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중국 書畵室長(서화실장) 웬퐁(Wen Fong) 선생은 우리나라 관련 학계에서는 잘 알려진 미술사학자이다. 프린스턴 대학 동양미술사 교수로서 한국 정신문화원 李聖美(이성미) 교수를 비롯한 한국인 제자들도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가을 뉴욕 문화원장으로 부임한 지 몇 달 안되어서였다. 그때부터 뉴욕을 떠나던 1993년 10월까지 뉴욕 타임스 기자들말고는 내가 가장 자주 접촉했던 뉴욕의 문화계 인사 중 한 사람이다. 바로 메트로폴리탄 한국미술 전시실 설치 件 때문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나와 연락을 가지다가 1996년 봄 내가 워싱턴 駐美대사관 공보공사로 부임하면서 다시 그와의 업무가 이어졌다.
「메트로폴리탄 한국미술 전시관(Arts of Korea Gallery)」은 오랜 産苦(산고) 끝에 1998년 6월7일 마침내 문을 열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은 중요한 나라의 미술 전시관 개관식에 그 나라 국가 원수를 모시는 관례가 있다. 1987년 일본 미술 전시관 개관식에는 아키히토(名仁) 天皇(천황)이 황태자 시절에 참석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층 이집트 전시관 서쪽 끝에 있는 고대 이집트 神殿(신전)은 가끔 MET의 중요한 리셉션 장소로 쓰인다. 한국미술 전시관 개관식은 이 장엄한 신전에서 뉴욕 타임스 회장 아서 옥스 설즈버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이사장이 金大中(김대중) 대통령과 개관식 명예회장으로 힐러리 로담 클린턴 미국 대통령 영부인을 모시고 화려한 디너 파티로 진행되었다.
MET의 프랑스人 관장 필리프 드 몬테벨로의 경과보고와 힐러리 여사의 인사말에 이어 金大中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그리고 식사가 나왔다. 이날의 메뉴는 간소하지만 국가 원수를 모신 만찬답게 최고급 味覺(미각)을 살렸다. 前菜(전채)는 박하 향기 나는 바질 소스와 생 야채를 곁들인 롭스터. 캘리포니아 포도주 명산지 나파 밸리에서도 유명한 케이크브레드 포도주 창고에 보관되었던 1996년도 샤르도네 백 포도주가 나왔다.
메인 디쉬는 검은 버섯 소스를 친 쇠고기 필레. 봄 야채와 으깬 당근과 감자 퓨레가 곁들였다. 赤포도주는 역시 나파 밸리 포도상인 조제프 펠프스의 1995년도 카버네 소비뇽. 그리고 디저트는 과일과 샤베트를 초콜릿 소스로 섞은 것, 이름하여 「브뤼 라 프랑새즈」. 무슨 소린지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MET로서는 성의를 다한 프랑스 요리 만찬 메뉴였다.
웬퐁 선생의 도움
음식도 좋았지만 파티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더욱 흥겨웠다. 리셉션의 배경 음악은 뉴욕 교포 음악인들의 앙상블 「세종 솔로이스트」 그룹이 맡았다. 바흐와 브람스 그리고 한국 민요곡들이 계속해서 흘렀다. 「食後(식후) 연주곡」은 우리 귀에 익은 사라사테 곡 「치고이네르바이젠(집시의 달)」. 바이올린 獨奏(독주)는 우리들의 하이틴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사라의 신들린 집시 선율은 마치 皎皎(교교)한 달빛이 이집트 신전 은밀한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假想(가상) 현실을 체험하게 만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1990년 가을부터 지난 8년 간 한국미술 전시관 설치를 둘러싼 여러 가지 오해와 갈등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1990년 당시 玄鴻柱(현홍주) 駐유엔 대사와 함께 MET 한국미술 전시관 사업 추진을 구상하고 웬퐁 선생을 만나던 일. 그후 작고하신 柳赫仁(유혁인) 前 공보처 장관께서 초대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시절 뉴욕을 찾아오셨을 때 駐美대사로 영전한 玄鴻柱 대사와 함께 다시 이 문제를 협의하던 일.
