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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정팽(鼎食鼎烹)
대장부가 살아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삶겨 죽겠다는 뜻으로, 삶아져 죽을망정 떵떵거리며 하고 싶은 대로 살다 가겠다는 말이다.
鼎 : 솥 정(鼎/0)
食 : 밥 식(食/0)
鼎 : 솥 정(鼎/0)
烹 : 삶을 팽(灬/7)
출전 : 사기(史記) 주보언전(主父偃傳)
잘 먹고 잘 살지 못할 바에는 삶겨 죽을 뿐이라는 말로, 살아서 오정식(五鼎食)을 먹을 수 없다면 오정(五鼎)에 삶겨져 죽을 뿐이라는 뜻이다.
오정식(五鼎食)은 고대 제후들이 연회 때 다섯 솥에 소, 돼지, 닭, 사슴, 생선을 놓고 먹던 식사로 호사스러운 생활이나 고귀한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史記) 卷112 평진후 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주보언(主父偃)은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조정에 글을 올려 특채되어, 무제의 총애에 힘입어 출세하면서 남의 비밀을 폭로하기 좋아하므로 대신들이 두려워하여 뇌물을 바쳤다.
이에 어떤 사람이 주보언에게 말했다. '전횡이 너무 지나칩니다.'
人或說偃曰: 太橫矣.
이에 주보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이나 유세하며 천하를 떠돌아 다녔지만 뜻한 바를 얻지 못했습니다.
主父曰: 臣結發游學四十餘年, 身不得遂.
친부모는 저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형제는 거두어주지 않았으며, 빈객들은 나를 버렸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親不以為子, 昆弟不收, 賓客棄我, 我阸日久矣.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살아 생전 오정식(五鼎食)을 먹을 수 없다면 오정에 삶아져 죽을 뿐입니다.
且丈夫生不五鼎食, 死即五鼎烹耳.
이제 내 인생의 날은 저물어 가고 갈 길은 멉니다. 그 때문에 순서를 뒤바꾸어 서두른 겁니다.'
吾日暮途遠, 故倒行暴施之.
정식정팽(鼎食鼎烹)
정식(鼎食)은 솥을 쫙 벌여 놓고 먹는다는 뜻으로, 썩 귀한 사람의 밥 먹음, 또는 그 진수 성찬의 비유하는 말이다. 정팽(鼎烹)은 죄수를 솥에 넣어 삶아 죽이는 혹형을 말한다.
이덕무에게 제자 자목(子牧)이 투덜댄다. '선생님! 벗이란 한 방에 살지 않는 아내요,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와 같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고상한 사대부와는 가까이하지 않고, 똥 푸는 엄행수와 벗이 되려 하시니, 제가 너무 창피합니다. 문하를 떠나겠습니다.'
이덕무가 달랜다. '장사꾼은 이익으로 사귀고, 대면해서는 아첨으로 사귄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워도 세 번씩 거듭 청하면 멀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고, 묵은 원한이 있더라도 세 번을 주면 친해지지 않음이 없다.
하지만 이익을 가지고는 사귐을 잇기가 어렵고, 아첨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큰 사귐은 굳이 얼굴을 맞댈 것이 없고, 훌륭한 벗은 착 붙지 않는 법이지.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을 삼아야 도의(道義)의 사귐인 게다.'
그러면서 이익과 아첨으로 벗을 사귀는 위선적 사대부와 냄새나는 불결한 일을 하면서도 향기로운 삶을 사는 엄행수의 태도를 견주고, 그는 나의 스승이지 감히 벗으로 삼을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에 나온다. 예(穢)는 똥을 가리키니 더럽다는 뜻이다. 박지원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자서(自序)에서 엄행수에 대해 이렇게 썼다.
士累口腹, 百行餒缺.
鼎食鼎烹, 不誡饕餮.
嚴自食糞, 迹穢口潔.
선비가 입과 배에 얽매이면, 온갖 행실 모두 다 이지러지네. 잘 먹고 잘 살다가 삶겨 죽어도, 그 탐욕을 경계하지 못하게 되지. 엄행수는 똥을 퍼서 먹고 살지만, 자취는 더러워도 입은 깨끗해.
정식정팽(鼎食鼎烹)은 사기(史記) '주보언전(主父偃傳)'에 나온다. 주보언이 고속 승진해서 전횡을 일삼자 어떤 이가 나무랐다.
그가 대답했다. '대장부가 살아서 오정(五鼎)의 음식을 먹지 못할 바엔, 오정에 삶아져서 죽을 뿐이다(丈夫生不五鼎食, 死卽五鼎烹耳).'
정식(鼎食)은 사치스러운 상차림이다. 정팽(鼎烹)은 죄수를 솥에 넣어 삶아 죽이는 혹형(酷刑)이다. 삶아져 죽을망정 떵떵거리며 하고 싶은 대로 살다 가겠다고 했다. 뒤에 그는 다른 일에 연루되어 집안이 다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은 도리를 떠나 권세와 이익만 입에 올린다. 차라리 똥 푸는 사람을 스승으로 삼겠다던 이덕무의 결기를 생각한다.
史記列傳(사기열전) 卷112
平津侯·主父列傳(평진후·주보열전)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은 평진후(平津侯) 공손홍(公孫弘)과 주보언(主父偃)의 합전(合傳)이다.
주보언전(主父偃傳) 1
주보언(主父偃)은 제나라 임치현 사람으로 종횡가의 학술을 익혔으나 중용되지 못하자 한 무제에게 상소한 것이 인정을 받아 낭중이 된 후 일 년 만에 중대부로 승진하였다.
남의 비밀을 폭로하기 좋아하므로 대신들이 두려워하여 뇌물을 바쳤으며, 제나라 재상이 된 후 주보언이 제나라 왕 유차경이 기옹주와 간통한 사실을 황제에게 간한 것으로 인해 일족이 멸족되었다.
01
主父偃者, 齊臨菑人也.
주보언(主父偃)은 제(齊)땅 임치(臨菑) 사람이다.
學長短縱橫之術, 晚乃學易春秋百家言.
전국시대 종횡가의 학설을 배웠으며, 만년에는 역경(易經), 춘추(春秋)와 제자백가의 학설을 공부했다.
游齊諸生閒, 莫能厚遇也.
그 후 제나라의 여러 유생들을 찾아다니며 유세를 했으나, 아무도 그를 후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齊諸儒生相與排擯, 不容於齊.
게다가 제나라의 여러 유생들이 합심하여 그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제나라에서 더 이상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家貧, 假貸無所得, 乃北游燕趙中山, 皆莫能厚遇, 為客甚困.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도 남에게 돈을 빌릴 곳조차 없어 북쪽으로 연(燕), 조(趙), 중산(中山) 지방을 떠돌았으나 모두 그를 후대해 주지 않아 몹시 곤궁한 나그네 신세가 되었다.
孝武元光元年中, 以為諸侯莫足游者, 乃西入關見衛將軍.
효무제(孝武帝) 원광(元光) 원년(기원전 134년)에 주보언은 제후들 중에는 유세할만한 자가 없다고 여기고, 이에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 위청(衛青) 장군을 찾아갔다.
衛將軍數言上, 上不召.
위청이 여러 차례 그를 황제에게 추천했지만, 황제는 그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資用乏, 留久, 諸公賓客多厭之, 乃上書闕下.
가진 돈도 떨어지고 머무른 지 오래되자 여러 공들과 빈객들은 대부분 그를 싫어했으므로, 이에 황제에게 상소를 하였다.
朝奏, 暮召入見.
아침에 상소를 하자 저녁에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所言九事, 其八事為律令, 一事諫伐匈奴.
상소문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일 가운데 여덟 가지가 율령에 관한 것이었고, 한 가지는 흉노 정벌에 대해 간하였다.
02
其辭曰:
그는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臣聞明主不惡切諫以博觀, 忠臣不敢避重誅以直諫, 是故事無遺策而功流萬世.
신이 들으니 현명한 군주는 간절한 간언을 꺼리지 않고 널리 살피며, 충신은 감히 무거운 형벌을 피하지 않고 직간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정책을 유실하지 않고 그 공적과 명성을 만대에 전하게 한다고 합니다.
今臣不敢隱忠避死以效愚計, 願陛下幸赦而少察之.
지금 신은 충심을 품고서 감히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어리석은 계책을 바칩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신의 계책을 조금이라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03
司馬法曰: 國雖大, 好戰必亡; 天下雖平, 忘戰必危.
사마법(司馬法)에서 이르기를, '나라가 비록 강대해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비록 태평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天下既平, 天子大凱, 春蒐秋狝, 諸侯春振旅, 秋治兵, 所以不忘戰也.
