잡아 준다. 이것이 바로 돌격해 오는 기병을 제압하는 장창 보병의 기본 자세다.
서 교수"장창 보병이 겨누는 것이 말위에 탄 사람이 아니라 말의 가슴이나 목이었다 걔네들
장창 보병에 걸려 첫대열은 낙마를 한다. 뒤에 오는 대열은 밀리게 된다. 차가 밀리듯이 기
병의 속도가 없어졌을 때 이 보병들이 그들을 포위하게 된다."
돌격하는 말에 장창을 겨눠 대열을 교란시키는 것이 장창 보병의 역할이다. 그뿐이 아니다.
서 교수 "기병이 질주할 때 보병이 보기에는 기병이 상당히 높고 빠르다. 이 기병을 향해 활
을 쏘는 궁수들은 겁에 질리게 된다. 기병이 활의 사정거리 안에서 보병이 도착하는데는 15
초에서 24초가 걸린다. 활을 두세발 이상은 쏠 수가 없다. 이 궁수들이 숨을 수 있는 안식처
,장창 보병의 대열뒤에 숨어 심리적 안정 궁수들의 적중률 높여 준다."
활의 사정거리는 약 2백미터, 이 거리를 기병은 15초에 달린다. 그 사이에 궁수들은 두발 정
도의 화살밖에 쏠수 없다. 궁수들이 두렵움없이 조준할 수 있도록 방패 역할을 하는 것이 장
창 부대의 또다른 역할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전투에서 장창 보병은 기병에 맞서 어떻게 싸웠을까. 중세의 서양 전투도에
서 장창 보병의 전투법을 볼 수 있다. 기병 제압용 장창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무기였다.
장창 보병을 보자 창을 높이 세워 들고는 빽빽하게 붙어서 있다. 장창으로 인간 방어벽을 만
드는 것이다. 장창 부대가 밀집 대형을 이뤘을 때 고슴도치 같은 장창의 밀집 방어벽은 그야
말로 위력적인 무기가 되는 것이다. 중세 프랑스 기병과 프로방스 장창 보병이 싸운 꾸트레
전투에서 장창병의 위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장창 보병의 위력은 여기 있다. 그렇다면 신라에도 장창 보병용 대열이 따로 있었을까.
삼국사기에 보면 문무대왕이 설수진의 지휘 아래 군사들이 육진법을 시전하는 것을 감독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육진법은 과연 어떤 것일까. 당시 기병 제압용으로 여섯 개의 꽃
잎 모양의 육화진법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라의 장창 보병도 이와 같은 진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3) 매소성 전투 승리의 비밀2- 노 부대
장창만으로 질주해 오는 기병들을 막아내는 것이 가능할까?
장창당이 기병에 대한 수비를 맡았다면 공격은 어떻게 했을까?
병법에 의하면 '기병 제압은 장창과 노' 라고 한다. 장창과 함께 기병을
무찌르기 위한 비밀 병기였던 노는 신라가 자랑하는 최강의 무기다.
노는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화살을 발사시키는 일종의 기계식 활이다.
기계적인 힘을 이용하여 활보다 훨씬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 또한 높다.
당고종까지 탐내서, 신라의 노기술자를 데려가기도 했다는 노는
도대체 어떤 무기였을까? 신라의 무기 천보노를 전문가와 함께 복원해보고
그 위력을 알아본다.
장창병이 일종의 수비 역할을 했다면 공격은 노병들이 담당했다. 노란 일종의 활과 같은 무
기였다. 노는
신라가 자랑하는 최강의 무기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당황 고종이 신라노를 너무 탐냈다는 기
록이 있다. 신라의 노는 성능이 좋아 자그마치 천보를 날아간다. 이 소문을 듣고 당 고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노 만드는 기술자를 보내 달라고 한다. 신라는 어쩔 수 없이 노의 명수
구진천을 당나라에 보내게 된다. 구진천이 당에 가서 노를 만들긴 만들지만 이 노는 30보,
60보 그 이상을 날아 가지 못한다.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이 호통을 치
고 구슬리기도 하지만 구진천이 끝까지 신라의 천보노를 만들지 않아서 끝내 당은 신라 천보
노의 비밀을 알수 없었다는 얘기이다. 구진천이 목숨을 걸고 지킨 신라의 노, 신라의 노는
도대체 어떤 무기였을까.
얼마전 한국 토지 박물관에서는 귀한 유물 한점을 발굴했다. 나당 전쟁의 격전지인 임진강
유역에서 발견된 철촉이다. 화살촉이라고 하기엔 그 크기가 너무 크다. 같이 발견된 다른 화
살촉의 두배 크기다. 발굴된 철촉의 길이는 22센티미터, 날부분만 15센티미터가 넘는다.