그리고 柳赫仁 이사장이 나를 데리고 뉴욕 有志(유지)로서 MET 理事(이사)의 한 사람인 레이먼드 새클러씨를 만나 한국미술 전시 공간 확보를 부탁하던 일. 레이먼드 새클러씨는 MET에 어마어마한 기부금을 낸 故(고) 아서 새클러의 동생으로 MET 이사회에서 발언권이 강한 분이다. 그리고 柳赫仁 이사장의 후임 孫柱煥(손주환) 국제교류재단 이사장과 安英模(안영모) 이사가 바통을 물려받아 웬퐁 선생과 필리프 드 몬테벨로 관장을 상대로 전시 공간 확보와 지원금 규모를 가지고 孫柱煥 이사장 특유의 뚝심으로 끈질긴 담판을 벌이던 일….
盧泰愚(노태우) 대통령 때 시작한 일이 金泳三(김영삼) 대통령을 거쳐 金大中 대통령에 이르러 마침내 화려한 개관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동안 이 일을 위하여 迂餘曲折(우여곡절)을 겪었던 사람들은 관련 현직에서 다 물러나 정작 개관식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뉴욕 문화원장도, 駐美대사도, 국제교류재단 이사장도, 문화부 장관도, 아니 대통령도 몇 번 바뀌었다. 테이프를 끊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은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인가. 초창기 일에 관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나라도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한국미술관을 열기까지
우리 정부가 MET에 한국미술 전시관을 희망한 것은 1970년대 초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때부터였다. 해방 후 민족주의 교육을 받아온 우리 국민들은 누구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연간 5백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려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에 독립된 한국미술 전시관이 없다는 사실에 누구나 분통을 터뜨린다. 더구나 중국은 그렇다 치고 일본미술 전시관이 버젓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때만 해도 MET측은 아직 한국미술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아시아 미술은 1980년 「중국 庭園(정원)」과 「중국 書畵室(서화실)」을 각각 개관함으로써 비로소 영구 전시관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무렵부터 웬퐁 선생은 MET의 아시아 미술 선임 큐레이터로서 아시아 미술 전시관 계획의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MET측은 1987년 「일본미술 전시실」, 1988년 「고대 중국미술 전시실」이 개관되면서 1990년대로 들어오면 약 6만 평방피트의 아시아 미술 전시관을 새롭게 꾸밀 계획을 추진한다.
한국 정부 일각에서는 사정도 모르고 마치 웬퐁이 개인적인 편견을 가지고 한국미술 전시관을 무시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나도 비슷한 편견을 전제로 웬퐁 선생을 처음 만났다. 1990년 가을 어느 날 MET에서 가까운 맨해튼 70街(가) 이스트에 있는 프랑스 식당 「라 굴뤼」에서 만난 선생은 훤칠한 키에 피부가 흰 영락없는 중국 貴骨(귀골)의 모습이다. 웬퐁의 한자 이름은 方聞. 고향인 상하이 발음에 따라 알파벳으로 적은 것이다. 물론 미국식으로 姓(성)을 뒤로 쓰고. 처음 보는 한국인들에게 거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첫날부터 선생의 박물관 강의는 한국 문화를 글로벌 시장에 홍보하는 일에 종사하는 나의 귀를 충분히 긴장시키고도 남았다.
『박물관에는 3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컬렉션(收藏品), 둘째 그 수장품을 전시할 공간, 셋째 그 수장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일반에게 홍보할 큐레이터(學藝官)이지요. MET에는 불행하게도 한국미술품 컬렉션이 빈약합니다. 동아시아 美術史(미술사)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말이지요. 한국미술 전담 큐레이터도 물론 MET에는 없습니다. MET의 전시 공간은 全세계 미술품의 경쟁 마당이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어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해요』
웬퐁 선생이 말하는 마지막 기회란 1990년대 MET 아시아관 전면 개축 계획을 말한다. 그동안 중국, 일본, 인도, 티베트, 동남 아시아 미술 컬렉션의 영구 전시실이 착착 자리잡으면서 한국미술 전시관이 마지막 남은 숙제였다. 6만 평방피트의 아시아 미술관 개축 총 예산은 자그만치 1천3백50만 달러.