천하가 이미 평정된 후에 천자는 대개(大凱)를 연주하고, 봄에는 수(蒐)라는 사냥을 하고 가을에는 선(獮)이라는 사냥을 하며, 제후는 봄에 군대를 훈련시키고 가을에는 무기를 정비하는 것은 모두 전쟁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且夫怒者逆德也, 兵者凶器也, 爭者末節也.
그러나 무릇 성내는 것은 덕행을 거스르는 것이요, 무기는 흉기이며, 싸움은 말단의 일입니다.
古之人君一怒必伏尸流血, 故聖王重行之.
옛날의 군주는 한 번 성내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 피를 보았기 때문에 성왕(聖王)은 그런 일을 신중하게 대처 하였습니다.
夫務戰勝窮武事者, 未有不悔者也.
대체로 싸워서 이기는 것에 힘을 쏟고 무력을 다 쓴 자는 후회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昔秦皇帝任戰勝之威, 蠶食天下, 并吞戰國, 海內為一, 功齊三代.
옛날 진시황(秦始皇)은 전쟁에서 승리한 위세를 몰아 천하를 잠식하기 시작하여 전국(戰國)을 병탄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니, 그 공적은 삼대(三代)와 같았습니다.
務勝不休, 欲攻匈奴, 李斯諫曰: 不可. 夫匈奴無城郭之居, 委積之守, 遷徙鳥舉, 難得而制也. 輕兵深入, 糧食必絕; 踵糧以行, 重不及事. 得其地不足以為利也, 遇其民不可役而守也. 勝必殺之, 非民父母也. 靡獘中國, 快心匈奴, 非長策也.
또 진시황은 승리를 하여도 만족하지 않고 다시 흉노를 치려고 했으며 그때 이사(李斯)가 간언했습니다. '불가합니다. 흉노는 성곽에서 살지 않으므로 창고에 재물을 쌓아놓고 지킬 것이 없으며, 마치 새떼가 날아다니듯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경무장한 병사로 깊이 쳐들어가면 필시 군량이 끊어질 것이며, 군량을 휴대하여 행군하려면 번거로워 일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들의 땅을 얻더라도 이로울 것이 없고, 흉노의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그들을 부리고 지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승리하고 나서 반드시 그들을 죽여야 하는데, 그것은 만백성의 부모 된 군주의 도리가 아닙니다.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 흉노를 치는 것을 통쾌하게 여긴다면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秦皇帝不聽, 遂使蒙恬將兵攻胡, 辟地千里, 以河為境.
진시황이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몽염(蒙恬)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흉노를 공격하게 하여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황하를 경계로 삼았습니다.
地固澤(咸)鹵, 不生五穀.
그러나 그 땅은 본래 염분이 많은 늪지대로 오곡이 자라지도 못했습니다.
然後發天下丁男以守北河.
그 이후에 전국의 장정들을 보내 북하(北河) 지역을 지키게 했습니다.
暴兵露師十有餘年, 死者不可勝數, 終不能踰河而北.
이곳에 10여 년 동안 군대가 비바람에 노출되어 지키다가 죽은 자가 이루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끝내 황하의 북쪽으로 넘어가지는 못했습니다.
是豈人眾不足, 兵革不備哉. 其勢不可也.
이것이 어찌 군사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그 당시의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又使天下蜚芻芻粟, 起於黃腄瑯邪負海之郡, 轉輸北河, 率三十鐘而致一石.
또 진나라 조정에서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급속히 마초(馬草)와 군량을 운송하게 하면서 황현(黃縣), 수현(腄縣), 낭야(琅邪) 등과 같은 바다에 인접한 군(郡)에서부터 북하(北河)까지 전하고 전해 운송시켰으나 대략 30종(鍾)이었던 것이 겨우 1석(石)만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男子疾耕不足於糧馕, 女子紡績不足於帷幕.
남자들은 온 힘을 다해 농사를 지어도 군량의 수요에는 부족했고, 아녀자들이 아무리 길쌈을 해도 군막(軍幕)을 만들기에는 부족했습니다.
百姓靡敝, 孤寡老弱不能相養, 道路死者相望, 蓋天下始畔秦也.
이 때문에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되었고, 고아와 과부와 노약자는 서로 부양할 수 없어 길바닥에는 죽은 시체가 잇따르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천하가 진나라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04
及至高皇帝定天下, 略地於邊, 聞匈奴聚於代谷之外而欲擊之.
그 후에 고조(高祖) 황제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변방을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흉노가 대군(代郡)의 산곡(山谷) 밖에 모여든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御史成進諫曰: 不可. 夫匈奴之性, 獸聚而鳥散, 從之如搏影. 今以陛下盛德攻匈奴, 臣竊危之.
그러자 어사(御史) 성(成)이 나아가 간언했습니다. '불가합니다. 저 흉노의 습성은 짐승처럼 모였다가 새떼처럼 흩어지니, 그들을 뒤쫓는 것은 그림자를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폐하의 성덕으로 흉노를 친다고 해도 신은 그것을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高帝不聽, 遂北至於代谷, 果有平城之圍.
고제(高帝)가 그의 건의를 듣지 않고 마침내 북쪽으로 진격하여 대곡(代谷)에 이르렀다가, 결국 평성(平城)에서 포위당하셨습니다.
高皇帝蓋悔之甚, 乃使劉敬往結和親之約, 然後天下忘干戈之事.
고조 황제께서는 이를 심히 후회하고, 유경(劉敬)을 보내 화친의 조약을 맺게 하셨으며, 그 후 천하는 전쟁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故兵法曰; 興師十萬, 日費千金.
그래서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이르기를, '군대 10만을 동원하면, 날마다 천금을 쓰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夫秦常積眾暴兵數十萬人, 雖有覆軍殺將系虜單于之功, 亦適足以結怨深讎, 不足以償天下之費.
진나라는 백성들과 수십만의 군대를 늘 변방에 주둔시켜놓고서 비록 적군을 무찌르고 장수를 죽이며 선우(單于)를 사로잡은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흉노로 하여금 원한을 맺히게 하고 복수심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들을 막기 위해서 천하의 비용을 다 써도 역부족이었습니다.
夫上虛府庫, 下敝百姓, 甘心於外國, 非完事也.
이와 같이 위로는 나라의 창고를 텅 비게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고달프게 하면서 나라 밖에 위엄을 떨치는 것으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은 일을 끝낸 것이 아닙니다.
夫匈奴難得而制, 非一世也.
흉노를 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行盜侵驅, 所以為業也, 天性固然.
그들이 도둑질을 감행하고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고 돌아다닌 것을 직업처럼 한 것은 그들의 천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上及虞夏殷周, 固弗程督, 禽獸畜之, 不屬為人.
위로 멀리 우(虞), 하(夏), 은(殷), 주(周)에 이르기까지 본래부터 그들을 감독하고 지도하지 않았으며 마치 금수처럼 여기고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습니다.
夫上不觀虞夏殷周之統, 而下修(循)近世之失, 此臣之所大憂, 百姓之所疾苦也.
멀리 옛 왕조였던 우, 하, 은, 주나라의 경험을 살피지 않고, 가까운 시대의 과실을 따라 백성들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신이 매우 우려하는 것입니다.
且夫兵久則變生, 事苦則慮易.
더구나 전쟁을 오래 지속하면 변란이 생기고, 하는 일이 고통스러우면 딴 마음을 먹게 마련입니다.
乃使邊境之民獘靡愁苦而有離心, 將吏相疑而外市, 故尉佗章邯得以成其私也.
이는 또한 변경의 백성들을 고달프고 시름에 잠기게 해 역심(逆心)을 품게 만들며, 장수와 관리들은 서로 의심하면서 외세와 결탁하였으므로 예전에 위타(尉佗)와 장한(章邯)처럼 그들의 사욕을 이룰 수 있게 하였습니다.
夫秦政之所以不行者, 權分乎二子, 此得失之效也.
진나라의 정령(政令)이 시행되지 않았던 까닭은 권력이 위타와 장한에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정치적 득실의 효과입니다.
故周書曰: 安危在出令, 存亡在所用.
고로 주서(周書)에서 이르기를, '국가의 안위는 군주의 정령(政令)에 달려 있고, 국가의 존망은 인사(人事)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願陛下詳察之, 少加意而熟慮焉.
청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상세히 살피시고 다소 주의를 기울여 심사숙고 하시기 바랍니다.
주보언전(主父偃傳) 2
이 장은 서악(徐樂)의 상서(上書)이며 서악은 무제(武帝)에게 국정에 대하여 간언하는 글을 올렸다.
