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tridaṃ, bhikkhave, sāriputtassa anupadadhammavipassanāya hoti.
비구들이여, 이것이 사리뿟따가 차례대로 법에 대해 위빳사나를 닦은 것이다.
M111에는 4가지 문맥에서 sati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문맥은 [초선에는
vitakko ca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 희열[喜], 행복[樂],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감각접촉[觸], 느낌[受], 인식[想], 의도[思], 마음[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의 법들이 있는바,
tyāssa dhammā anupadavavatthitā honti. 그는 이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지었다.]에서
첫 번째 줄에는 각 선(초선, 2선, 3선, 4선 등)의 고유한 법수들이 나타나고
두 번째 줄에는 禪에 공통인 법수들이 나타납니다.
여기까지는 삼매(사마타, 止)를 구성하는 법들이고
세 번째 줄에는 위빳사나(觀)를 구성하는 법들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첫 줄의 [喜], [樂]와 세 번째 줄의 [捨]가 충돌하기 때문이고
주석에 [欲], [信解], 精進, [念], [捨]로 이루어진 [作意]와
동일한 의미의 단어가 위빳사나의 수번뇌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adhimokkho, paggaho, upaṭṭhānaṃ, upekkhā, nikanti>
하여튼 여기서 나타나는 sati는 다다음에 소개된 manasikāro와 연결되는 법수로 추정합니다.
* 念 → 作意 (→ 意) → 法 이 흐름에 유의하시길 권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문맥은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렀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했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라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tatiye jhāne dhammā —
sukhañca sati ca sampajaññañca cittekaggatā ca,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과
그 다음 세 번째 문맥은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ye ca catutthe jhāne dhammā —
upekkhā adukkhamasukhā vedanā passaddhattā cetaso anābhogo satipārisuddhi cittekaggatā ca,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
sati가 나타나는 마지막 문맥은
[“puna caparaṃ, bhikkhave, sāriputto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비구들이여, 다시 사리뿟따는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문다.”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ati.
그는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出定)한다.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itvā
ye dhamm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e dhamme samanupassati —
‘evaṃ kirame dhammā ahutvā sambhonti, hutvā paṭiventī’ti.
그는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하여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그 법들을 관찰[隨觀]한다.
'이와 같이 이 법들은 없었는데 생겨나고, 있다가는 사라진다.'라고.]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에서는
각각의 선정을 특징짓는 고유의 법이나, 공통되는 법이 나타나지 않고, 또한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한다. 그는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하여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그 법들을 관찰한다.'라고 나오지만
그 이전의 선정에서는 출정이라든지 과거라는 표현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마지막 2가지 處(비상비상과 상수멸)은
그 선정 상태에서는 위빳사나 할 수 없고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법들을'
마음챙김(기억)에 의해서 과거의 법을 sam-anu-passati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흔히들 위빳사는 사마타(삼매)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고 출정하고 나서야 가능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본 경문과 다른 경문에 의하면 삼매 상태에서 위빳사나가 가능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본 경에도 나오듯이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은 출정하고서 sam-anu-passati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른바 찰나 혹은 근접삼매(아마 욕계삼매)는 어떨까 하면
본 삼매라고 하는 색계 바른 삼매 이전의 欲界 禪에 해당될 만한 수행법 중에
대표적인 것이 4념처입니다.
이러한 욕계 선정 상태에서는 아주 안정되게 머물 수 없어서 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만 머물고 그래서 선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 상태에서 즉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하게 된다. 그는 그 증득에서
마음챙기며 출정하게 되어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그 법들을 관찰한다.'라면
가능할 수 있지 싶습니다.
그러나 바른 삼매인 색계선과 공무변, 식무변, 무소유처(무색계, 止)에서는
출정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위빳사나(觀)하는 것으로 경문에 나타납니다.
(atikkammeva kabaḷīkārāhārabhakkh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o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고 사는 신들의 동료가 되는 것을 뛰어넘은
dibbo rūpī manomayo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根이 저열하지 않은 意成身) 색계 상태에서는
최소한 '코로 냄새를 맡는다.'거나 '혀로 맛을 본다.'라거나
하물며 배가 고프다거나, 먹고 나서 똥 오줌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싶습니다.
최소한 제2선천에서는 이미 地大가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소개해 드린 제3선의 [sato ca sampajāno]에 대한 「청정도론」의 내용입니다.
Idāni sato ca sampajānoti
ettha saratīti sato. Sampajānātīti sampajāno.
Puggalena sati ca sampajaññañca vuttaṃ.
Tattha saraṇalakkhaṇā sati, asammussan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Asammohalakkhaṇaṃ sampajaññaṃ, tīraṇarasaṃ, pavicayapaccupaṭṭhānaṃ.
여기(제3선에 나오는) sato와 sampajāno란
여기에서 '기억한다.'라고 sato(남성 단수 주격)이다.
'즉각 (실시간으로) 안다'라고 sampajāno(남성 단수 주격)이다.
사람에 속하는 것으로 sati와 sampajañña가 언급되었다.
거기서 sati는 기억하는 특징, (망각하지 않고) 잊지 않는 역할, 보호함으로 나타난다.
sampajañña는 미혹하지 않는 특징, 조사하는 역할, (즉시 알아)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상과 같이 남방 상좌부 부동의 준거라고 하는 청정도론에서도 sati의 의미를
'기억한다.'라든지, 특징은 기억, 역할은 잊지 않음, 나타남은 보호함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보호(ārakkha)라는 이른바 (육근을) 수호하는 '문지기' 비유가 경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지기'가 sati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유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sati가 '문지기' 비유로 나타나는 지는 각자 사유하시길 권합니다.
첫댓글
바른 기억을 두 가지 측면(혹은 입력-저장,출력의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대면할 것에 대한 바른 기억이 여리작의가 가능하게 하는 측면과
이렇게 여리작의하여 바르게 알고 보게 된 대상(법)을 저장하여 기억되어 있는 상태로 나눌 수 있고
만약 바르게 저장 기억되어 있는 상태라면
다시 어떤 대상을 대면하게 되면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되지 싶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알아차림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기억은 기억이고 알아차림은 알아차림입니다.
산에 올라갈 때는 여러 친구(신/정진/념/정/혜)가 각자의 위치에서 정상을 향해 올라가지만
정상에서 만나면 여럿이 아니고 하나라고 해도 어폐는 없습니다.
이럴 때의 기억은 반야라고 해도 되고 반야가 기억이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