나중에 안 일이지만 1993년 봄 당시 이미 약 1천만 달러 이상 募金(모금)이 되어 있었다. 중국미술 지원에 적극적인 더글러스 딜론 재단에서 2백50만 달러, 허버트 어빙 부처가 4백만 달러, 뉴욕 唐(당)씨 집안에서 3백만 달러를 약속한 것이다. 뉴욕 唐씨 집안은 바로 웬퐁의 처갓집이다. 돈 많은 華僑(화교) 집안으로 이미 MET에 귀중한 중국 서화 컬렉션을 많이 기증한 바 있다. 그 집 사위인 웬퐁 선생이 MET 아시아 미술 선임 큐레이터로 자리잡은 배경도 알 만하다. MET는 그 명성으로 하여 그만큼 돈 많은 후원자들이 많았다.
고려시대 佛畵
오찬 후 웬퐁 선생은 내게 MET가 소장한 한국미술품을 보여주겠다고 제의한다. 迷路(미로) 같은 통로를 따라 아시아 미술품 보관실에 들어서면서 선반을 가득 메운 무수한 중국 서화와 공예품들과 다양한 일본 풍속화와 佛像(불상) 및 武具(무구)들을 만난다. 나에게 보여주려고 비좁은 2층 다락방 한구석에 마련한 긴 장방형 탁자에 늘어놓은 한국미술품들은 정말 보잘것없는 소규모의 컬렉션이다.
삼국시대 護身用(호신용)으로 만들었다는 몸에 지니는 작은 金銅佛像(금동불상)들, 낙랑시대 銅鏡(동경) 몇 개, 그리고 작은 술잔과 접시 등 도자기들인데 그나마 제대로 된 고려자기와 이조자기들은 MET 2층 중국 자기 진열창의 한 칸을 메우러 나가 있었다. 우선 質(질)은 고사하고 量(양)에서 중국은 물론 일본 컬렉션과도 비교가 안된다. 나는 놀랍고 부끄러웠다. 이러고도 무슨 한국미술 전시 공간을 달라고 말하겠는가.
웬퐁 선생은 나의 실망을 눈치챘는지 벽에 걸린 두 장의 아름다운 관음보살 撑畵(탱화)를 가리킨다.
『金원장, 이 그림 좀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틀림없는 고려시대 佛畵(불화)입니다』
고려시대 佛畵라면 그 무렵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뉴욕 미술품 경매장에서 1백만 달러나 나가는 값비싼 미술품이다. MET가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한국미술품을 사들일 리는 만무하고…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金원장, 이 그림들은 MET의 일본미술 컬렉션 중에 섞여 있던 것입니다. 여기 계신 오니시 선생이 찾아냈지요』
옆에 서 있던 MET의 일본미술 큐레이터 중 한 사람인 일본인 3세 미국인 히로시 오니시씨가 빙그레 웃는다. 어찌된 일인가? 2차대전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들 중에는 문화재에 관심을 가진 군인들이 많았다. 헐값에 많은 문화재를 쉽게 수집할 수 있었으니까. 그 중 해리 패커드와 같은 이가 1975년 대규모의 일본미술 컬렉션을 MET에 기증한 것이 일본미술 전시관을 만들게 된 직접 동기였다. 지금도 산더미처럼 쌓인 일본미술 컬렉션을 두세 명의 일본미술 큐레이터들이 하나하나 미술사적 가치를 감식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고려 佛畵가 나왔다.
오니시 선생이 감식한 고려 佛畵는 분명히 日本列島(일본열도)에서 수집된 것들이다. 하긴 15세기부터 한반도 해안에 출몰한 倭寇(왜구)들은 한반도의 도자기와 佛畵를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한반도에서 제작된 도자기와 佛畵는 값비싼 보물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도자기를 한낱 생활 容器(용기)로 만들어 썼으나 일본열도 사람들에게 이 고귀한 미술품은 鑑賞(감상)의 대상이었을 테니까.