서악은 국가의 우환은 토붕(土崩)에 있으며 토붕이란 백성들이 폭정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무리를 지어 반항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라 하였으며, 와해(瓦解)란 정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권력 다툼이라 하였다.
토붕은 기존의 정권을 뒤엎어서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이지만, 와해는 단지 인사 교체를 조성하는 일일 뿐이라는 요지의 글을 올려 무제에게 토붕의 형세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간언하였다.
05
是時趙人徐樂, 齊人嚴安俱上書言世務, 各一事.
이때, 조(趙)나라 사람 서악(徐樂)과 제(齊)나라 사람 엄안(嚴安)이 당면한 국정(國政)에 대해 각 한 가지 일을 상서하였다.
06
嚴安上書曰:
서악은 다음과 같이 상서하였다.
臣聞天下之患在於土崩, 不在於瓦解, 古今一也.
신이 듣건대 천하의 우환은 토붕(土崩)에 있는 것이지 와해(瓦解)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何謂土崩. 秦之末世是也.
무엇을 토붕이라고 이르는 것이겠습니까? 진(秦)나라의 말세가 바로 그렇습니다.
陳涉無千乘之尊, 尺土之地, 身非王公大人名族之后, 無鄉曲之譽.
당시 진섭(陳涉)은 제후의 존귀한 신분도 아니었으며, 한 치의 땅도 없었으며, 신분도 왕공(王公), 대인(大人)이나 명망 있는 가문의 후예도 아니었으며, 시골 구석에서도 명성이 없었습니다.
非有孔墨曾子之賢, 陶朱猗頓之富也, 然起窮巷, 奮棘矜, 偏袒大呼而天下從風, 此其故何也.
또한 공자(孔子), 묵적(墨翟), 증삼(曾參)과 같은 현능함을 갖추지도 못했고, 도주공(陶朱公) 이나 의돈(猗頓)과 같이 부유하지 않았으나, 궁벽한 시골에서 일어나 창 자루를 휘두르면서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크게 소리치자 천하의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리듯이 일어나 그를 따랐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由民困而主不恤, 下怨而上不知(也), 俗已亂而政不修, 此三者陳涉之所以為資也.
그것은 백성이 곤궁한데도 군주가 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아랫사람들이 원망하는데도 윗사람이 이를 알지 못하며, 풍속이 이미 어지러워졌는데도 정치를 바르게 하지 못한 이 세 가지를 진섭이 빙자하였기 때문입니다.
是之謂土崩.
이를 이른바 토붕(土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故曰天下之患在於土崩.
그래서 천하의 우환은 토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何謂瓦解. 吳楚齊趙之兵是也.
그러면 무엇을 일러 와해(瓦解)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오(吳), 초(楚), 제(齊), 조(趙)나라 등 칠국의 난이 바로 그것입니다.
七國謀為大逆, 號皆稱萬乘之君, 帶甲數十萬, 威足以嚴其境內, 財足以勸其士民.
칠국이 모의해 대역을 도모하고 모두 천자를 칭하여 무장한 병사가 수십만 명이었고, 그 위세는 그들의 제후국의 백성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재물은 그 백성과 군사들을 격려하기에 넉넉했습니다.
然不能西攘尺寸之地而身為禽於中原者, 此其故何也.
그러나 서쪽으로 공격해 한 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자신의 몸은 중원으로 사로잡혀 갔으니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非權輕於匹夫而兵弱於陳涉也, 當是之時, 先帝之德澤未衰而安土樂俗之民眾, 故諸侯無境外之助.
그들의 권위가 평범한 사람보다 가볍고 병력이 진섭보다 약했기 때문은 아니며. 당시의 형세가 선제(文帝)의 은택이 아직 쇠하지 않았으며, 고향 땅에 편안히 살고 풍속을 즐기는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후들을 나라 밖에서 도와주는 세력이 없었습니다.
此之謂瓦解, 故曰天下之患不在瓦解.
이를 와해라고 하는 것이며, 고로 천하의 우환은 와해에 있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由是觀之, 天下誠有土崩之勢, 雖布衣窮處之士或首惡而危海內, 陳涉是也.
이런 경우를 통해서 볼 때 천하가 진실로 토붕의 형세에 놓이면 비록 지위나 벼슬도 없는 궁핍한 선비라고 하더라도 혹은 악인의 우두머리가 되어 천하를 위태롭게 할 수 있으니 진섭(陳涉)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況三晉之君或存乎.
하물며 삼진(三晉)의 군주와 같은 강자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天下雖未有大治也, 誠能無土崩之勢, 雖有彊國勁兵不得旋踵而身為禽矣.
천하가 비록 아직 잘 다스려지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토붕의 형세가 없다면, 비록 강대국의 강한 군대가 있을지라도 발뒤꿈치를 돌릴 틈도 없이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吳楚齊趙是也.
오, 초, 제, 조 등 칠국의 반란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況群臣百姓能為亂乎哉.
하물며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어떻게 난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此二體者, 安危之明要也, 賢主所留意而深察也.
이 두 가지의 정황은 국가의 안위에 명백한 요건이 되는 것으로 현명한 군주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여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07
閒者關東五穀不登, 年歲未復, 民多窮困, 重之以邊境之事.
요즈음 관동(關東)에는 오곡이 여물지 않아 수확이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무척 곤궁하게 되었고 변경의 전쟁까지 겹쳤습니다.
推數循理而觀之, 則民且有不安其處者矣.
이것을 도리에 따라 헤아려 본다면 이런 형국을 불안하게 여기는 백성이 생길 것입니다.
不安故易動. 易動者, 土崩之勢也.
불안하게 되면 동요하기 쉽습니다. 동요하기 쉬운 것은 토붕의 형세입니다.
故賢主獨觀萬化之原, 明於安危之機, 修之廟堂之上, 而銷未形之患.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만물 변화의 원인을 살펴서 안위의 기틀을 분명히 하고, 조정에서 이를 다스려 우환의 형체가 드러나기 전에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其要, 期使天下無土崩之勢而已矣.
그 요령은 천하에 토붕의 형세가 없도록 하는 것뿐입니다.
故雖有彊國勁兵, 陛下逐走獸, 射蜚鳥, 弘游燕之囿, 淫縱恣之觀, 極馳騁之樂, 自若也.
그러므로 비록 강대국의 정예군대가 있더라도 폐하께서는 달리는 짐승을 쫓고 날아가는 새를 잡으며, 연회를 벌이는 장소를 넓혀서 과분하게 마음껏 즐기시며 마구 치달리는 사냥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태연자약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金石絲竹之聲不絕於耳, 帷帳之私俳優侏儒之笑不乏於前, 而天下無宿憂.
각종 악기소리가 폐하의 귀에 끊이지 않고, 장막 안에서 미녀들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고 배우들과 난쟁이들의 웃음소리가 폐하의 면전에 끊이지 않더라도, 천하에는 오랫동안 근심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名何必湯武, 俗何必成康.
어찌 명성이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과 반드시 같고, 풍속이 성왕(成王)이나 강왕(康王) 때와 반드시 같기를 바라겠습니까!
雖然, 臣竊以為陛下天然之聖, 寬仁之資, 而誠以天下為務, 則湯武之名不難侔, 而成康之俗可復興也.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신이 사적으로 생각하건데 폐하께서는 타고난 성군(聖君)으로서 관대하고 인자한 자질을 지니고 계시니 진실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힘쓰신다면,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과 같은 명성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고, 성왕(成王)이나 강왕(康王) 때의 풍속을 부흥시킬 수 있으실 것입니다.
此二體者立, 然後處尊安之實, 揚名廣譽於當世, 親天下而服四夷, 餘恩遺德為數世隆, 南面負扆攝袂而揖王公, 此陛下之所服也.
이 토붕과 와해의 형세를 피하는 이 두 가지 근본을 확립한 뒤라야 존귀하고 편안한 현실 속에서 당세에 명예를 드날리어 천하 사람들을 아끼고 사방 오랑캐를 감복시키며, 남은 은덕이 여러 대에 걸쳐 융성하게 될 것이며, 폐하께서는 천자의 자리에서 병풍을 등지고 앉아 소매를 말아 올리고 왕공과 대인들로 하여금 읍하게 만드는 것이 폐하께서 하실 일입니다.
臣聞圖王不成, 其敝足以安.
신이 들으니 왕도(王道)를 행하다가 그것을 이루지 못하여 나쁜 결과가 나와도 천하를 안정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합니다.
安則陛下何求而不得, 何為而不成, 何征而不服乎哉.