심광주 박물관장 "처음 출토됐을 때 화살촉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곳에서 나온 것들과 비교
3배 무겁고 길이면에서도 다른 것 보다 훨씬 길어서 보통 화살로는 쏠수가 없다고 생각 기계
장치에 의한 화살 노 같은 데 쓰인 화살 촉이 아닐까 생각"
궁시 전문가 유세현씨의 도움을 얻어 이 철촉에 맞는 화살을 복원해 보기로 했다.
복원된 노 화살은 길이가 1미터. 일반 화살보다 매우 크다. 일반 화살 촉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복원된 화살 촉은 강력해 보인다. 이런 화살을 날리는 노는 과연 어떤 무기일까. 노
는 활에 기계적인 장치를 달아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다. 종류도 다양하다 . 시위를 당기는
힘에 따라 노의 위력도 다르다. 시위를 당기는데 드는 힘만큼 위력도 강하다. 시위를 걸개에
걸고, 발사 장치에 걸어서 발사 끈을 당기면 화살이 날아간다.
노는 신라군의 대표적인 무기였다. 만노구발이라는 기사는 신라군에게 있어 노는 보편적인
무기였음을 말해 준다.
신라 노의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복원한 화살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어떤 노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까. 천보를 날아간다는 신라의 천보노는 어떤 모습이었을
까. 신라 천보노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고려의 팔우노다. 팔우노는 여덟마리의 소
가 끌어야 시위가 당겨질 정도로 아주 강력한 고려의 노다. 신라의 천보노는 고려의 팔우노
와 유사한 형태였을 것이다. 받침대를 만들어 활을 올린 일종의 상노다. 앞에 활이 두 개,
뒤에 또 활이 하나 더 있다. 노의 위력은 이 세 개의 활에서 나온다.
세 개의 활 시위가 모두 연결돼 있어서 시위를 당기면 세 개의 활이 동시에 휘게 된다.
4) 매소성 전투 승리의 비밀3-신라의 특수부대
신라는 나당 전쟁 기간 중에 산성 축조에 공을 들인다.
당시 임진강 일대의 산성은 150개에 이를 정도...
나당전쟁 7년 동안 당나라 군대가 임진강과 한탄강을 넘지 못한 것도
신라의 산성을 이용한 방어전술 때문이었다.
신라는 성 축성을 위해 지방의 축성 전문기술자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었다.
대장척당이 바로 그것. 이 부대는 축성전문가 뿐 아니라 병장기를 제조하는 기술
자로 편성돼 있다. 즉 기술자만 모아 놓은 일종의 장인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신라는 나당 전쟁 기간 동안 전투를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특수부대를 동원,
산성을 축조해 방어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나당 전쟁 7년. 당군은 임진강 이남을 한번도 넘지 못했다. 신라는 어떻게 당의 남하를 막았
을까. 한강 이남을 지키는 남한산성은 남한에서 가장 큰 성이다. 이 거대한 남한산성은 나당
전쟁때 신라가 쌓은 주장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의 축조에는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투입돼야 한다. 당과 치열한 전쟁 벌이던 때, 신라는
왜 이런 거대한 성을 쌓았던 걸까. 나당 전쟁 기간 신라군은 산성 축조에 공을 들인다. 672
년에서 673년 사이에 신라는 열 개나 되는 성을 쌓았다. 그 이유는 뭘까.
심 교수 "한강유역에서부터 임진강 일대에 있는 성들을 보면은 이 성들이 삼국시대부터도 이
미 많은 성들이 있었지만 나당 전쟁 기간 중에도 상당히 많은 성들이 새로 신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당나라와의 전면전에 대비해서 결국은 지역적인 방어를 견
고히 하기 위해서 어떤 방어 라인을 구축한 그런 목적에 의해 쌓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
다."
나당 전쟁 당시 당과 신라의 주전선이었던 임진강 일대. 이곳에는 신라와 당이 치열한 공방
전을 벌였던 성이 하나 있다. 칠중성이다. 성은 붕괴되고 석축만 남아 있다. 칠중성은 당과
신라, 양군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이었다. 칠중성 인근의 임진강은 강이 얕아서 당군이
남하하기 좋은 이동로다. 반면 시야가 사방으로 트여 있어서 신라군으서는 당군의 남하를 저
지하기에도 좋은 위치다. 신라는 이처럼 당군의 주요 이동로에 산성들을 확보하고 당의 남하
를 막았다. 수많은 산성 축조도 그 이유다.