佛畵 역시 한반도에서는 사찰의 장식품으로 종교적인 의미가 더 깊었겠지만 일본열도에서는 절에서도 사용했지만 領主(영주)들의 鑑賞品으로 더욱 귀하게 수집되어 왔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도자기 예술이나 불교 탱화를 우리 미술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하게 된 동기는 일본을 비롯한 서양에서 그것을 중요한 미술품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近代(근대) 이후가 아닌가.
끈질긴 흥정
문제는 다시 한국미술 전시관으로 돌아왔다. 그럼, 삼국시대 호신용 금동불상 몇 점과 고려시대 佛畵 두 점, 그리고 고려자기와 이조자기 몇 점을 전시하기 위하여 수백만 달러를 들여서 한국미술 전시관을 만들자는 말인가. 웬퐁 선생은 물론 한국미술이 아시아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너무나 잘 아는 미술사가였다.
『물론 MET의 현재 소장품으로서 한국미술 전시관을 채우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분간 한국 국립박물관이 연대별로 대표적인 작품들을 대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싶어요. 물론 삼국시대 토기 종류는 값도 안 나가고 국립박물관에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MET에 쉽게 기증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신라 金冠(금관)이라든가 백제 半跏思惟像(반가사유상)과 같은 대표적인 국보급 작품들을 주기적으로 빌려와야 합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MET가 한국미술 컬렉션을 늘려야 합니다. 그래서 수집 기금이 필요해요』
웬퐁 선생은 MET의 한국미술 프로그램 예산을 1천만 달러로 잡고 있었다. 우선 전시 공간 확보에 5백만 달러, 컬렉션 기금으로 3백만 달러, 그리고 한국미술 전담 큐레이터 석좌 기금으로 2백만 달러였다. 그중 전시 공간은 장소 여하에 따라 3백만 달러로도 가능하다는 것. 당시 해외공보관 문화사업비를 다 털어야 1백만 달러가 될까말까 한 사정을 너무도 잘 아는 나로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박물관도 수집 예산이 없어서 사들이지 못하는 우리 문화재를 MET에 사주려고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니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러나 全세계 시선이 몰린 뉴욕 한복판에 韓國美術史(한국미술사) 쇼윈도를 하나 마련한다고 생각하면 수백만 달러를 쓰는 게 어찌 아까울쏘냐! 1992년 국제교류재단이 생기면서 나는 MET 한국미술 전시관 사업을 뉴욕에서 벌일 문화홍보 사업 중 우선 순위 넘버원으로 건의했다. 그리하여 국제교류재단과 MET 사이에 한국미술 갤러리 설치비용을 놓고 끈질긴 흥정이 시작된 것이다.
1995년 10월 MET는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설치비용 3백만 달러, 삼성그룹에서 한국미술 전담 큐레이터 석좌 기금 2백만 달러를 받아서 한국미술 전시관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애당초 MET측이 제시한 5백만 달러의 설치비용을 3백만 달러로 깎은 것은 孫柱煥 이사장의 뚝심 담판 덕분이었다. 다만 갤러리 명칭을 「Korea Foundation Gallery of Korean Arts」로 하자는 孫이사장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고 「Arts of Korea Gallery」로 정해졌다. 그 대신 전시관 플라크에 국제교류재단의 영문 명칭 「Korea Foundation」과 삼성측의 「Kun-Hee Lee Fund for Korean Art」의 지원 내용을 명시하게 되었다. 1998년 여름 개관식 프로그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새로 개관하는 한국미술 永久(영구) 전시관은 MET의 아시아 미술 전시 마스터플랜의 完結(완결)을 뜻한다. 개관 기념 전시는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왕조시대까지 한국의 도자기, 금속 공예품, 漆器類(칠기류), 불교 조각과 회화를 망라하고 있다. 새로운 전시관과 개관 기념 전시는 한국의 풍부한 미술문화 遺産(유산)에 어울리는 讚辭(찬사)와 함께 소중한 국제협력을 통한 결실임을 밝혀둔다」
놀라운 소식
그리고 큰 활자로 「한국미술 갤러리의 설치와 그 프로그램은 한국 국제교류재단과 한국미술을 위한 이건희 기금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분명히 박았다. 그리고 작은 활자로 개관 기념 전시와 관련 홍보물 제작에 삼성문화재단의 부분 협찬, 개관 행사 관련 LG상사의 지원, 그리고 한국 문화재 대여 보험료를 미국 연방정부의 예술 및 인문 위원회가 부담했다는 사실 등을 명시하고 있다.