천하가 편안해지면 폐하께서 무엇을 구한들 못 얻을 것이 없고, 무엇을 행한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디를 정벌한들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주보언전(主父偃傳) 3
이 장에서는 앞 장의 서악(徐樂)의 상서에 이어 엄안(嚴安)이 무제(武帝)에게 상서하여 흉노에 대한 계책을 진술한 것이다.
무제는 서악과 엄안 및 주보언(主父偃)을 칭찬하며 모두 낭중에 임명하였으며, 주보언에 대하여는 1년에 네 차례 승진시켰다.
08
嚴安上書曰:
엄안은 다음과 같은 상서하였다.
臣聞周有天下, 其治三百餘歲, 成康其隆也, 刑錯四十餘年而不用.
신이 들으니 주나라가 3백여 년 동안 천하를 다스릴 때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시절이 가장 융성했으며 형법의 적용을 내버려두고 40여 년 동안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及其衰也, 亦三百餘歲, 故五伯更起.
3백년 뒤에 주나라가 쇠퇴해지자 오패(五覇)가 번갈아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五伯者, 常佐天子興利除害, 誅暴禁邪, 匡正海內, 以尊天子.
오패는 늘 천자를 보좌해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제거했으며, 사나운 자를 주벌하고 간사한 것을 금해 천하를 바로잡아 천자를 존귀하게 하였습니다.
五伯既沒, 賢聖莫續, 天子孤弱, 號令不行.
오패가 죽고 난 후 현인과 성현은 이어서 나오지 않으니 천자는 고립되고 쇠약해졌으며, 천자의 명령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諸侯恣行, 彊陵弱, 眾暴寡, 田常篡齊, 六卿分晉, 并為戰國, 此民之始苦也.
제후들은 제멋대로 행동하여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다수는 소수에게 포악하게 굴었으며, 전상(田常)이 제나라의 정권을 찬탈하고 육경(六卿)이 진(晉)나라를 나누어가지자 함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이루었고 백성들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於是彊國務攻, 弱國備守, 合從連橫, 馳車擊轂, 介胄生蟣蝨, 民無所告愬.
강대국은 전쟁에 힘쓰고, 약소국은 방비에 여념이 없게 되어서 나라 간에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이 출현하여 사자들의 수레가 분주히 오가게 되었으며 군사들의 갑옷과 투구에는 서캐와 이가 가득하건만, 백성들은 그 고통을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09
及至秦王, 蠶食天下, 并吞戰國, 稱號曰皇帝, 主海內之政, 壞諸侯之城, 銷其兵, 鑄以為鐘虡, 示不復用.
진나라 왕 영정(嬴政)시대에 이르러 천하를 잠식하여 전국(戰國)을 병탄하고 황제라고 칭하였으며, 천하의 정치를 장악하고 제후들의 성을 파괴하였고, 제후들의 무기를 녹여서 종과 종틀을 주조해 다시는 무기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元元黎民得免於戰國, 逢明天子, 人人自以為更生.
선량한 백성들은 이제는 전쟁에서 벗어나고 현명한 천자를 얻었다고 하며 저마다 다시 새로운 세상에 태어났다고 여겼습니다.
向使秦緩其刑罰, 薄賦斂, 省繇役, 貴仁義, 賤權利, 上篤厚, 下智巧, 變風易俗, 化於海內, 則世世必安矣.
만일 진나라가 그때 형벌을 완화하고 세금을 줄이고 부역을 덜어주며, 인의를 숭상하고 권세와 이익을 천시하고, 독실하고 돈후한 것을 숭상하고 교활한 지혜를 경시하여, 풍속을 바꿔서 천하를 교화시켰더라면 대대로 편안했을 것입니다.
秦不行是風而修其故俗, 為智巧權利者進, 篤厚忠信者退.
그런데 진나라는 이러한 풍속을 교화하지 않고 옛 관습대로 교활한 지혜와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등용하고 미덥고 충성스러운 자는 물리쳤습니다.
法嚴政峻, 諂諛者眾, 日聞其美, 意廣心軼.
법은 엄중하고 정치는 준엄하였으며 아첨하는 자가 많아서 황제는 날마다 칭송하는 말만 들으니, 야심은 커지고 마음은 교만해졌습니다.
欲肆威海外, 乃使蒙恬將兵以北攻胡, 辟地進境, 戍於北河, 蜚芻芻粟以隨其后.
위세를 나라 밖까지 떨치고 싶어져 몽염(蒙恬)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흉노를 공격하여 영토를 개척하여 국경을 넓히고 북하의 땅을 지키며, 백성들에게 빠르게 식량과 말먹이를 운반하며 그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又使尉(佗)屠睢將樓船之士南攻百越, 使監祿鑿渠運糧, 深入越, 越人遁逃.
또 위관(尉官)인 도수(屠睢)에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백월(百越)을 치게 하고, 감어사(監御史) 록(祿)에게 운하를 파서 군량을 운반하여 월(越)나라 깊숙이 들어가게 하니, 월나라 군사들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曠日持久, 糧食絕乏, 越人擊之, 秦兵大敗.
진나라 군사는 헛되이 날을 보내며 오래 끌다가 군량이 떨어지자 월나라 군사가 공격하니 진나라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秦乃使尉佗將卒以戍越.
진나라는 이에 위타(尉佗)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월나라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當是時, 秦禍北構於胡, 南掛於越, 宿兵無用之地, 進而不得退.
당시 진나라는 북쪽의 흉노와 원한이 맺혀있었고 남쪽으로는 월나라와 원수가 져서 군대를 쓸모없는 땅에 주둔시켜 놓은 채 진퇴양난에 빠져들었습니다.
行十餘年, 丁男被甲, 丁女轉輸, 苦不聊生, 自經於道樹, 死者相望.
10여 년이 지나도록 장정들은 갑옷을 입고 젊은 부녀자들은 식량을 운반하여 그 고달픔에 삶을 마다하고 길가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였으며 죽은 사람들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及秦皇帝崩, 天下大叛.
진나라의 황제가 죽자 천하에는 대란이 일어났습니다.
陳勝吳廣舉陳, 武臣張耳舉趙, 項梁舉吳, 田儋舉齊, 景駒舉郢, 周市舉魏, 韓廣舉燕, 窮山通谷豪士并起, 不可勝載也.
진승과 오광은 진(陳) 땅을 점거하고, 무신(武臣)과 장이(張耳)는 조(趙) 땅을 점거했으며, 항량(項梁)은 오(吳) 땅을 점거하고, 전담(田儋)은 제(齊) 땅을 점거했으며, 경구(景駒)는 영(郢) 땅을 점거하고, 주불(周市)은 위(魏) 땅을 점거하고, 한광(韓廣)은 연(燕) 땅을 점거하였으며, 심산유곡에서까지도 호걸들이 함께 봉기하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然皆非公侯之后, 非長官之吏也.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후(公侯)의 자손이나 장관의 아전도 아니었습니다.
無尺寸之勢, 起閭巷, 杖棘矜, 應時而皆動, 不謀而俱起, 不約而同會, 壤長地進, 至于霸王, 時教使然也.
그들은 조그마한 세력도 없이 거리에서 봉기해 창을 잡고 시세에 따라 모두 움직였으며, 서로 모의하지 않았어도 함께 봉기했으며,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모였으며, 점거한 지역이 넓어져서 패왕이 되기에 이르니, 그것은 모두 시세의 가르침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秦貴為天子, 富有天下, 滅世絕祀者, 窮兵之禍也.
진나라가 천자의 귀한 신분으로 천하를 소유할 만큼 부유했으면서도, 결국 대를 잇지 못하고 제사가 끊기게 된 것은 무력을 남용하여 전쟁을 일삼은 화(禍)입니다.
故周失之弱, 秦失之彊, 不變之患也.
그러므로 주나라는 약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고, 진나라는 강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던 것이며,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르지 못한 데서 기인한 환난이었습니다.
10
今欲招南夷, 朝夜郎, 降羌僰, 略濊州, 建城邑, 深入匈奴, 燔其蘢城, 議者美之.
지금 폐하께서는 남이(南夷)를 부르고, 야랑(夜郎)을 입조시키며, 강(羌)과 북(僰)을 투항시키고, 예주(濊州)를 공략해 성읍(城邑)을 건설하며 흉노 땅으로 깊숙이 쳐들어가 그들의 용성(蘢城)을 불태우려고 하며 이런 일을 논의하는 자들은 그런 전략이 좋다고 합니다.
此人臣之利也, 非天下之長策也.
이는 남의 신하된 자의 이익이 될 수 있으나 천하를 위한 장구한 계책은 아닙니다.