제일차 방어선인 임진강. 매소성 일대 1차 방어선3 신라는 임진강을 제 일차 방어선으로 삼
는다. 양주 포천일대의 2차 방어선에도 산성이 빽빽하다. 한강까지 남하 하려면 당군은 백오
십개나 되는 신라의 성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신라는 철통같은 산성 방어망과 고도로 훈련된 특수 부대, 신라는 이렇게 만반의 전투 태세
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보병에 비해 기병에게는 보급 문제의 어려움이 더 크다. 전쟁 중에 말은 죽기도 하고 다치기
도 한다. 때문에 기병에게 있어 말은 끊임없이 보충돼야 하는 보급품이다.
매소성에 주둔한 20만 당기병, 그들에게 말은 무기다. 말 보급은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또한 말의 먹이도 문제다. 현지에서 조달한다고 해도 한계는 있다. 먹이도 상당 부분 보급에
의존했을 것이다.
당시 당군의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삼대칠이다. 그렇다면 매소성에는 7만의 기병이 있었을
것이다. 필요한 식량은 얼마나 될까.
하루 필요한 양을 계산해 보자. 말한마리가 하루 먹는 양은 5킬로그램, 7만마리에게 필요한
하루 먹이 양은 약 350톤. 병사들의 식량을 보자. 당군 20만명에게 하루 필요한 식량은 60톤
이나 된다. 매소성 당군에게 가는 보급선은 서해와 임진강을 통하는 뱃길이었을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오두 산성. 천성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임진강 수로변에 인접한 야산. 이곳
이 천성 자리다. 드문드문 쌓아 올린 석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성에서 신라수군은 당의
보급선단과 전투를 벌였다. 천성 전투는 매소성에 주둔한 20만 당군의 보급을 차단한 전투였
다.
675년 음력 9월, 매소성에는 겨울이 찾아 오고 있었다.
20만 당군에게 보급품 차단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겨울을 앞두고 보급품마저 끊긴 상황에
서 당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진영은 어떠했을까. 연천군 청산면. 이곳에는 초성리 토성이라는 작은 토성이
있다. 매소성 바로 아래 평원 지대다. 신라는 이곳을 전초기지로 삼았다. 초성리 토성을 시
작으로 이곳에서 한강까지 이어지는 협곡 양쪽 산성에 신라군은 방어선을 쳤다. 당군과 신라
군은 전력을 투입해 최후의 결전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675년 9월. 20만 당군 기병대 4만 신라군 보병은 정면 승부를 벌인다. 결과는 신라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빛나는 승리였다.
매소성 전투에서 철저하게 참패를 당한 당나라 군사들은 불과 몇달을 못견디고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신라가 최강의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얻어진 결
과가 아니었다.
당의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는 그야말로 발빠르게 움직다. 장창 부대를 새롭게 만들고
대규모 산성을 축성해서 그야말로 철저하게 방어를 했다. 신라군의 전투력은 탁월했다. 그
뒤에는 우수한 무기와 특수 부대에서 훈련된 병사들이 있었다. 전쟁의 요소 요소들을 적절하
게 운용할 줄 알았던 신라, 신라가 있었기에 한반도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5) 나당전쟁의 승부처, 매소성 전투
나당전쟁은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했다.
670년 당이 서역의 토번(지금의 티벳)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사이,
국제정세를 간파하고 있던 신라는 한반도에 대한 당의 야욕을 막기위해
당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와 결코 무모한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무기와 고도의 군사 훈련으로 무장한 신라.
신라는 최강의 당나라 군대와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당전쟁의 분수령이 된 매소성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는 당의 최정예 기병과 싸웠다
20만 당나라 대군이 주둔했다는 매소성은 어디쯤일까? 경기도 연천 전곡. 이곳에는 국도를
끼고 한탄강이 흐르는 곳에 나지막한 야산이 있다. 전곡 일대를 관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야산에 오른다. 산 정상에서는 막힘없이 사방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천혜의 군사적 요충
지.여기가 바로 20만 당나라 대군이 주둔했던 매소성이 있던 자리다.
전곡 일대에는 당시 치열했던 전투의 기억이 지금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산면 대전리 마을에는 말무덤으로 전해져오는 유적이 있다.
밭으로 쓰고 있어 훼손이 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고분의 형태가 남아 있다.
당시 전투에서 말이 많이 죽어 말을 묻었다는 말무덤. 왜 이곳에는 유독 말에 관한 구전이 많은 것일까..
첫댓글 유인촌인데 ,;; 근데 잼잇네여 ㅋㅋㅋ3만대 20만이라..ㅎㅌㅌㅌㅌㅌ외국영화못지않음 ㅎㅌㅌㅌㅌㅌㅌ
내용 궁금해서 보려다가 유C나와서 안볼랍니다 ㅋㅋ
밥그릇 하나 더 챙기려다 갖고 있던 밥그릇마저 빼앗길 뻔했죠..
아마 후손들에게 이렇게 욕 처먹을 나라로 남을 줄은 몰랐겠지. 신라
저렇게 졌으니 당나라 군대지.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