MET 한국미술 갤러리 개관식에 참석하고 워싱턴에 돌아온 나는 여름 휴가철을 보내고 나서 우연히 워싱턴 포스트 문화부 기자 벤자민 포지를 만나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스미소니언 산하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대규모 일본 전통미술전이 곧 열린다는 것이다. 건축과 미술 전문기자인 벤자민 포지는 1990년 초 한국에 취재차 왔을 때 만난 인연으로 내가 워싱턴에 와서 한두 번 회동한 사이였다. 포지 기자에 따르면 일본의 에도(江戶) 시대 전통미술전이 1998년 11월15일부터 1999년 2월15일까지 3개월간 워싱턴 국립미술관 「東館(동관)」에서 열린다는 것.
일본 전화전신 NTT社가 큰 돈을 내고 일본 정부 문화청과 일본 국제교류재단이 총동원된 거국적인 해외문화홍보 프로젝트였다. 개관 행사에 참석을 벼르고 있던 참에 나의 駐美대사관 공보공사 임기가 만료되어 다음해 봄 귀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3년간의 워싱턴 생활을 정리하는데 마음이 바쁘다 보니 에도 전시회 개관식은 놓치고 크리스마스 휴일에야 겨우 관람할 수 있었다.
「에도:1615~1868년 일본 미술」은 한마디로 일본 전통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미술사를 통하여 보여주려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의 책임 큐레이터는 LA 카운티 미술관 일본미술 담당 로버트 싱어. 일본 국내외에서 모은 약 3백 점의 에도 시대 대표적인 미술품들을 장신구, 사무라이, 일, 종교와 축제, 여행과 풍경과 자연, 흥행의 여섯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고 있다. 일본 전통사회의 생활상을 회화, 책자, 도자기, 목각, 칠기, 검도, 갑옷, 투구, 의상 등 여러 가지 문화재를 통하여 구경할 수 있도록 꾸몄다. UCLA 역사학 교수 허만 움스는 무려 5백 페이지나 되는 전시 작품 카탈로그의 주제 논문 「에도 문화와 사회의 여러 가지 樣式(양식)과 규범」에서 일본이 西歐化(서구화)하기 이전에 그 전통 사회에서 이미 자생적인 근대화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文化宣傳論
솔직히 나는, 워싱턴 국립미술관이라는 장소, 경제 대국 일본의 거국적 재정 지원, 미국內 旅團(여단) 규모의 일본학 학자들의 활용 등 일본의 해외문화홍보 스케일을 대하면서 우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다. 1993년 가을, 내가 뉴욕문화원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무렵, 1993년 10월3일부터 1994년 1월2일까지 아시아 소사어티 본부 갤러리에서 열렸던 「18세기 한국미술: 화려함과 단조로움」 전시회와 자연스럽게 비교되었다.
그해 아시아 소사이어티가 필립 모리스社와 한국 국제교류재단,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등의 후원으로 벌인 「한국 축제」의 한 전시 행사로서 추진되었던 것. 이 전시회의 미술 기획은 당시 아시아 소사이어티 큐레이터 김홍남 현 이화대학교 미술사 교수였다. 우리 역사학자들이 전통사회에서 가장 화려한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설명하는 18세기 미술전에 초점을 맞춘 기획 의도를 높이 샀던 기억이 떠오른다.