今中國無狗吠之驚, 而外累於遠方之備, 靡敝國家, 非所以子民也.
지금 중국은 개 짖는 소리에 놀랄 일이 없을 정도로 태평스러운데, 나라 밖으로 먼 곳의 수비에 얽매어 국가를 피폐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군주의 도리가 아닙니다.
行無窮之欲, 甘心快意, 結怨於匈奴, 非所以安邊也.
끝없는 욕망을 좇아 만족을 추구함으로써 흉노와 원한을 맺는 것은 변경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禍結而不解, 兵休而復起, 近者愁苦, 遠者驚駭, 非所以持久也.
화가 맺히면 풀어지지 않으므로 전쟁은 그쳤다가 다시 벌어지게 되며, 가까이 있는 자는 근심 걱정으로 괴로워하고, 멀리 있는 자는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어 천하를 오래도록 지탱하기 어려운 원인이 됩니다.
今天下鍛甲砥劍, 橋箭累弦, 轉輸運糧, 未見休時, 此天下之所共憂也.
지금 천하는 갑옷을 수리하고 칼을 갈며, 화살을 바로잡고 시위를 점검하며 군량을 수송하느라고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천하 사람들이 함께 근심하는 바입니다.
夫兵久而變起, 事煩而慮生.
무릇 전쟁이 오래되면 변란이 일어나고, 일이 번잡해지면 걱정이 생기는 법입니다.
今外郡之地或幾千里, 列城數十, 形束壤制, 旁脅諸侯, 非公室之利也.
지금 나라 밖으로 개척한 땅은 천리나 되고 이곳에 줄지은 성들이 수십 개이며, 산천의 형세와 토지에 근거해 그곳의 백성들을 통제하고 인근 제후들을 위협하니, 이 또한 조정의 이익은 아닙니다.
上觀齊晉之所以亡者, 公室卑削, 六卿大盛也.
예전에 제나라와 진(晉)나라가 무너진 까닭을 살펴보면, 조정의 지위가 쇠약해지고 육경의 세력이 성대해졌기 때문입니다.
下觀秦之所以滅者, 嚴法刻深, 欲大無窮也.
또 근래에 진(秦)나라가 멸망한 까닭을 살펴보면, 형벌이 지나치게 혹독하고 욕심이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今郡守之權, 非特六卿之重也.
지금 군수(郡守)의 권력의 중함은 육경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地幾千里, 非特閭巷之資也.
군수들의 땅은 천리나 되어 진승 등의 작은 골목에 비할 수 없이 광활합니다.
甲兵器械, 非特棘矜之用也.
갑옷, 병기 그리고 각종 장비는 진승 등이 사용했던 창 자루 정도가 아닙니다.
以遭萬世之變, 則不可稱諱也.
이런 형세 하에 천하의 변란을 만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는 명백합니다.
11
書奏天子, 天子召見三人, 謂曰: 公等皆安在. 何相見之晚也.
이 상서들이 천자에게 바쳐지자 천자는 세 사람들을 불러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들 어디에 있었는가? 어째서 이제야 만났단 말인가!'
於是上乃拜主父偃, 徐樂, 嚴安為郎中.
이에 황제는 주보언, 서악, 엄안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했다.
偃數見, 上疏言事, 詔拜偃為謁者, 遷為中大夫.
주보언이 여러 차례 황제를 알현하고 국사에 대해 상소를 하자 그를 알자(謁者)로 임용했다가 다시 중대부(中大夫)로 옮기도록 했다.
一歲中四遷偃.
주보언은 일 년에 네 차례나 관직이 바뀌었다.
주보언전(主父偃傳) 4
이 장에서는 주보언이 무제에게 유세한 내용으로 제후국의 통제와 흉노에 대한 정책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주보언은 제후국인 연나라와 제나라의 왕의 비리를 들추어내어 연나라 왕은 사형에 처해지고 제나라 왕이 자살한 사건으로 인하여 일족이 멸족되었다.
12
偃說上曰: 古者諸侯不過百里, 彊弱之形易制.
주보언이 황제에게 권유하여 말했다. '옛날의 제후들은 봉지가 1백리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강약의 형세로 통제하기 수월했습니다.
今諸侯或連城數十, 地方千里, 緩則驕奢易為淫亂, 急則阻其彊而合從以逆京師.
지금의 제후들은 수십 개의 성이 이어지기도 하고 봉지가 사방 1천리나 되어, 평상시에는 교만하고 사치하여 음란해지기 쉬우며, 위급해지면 자신들의 강대함에 기대어 서로 합종하여 조정에 반기를 들려고 합니다.
今以法割削之, 則逆節萌起, 前日晁錯是也.
지금 법으로 그들의 영지를 삭감한다면 반역의 마음이 싹트게 될 것이며, 지난날 조조(晁錯)가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今諸侯子弟或十數, 而適嗣代立, 餘雖骨肉, 無尺寸地封, 則仁孝之道不宣.
지금 제후의 자제들은 수십 명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적장자(適長子)만이 대대로 물려받으며 나머지 아들들은 골육임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땅도 주어지지 않으니 인과 효의 도가 널리 펼쳐지지 못합니다.
願陛下令諸侯得推恩分子弟, 以地侯之.
원컨대 폐하께서 제후들에게 명하여 은혜를 베풀어 자제들에게 봉지를 나누어주어 그 봉지의 제후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彼人人喜得所願, 上以德施, 實分其國, 不削而稍弱矣.
자제들은 각자 원하던 것을 얻게 되어 기뻐할 것이며 폐하께서는 은덕을 베푸시는 것이 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나라를 나누게 되는 것이니,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하지 않아도 점차 약해질 것입니다.'
於是上從其計.
이에 황제는 그의 계책을 따랐다.
又說上曰: 茂陵初立, 天下豪桀并兼之家, 亂眾之民, 皆可徙茂陵, 內實京師, 外銷姦猾, 此所謂不誅而害除.
주보언은 다시 황제를 설득했다. '무릉(茂陵)에 새롭게 현(縣)이 설치되었으니 그곳에 천하의 호걸, 부호와 난동을 일으키는 백성들을 모두 무릉으로 이주시키시면 안으로 조정을 충실하게 만들고 밖으로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를 없앨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죽이지 않고도 해를 제거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上又從其計.
황제는 또 그의 계책을 따랐다.
13
尊立衛皇后, 及發燕王定國陰事, 蓋偃有功焉.
위자부를 높여 황후(皇后)로 세우고 연왕(燕王) 유정국(劉定國)의 음탕한 행위를 적발하는 데에는 대체로 주보언의 공이 있었다.
大臣皆畏其口, 賂遺累千金.
대신들 모두 주보언의 입을 두려워해 바친 뇌물이 수천 금이나 되었다.
人或說偃曰: 太橫矣.
어떤 사람이 주보언을 설득하여 말했다. '전횡이 너무 지나칩니다.'
主父曰: 臣結發游學四十餘年, 身不得遂.
이에 주보언이 대답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이나 유세하며 천하를 떠돌아 다녔지만 뜻한 바를 얻지 못했습니다.
親不以為子, 昆弟不收, 賓客棄我, 我阸日久矣.
부모는 저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형제는 거두어주지 않았으며, 빈객들은 나를 버려서 나는 오랜 세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且丈夫生不五鼎食, 死即五鼎烹耳. ��️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생전에 오정식(五鼎食)을 먹을 수 없다면 죽을 때는 오정(五鼎)에 삶아져 죽을 뿐입니다.
吾日暮途遠, 故倒行暴施之.
이제 내 인생의 날은 저물어 가고 갈 길은 멀기 때문에 순서를 뒤바꾸어 서두른 것입니다.'
14
偃盛言朔方地肥饒, 外阻河, 蒙恬城之以逐匈奴, 內省轉輸戍漕, 廣中國, 滅胡之本也.
주보언이 황제에게 크게 칭찬하여 말하기를, '삭방(朔方)은 땅이 비옥하고 풍요로우며, 밖으로 황하가 가로막고 있어 몽염이 거기에 성을 쌓아 흉노를 쫓아버리면 내적으로 육로로 운송하는 물자를 줄이고 수로로 운송하는 물자를 지킬 수 있어 중국의 땅을 넓힐 수 있으니 이것이 흉노를 없애는 근본이라'고 하였다.
上覽其說, 下公卿議, 皆言不便.
천자는 그 건의를 보고 공경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했는데 모두들 불편하다고 말했다.
公孫弘曰: 秦時常發三十萬眾筑北河, 終不可就, 已而棄之.
공손홍이 말했다. '일찍이 진(秦)나라 때에 30만 명의 군사를 보내 북하(北河)에 성을 쌓도록 했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이미 버려진 땅이 되었습니다.'