英正祖(영정조) 시대 화려한 궁중 회화와 장식과 檀園(단원) 金弘道(김홍도)를 필두로 한 단조로운 필치의 풍속화를 대비시킨 전시회였다. 물론 이 「18세기 한국미술전」은 謙齋(겸재) 鄭(정선)의 眞景山水(진경산수)도 빼놓지 않았다. 국립박물관 소장 「萬瀑洞(만폭동) 계곡」과 호암 미술관 소장 「내연산 三龍瀑(삼룡폭)」 그리고 개인소장품 「西苑(서원)의 亭子(정자)」 세 편이 선보였다.
그러나 「18세기 한국미술전」은 겸재라는 화가와 진경산수라는 우리 미술사의 금자탑과 같은 創意的(창의적) 畵風(화풍)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전시회에 참석한 미국인 친구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文化宣傳論(문화선전론)을 폈다.
『웬퐁 선생의 말처럼 인류가 풍경을 화폭에 담아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중국 宋代(송대)부터다. 「꾸어시(郭熙)」의 山水畵가 그 효시라고 하겠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중세 종교화는 물론 르네상스 고전 미술에서도 人物畵(인물화)뿐이지 풍경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 보인다. 중국의 산수화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13세기쯤 될까. 중국을 오가는 使臣(사신)들이 아름다운 중국의 絶景(절경)을 그린 산수화를 몇 점 얻어 들고 오면 한반도에서는 그지없이 귀한 보물처럼 鑑賞의 대상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한반도의 재주 좋은 畵工(화공)들은 중국産 원본 산수화를 복사하듯 베껴서 수요에 충당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실제로 가보지도 못한, 중국 경치가 아닌 우리나라 경치, 바로 實景(실경)을 그리자는 생각이 나온 것이 18세기 초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서다. 겸재 정선과 같은 천재적인 화가가 전통적인 중국 산수화 기법과 다른 독특한 謙齋(겸재준)을 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미술 문화는 서양 최초의 네덜란드 풍경화와 비슷한 시기에 꽃피웠다고 하겠다』
우리 전통문화 세계에 알리려면…
워싱턴에 부임해 온 뒤 나는 공보공사 관저의 장식을 이 문화선전론에 입각하여 꾸몄다. 꾸어시의 산수화, 네덜란드 풍경화, 겸재의 금강산 實景, 그리고 일본 19세기 화가 「호쿠사이(北薺)」의 「후지산과 파도」의 복사본들을 구해 비교 전시해놓고 관저에 초대받은 미국 언론인과 교수들에게 우리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자료로 써왔다.
그런데 정작 워싱턴을 떠나려고 하는 마당에 국립미술관 동관에서 열린 「에도:일본미술전」에서 뜻밖의 伏兵(복병)을 만난 것이다. 「여행과 풍경과 자연」실에 들어서면서 우연히 한 폭의 족자에 붙은 영문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True View of Kojima Bay」. 원 제목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거꾸로 유추하면 「고지마(小島)灣(만)의 眞景(진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에도 진경산수라는 미술사적 개념이 있었다는 말인가.
작가의 이름은 「이케 다이가 (1723~1776)」. 다행히 겸재 (1676~1759) 보다는 한 세대 늦게 태어난 사람이다. 일본열도의 진경산수가 한반도의 그것보다는 한 30년 뒤늦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으로 위로가 될 수는 없었다. 18세기 에도 문화에서 중국의 南畵(남화), 이른바 文人畵(문인화)가 사무라이 계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여기에 대항하여 민간의 「浮畵(우키오에)」가 발달하여 급기야 19세기에 프랑스 인상파 미술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세계 미술사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반도에서도 18세기 양반층에서 문인화가 유행하였고 이와 병행하여 진경산수화가 발전했다는 것이 定說(정설)이다. 그럼 일본의 진경은 어떤 것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문제는 우리나라 미술사가 중국미술사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언급되고 있지만, 중국문화권의 주변 국가들, 최소한 우리와 가까운 일본과도 비교미술사 관점에서 정리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어디 그뿐인가. 일본미술에서 「진경」이 있었다면 베트남에서는 어떠했을까?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려면 아시아 비교 미술사 연구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