主父偃盛言其便, 上竟用主父計, 立朔方郡.
그러나 주보언이 다시 완강하게 그 편리한 점을 역설하니, 황제가 주보언의 계책을 받아들여 그곳에 삭방군을 두었다.
15
元朔二年, 主父言齊王內淫佚行僻, 上拜主父為齊相.
원삭 2년(기원전 127년), 주보언이 제나라 왕 유차경(劉次景)이 궁 안에서 마음껏 음란하게 지내며 행실이 바르지 않다고 아뢰자 황제는 주보언을 제나라 재상으로 임명했다.
至齊, 遍召昆弟賓客, 散五百金予之, 數之曰: 始吾貧時, 昆弟不我衣食, 賓客不我內門; 今吾相齊, 諸君迎我或千里. 吾與諸君絕矣, 毋復入偃之門.
주보언은 제나라에 도착하자 형제와 빈객들을 두루 불러놓고 5백금을 풀어 나누어 주면서, 잘못을 열거하며 꾸짖었다. '처음에 내가 가난할 때 형제들은 나에게 의식도 주지 않았고, 빈객들은 나를 문으로 들이지도 않았소, 이제 내가 제나라의 재상이 되니 여러분들 중에 나를 맞으러 천리나 나온 자도 있었소, 나는 여러분들과는 절교할 것이니 다시는 내 집에 출입하지 마시오!'
乃使人以王與姊姦事動王, 王以為終不得脫罪, 恐效燕王論死, 乃自殺.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 제나라 왕이 그의 맏누이와 간통한 일을 가지고 제나라 왕을 위협했으며, 제나라 왕은 죄를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예전의 연왕(燕王) 유정국(劉定國)처럼 사형에 처해질까 두려워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有司以聞.
담당 관리가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했다.
16
主父始為布衣時, 嘗游燕趙, 及其貴, 發燕事.
주보언이 지난날 평민일 때 연나라와 조나라 사이를 다니며 유세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귀한 신분이 되자 연나라의 비리를 들추어냈다.
趙王恐其為國患, 欲上書言其陰事, 為偃居中, 不敢發.
조왕(趙王) 유팽조(劉彭祖)는 주보언이 자신의 나라에 근심거리가 될 것을 걱정하여, 황제에게 글을 올려 주보언의 불미스런 일을 폭로하고자 했으나, 주보언이 황제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及為齊相, 出關, 即使人上書, 告言主父偃受諸侯金, 以故諸侯子弟多以得封者.
그런데 주보언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함곡관 밖으로 나가게 되자, 즉시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상서하여, '주보언은 제후들에게 뇌물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제후의 자제로 봉후(封侯)된 자들이 많다'고 고하였다.
及齊王自殺, 上聞大怒, 以為主父劫其王令自殺, 乃徵下吏治.
이때 황제는 제나라 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했고 주언보가 제나라 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여겨 형리에게 넘겨 심문토록 하였다.
主父服受諸侯金, 實不劫王令自殺.
주보언은 제후들의 뇌물을 받은 것은 자백했으나, 제나라 왕을 위협해 자살하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上欲勿誅, 是時公孫弘為御史大夫, 乃言曰: 齊王自殺無後, 國除為郡, 入漢, 主父偃本首惡, 陛下不誅主父偃, 無以謝天下.
천자는 주보언을 죽이지 싶지 않았으나 당시 어사대부였던 공손홍이 이에 대해 말했다. '제나라 왕은 자살하고 후손이 없어 봉국은 폐지되고 군(郡)으로 한나라에 귀속되었으며, 주보언이 이 일에 수괴(首魁)이니 폐하께서 주보언을 죽이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에게 사과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乃遂族主父偃.
그리하여 천자는 결국 주보언과 그 일족을 멸하였다.
17
主父方貴幸時, 賓客以千數, 及其族死, 無一人收者, 唯獨洨孔車收葬之.
주보언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었을 때는 빈객들이 수천 명이나 되었으나 그가 멸족 당하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는 자가 없었다. 오직 효현(洨縣) 사람인 공거(孔車)만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었다.
天子后聞之, 以為孔車長者也.
천자는 뒤에 그 말을 전해 듣고 공거를 장자(長者)로 여겼다.
주보언전(主父偃傳) 5
이 장에서는 공손홍과 주보언에 대한 태사공 사마천의 논평이 기록되어 있으며, 태사공의 논평 이후에는 한 평제(漢 平帝)의 조모인 왕정군(王政君)이 공손홍(公孫弘)을 기리는 조서와 반고의 논평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사마천의 원문이 아닌 후세 사람이 추가한 것이다.
18
太史公曰: 公孫弘行義雖修, 然亦遇時.
태사공은 말한다. '공손홍(公孫弘)은 행의(行義)가 뛰어났지만 시기 또한 잘 만났다.
漢興八十餘年矣, 上方鄉文學, 招俊乂, 以廣儒墨, 弘為舉首.
한나라가 일어난 지 80여 년에 황제께서 때마침 문학을 숭상해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아 유학(儒學)과 묵학(墨學)을 발전시킬 무렵 공손홍이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主父偃當路, 諸公皆譽之, 及名敗身誅, 士爭言其惡. 悲夫.
주보언(主父偃)이 요직에 있을 때 조정의 고관들은 모두들 그를 칭찬했으나, 그의 명성이 실추되어 사형을 당하자 선비들은 다투어 그의 악행을 비난했다. 슬픈 일이로다!'
19
太皇太后詔大司徒大司空: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대사도(大司徒), 대사공(大司公)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蓋聞治國之道, 富民為始; 富民之要, 在於節儉.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데에서 시작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관건은 절약하고 검소함에 달려있다고 했다.
孝經曰: 安上治民, 莫善於禮.
효경(孝經)에서 이르기를, '윗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예(禮)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고 하였다.
禮, 與奢也寧儉.
또 공자는, '예는 사치하기 보다는 차라리 검소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昔者管仲相齊桓, 霸諸侯, 有九合一匡之功, 而仲尼謂之不知禮, 以其奢泰侈擬於君故也.
옛날 관중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제 환공을 제후의 패자가 되게 했으며,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규합해 천하를 바로잡은 공이 있었으나, 공자(孔子)께서는 관중은 예를 모른다고 하셨으며, 그것은 관중의 호사스러움이 군주에 비길 정도로 지나쳤기 때문이다.
夏禹卑宮室, 惡衣服, 后聖不循.
하(夏)나라 우(禹)임금은 궁전의 누추한 방에 살면서 남루한 의복을 입고도 후세의 성인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由此言之, 治之盛也, 德優矣, 莫高於儉.
이로 미루어 볼 때 훌륭하게 다스렸다는 것은 덕망 있는 정사를 펼쳤다는 것이며, 덕행에는 검소한 것 보다 높은 것이 없다.
儉化俗民, 則尊卑之序得, 而骨肉之恩親, 爭訟之原息.
검소함으로 풍속과 백성을 교화시키면 신분의 질서가 제자리를 찾게 되고 골육 간에는 서로 아끼게 되어 분쟁이나 소송의 근원이 사라지게 된다.
斯乃家給人足, 刑錯之本也歟.
이것이 바로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어 형법을 시행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근본이 되지 않겠는가?
可不務哉.
어찌하여 이것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夫三公者, 百寮之率, 萬民之表也.
무릇 삼공(三公)은 모든 관료들의 통솔자요, 만민의 본보기이다.
未有樹直表而得曲影者也.
이제껏 곧은 기둥을 세워놓고 굽은 그림자를 얻은 자는 없었다.
孔子不云乎, 子率而正, 孰敢不正.
공자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대가 바름으로서 솔선수범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舉善而教不能則勸.
또 '현능한 사람을 등용하여 그렇지 못한 자를 교화한다면 서로 타일러 힘쓰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維漢興以來, 股肱宰臣身行儉約, 輕財重義, 較然著明, 未有若故丞相平津侯公孫弘者也.
한나라가 건국한 이래 황제의 수족 같은 승상들 중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하면서 재물을 경시하고 의를 소중히 여겨 세상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람으로는 지난날 승상 평진후(平津侯) 공손홍(公孫弘)만한 사람은 없었다.
位在丞相而為布被, 脫粟之飯, 不過一肉.
그는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베 이불을 덮고, 거친 밥에 고기반찬은 한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다.
故人所善賓客皆分奉祿以給之, 無有所餘.
평진후는 옛 친구들이나 사이좋은 빈객들 모두에게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주고 자신은 남은 재물이 없었다.
誠內自克約而外從制.
그는 확실히 내심으로 스스로 검약할 줄 알았고, 밖으로는 제도를 따랐다.
汲黯詰之, 乃聞于朝, 此可謂減於制度而可施行者也.
급암(汲黯)이 그를 힐책함으로써 그의 사정이 마침내 조정에 알려졌으며, 이는 그의 행위가 정해진 제도의 본뜻을 손상시킨 면도 있지만 시행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德優則行, 否則止, 與內奢泰而外為詭服以釣虛譽者殊科.
덕행은 넉넉하면 밖으로 행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그치는 것이며 그것은 속으로는 지나치게 사치하면서도 겉으로는 거짓된 행위를 하고 헛된 명예를 낚시질하는 것과는 다르다.
以病乞骸骨, 孝武皇帝即制曰: 賞有功, 褒有德, 善善惡惡, 君宜知之. 其省思慮, 存精神, 輔以醫藥.
그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하자, 효무제(孝武帝)께서 즉시 말리며 말씀하시기를, '공이 있는 자를 상 주고 덕이 있는 자를 표창하며, 군자는 선량한 사람을 좋아하고 추악한 사람을 미워함은 그대가 잘 알 것이오. 근심을 덜고 정신을 모아 의약으로 몸을 잘 보전토록 하라'고 하셨다.
賜告治病, 牛酒雜帛.
그러고는 휴가를 주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쇠고기와 술, 그리고 여러 옷감을 하사하셨다.
居數月, 有瘳, 視事.
몇 달이 지나자 그는 병이 치유되어 다시 승상의 업무를 볼 수 있었다.
至元狩二年, 竟以善終于相位.
원수(元狩) 2년(기원전 121년)에 이르러 마침내 승상으로 재직 중에 천수를 다하였다.
夫知臣莫若君, 此其效也.
무릇 군주만큼 자신의 신하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무제와 공손홍의 사이가 바로 그 증거이다.
弘子度嗣爵, 后為山陽太守, 坐法失侯.
공손홍의 작위는 아들 공손도가 물려받았고, 후에 산양의 태수가 되었으나 법을 위반하여 제후의 작위를 잃고 말았다.
夫表德章義, 所以率俗厲化, 聖王之制, 不易之道也.
무릇 덕행을 드러내고 의로움을 표창하는 것은 풍속을 이끌어 격려하고 교화하기 위한 이유로 성왕(聖王)의 법도로서 바뀌지 않는 도리이다.
其賜弘後子孫之次當為後者爵關內侯, 食邑三百戶, 徵詣公車, 上名尚書, 朕親臨拜焉.
공손홍의 후손으로 서열상으로 그의 뒤를 이어야 할 자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식읍 3백호를 하사하며 나라의 수레로 조종으로 불러들여 상서(尙書)에 이름을 올리면 내가 친히 조정으로 나아가 작위를 수여하리라.'
20
班固稱曰: 公孫弘, 卜式, 兒寬皆以鴻漸之翼困於燕雀, 遠跡羊豕之閒, 非遇其時, 焉能致此位乎.
반고(班固)는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공손홍(公孫弘)과 복식(卜式), 예관(兒寬)은 모두 큰 기러기의 날개를 지니고서도 제비와 참새 같은 무리에게 시달림을 당하여 멀리 가서 양과 돼지를 키우며 살았으니 그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그러한 지위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是時漢興六十餘載, 海內乂安, 府庫充實, 而四夷未賓, 制度多闕, 上方欲用文武, 求之如弗及.
당시는 한나라를 건국한 지 60여 년으로 온 천하는 안정되었고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으나 사방의 오랑캐는 아직 복종하지 않았으며, 제도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으니 황제께서 때마침 문(文), 무(武)를 지닌 인재를 등용하려 하였으며 인재들을 얻지 못할까봐 애태우며 구하였다.
始以蒲輪迎枚生, 見主父而嘆息.
처음에는 부들로 바퀴를 감싼 수레를 보내 매승(枚乘)을 맞이했고 주보언을 만나보고는 늦게 만난 것을 탄식했다.
群臣慕向, 異人并出.
이에 많은 신하들이 흠모하여 따르고 비범한 자들이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
卜式試於芻牧,
복식은 양을 치다가 등용되었고,
弘羊擢於賈豎,
상홍양(桑弘羊)은 장사꾼으로 있을 때 발탁되었으며,
衛青奮於奴仆,
위청(衛靑)은 종의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고,
日磾出於降虜, 斯亦曩時版筑飯牛之朋矣.
김일제(金日磾)는 투항한 흉노 속에서 나왔으니 이 또한 옛날에 판으로 담을 쌓던 부열(傅說)이나, 소에게 꼴을 먹이던 영척(寗戚)과 같은 인재를 등용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漢之得人, 於茲為盛.
한나라가 인재를 얻음이 이때에 이르러 가장 성대했다.
儒雅則公孫弘, 董仲舒, 兒寬,
학문이 깊고 의젓한 인물로는 공손홍(公孫弘), 동중서(董仲舒), 예관(兒寬)이 있었고,
篤行則石建, 石慶,
독실한 행실로는 석건(石建), 석경(石慶)이 있었으며,
質直則汲黯, 卜式,
질박하고 정직한 인물로는 급암(汲黯), 복식(卜式)이 있었으며,
推賢則韓安國, 鄭當時,
현인을 잘 천거한 인물로는 한안국(韓安國), 정당시(鄭當時)가 있었으며,
定令則趙禹, 張湯,
법령을 제정하는 데에는 조우(趙禹), 장탕(張湯)이 있었으며,
文章則司馬遷, 相如,
문장에 특출한 인물로는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있었으며,
滑稽則東方朔, 枚皋,
골계(滑稽)에 뛰어난 인물로는 동방삭(東方朔), 매고(枚皐)가 있었으며,
應對則嚴助, 朱買臣,
응대(應對)에는 엄조(嚴助), 주매신(朱買臣)이 있었고,
歷數則唐都, 落下閎,
역법과 천문에는 당도(唐都), 낙하굉(落下閎)이 있었으며,
協律則李延年,
음악과 음률에는 이연년(李延年)이 있었고,
運籌則桑弘羊,
기획에는 상홍양(桑弘羊)이 있었으며,
奉使則張騫, 蘇武,
외국에 간 사신으로는 장건(張騫), 소무(蘇武)가 있었고,
將帥則衛青, 霍去病,
장수로는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이 있었으며,
受遺則霍光, 金日磾.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천자를 보필하는 데에는 곽광(霍光), 김일제(金日磾)가 있었다.
其餘不可勝紀.
그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是以興造功業, 制度遺文, 後世莫及.
이들로 인하여 공업(功業)이 세워지고 여러 가지 제도와 문물을 남았으니 후세에는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했다.
孝宣承統, 纂修洪業, 亦講論六藝,
선제(宣帝)께서는 대통을 계승하여 대업을 새로이 하고 육예(六藝)를 강론하고,
招選茂異, 而蕭望之, 梁丘賀, 夏侯勝, 韋玄成, 嚴彭祖, 尹更始以儒術進,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불러 모아 소망지(蕭望之), 양구하(梁丘賀), 하후승(夏侯勝), 위현성(韋玄成), 엄팽조(嚴彭祖), 윤갱시(尹更始) 등은 유가의 학설에 정통하여 등용되었고,
劉向, 王褒以文章顯.
유향(劉向), 왕포(王褒)는 문장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將相則張安世, 趙充國, 魏相, 邴吉, 于定國, 杜延年,
장상(將相)으로는 장안세(張安世),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邴吉), 우정국(于定國), 두연년(杜延年)이 있었고,
治民則黃霸, 王成, 龔遂, 鄭弘, 邵信臣, 韓延壽, 尹翁歸, 趙廣漢之屬.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황패(黃霸), 왕성(王成), 공수(龔遂), 정홍(鄭弘), 소신신(邵信臣), 한연수(韓延壽), 윤옹귀(尹翁歸), 조광한(趙廣漢) 등이 있었다.
皆有功跡見述於後.
그들이 남긴 공적이 모두 후세에 칭송되었다.
累其名臣, 亦其次也.
명신(名臣)이 많기로는 이 시대가 역시 무제(武帝) 때의 다음이 된다.'
▶️ 鼎(솥 정)은 ❶상형문자로 鼎(정)은 발이 셋, 귀가 둘 달린 쇠솥을 본 뜬 모양이다. 정괘(鼎卦). ❷상형문자로 鼎자는 '솥'이나 '점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鼎자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솥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 솥은 음식을 익혀 먹던 조리 도구가 아닌 신에게 바칠 음식을 담았던 '솥'이다. 鼎자에 '점괘'라는 뜻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鼎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주로 '제사'나 '점괘', '신(神)', '솥'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鼎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참고로 鼎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한 예를 찾기 어려운 것은 貝(조개 패)자로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鼎(정)은 ①솥(밥을 짓거나 국 따위를 끓이는 그릇) ②점괘(占卦: 점을 쳐서 나오는 괘) ③괘(卦)의 이름 ④삼공(三公)의 자리 ⑤말뚝 ⑥의자(椅子) ⑦바야흐로 ⑧현귀(顯貴)하다(지위가 높고 귀하다) ⑨대치(對峙)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세 사람이 솥발처럼 벌려 마주 앉아서 하는 이야기를 정담(鼎談), 낡을 것을 새로이 고침을 정신(鼎新), 세 사람이 솥발과 같이 서로 벌여 섬으로 세 세력이 서로 대립함을 정립(鼎立), 발이 있는 솥과 발이 없는 솥을 정확(鼎鑊), 임금이나 나라의 운명을 정운(鼎運), 임금의 자리 또는 국운을 정조(鼎祚), 솥 안에 든 물고기를 정어(鼎魚), 솥과 자리라는 뜻으로 먹고 자고 하는 일상적인 생활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정인(鼎茵), 도읍으로 삼을 자리로 정함을 정정(鼎定), 세 사람이 자리를 같이 함을 정석(鼎席), 세 사람이 솥발 모양으로 마주 벌려 앉음을 정좌(鼎坐), 한창 나이라서 매우 혈기가 왕성함을 정성(鼎盛), 돌로 만든 솥을 석정(石鼎), 종이나 솥 따위 금석붙이와 그릇 붙이의 통틀어 일컬음을 종정(鐘鼎), 밥 짓는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을 화정(火鼎), 흙으로 빚어서 구워 만든 솥을 와정(瓦鼎), 밥을 짓는 솥을 식정(食鼎), 약을 달이는 기구를 약정(藥鼎), 한 올의 실로 솥이 엎어지지 않게 부지한다는 뜻으로 한 사람의 힘으로 막중한 천하의 정치를 담당함을 이르는 말을 일사부정(一絲扶鼎), 도끼에 찍히고 솥 안에 삶긴다는 뜻으로 극형을 당함을 이르는 말을 간부역정(干鈇逆鼎), 얼음이 뜨거운 솥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위태한 곳으로 뛰어 듦을 이르는 말을 빙고정확(氷顧鼎鑊), 종을 쳐서 식솔을 모아 솥을 걸어 놓고 먹는다는 뜻으로 부유한 생활을 이르는 말을 격종정식(擊鐘鼎食),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다리가 셋인 솥이라는 뜻으로 세 사람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차지함을 이르는 말을 삼분정족(三分鼎足), 소를 삶을 수 있는 큰 가마솥에 닭을 삶는다는 뜻으로 큰 재목을 알맞은 곳에 쓰지 못하고 소소한 일을 맡기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을 우정팽계(牛鼎烹鷄) 등에 쓰인다.
▶️ 食(밥 식/먹을 식, 먹이 사, 사람 이름 이)은 ❶회의문자로 饣(식)은 동자(同字)이다. 사람(人)이 살아가기 위해 좋아하며(良) 즐겨먹는 음식물로 밥을 뜻한다. 사람에게 먹이는 것, 먹을 것, 먹게 하다는 飼(사)였는데 그 뜻에도 食(식)을 썼다. 부수로서는 그 글자가 음식물 먹는데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食자는 '밥'이나 '음식', '먹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食자는 음식을 담는 식기를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食자를 보면 음식을 담는 식기와 뚜껑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食자는 이렇게 음식을 담는 그릇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밥'이나 '음식', '먹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食자가 부수로 쓰일 때도 대부분이 '음식'이나 먹는 동작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食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모양이 바뀌어 飠자나 饣자로 표기된다. 그래서 食(식)은 ①밥 ②음식 ③제사 ④벌이 ⑤생활 ⑥생계 ⑦먹다 ⑧먹이다 ⑨현혹케하다 ⑩지우다 그리고 ⓐ먹이, 밥(사) ⓑ기르다(사) ⓒ먹이다(사) ⓓ양육하다(사) ⓔ사람의 이름(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음식을 청해 먹은 값으로 치르는 돈을 식대(食代), 부엌에서 쓰는 칼을 식도(食刀), 여러 가지 음식을 먹는 일을 식사(食事), 한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 음식점이나 식당에서 먹을 음식과 바꾸는 표를 식권(食券), 밥을 먹기 전을 식전(食前), 식사를 마친 뒤를 식후(食後),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을 식기(食器), 음식만을 먹는 방 또는 간단한 음식을 파는 집을 식당(食堂), 뜻밖에 놀라 겁을 먹음을 식겁(食怯), 음식에 대하여 싫어하고 좋아하는 성미를 식성(食性), 음식(飮食)을 만드는 재료를 식료(食料), 남의 집에 고용되어 부엌일을 맡아 하는 여자를 식모(食母), 음식(飮食)을 먹고 싶어하는 욕심을 식욕(食慾), 한번 입 밖으로 냈던 말을 다시 입속에 넣는다는 뜻으로 앞서 한 말을 번복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을 식언(食言), 각종 식품을 파는 가게를 식품점(食品店), 음식을 먹은 뒤에 몸이 느른하고 정신이 피곤하며 자꾸 졸음이 오는 증세를 식곤증(食困症),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식이위천(食以爲天), 식량으로 옥을 먹고 계수나무로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물가가 비싸 생활이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식옥취계(食玉炊桂), 생선을 먹을 때에 한쪽만 먹고, 다른 쪽은 남겨둔다는 뜻으로 민력을 여축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식어무반(食魚無反), 근심 걱정 따위로 음식 맛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식불감미(食不甘味),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로 음식이나 사물에 대한 욕심 또는 야심을 품는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식지동(食指動), 먹을 것은 적고 할 일은 많음이라는 뜻으로 수고는 많이 하나 얻는 것이 적음을 일컫는 말을 식소사번(食少事煩), 사방 열 자의 상에 잘 차린 음식이란 뜻으로 호화롭게 많이 차린 음식을 이르는 말을 식전방장(食前方丈), 식량이 떨어져 기운이 다함을 일컫는 말을 식갈역진(食竭力盡), 음식을 잘 차려 먹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식불이미(食不二味), 맛있는 고기만 먹고 지내면서 누리는 부귀를 일컫는 말을 식육부귀(食肉富貴), 식객이 삼천 명이라는 뜻으로 함께 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음을 이르는 말을 식객삼천(食客三千), 나라의 녹을 받아먹음을 일컫는 말을 식국지록(食國之祿), 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를 일컫는 말을 식록지신(食祿之臣), 소라도 삼킬 정도의 기개라는 뜻으로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남을 이르는 말을 식우지기(食牛之氣) 등에 쓰인다.
▶️ 烹(삶을 팽)은 회의문자로 亨(형; 솥의 모양, 삶음)과 灬(화; 불)의 합자(合字)이다. 솥에 불을 가하여 삶다의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烹(팽)은 ①음식물을 삶다 ②삶아지다 ③삶아서 죽이다 ④쇠붙이를 불리다 ⑤요리, 익힌 음식 ⑥삶아서 죽이는 벌,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삶은 달걀을 팽란(烹卵), 음식을 삶고 지져서 만듦을 팽임(烹飪), 삶고 구움을 팽료(烹爒), 얼음처럼 미끄러운 순채蓴菜를 삶음을 팽빙(烹氷), 죽여 멸함을 팽멸(烹滅), 삶음을 외팽(煨烹), 쪄서 삶음을 증팽(蒸烹), 썰어 삶아서 음식을 조리함을 할팽(割烹), 형벌의 하나로 가마에 넣어서 삶아 죽임을 확팽(鑊烹), 굽거나 삶아서 음식을 만듦을 포팽(炮烹),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교토사주구팽(狡兔死走狗烹),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약팽소선(若烹小鮮), 머리를 삶으면 귀까지 삶아진다는 팽두이숙(烹頭耳熟), 소를 삶을 수 있는 큰 가마솥에 닭을 삶는다는 우정팽계(牛鼎烹鷄), 배 부를 때에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그 맛을 모른다는 포어팽재(飽飫烹宰), 설 같은 때에 양이나 염소 등을 잡아 잔치를 차려 베풂을 팽양포고(烹羊炮羔), 설 삶은 말 대가리로 고집이 세고 멋대가리 없는 모양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마두생팽(馬頭生烹) 등에 쓰인다.